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폰 파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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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의 22대 총리
나치 독일 부총리
프로이센 주의 2대 총리
'''
'''본명'''
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zu Köningen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 추 쾨닝겐[1]
'''출생'''
1879년 10월 29일, 독일 제국 라인란트 베를
'''사망'''
1969년 5월 2일,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오베어자즈바흐 (향년 89세)
'''정당'''
가톨릭 중앙당 (1918년~1932년)
(1932년~1938년)
(1938년~1945년)
'''국적'''
독일 제국서독
'''신체'''
175cm
'''종교'''
가톨릭
'''배우자'''
마르타 폰 보흐갈하우
'''자녀'''
프리드리히, 안토이네테, 이자벨라, 마르가레트, 슈테파니에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정계 입문과 총리 임명
2.3. 넉달 반의 짧은 임기와 실책들
2.4. 악마와 손을 잡다
2.4.1. 히틀러 내각
2.5.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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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 프로이센 주의 총리,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를 지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나치 독일 탄생의 1급 조연'''으로 기억한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파펜은 독일 제국 라인란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서부 귀족 가문 출신의 독일 제국 군인이었다. 귀족이긴 한데 명문 가문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빌헬름 2세의 학우였던 정도. 이후 승마에 뛰어나 기병장교로 임관했고 참모부에 배속된다. 여기서 베프를 맺은게 나중에 애증의 관계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주재 국방무관으로서 대미외교를 담당하여, 본업인 군인보다 외교임무를 더 많이 맡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더글러스 맥아더(!)와 절친했고, 멕시코와 동맹을 맺어 미국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것도 사실 파펜의 작품. 하지만 1916년 독일, 오스트리아계 노동자들의 군수공장 파업을 주도하며 파괴공작을 벌이다가 미국에서 추방당했고, 중간에 영국 해군한테 걸려서 첩보 상황도 다 노출당했다(...) 이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대대장으로 서부전선에 참전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독일 군사고문단의 참모가 되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다만 이때 히틀러와의 다리가 되는 리벤트로프를 만났다. 전쟁 끝날 때 마흔이었으니 대단한 군공이 있을 것은 없었다.. 단지 파업 파괴공작으로 추방당하여 국제적으로 유명(?) 했을 뿐. 전쟁이 끝날 때 쯤 육군 소령 이었다.

2.2. 정계 입문과 총리 임명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군에서 중령으로 퇴역하고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계에 입문했다. 가톨릭교도이며 우파였기에 그는 가톨릭 중앙당에 몸을 담았으며, 1925년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 영웅 출신의 무소속 후보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지, 당선시키는 데 공헌하여 대통령과의 친분을 쌓았다. 중앙당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하나 별 존재감도 없고 의정활동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대공황정치극단주의 세력의 대두로 혼란에 빠진 1932년 6월, 어느 정당도 과반수 확보를 못하고 연정 또한 구성하지 못해 의회내각 구성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힌덴부르크는 파펜을 대통령 권한으로 총리에 임명했다.
애초에 듣보잡이었던 파펜이 총리가 된건 국방부 정무부서 정치군인 똥별 슐라이허의 추천(뒷공작) 때문이었다. 슐라이허와 파펜은 초급장교 시절 베프를 먹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실상은 슐라이허 자기가 머리이고 실질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조종 할 인물을 고른게 젊은 시절 베프 파펜이었던 것이다(...) 이때 슐라이허의 국방부 부하가 저런 하찮고 머리 딸리는 인간을 어떻게 추천하냐는 질문에 슐라이허 왈 "'''그는 머리가 필요 없어. 모자니깐!'''"이라면서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파펜에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최대의 재능이 있었다. 아부 떨기와 비위 맞추기. 마누라나 친구가 없고 뒷방 노인신세였던 팔순 노인 힌덴부르크에게 큰 신임을 받은 파펜은 슐라이허와 점점 따로 놀면서 권력 기반을 굳혀(?)나간다.
주독 프랑스 대사 프랑수아 퐁셰도 역시 그렇게 서술했다.

그는 원수(힌덴부르크)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기 발랄하고 유쾌한 언행으로 이 늙은이를 즐겁게 했고 존경과 헌신을 보여 그의 마음을 샀으며 대담함으로 그를 기쁘게 했다. 힌덴부르크 눈엔 파펜이 완벽한 신사였다.

