킹 조지 5세급 전함
1.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전함
1.1. 제원
1.2. 개요
킹 조지 5세급 전함(1911)은 영국 해군 오라이언급 전함의 후속함으로, 초기에는 로열 조지급으로 계획하여 4척을 건조하기로 하였으나 1번함의 이름을 그냥 조지 5세로 바꾸면서 킹 조지 5세급 전함으로 통칭되게 되었다.
1.3. 상세
기존의 오라이언급이 처음으로 13.5인치 이상의 포를 단 전함이다보니 자잘한 문제점이 있었고 독일 전함과 비교해서 그다지 장갑의 우위가 없다고 보고 속력과 장갑을 강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빠르게 수를 늘리고 싶었던 영국은 독일이 신형 전함 카이저와 쾨니히같이 속력도 장갑도 꿇릴 것이 없는 전함이 계획되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개량만 하고 이후 함급에서 확실하게 문제점을 제거하기로 했다.[1] 그래서 13.5인치 포를 10문을 달고(2연장 5개), 4인치 부포를 16문이 배치되었다. 현측장갑은 최대 12인치, 갑판은 4인치, 포탑은 10인치 수준이었다. 배수량은 기준 23,400톤으로 오라이언급보다 좀 늘었긴 하지만 여전히 넉넉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함급은 건함경쟁 중에 나온 전함으로 제1차 세계 대전기준 화력, 속력만 합격점인 전함으로 오라이언급 4척, 킹 조지 5세급 전함 4척, 아이언 듀크급 전함 4척이 모여서 총 12척이 우르르(...) 몰려 다니며 독일 대양함대를 압박했고 유틀란트 해전때는 속력이 모자라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은 먼저 갔지만 나머지 12척은 늦게 도착했고[2]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3] 결국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전부 해체된다.
1.4. 자매함 일람
- 1번함 킹 조지 5세(King George V)
- 2번함 센츄리온(Centurion)
- 3번함 오데이셔스(Audacious)
- 4번함 애이잭스(Ajax)
1.5. 등장 매체
2.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전함
2.1. 제원
2.2. 개요
해가 지기 시작한 안습한 상황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성능과 가격으로 건조되어 적절하게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퇴역한 영국 해군의 전함. 흔히 앞글자만 따서 KGV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킹 조지 5세라는 함명이 붙은 전함군은 두 번 건조되었는데, 첫번째는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 4척이 취역했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결과 폐기되었다. 두번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5척이 취역하였다. 보통 KGV급이라고 하면 후자 쪽을 일컬으며 본 항목도 이쪽을 설명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하면 국왕 조지 5세의 이름을 따서 함명을 지었는데, 첫번째 건조 때는 조지 5세가 막 즉위했을 무렵이고, 두번째 건조 때는 막 건함계획이 시작되었을 무렵에 조지 5세가 사망했다.
실제로 조지 6세가 즉위한 후 함명을 바꾸는게 좋지 않겠냐는 건의가 올라왔으나 부왕을 기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에 2번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형 에드워드 8세를, 3번함 듀크 오브 요크가 조지 6세를 가리킨다.[4][5]
2.3. 안습한 출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21년의 워싱턴 조약과 뒤이은 런던 조약으로 열강들의 건함경쟁은 "해군의 휴일(Naval Holiday)"라고 불리우는 휴지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워싱턴 조약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1936년이 다가오자 각국은 다가올 건함경쟁의 시대에 대비하여 강력한 신전함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더구나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유럽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 비틀거리는 상태였고, 더구나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새로운 건함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영국은 군축조약을 연장시키기 위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반발해 뛰쳐나간 상태에서,[6] 남은 국가들 간에 신전함의 성능을 기준배수량 35,000톤에 주포구경은 14인치(356mm)로 제한하는 데 어느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조약 복귀를 기다리면서,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설계는 이 제2차 런던 조약이 성립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그에 맞춰서 이루어졌다. 조약 체결이 무산될 경우에 대비해 15인치(381mm)나 16인치(406mm) 주포의 탑재안도 고려되고 있었으나, 그 주포들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넬슨급 전함의 16인치 주포가 기대한 성능이 아니었기 때문에, 16인치 주포는 별도의 버전을 미리 준비해야했다. 그런데, 만약 16인치의 채택이 무산된다면 그대로 악성재고가 되며, 영국 정부와 로열 네이비는 주포의 제작 비용은 물론 보관비용까지 날리게 된다.
둘째, 조약 성립 이후에 주포를 선택하는 경우 제 시간에 맞춰서 주포를 배에 올릴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단순히 주포없는 전함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 일본, 영국같은 해군 열강국들은 이미 주포와 사격제원 및 사격 통제 시스템이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생각보다 괜찮은 수준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당대 수준에서 이를 달성하려면 포를 올린 후 많은 공을 들여야했다. 반면 현대보다 떨어지는 정밀가공 수준 때문에 포를 올린 이후의 오차를 측정하고 보정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배는 완전히 진수되고 나서야 승조원들을 모아서 훈련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차일피일 미룬다고 되는 일이 아니며, 재수가 없다면 멀쩡한 최신형 전함이 취역하기도 전에 폐급이 될 위험까지 존재했던 것이며, 이것은 국가 예산에 대 재앙이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군축 조약의 문제가 있었다. 영국은 이번에도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제일 적극적인 입장이었는데, 말로는 군축을 논하면서 뒤에서 신형 16인치 주포나 15인치의 신규 재고를 만들거나 혹은 이것을 장착할 수 있는 새 포탑을 만들고 있으면, 회담 자체가 어그러질 판이었다. 물론 미국이 16인치 주포로 그랬던 것처럼, 기존 15인치 주포를 사용하면서 겉으로는 숨겨볼 수도 있겠지만, 2척에 불과했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과는 달리, 영국이 당장 조달해야했던 KGV급은 5척... 게다가 이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15인치 주포가 기존에 영국이 개발해서 굴린 14인치나 16인치보다 우월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올시다였다.
이상의 이유로, KGV는 결국 14인치 주포를 탑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런 관계로 화력과 배수량에서 처음부터 핸디캡을 안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전함이다. 정치적, 외교적 고려와 국가 대전략의 문제로 인해 성능을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전함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결국 일본이 복귀하지 않음으로서 조약의 의미는 상실되어 버렸고, KGV급에는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본래 제2차 런던조약에는 탈퇴한 국가가 있을 경우 정해진 기간후 배수량과 주포구경을 늘릴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조항이 있었으나, 당시 유럽의 정세는 매우 급박했고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이나 이탈리아의 리토리오급 전함같은 빠르고 강력한 신전함이 건조되고 있는 상태에서, 1차대전 당시의 구식전함과 넬슨급 전함 같은 발이 느린 전함만 가지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이에 대항할만한 신전함을 한시라도 빨리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결국 제대로 된 신전함은 이후 건조될 예정이었던 라이온급 전함으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건조에 역량이 집중되어 기공은 했지만 진척이 느린 상태로 있다가 중지되었다.
2.4. 스펙
넬슨급 전함 만큼 제한이 많지는 않았지만, 35,000톤이라는 배수량 내에 충분한 고속을 달성하기 위한 기관과 타국의 신전함에 대항할만큼의 충분한 방어력을 우겨넣어야 하는 과제를 공통으로 안고 있었던 조약형 전함이다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통의 해군강국 영국인데다 넬슨급을 건조하면서 생긴 노하우가 있었는지 많은 제한에도 불구 무난하게 뽑혀나왔다는 평가가 주류이며, 조약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야에서는 거의 뒤쳐지지 않았다.
2.4.1. 화력
[image]
14인치 주포는 전술했듯이 정치적인 이슈도 있었으나, 4연장으로 하는 모험은 일종의 기술적인 성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1933년 8월에 영국에서는 강철로 통짜 주포를 만드는 실험을 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7] 그 결과 주포의 무게는 엄청나게 가벼워졌고, 포신이 스스로의 무게로 처지는 문제가 덜해졌다. 실제 KGV의 주포는 통짜로 만든건 아니었으나, 이 기술력을 이용해서 이제 같은 스펙의 주포라도 한 포탑에 1개 더 넣어보는 모험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4인치 Mark VII 주포를 탑재를 하였으나 이 주포의 위력은 전간기 전함들중 샤른호르스트의 11인치 주포 다음으로 바닥을 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측관통력은 오히려 11인치에게도 약간 밀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갑판타격능력에 있어서는 우세했지만 3인치나 작은 주포와 비교당하는(...) 시점에서 이미 안습. 후달리는 화력을 물량으로라도 메꾸기 위해 4연장 3기를 탑재할 예정이었지만 전방 4연장포 2기를 아래위로 올렸더니 구조상 문제로 인해 유폭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취약점과, 함이 선회할때 무게중심이 높아지는 문제가 발견되어, 결국 4연장 2기 + 2연장 1기라는 괴악한 구성이 되어버렸다.
덧붙여서, 2번 포탑의 문제는 3연장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였는데, 2번 포탑의 아래나 그 주변에 적당히 무거워질만한걸 늘어놓아서 무게중심을 낮추면 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전적으로 배수량을 아껴써야하는 조약형 전함의 골칫거리였고, 각 열강에서 긁어모은 최고의 공학자들조차도 그들의 창의성을 시험받는 난제였다.[8] 가령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은 2번 포탑에 다른 포탑보다 많은 탄약을 싣는 식으로 대응하였는데, 이 경우 2번 포탑 주포의 수명과 탄약 보급이 '속칭' 아다리가 안맞게 되므로 미국같은 나라도 보급과 정비 문제로 상당히 골머리를 썩혀야했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부터는 포기하게 된다.