그러나 퐁셰는 파펜에 대해서 이렇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진지하지 못하며, 천박하고 이간질이나 잘하는 이. 사람을 잘 속이고 출세욕이 강하며, 교활하고 낯두꺼운데, '''자신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것 같다.''' 모든 내기를 받아 들이는 탓에 ''' 절대 위험한 일을 맡으면 안 될 사람이다."(...)'''

또 영국 대사 호러스 럼볼드 경은 파펜이 총리에서 짤린 1933년 1월 파펜과 만나고 나서 "이 거대한 나라의 운명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렇게 '''무게 없는 사람'''이 짊어지고 있었다니 놀랍다." 라고 평했으며, 전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는 후에 "나는 늘 그의 수많은 한계를 감안해 정상을 참작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라고 회상했다.

2.3. 넉달 반의 짧은 임기와 실책들


보수적인 파펜 내각은 각료 중에 11명중 7명이 귀족이라 '''남작님 내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머지 2명은 재벌회장이었고, 1명은 슐라이허 장군이었다. 프랑스 대사 퐁셰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아무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중에 사실로 확인되자 다들 웃거나 실소했다"라고 적었다. 파펜, 가일, 슐라이허의 삼두정치는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정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는데, 특히 동프로이센의 토지귀족 융커의 이익을 대변하는 가일은 사민당과는 천적관계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파펜은 '''당의 동의 없이 총리직을 수락하여 현직 총리가 출신당(가톨릭 중앙당)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무엇보다 경제 대공황으로 실업이 600만에 달하는데 실업수당이 너무 아깝다고 수령요건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노동자의 동의 없이 사업주가 임금을 깎을수 있도록 추진하는 바람에 재벌에 언론사 사주이자 우파 국민국가당의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2]만 열광하고 다른 우파정당 사이에서도 '''노동자의 적'''으로 찍힐까봐 버림받았다.
이렇게 파펜은 몇달 안되는 임기 기간동안 별 실력도 지지도 없는 주제에 '''목표는 독재다'''란 중2병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데다가, 자신을 비스마르크에 비유하며, 비스마르크도 헌법을 무시하며 통치했다며 헌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하고 헌법을 제국시대처럼 권위적이고 보수적으로 뜯어 고치려고 시도하는 등[3] 온갖 실책을 저질렀다.

2.3.1. "프로이센 쿠데타"


이렇게 되자 파펜은 안정적인 내각 유지를 위해 '''아돌프 히틀러'''와 거래를 했다. 파펜은 총리가 되자마자 히틀러를 만났는데 히틀러는 파펜에게 "나는 귀하의 내각을 한시적 대안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 당을 가장 강한 당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라면서 파펜에게 친근감을 보였고, 파펜은 히틀러를 '''"깍듯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히틀러는 원내 2당인 나치당이 파펜 내각을 지지하는 대신, 2년 임기가 남은 제국 의회를 해산하고 돌격대 활동정지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파펜은 덜컥 승낙한다.
문제는 히틀러가 조건으로 내건 돌격대 활동 허가는 이 명령이 중앙정부가 아닌 사회민주당 주정부였던 프로이센주에서 내렸다는 점.[4] 그러나 마침 1932년 4월에 프로이센 주의 주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오토 브라운의 연립정권이 패배했기 때문에 파펜과 히틀러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다만 나치당을 비롯한 정파들의 병림픽으로 새 내각구성이 지지부진하여 여전히 잠정내각으로 존재하긴 했다.) 주의회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얻은 나치당 돌격대는 이미 불법 같은 건 다 무시하고 정권을 내놓으라고 난리질이었고, 허구한날 길거리서 공산당 정치 깡패 "붉은전사동맹"과의 충돌로 곤봉 쇠파이프가 난무, 심하면 권총살인까지 일어나는 막장 상황이었다.[5]
파펜은 7월 17일에 알트너에서 일어난 나치당과 공산당의 패싸움(사망자 17명, 중상자 다수)을 명분으로 삼아 <프로이센 주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개입을 시작했다.
7월 20일에 파펜은 프로이센 주 각료들을 소집, 대통령 긴급명령을 내려 프로이센 주 총리 브라운과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카를 제펠링크를 해임했다. 또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 계엄령을 내리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친 사민당 성향을 가진 베를린의 경시총감과 사령관들을 잇달아 체포했다. 이것을 프로이센 쿠데타라고 부른다.
쿠데타를 벌여 프로이센 지방정부의 사민당 정권을 붕괴시킨 파펜은 라디오 방송에서 <프로이센 주 정부는 공산테러조직에 대항할 생각이 없다>라며 쿠데타를 정당화시켰다. 파펜은 프로이센 주 경찰청장을 겸임하면서 프로이센 주지사로 취임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의 특성상 겸직이 많고 실무부처 장 자리는 정치인이 겸임하는 게 잦긴 했지만 연방 총리가 일개주 주지사와 경찰청장직까지 겸임하는 건 당시에도 특이한 상황이었다.