이 4연장포는 실전에서도 말썽을 부렸는데,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비스마르크에게 뭇매를 맞은 원인도 이 포탑들이 기능 부전(그러니까 14인치 함포 10문 중에 '''8문'''이 사용 불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국 내에서는 이것이 수병들의 훈련 부족[9] 인지, 아니면 수병들의 피로 때문인지[10] , 아니면 포 자체의 문제인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훈련과 기계적인 개선을 통해 1943년에 해결되었고, 노스케이프 해전에서는 듀크 오브 요크에 발생한 모든 문제가 수병들을 쉬지 못하게 한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덧붙이자면 14인치의 화력 문제는 대전말로 갈수록 점점 잦아들었다. 전함의 메인롤이 막강한 지상 포격을 제공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14인치는 커녕 순양함의 8인치만 되어도 지상의 목표물은 뭐가 되었든 다 박살났기 때문이다.
2.4.2. 대공
부포와 대공무장 또한 문제가 많았다. 우선 나은 점만 서술하자면, 양용포는 주포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HACS(High Altitude Control System)이라는 화기관제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40mm 대공포는 Pom pom director의 통제 하에 작동한다. 조준 방위, 부양각을 포대에 전달하여 포대의 조작원들이 이에 맞춰 조준시키게끔 하는 기존의 Pom pom director Mk.I~III과는 다르게, RPC(Remote Power Control: 원격 동력제어) 기능의 추가로 포대를 원격으로 직접 조작하고 표적의 움직임에 의한 편차를 보정하여 예측사격을 쉽게 하도록 하는 자이로 조준기가 추가된 Pom pom director Mk.IV가 장착되어 정확도와 반응성의 개선을 이끌어 내어 당시 수준으로도 세련된 함대공 소프트웨어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화기관제 체계를 갖춘 국가는 Mk.51 Director와 결합하여 작동하는 40mm 보포스포대를 갖춘 미국과 함께 유일하다.
그러나, 부포와 대공포 역할을 겸하도록 설계된 5.25인치 양용포는 최대앙각이 낮아서 사실상 대공포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대공무장인 40mm 폼폼 포는 사거리가 짧은데다 툭하면 고장나는 신뢰성이 부족한 물건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같은 때 미국의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의 대공포 숫자와 비교해보면... 결국 부실한 대공화망은 35,000톤의 한계인 '예비 배수량의 부족'과 더불어 말레이 해전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무기력하게 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영국의 주력함들은 독일 공군과 일본 해군에 맞서기 위해 대공 무장을 경쟁적으로 증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대공 무장의 증설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 생긴 대공포가 있으면 입항한 배에 마구 지어올리는 식으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두른다'''는 개념으로 진행되어서, 2차 대전기의 영국 전함들은 같은 클래스라도 대공포의 배치와 종류는 전부 다르게 된다.
이후 미국의 VT 신관을 받아와서 5.25인치 양용포의 압도적인 1발당 화력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부포와 대공 무장에 레이더 자동 연동을 적용함으로서, 대공 화력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게 된다.
2.4.3. 방어력
방어면에서는 타국의 전함에 맞추어 15인치에서 16인치에 상당하는 대응방어를 갖추고 있다. 자국 15인치 함포 기준으로 주포탑 측면, 갑판장갑 기준 13,500~33,500야드(12.3~30.6킬로), 기관부 측면, 갑판장갑 기준 15,600~29,500야드(14.3~26.9킬로)였다.[11] 다만 넬슨급과는 달리 경사장갑이 아닌 수직장갑을 채용했는데, 이 역시 제한된 배수량 내에서 방어능력을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 다만 경사고 뭐고 그냥 떡장갑 발라버렸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지라 이점에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달리 수직장갑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구식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금물. 수직장갑이라 해도 포탑 쪽 측면은 15인치이며 기관실이 있는 함선 중앙부는 14인치이었다. 갑판장갑은 포탑 주변은 6인치이고 기관실이 있는 함선 중앙부는 5인치이었다. 넬슨이 화력과 방어력에 중점을 두고 속도를 포기한 설계였다면 KGV급은 방어력과 속도를 잡은 대신 건조 시기와 정치적인 문제로 화력이 낮아지게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4.4. 기동성
원가절감을 위해 함수를 수직으로 설계한 탓에 능파성이 나쁜데다, 더구나 전방쪽으로 충분한 주포시계를 확보하려고 함수 높이를 낮춘 결과 파도를 쉴새없이 뒤집어쓰는 안습한 결과가...[12] 그 외에도 경량화를 위해 최대한 우겨넣은 탓에 잔고장이 꽤 많았다고.
설계상 최고속도는 28노트이며 비공식이긴 하지만 경하 상태에서 30노트를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대공 무장 증설로 인해 배수량이 늘어나게 되자 27노트대로까지 떨어졌다.
2.4.5. 화기관제
굳이 KGV가 아니더라도, 영국 해군의 화기관제장비는 꽤 앞선 편이었다.
영국 해군이 모터와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아날로그식 사격지휘 컴퓨터를 도입한 것은 1920년대에 넬슨급 전함을 건조할때였다.[13] 이 장비를 Admiralty Fire Control Table, 해군용 사격지휘 테이블이라고 불렀으며, 넬슨급에 장착된 것을 Mk.1으로 친다. 해군의 휴일 동안에도 장비의 연구는 계속되었고, 1930년대에 개장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3척과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에는 Mk.7이 장착된다. KGV에는 Mk.9이 장착되었고, 뱅가드급 전함에는 최종 버전인 Mk.10이 장착된다.
하지만 산출된 사격제원을 포탑에서 장입하는 것은 수동이었다. 영국은 RPC(Remote Power Control) 기술을 완성하여 순양함에 도입한 바 있었지만, 여기에 사용하는 모터에는 전략 자원들이 많이 들어갔고, 특히 구리가 문제였다. 구리는 당장 보병과 항공기의 탄피에 들어갈 양도 부족했기 때문에, 꼭 써야할 곳에만 써야 했다. 그 결과 RPC 대신에 가솔린 엔진을 장착해서, 포탑을 회전시키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사격제원을 받으면 눈금이 옮겨가고, 포탑의 편각 담당자가 엔진을 돌려서 포탑을 움직여서 제원을 입력하는 식이었다.
2.5. 자매함 일람
- 1번함 킹 조지 5세(41) (HMS King George V)
함명의 유래는 조지 5세.
1941년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가, 넬슨급 전함 로드니와 함께 마지막 일격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1942년엔 호송작전 중 안개속에서 HMS Punjabi와 충돌, 함수부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14]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 영국측 기함으로 참가했다.
1941년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가, 넬슨급 전함 로드니와 함께 마지막 일격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1942년엔 호송작전 중 안개속에서 HMS Punjabi와 충돌, 함수부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14]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 영국측 기함으로 참가했다.
- 2번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53) (HMS Prince of Wales)
함명의 유래는 영국 왕세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웨일스 공작으로, 아버지 조지 5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8세를 가리킨다.
동형함 중에서 가장 유명한데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막 취역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여했다가, 주포탑의 기계적 문제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비스마르크에게 손상을 입고 후퇴했으나 그 와중에도 한 방을 먹였다. 수리가 끝난 후 리펄스와 함께 태평양에 파견되었으나 말레이 해전에서...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동형함 중에서 가장 유명한데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막 취역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여했다가, 주포탑의 기계적 문제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비스마르크에게 손상을 입고 후퇴했으나 그 와중에도 한 방을 먹였다. 수리가 끝난 후 리펄스와 함께 태평양에 파견되었으나 말레이 해전에서...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3번함 듀크 오브 요크(17) (HMS Duke of York)
함명의 유래는 영국 왕세자의 형제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요크 공작으로, 형 에드워드 8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6세를 가리킨다. 1942년 10월에 지브롤러에서 H 기동부대의 기함을 맡았고 횃불 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이탈리아 항공기들이 공격해왔지만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에 의해 저지되어 별 피해는 없었다.
1943년 선단호위 도중 독일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에게 포격을 퍼부어 격침시켰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
듀크 오브 요크는 KGV 최고의 수훈함이지만, 개별 항목을 보유한 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뿐이다. KGV 전함들 자체가 PoW의 비명횡사 이후로는, 최전선 탱커보다는 주력함대의 호위 역할을 하는 미국 태평양 함대식 운영이나[15] 독일 전함의 카운터로 대기하는 보수적인 운영을 하고,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과 리나운이 실질적인 주력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나쁜 일은 거의 당하지 않았으나 승리의 영광이란 측면에서도 큰 임팩트가 없었다.
1943년 선단호위 도중 독일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에게 포격을 퍼부어 격침시켰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
듀크 오브 요크는 KGV 최고의 수훈함이지만, 개별 항목을 보유한 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뿐이다. KGV 전함들 자체가 PoW의 비명횡사 이후로는, 최전선 탱커보다는 주력함대의 호위 역할을 하는 미국 태평양 함대식 운영이나[15] 독일 전함의 카운터로 대기하는 보수적인 운영을 하고,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과 리나운이 실질적인 주력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나쁜 일은 거의 당하지 않았으나 승리의 영광이란 측면에서도 큰 임팩트가 없었다.
- 4번함 앤슨(79) (HMS Anson)
함명의 유래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해군제독 조지 앤슨(George Anson).
하우와 마찬가지로 주로 선단 호위 임무에 종사하였고 티르피츠를 격침 시키기 위해 출격한 항공모함 부대 호위를 맡기도 했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했으나, 다른 배들과 다르게 너무 늦어버려서 큰 활약은 없었지만, 미주리와 함께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하우와 마찬가지로 주로 선단 호위 임무에 종사하였고 티르피츠를 격침 시키기 위해 출격한 항공모함 부대 호위를 맡기도 했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했으나, 다른 배들과 다르게 너무 늦어버려서 큰 활약은 없었지만, 미주리와 함께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 5번함 하우(32) (HMS Howe)
함명의 유래는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해군제독 리처드 하우(Richard Howe).
주로 북대서양 선단 호위 임무에 종사하다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 태스크 포스 113의 기함으로 활동하고 빙산 작전에서도 활동을 했으며, 오키나와에서 상륙 지원 포격임무등을 수행했다.