2.3.2. 사면초가


한편, 히틀러와 한 두 번째 약속에 따라 1932년 7월 31일 총선이 열렸다. 이때 나치는 제1당이 되었으며(37.4%, 230석), 히틀러는 '''1당이 되었다는 이유로 민주적 다수결 원칙을 강조하며''' 총리직을 요구하면서 파펜과의 약속을 깨버렸다. 훗날 파펜은 "히틀러는 내가 두달 전에 만났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깍듯한 태도는 사라지고 요구 많은 정치인으로 돌변해 있었다." 라고 회고했다.
파펜과 힌덴부르크는 거부했으나 바야흐로 사면초가였다. 열받은 히틀러는 정권 거부 투쟁에 나섰고, 사민당에선 당연히 프로이센 주 정부 사태로 불신임, 한때 몸담았던 가톨릭 중앙당은 사민당과 프로이센 연립정부 구성원이었으며 "전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이 짤린 건 파펜이 정치군인 슐라이허와 짜고 뒷공작치면서 배신을 했기 때문"이라며 칼을 갈고 있었고, 공산당은 '''남작 나으리들의 내각'''인 파펜 내각이면 당연히 무조건 반대였다.[6] 또 다른 중도 정당들도 친재벌 정책인 노동자 임금삭감안이나 올려놓은 무능한 파펜을 지지했다간 표가 날아가기 때문에 지지하지 않았다.
때마침 의회가 열리자 공산당에서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한다. 이에 자신의 귀요미 파펜을 보호하려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미리 의회 해산에 서명해 놓고 파펜을 시켜서 의회에 제출했다. 비상대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것, 그러나 당시 제국국회 의장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먼저 도착한 의회해산 서류는 쌩까고 '''공산당과 합심해서 내각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결과는 찬성 511 반대42 이라는 압도적인 개관광으로 불신임 당하는 치욕을 겪는다. 파펜은 내각 불신임안 전에 의회해산안이 먼저 도착했다는 '절차상 문제점'을 들어서 당장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진 않았지만 이미 정치적 타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입게 되었던 것.
결국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불신임한 총리를 의회 해산하고 재선거없이 비상대권으로 통치하면 곳곳에서 폭동이 벌어질 것이고 병력이 10만에 불과한[7] 국가방위군(Reichswehr)은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파펜의 총리직에 결정타를 먹었다.
힌덴부르크는 눈물을 흘리며 파펜을 놓아준다... 헤어지기 아쉬운 듯 여든네살이나 드신 할배가 자필편지로 그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서명이 된 자기 사진을 죽은 동료에 대한 감상을 노래한 "내게는 전우가 있었다네~"라는 군가 후렴구로 장식해 전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총리공관[8] 바로 앞에 내무부에 있는 아파트를 내주고 개구멍을 통해 몰래 드나들도록 한다. 이 때문에 파펜은 총리서 짤리고도 몰래 드나들면서 계속 힌덴부르크를 구워삶을 수 있었다.