원래 4번함과 5번함은 각각 유틀란트 해전의 지휘관이었던 젤리코와 비티의 이름이 붙을 예정이었으나, 당시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이 이 사람들을 싫어해서 바꿨다는 카더라 통신이 존재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바꾸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래는 젤리코와 비티의 이름이 붙을 예정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16]주로 북대서양 선단 호위 임무에 종사하다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전선 참전. 태스크 포스 113의 기함으로 활동하고 빙산 작전에서도 활동을 했으며, 오키나와에서 상륙 지원 포격임무등을 수행했다.
2.6. 평가
야마토급 전함이나 아이오와급 전함, 비스마르크급 전함 같이 척 보기에도 크고 아름다운 타국 전함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데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비극적 최후로 인해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KGV급의 가치는 고속전함으로서의 '''적당한 스펙의 전함이 적절한 수로 적절한 시기에 갖춰져 있었다'''는 점에 있고, 그것을 '''적절하게 운영할 역량이 충분했던 영국해군의 노하우'''가 반영되자, 독일 해군측의 고속전함 세력을 확실하게 제압하여 대서양에서의 영국 해군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지켜낸 것에 있다.
2.6.1. 제때 등장한 충분한 물량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노르웨이 전역과 프랑스 침공이 시작될 당시, 영국 해군이 스스로 평가하기에 유효하게 활용할만한 전함 전력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5척 중에서 완전 개장을 받은 퀸 엘리자베스와 밸리언트의 2척, 그리고 단 1척밖에 없었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후드 뿐이었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안전빵 스팸 버전으로 등장한 리벤지급 전함은 너무 느려서 대전기 내내 부차적인 전력으로 취급받았고[17] , 넬슨급 전함은 16인치의 강펀치를 지녔지만 '전방 3포탑의 구조적 결함이 심각하고, 어마무시한 포연이 차탄 사격에 장애가 됨 + 기동성을 버리고 방어력에 치중함'이 합쳐진 결과 느린 속도와 형편없는 조함 성능, 내파성을 가지게 되었다.[18] 그 결과 2차 대전 내내 영국 해군의 최중요 과제였던 호송 선단 임무에 나서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8노트급의 고속전함 4척[19] 의 전력은 굉장한 보탬이 되었다. 전쟁 초기에 크릭스 마리네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리나운에게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이 판정패를 당하고, 워스파이트에게 구축함들이 대학살당해 수상함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는데다가, 이후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비스마르크를 어이없게 잃었다. 이후 개장받지 못한 구식의 퀸 엘리자베스급만 보여도 부담을 가졌던 독일 해군 수상함대는 최신예 전함인 KGV급이 5척[20] 이나 연속으로 취역하자, 통상파괴전 같은 적극적인 수상 활동은 아예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21]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모르모트 개장을 받은 워스파이트[22] 와 선체의 한계와 예산의 범주 내에서 최대한의 개장을 받은 리나운도 수훈함이 되었고, 개장받지 못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인 버럼, 말라야도 잘 굴려먹었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결과론일 뿐이고 그 배들을 교전해역에 밀어넣어야하는 수뇌부들의 관점에서는 '일본, 미국보다 크게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떡장'을 두른 5척의 신예 전함은 전략 단위에서 숨통을 확 틔어주는 해결사들이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교전이 예상되는 모든 지역에 전함을 붙이고, 대전 말에는 독일 패망 전에도 동남아에 재진출을 시도할만한 전략적 여유를 어느 정도는 회복하게 된다.
반대로 KGV가 '''16인치 주포를 선택한다던가''' 등의 이유로 제때에 맞춰 취역하지 않았을 경우 독일 해군의 30노트급 고속 전함군인 비스마르크급 2척 + 샤른호르스트급 2척이 온 대서양을 상대로 통상교란을 하는 동안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태평양에 우선 배치되었던 미 해군의 함대 세력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여 대서양 투입이 가능해지는 43년도까지[23] 대서양의 제해권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서 자동적으로 당시까지 대영제국의 사활을 걸었던 대서양 잠수함전의 수행까지도 심각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잠수함을 막으려고 구축함을 붙이면 전함이 오고, 그걸 막기 위해 전함을 붙이면 항속이 30노트 밑으로 내려가서 더 쉬운 먹이가 되는데다가 전함 자체를 사냥하려는 유보트들이 분명히 나타나고, 그중 몇몇은 분명 성공했을 것이니... 그것들 하나하나가 대전 초기의 영국과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파급 효과를 낳는다.