2.4. 악마와 손을 잡다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와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속셈으로 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하자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슐라이허에 대한 복수, 아니 공화국에 대한 복수에 들어간다. 총리직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슐라이허를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나치와 다시 손을 잡았던 것.
국방부에서 뒷조사나 하고 도청하면서 정치공작이나 벌이던 슐라이허는 의회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고, 어처구니없게도 나치당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멍청한 파펜이[9] 자기를 도와주려 히틀러와 접촉하는줄 알았단다.(…) 안습….
한편 의회는 의회 나름 막장이었다. 의회는 해산되었으나 청문회는 열렸는데, 대통령의 친구들이 농업보조금을 해먹은게 까발려지면서 위기 상황이 온 것. 힌덴부르크는 "정치공작에 능한 저놈이 그것도 못 막는건가 아니면 일부러 안 막는건가"하고 의심했고, 여기에 더해 농민단체가 "수입농산물 관세 내린 총리 때문에 못살겠다"라고 징징거리면서 역시 동부의 지주출신인 힌덴베르크는 슐라이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펜은 뒤늦게 정치적 포텐을 다시 터트린다. 이미 후겐베르크까지 구워삶았고, 대통령 비서실장,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와 함께 팔순 노인 앞에서 히틀러 찬양에 나섰다. 총애하던 파펜의 설득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다시 보게 되었고 슐라이허 경질을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린 슐라이허는 자신을 믿고 의회를 해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팔순 노인은 해산-재선거-해산-재선거 병림픽에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었다. 슐라이허는 예전에 의회 해산하면 폭동난다고 거짓말쳤던 전력이 있는데, 이번에도 폭동 벌어지면 어쩔 거냐는 힌덴부르크의 퉁명스런 질문에 슐라이허는 '''"이번엔 군대가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10] 라는 개소리를 작렬해 힌덴부르크를 격노시켰고,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획책한다는 루머까지 돌아서 결국엔 슐라이허는 사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파펜은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여 히틀러를 총리에 취임시키고, 자신이 부총리에 프로이센 경찰청장을 겸직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으며 1933년 3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한다는데 합의했다. 여기에 나치만으로 부족한 의회 의석 확보를 위해 국가민주당까지 끌어들여 연립내각의 구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고작 오스트리아 상병 출신인 히틀러가 총리 되는 것에 반대하던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설득한 장본인도 바로 파펜. 심지어 의회 과반 확보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는 '''"제가 속한 가톨릭 중앙당도 연립내각에 참여합니다."''' 라고 구라까지 쳤다.[11]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을 사용하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가 아닌 의회 내각의 총리로 임명하여 원내 과반수 의석을 달성하기 어려운 총리를 자신의 영향력에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와 파펜은 가톨릭 중앙당과 힌덴부르크에게 의회내각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위해 법무장관직은 공석으로 해놓고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가톨릭 중앙당에선 내심 연정이 요청이 오면 검토하자는 입장이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히틀러는 의회 결의를 필요로 하는 내각은 할 생각이 없었고 이미 총리가 사실상 내정된 마당에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만을 원했다. 그리고 연립정부 파트너 후겐베르크는 가톨릭 중앙당이 연립정부에 끼어들면 자신이 맡기로 한 농업장관, 경제부 장관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톨릭 중앙당의 합류는 밥통 싸들고 극심하게 반대했고, 중앙당과 연립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베를린 정계에선 이미 1933년 초 이미 슐라이허 경질설이 나올 때부터 새 내각은 파펜 내각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1월 30일 내각이 출범할 때 임명장 받으러 온 장관들은 그제서야 히틀러 내각인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힌덴부르크에게 임명장 받기 직전까지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재선거를 하자느니, 내각 참여 안한다느니 병림픽을 벌이는 등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연정이 구성되고 힌덴부르크 앞으로 임명장 받으러 갈 때까지 갈등이 있었는데, 내각 출범 후 3월에 재선거를 한다는걸 후겐베르크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뒷통수 맞은 후겐베르크가 뛰쳐나가라고 했던 것. 이에 히틀러가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내각 인적구성은 유지한다고 또 지키지 않을 거짓말로 간신히 달랬다. 후겐베르크는 연방 및 프로이센 경제/농업 장관으로 선임되었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2.4.1. 히틀러 내각


물론 히틀러 내각이 용인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히틀러 내각을 노련한 힌덴부르크와 보수 관료들이 '''정치 초보 히틀러를 조종하는 괴뢰내각''' 정도로 생각했으며, 파펜 본인도 그런 목적으로 히틀러의 연립내각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좌파인 사민당과 공산당 또한 저질선동가 히틀러는 밑천이 드러나면 곧 몰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꼭두각시라고 봤다. 사실 연립내각에 나치는 총리인 히틀러를 포함해 달랑 3명뿐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제외한 나머지 2인 중 빌헬름 프리크는 내무장관직을, 헤르만 괴링은 무임소장관 및 신설될 항공교통장관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을 겸직했다.
다른 나라도 그렇듯, 바이마르 공화국도 내무부가 경찰을 통제하고 있었으니 '''국가경찰력이 통째로 나치에게 넘어간 것이다.''' 프로이센 내무장관에 취임한 괴링은 잘 훈련된 베를린 무장경찰 15,000명을[12] 손에 넣은 데다가 돌격대 SA를 프로이센 예비경찰로 임명해버린다. 이래놓고 '히틀러 조종해야지~' 하고 있었으니 답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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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내부의 시각을 보여주는 만평 - 후겐베르크의 운전학원(…).
만평 속에서, 후겐베르크는 파펜에게 "저 초짜가 저기 앞에서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고 한가하게 자뻑하고 있겠지만, 경제 과정의 확실한 운전은 우리가 하고 있지요!"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만평은 후겐베르크와 파펜의 망상을 비웃는 당시 좌파 잡지 <전진>의 것이었는데, 결국 이 만평대로 허수아비가 된 건 파펜과 후겐베르크였다.[13]
엉뚱하게도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주독 대사의 보고를 토대로 정확하게 사태를 인지했다. 히틀러가 절대 합법적이고 온건하게 권력을 유지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그래봤자 그건 독일 국내정치고, 히틀러는 국제정치에선 암것도 모르는 생초짜에 협상 가능한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뙇![14]