2.6.2. 고속 전함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비스마르크의 포격에 순식간에 전력을 상실하여 굴욕을 당하기는 했지만,[24] 한편으로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있었기에 순양전함 후드와 함께 발빠르게 비스마르크를 쫓아갈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 때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서 쏜 포탄이 비스마르크의 발을 묶음으로서(5,000톤은 될법한 바닷물이 밀려들어왔으며, 하필이면 '''연료'''까지 새게 만들었다) 최종적으로 격침이라는 전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갓 취역한 KGV급 2척이 없었다면 비스마르크는 30노트로 도망가는데 후드는 다른 구식전함과 보조를 맞추느라 24노트로 쫓아가다가 추격을 포기하거나,[25] 후드 혼자만 비스마르크와 교전하다가 격침되고 비스마르크는 무사히 브레스트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은 실제로 이미 KGV급이 취역하기 전인 1940년의 캐터펄트 작전에서 영국 H부대의 포위망을 뚫고 됭케르크급 전함 스트라스부르가 도주했을 때 벌어졌다. 당시 H부대에는 후드 외에도 리졸루션(리벤지급), 밸리언트(퀸 엘리자베스급) 등 2척의 전함이 더 있었지만 지휘관인 서머빌 제독은 이들 구형함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스트라스부르를 도저히 쫓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후드 한 척만 보내기에는 전력적으로 불안했기에 결국 추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말레이 해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전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해군의 지중해 봉쇄 때문에, 함대는 아무런 피해없이 수에즈 운하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희망봉을 찍고가거나 파나마 운하로 가야하는데, 당시 해군경이 제시했던 방안으로는 어느 쪽의 루트도 일본 해군의 침공 속도에 맞춰 동남아에 도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 처칠의 주장을 따르면, 영국의 주력함 중에서 KGV와 순양전함들, 주력항공모함만 선별하여 출항시킨다면 희망봉과 인도를 거쳐가는 루트를 통해 일본군의 진공 속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방안이 받아들여지게 되나, 당시에는 이들 함급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KGV 1/ 리나운급 순양전함 1/ 장갑항모 1이라는 구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2.6.3. 홀로 설 수 없는 성능과 이를 극복한 영국군의 운영
단점에서 보다시피 KGV는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인해 동시대의 1선급 전함들보다 뒤쳐지는 면이 많았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함대는 홀로 다니지 않으므로, 영국군은 각 함선들의 역할과 장점을 조합하는 식으로 KGV의 약점을 보완해서 운영하게 된다. 요약하면, '''병기는 결국 사람이 다루는 것이라는걸 웅변하는 전함'''이다.
2.6.3.1. 속도
KGV는 고속전함으로 쳐줄만한 속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28노트는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 비하면 느렸다. 그나마 한 척 남은 최후의 순양전함 리나운과 함께 최대 속도로 항진할 수 있다는게 위안거리.
KGV의 속도를 해결한 첫번째 방식은 항공모함을 동반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미군식 운영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겠지만, 미해군의 경우 전함이 항공모함의 대공 호위 노릇을 하는게 메인 롤이었다면[26] , KGV의 경우는 항공모함의 유효 교전거리는 전함의 유효 교전 거리보다 훨씬 길다는 점을 이용해서 사거리가 연장된 전함의 주포 개념으로 함대를 통합 운영한 뒤, 전함이 몇몇 호위함을 후방의 항모에 붙여둔 채로 적 전함에 돌입하는 식으로 굴리게 된다. 이 방식은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아크 로열의 함재기들이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후에는 북극항로의 호송선단을 보낼때마다 티르피츠를 견제하는 단골 조합으로 자리잡게 된다.
두번째 방식은 영국군 제독들이 즐겨쓰던 '''길목에 매복하기''' 방식이었는데, 적의 항로를 알아내서 함재기, 경순양함과 구축함들로 하여금 스토킹을 하도록 한다음, 길목에서 때려잡는 방식을 썼다. 독일 전함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결국 가려는 항구, 만나야하는 보급선과의 랑데뷰 포인트는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연료 고갈의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항구로 배를 돌리지 않는다면, 레이더의 파손 여부와는 무관하게 결국 KGV와 만나던가 모항 입구에서 U턴하는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이 점은 영국해군이 싸웠던 북해/지중해같은 문명권 해역을 미 해군의 전장이었던 태평양/대서양 해역과 구분짓는 아주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2.6.3.2. 화력
주포인 14인치 포는 1차 대전기의 주력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과 리나운급 순양전함의 15인치 주포보다도 뒤떨어지는 화력이었다.
이것을 극복한 방법은 요약하면 '집중 방어 구획'을 관통하지 못하더라도 '''함상 구조물을 초토화시키면 그 전함은 사실상 무력화된다'''는 점과 '''어떤 전함도 뇌격 세례를 다 쳐맞고도 버틸 순 없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 전함과 뇌격이 가능한 함종이 합동 작전을 했는데, 태평양의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의 경우 구축함의 선제 뇌격이 상식이었으나, KGV의 경우는 전함이 원거리에서 교전을 시작해 포화를 퍼붓고, 그 결과 적 주력함에게 쏠 수 있는 만큼 쏴서 부술 수 있는 만큼 부숴본 다음에야 순양함과 구축함이 돌격해서 뇌격을 했다. 결국 영국 해군에게 격침당한 2척의 독일 전함이 이 패턴으로 끝장나게 된다.
다만 이런 식의 포함/뇌격함의 합동작전은 영국군이 KGV 이후에 고안한 것은 아니고 어뢰 등장 초창기부터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존의 전술이었으나, 기술[27] 과 전술[28] 의 발전으로 사장된 것을 '''전함이 구축함과 경순양함의 뇌격을 위해 테이블 세팅을 해준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었다.[29]
그리고 영국 해군도 이 전술을 바로 관에서 끄집어낸 것은 아니어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2차전에서는 넬슨급 전함 로드니를 동반하고 무력화된 비스마르크를 두들기고도 침몰이라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해[30] 도세셔의 뇌격으로 격침한 경험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2.6.3.3. 대공
KGV는 38,000톤이라는 배수량에 종속된 설계여서 대공포를 충분히 두르지 못했다. 포 자체의 공간도 문제지만 운영 인원의 숙식, 대공포탄의 적재, 전투 상황시 인원들이 자신의 대공포로 달려가기 위한 동선 등등 모든 것이 배수량이 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용포도 둘러보았지만, 2차 대전의 일본 항공 세력은 부포 몇 개를 대공 사격할 수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규모가 아니었다.
첫번째 해결책은, 정석이라 할 수 있는 대공포를 더 붙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전함의 속도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고, 전술한 배수량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두번째 해결책은, 앞서 말한 것과 동일하게 주력 항공모함을 붙이고, 항공모함을 스팸처럼 더 찍어내서 함대에 더 붙이는 것이었다. 영국 해군은 노르웨이 전역의 전훈을 분석해서 주력함의 방공은 항공기가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고 일찌감치 함대에 적용했다.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항공기를 이용한 함대 방공 이론의 완성은 미 해군보다 빨랐다.
2.7. 기타
해군강국 영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 치고는 여러모로 아쉬운 전함인 탓에[31] 결국 완성되지 못한 라이온급 전함에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합성짤이 나올 지경.
전쟁 초기에 항공모함의 숫자가 부족해서 이를 보충할 목적으로 항공모함과 전함의 혼종을 만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항공전함 5척을 만들 배수량보다 항공모함 3척과 전함 3척을 만드는 배수량이 더 적고 주포 화력과 항공기 탑재수에서도 항공전함이 더 불리하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항공전함의 개장안은 폐기된다. 결국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1942년 설계 경량 함대 항공모함이 나오게 된다.[32]
2.8. 등장 매체
- Naval Front-Line 영국 해군 수상함 트리에서 후반에 등장. 레벨50급의 전함이다. 킹 조지 5세급은 레벨 60에서 라이온급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킹 조지 5세급과 동티어는 레벨 46에 업그레이드 되는 어드미럴급. 어드미럴급은 이후 뱅가드가 되는데 이 쪽은 레벨 55만 되어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뱅가드 주포는 15인치고 라이온은 16인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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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비필드에서도 영국 전함으로 등장한다.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의 연합군 전함 중 하나로 등장한다.
- 네이비필드2 CBT 때 영국 전함으로 등장했었으나, 다시 추가될지는 미지수다.
- 월드 오브 워쉽에서 영국 7, 8티어 전함으로 등장한다. 본래 7티어로 테스트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새로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페이퍼플랜인 15인치 주포를 받으며 8티어로 이동되었다가 또다시 7티어로 변경되었다. 또한 15인치 3연장포 3기를 장착하는 계획안이 모나크라는 이름으로 8티어 전함으로 등장한다. 자매함인 듀크 오브 요크도 7티어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한다.
- Naval Creed:Warships에서 영국 전함 4티어 2차함선으로 나온다, 14인치라는 동티어대 보다 다소 작은 구경이라서 화력면에서 크게 밀리는 단점이 있으나, 더 좋은 연사력과 상당히 좋은 기동성, 그리고 측창에 청갑을 정확히 박아도 시타델이 안나는, 일명 노시타함선, 이 세 장점덕에 운용하기엔 편한편, 다만 노시타 부분은 수중탄 패치가 나오자마자 옛말이 되어버려서, 운용에 주의를 가해야한다, 이후 자매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4티어 1차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하며, 초기 15인치 3연장 3기를 장착한 계획안 역시 프린세스 로열[33] 이란 이름으로4티어 2차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한다.
- 모바일 게임 전함소녀에서는 1번함 킹 조지 5세, 2번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3번함 듀크 오브 요크가 등장한다.
- 모바일 게임 벽람항로에서는 1번함인 킹 조지 5세, 2번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3번함 듀크 오브 요크, 그리고 5번함인 하우가 등장한다. 월드 오브 워십과 콜라보레이션으로 PR 함선인 모나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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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쉽 플릿 커맨드에서 2번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5등급 전함으로 등장한다. 동급의 다른 전함에 비해 화력은 부족하지만 방어력과 속도가 우수하다.