2.4.2. 역관광


새정부 출범 후 3월 총선을 앞두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졌다. 희대의 운빨 보너스를 받은 히틀러는 일약 공포분위기를 조성, 공산당과 사민당 뿐만 아니라 연립내각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숙청을 벌인다.
히틀러의 살벌함에 히틀러를 조종하겠다던 파펜의 야망은 사라졌다. 파펜은 사이가 좋지 않던 히틀러와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관계를 이용하여,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반격을 가하려고도 했으나 얼마 안 가 대통령이 '''히틀러의 정국운영에 만족해버렸다.'''
이를 대비하여 원래 히틀러와 대통령이 만날 때에는 부총리 파펜이 동참하도록 합의가 되었지만 히틀러가 약속을 지킬 사람도 아니고 비서실장 마이스너, 대통령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대령도 히틀러에 기울었다. 무엇보다 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비상시국이라서 파펜은 대통령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1934년에 꼴에 '''가톨릭'''중앙당 출신이라고 기독교 윤리를 들먹이며 나치 정책에 반발하는 연설("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을 한 번 하긴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장검의 밤 사건으로 히틀러의 정적들이 줄줄이 처형당했으며, 파펜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한 뒤 가택연금당했다. 그나마 파펜은 슐라이허나 자기 비서들처럼 부부동반으로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장검의 밤 당일 파펜이 찾아가서 항의하려 했던 바로 그 괴링이 파펜을 보호했다고 한다. 장검의 밤 5주 후에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사망한 걸 보면 운빨은 아직 남아 있었던 셈.
파펜은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했고, 숙청되지 않기 위해 깨갱거리는 처절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실제로 파펜은 총통제를 용인하는 힌덴베르크의 유언장 작성에도 참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주제도 모르고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부총리인 자신이 대통령직을 '물려 받는 것'을 시도했다고도 하지만 히틀러도 파펜의 이런 깨갱거리는 모습에 측은했는지 숙청은 안 했다. 대신 그의 외교경험을 활용해 주 오스트리아 연방국 대사로 보내 오스트리아 합병 작업을 추진했다.[15]
이후에는 폴란드가 무너지고 프랑스가 무너지고 유대인이 끌려가는 현실을 지켜보게 된다.

2.5.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주 터키 대사로 부임하여 중립국 터키를 추축국으로 꼬드기는 작업에 전념하였고 실제로 1941년엔 독일 - 터키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터키는 여전히 중립적이었고[16] 소련의 스파이에 의한 암살미수사건까지 접한 파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에는 첩보원을 시켜 영국대사관의 정보를 수집했지만 오히려 연합국의 기만전술에 걸려 독일에 잘못된 정보를 보내는 사고를 터뜨리기도 했다.
결국 1944년에 터키가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파펜은 귀국을 시도했고, 로마 교황청의 대사가 되는 방법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베를린 교구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1944년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던 파펜은 오히려 게슈타포의 감시만 받게 되었다.
파펜은 자신의 사위인 막스 폰 슈토크하우젠 백작이 메센디에 소유한 성에서 살다가, 1945년 4월에 미군이 메센디를 점령하자 인근의 사냥꾼 가옥으로 달아났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파펜은 헤르만 괴링, 카를 되니츠,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등과 함께 나치 전범들 중에서도 거물급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룩셈부르크의 바트 몽들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파펜은 나치 정권에서 공직생활을 한 점과 오스트리아 합병에 관여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파펜 자신은 1946년 6월 14일 변론에서 히틀러에 협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했고, 그리고 히틀러에게 실질적으로 사임을 당한 전 정권인사는 자기뿐이었다고 항변을 했다. 그러자 영국 측 수석검사인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은 이에 대해 "그렇소, 그리고 당신은 11일 후 오스트리아를 살해한 정부의 대사가 되었지." 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1946년 10월 1일 파펜은 히틀러를 총리에 앉힌 동조죄와 히틀러 정권에서 대사를 지낸 고위직 인사이며, 오스트리아 합병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지만 범죄행위가 없다는 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에 소련 측 재판관인 이오나 니키첸코는 히틀러의 범죄행위 대부분은 파펜이 가담했다고 하면서 유죄를 요구했지만 서방 측 재판관들은 이를 거부했다. 또한 프란츠 폰 파펜은 1947년 2월에 열린 비나치전범 재판에서 노동교화 8년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지만 결국 1949년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52년에는 자신의 회상록인 <길 위의 현실>을 출판하였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히틀러가 집권한 건 내 탓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았다. 이에 역사학자인 로버트 비스트리히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라며 비판했다. 1959년 7월 24일에는 교황인 요한 23세와 미국 주재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교황시종으로 임명되기도 했고, 몰타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서독 정계에 진출하려고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파펜은 은거생활을 보내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자스바하에서 1969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나고도 24년을 더 살다가 90살 장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가 죽은 해 세계는 68혁명의 후유증으로 들끓고 있었고, 독일에선 그 해 10월에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다.