[1] 하지만 이후 함급인 아이언 듀크급 전함은 그다지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고 영국 전함의 설계의 완성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이다.[2] 단, 유틀란트에선 오데이셔스와 엠페러 오브 인다아는 참가하지 않았다.[3] 단, 이건 단순히 속력의 차이 뿐 아니라 QE급 4척은 비티가 지휘하는 순양전함 전대와 함께 움직이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4] 조지 6세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즉위 전에는 요크 공작이었다.[5] 사실, 건조 계획이 시작되었을 때는 에드워드 8세가 재위중이었고, 영국 전함의 명명 관례상 갓 등극한 국왕의 이름을 신전함의 네임쉽으로 할 수 있었는데, 결혼 문제로 분규중이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의 퇴위를 예감하고는 부왕의 이름을 네임쉽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원래 2번함의 이름이 되었을 듀크 오브 요크는 퇴위한 형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개명되고 앤슨이 되었을 3번함은 찰스 2세 시대의 대제독 요크 공작(제임스 2세)과 신왕이 된 자신을 이중으로 기념하는 차원에서 듀크 오브 요크로 개명되었다.[6] 1935년 1월, 이때 아예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도 탈퇴해버렸다.[7] 기존의 거포 생산 방식이 어땠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 영상을 보고 오는게 좋다. 1908년 영국에서 강선식 공정을 통해 12인치 함포를 만드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8] 일본, 독일은 조약에 맞춰 건조한 전함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자유로웠다.[9]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10]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킹 조지 5세, 노스케이프 해전의 듀크 오브 요크.[11] Naval Firepower: Battleship Guns and Gunnery in the Dreadnought Era, 페이지299.[12] 근접전을 선호한 영국 해군의 특성상, 능파성을 다소 포기해서라도 근접전 능력을 향상시키려 한 것이다.[13] 그 전에는 Dreyer Fire Control Table를 사용했는데, 후드가 이 장비의 최종 버전인 Mk.5를 쓰고 있어서, 영국 해군의 숨겨진 골칫거리였다.[14] [image] [15] 대서양과 지중해의 독일, 이탈리아의 해군과 공군은 일본군처럼 수상함과 항공기 위주의 대규모 기동 작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호위였을 뿐이다.[16] 그런데 이와 반대로 처칠은 1차 세계대전 전에 신규 건조된 전함 한 척에 "올리버 크롬웰" 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가 국왕으로부터 거부된 적이 있었다. 직계조상은 아니지만 선대 국왕의 목을 자른 인물의 이름을 딴 전함에 His Majesty's Ship 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는 어려웠을 듯[17] 어찌저찌 써보려했던 지중해 함대의 제독들도 전황을 미리 읽어서 매복시키는 식으로 굴려보려했으나, 일제 사격을 1~3번을 하는 동안 아군과 적군 순양함, 전함들이 빠르게 기동하며 지나치는 눈물나는 상황이 반복되자, 항구의 대공포좌+포대 노릇으로 쫒아버리게 된다.[18] 넬슨급은 사실 화력도 16인치 치고는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경량탄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초중량탄 도입으로 동 구경 대비 최대급의 화력을 얻어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19]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격침되었기 때문.[20]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과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을 간신히 내놓은 독일로서는 충공깽.[21]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은 전쟁에 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호송선단을 굴리면서 티르피츠에게 똑같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스펙을 몰라서 벌어진 촌극이다.[22] 유틀란트 해전 시작 전부터 2차 대전 종전까지 고질병인 키 고장이 해결되지 못해서, 퀸 엘리자베스, 밸리언트, 리나운, 후드에 적용될 개장의 테스트베드 노릇을 리펄스와 함께 했다.[23] 물론 본격적으로 군함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이후에도 미 해군은 주력함들을 태평양에 거의 배치했고 일부 주력함만이 잠깐씩 얼굴을 비추었을 뿐이다. 대서양에서는 영국 해군이 혼자서도 추축국 해군을 상대로 충분히 싸우고 있었으니 미 해군 입장에서는 태평양이 더 급했다.[24] 다만 이때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그야말로 갓 뽑혀나온 신조함이었다. 추격전 와중에도 기술자가 동승해서 장비 조정을 하고 있었을 정도.[25] 물론 최고속도가 30노트라고 군함이 항상 그 속도로 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예시.[26] 영국도 인도양에 재진출해 일본과 싸우는 시점에서는 이렇게 되긴 한다.[27] 어뢰 사거리와 속도, 화력의 발전. 어뢰를 실은 함종의 고속 순항 등.[28] 부채꼴 뿌리기, 어뢰정의 등장.[29] 당장 이 작전을 한척으로 수행하겠다면 중순양함이나 전함에 어뢰를 싣으면 된다. 얼마나 오래된 전술인지 감이 오는지?[30] 사실 이건 비스마르크가 근접전에 특화된 방어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비스마르크를 근거리에서 두들겨팬 탓도 있기는 하지만.[31] KGV 이후로도 뱅가드가 있지만 이것도 역시 성에 안차긴 마찬가지...[32] British Aircraft Carriers: Design, Development & Service Histories,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 1945[33] 프린세스 로열은 영국 왕의 제 1왕녀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