3. 평가


정치적 재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불법적인 정치 행동을 여러 차례 시도한 시대착오적 정치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권력추구의 과정에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고 그를 이용하겠다는 오판'''으로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또한 무려 90세(2차대전이 끝날 당시에 이미 66세)까지 장수한 것이 여생 동안에도 후대 사람들의 비판 속에 생을 마감하는 저주로 작용했다.
두뇌는 그럭저럭 우수했던 모양이다. IQ 134로, 에리히 레더와 함께 나치 전범들 중 공동 5위. 하지만 헤르만 괴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머리가 좋다고 판단력도 좋은 것은 아니다.참고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파펜 추쾨닝겐'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후겐베르크가 듣보잡이던 히틀러를 키워줬다는건 과장이다. 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였고 여러번 사이가 틀어졌다.[3] 의석수 3분의 2가 동의해야 가능하다.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걸 고집했던 것.[4] 독일은 경찰병력이 중앙정부가 아닌 주정부에서 관리 했기 때문에 파펜의 권한으론 프로이센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은 지방자치제 연방 국가로 독일 제국 또는 그 이전부터의 전통에 따라 지방행정의 자율성과 정부구성이 보장되어 치안권은 중앙정부 내무부가 아닌 주정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5] "1932년 정치 폭력으로 사망자는 155명에 달했고 나치당 55명 공산당이 54명에 달했다."-리처드 오버리 - <독재자들>.[6] 사실 공산당은 정치혼란이 가속화되면 공산화가 더 쉬워지리라 믿었기에 이때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거부를 자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많이 동조한건 나치당이었는데, 나치당도 정치혼란의 가속화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7]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 제한 때문이다.[8] 대통령궁은 수리 중이라 대통령이 총리공관을 쓰고 총리는 총리공관 별관을 사용했다.[9] 사실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랐다. 그냥 느낌으로 알았던 것. 그래서 슐라이허는 파펜이 자신을 증오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10] 군과 프로이센 경찰병력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했다고 한다.[11] 당시 독일 의회는 제적의원 584명이었고, 나치의 196명과 국가국민당의 52석을 합쳐도 과반에 미달했기에 70석의 가톨릭 중앙당이 합류해야 의회 과반을 확보하는 안정적인 내각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펜은 총리직을 수락한 당시 허락을 얻지 않은 덕분에 당에서 외톨이였고, 당연히 당의 연립내각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12] 경찰이라곤 하지만 기관총장갑차까지 보유했다. 시가전에서 공산당 정치깡패 '붉은 전사 동맹'이나 돌격대는 그냥 쳐바르기 충분했다. 이미 1929년에 공산당 베를린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전력도 있다.[13] <전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언론정리 과정에서 강제 폐간되었다.[14] 여담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는 '''별 일 아니다'''라고 본국에 타전했다. 그리고 6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에 먹힌다.(…)[15] 훗날 회상록에서 전 유럽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합병공작을 벌였다고 술회했다고.[16]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가 죽기 전에 히틀러는 미친놈이니 절대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당시 터키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는 2차대전 후반까지 중립을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