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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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 나치 독일의 정치가.
제국선전부 장관으로 유대인 탄압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계를 통제하고 나치 정권의 악행에 앞장선 인물이자 '''선동의 제왕'''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베를린 관구장[2] , 중앙당 선전국장[3] 을 거쳐서 1933년 나치 독일이 집권하자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에는 총력전 전권대사도 겸직하였다. 이후 전쟁 말기엔 나치 독일의 2대 총리이자 독일의 25대 수상을 역임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국가사회주의와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선전장관 부임 당시 독일인들에게 라디오를 보급하는 등 각종 선전 전략을 만들어서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냉철하고 치밀한 선전 활동으로 유명하며 흔히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 프로파간다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전쟁 중엔 선전으로 유럽 침략 전쟁을 미화하면서 전쟁범죄에 크게 일조했었다. 전쟁 중에는 일기를 자주 썼다. 베를린이 포위되어 패전을 앞두고 베를린에 있던 총통벙커에서 자신의 아내 마그다와 아이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때문에 엉뚱한 부하 직원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끌려나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독일 내 일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보다 괴벨스를 더 싫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유대계 독일 언어학자인 빅토어 클렘페러(Victor Klemperer)가 있다.
2. 생애
3. 개인적인 특징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가 굽는 신체장애가 있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박사 학위만큼이나 잘 알려진 개인적인 특징이다. 어려서부터 성인 나치당과 장관에 이르기까지 정적들의 공격대상이었고 괴벨스 자신도 장애를 잊지 않았다. 군대는 면제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는 않고 대학에 다닐 때 징집된 적이 있다. 현역은 아니고 군대에 비품을 공급하는 보훈단체에서 행정병으로 몇 달 일하다가 높으신 분이 괴벨스의 꾀죄죄한 외모를 보고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유대인 초등학교 교사[4] 엘제 얀케와 결혼을 고민할 때도 여자 쪽에서 괴벨스의 다리 장애가 유전이 될까봐, 괴벨스는 엘제 얀케의 어머니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대판 싸우는 원인도 되었고 나치당 관구장이 될 때도 말이 많았고 장관으로 출세했을 때도 정적들은 군 복무 경력과 신체장애를 빗대 '방구석 병사', '빼어난 외모의 게르만 청년' 이라 비꼬거나''' '절름발이 악마' '''라는 별명을 붙였다.
장관이 되고 나서는 다른 나치당 간부들만큼 흥청망청은 아니어도 꽤나 해먹었다. 우선 유대인 부호를 협박해서 땅을 헐값에 가로채고 괴링의 양해를 받아 산림구역에서 법을 어기고 주건물 방 개수만 21개, 욕실만 5개짜리 별도의 영화관과 연회홀이 딸린 저택을 300만 제국마르크를 들여서 만들었다.[5] 내부 장식도 가구나 식기는 물론이고 하나에 3만 마르크나 하는 루이 16세풍 양탄자를 까는 등 실내 장식에도 펑펑 써댔다. 물론 여기엔 재벌 출신 마그다의 취향도 한 몫 했다. 이 대부분의 돈은 당연히 영화계의 뇌물이나 선전부 예산을 삥땅쳐서 빼돌렸다.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시절에도 상당수의 베를린 관구 당예산을 빼돌려서 소송비용이나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데 썼다.
3.1. 여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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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품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다른 재주가 뛰어나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다.[6] 고등학생 시절에도 시골 여자를 꼬셔서 사귄 적이 있다. 얀카 슈탈헤름이라는 부자집 따님과는 신분 차이로 헤어지지만 오랫동안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였고 엘제 얀케라는 유대인 초등학교 교사와도 나치당에 들어가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가기 전까지도 헤어지지 않았다. 한때 나치당에 있음에도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했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부임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질 정도. 베를린에 가서도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자주 바뀌었으며 아내 마그다와 결혼하던 시절에도 전 여자친구인 슈탈헤름과 양다리를 걸쳤으며 바쁜 와중에도 다른 여자들도 만났다. 권력을 잡은 뒤 선전장관이라는 직책상 배우들의 출세에 대해 최종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여배우들과 염문이 많았으며 그 문제가 불거져 정적이던 힘러는 '우리는 여직원을 농락하는 유대인 사장에 대해 비난해왔는데[7] 이제는 괴벨스 장관이 그 비난을 듣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모든 여자들이 나의 피를 끓게 만든다.
-1926년 그의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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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 바로바.
특히 체코 병합 이후에는 체코 출신 여배우 리다 바로바(Lida Baarova, 1914~2000)와 상당히 심각한 수준으로 문제가 되어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 리다 바로바는 원래 약혼자[8] 까지 있던 여자였는데 괴벨스가 데리고 다니면서 성관계를 하다가 남자 배우인 전 약혼남에게 주먹질을 당했다는 둥 멱살을 잡혔다는 둥 결투를 했다는 둥 루머가 돌았고 극장에선 리다 바로바가 나오면 '선전장관의 창녀' 라고 다들 수근대는 등 소문이 다 퍼졌다. 사회적 시각과 마그다 괴벨스의 인맥[9] 을 생각한 히틀러의 불호령으로 사건을 대충 수습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참고로 리다 바로바는 2차대전 이후까지 살아남았고 전후 증언에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 라고 공언하였다고 한다. 정작 괴벨스는 대학 시절 연인 얀카 슈텔헤름이 자신이 진정 사랑한 연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체적 장애에 대한 반발인지 여성관은 대단히 보수적이었고 마초 성향이었다. 여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히틀러처럼 여자는 집구석에서 애들 많이 낳고 남편 내조하는 데 충실해야 된다고.
3.2. 마그다 괴벨스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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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마그다 괴벨스는 1901년 태생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처녀일 때 성은 '리첼'로 어릴 때 어머니가 생부와 이혼하고 유대인 출신 부자 남편과 재혼했다.[10] 상류층 영양들이 다니는 기숙학교를 다녔고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19세 때 나이가 40줄에 애 둘 딸린 재벌 크반트 가문과 결혼했다. 8년간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아들 둘(하나는 요절)을 낳았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바쁘다고 얼굴도 보기 힘든 남편을 두고 마그다가 젊은 남자와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면서 자연스레 이혼한다. 이혼할 때 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데리고 나온다. 서양식 사고방식의 위엄인지 전 남편&전 시가(媤家)와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며 이혼할 때도 풍족하게 한 보따리 챙겨서 나온다. 오히려 이혼하고 나서 전 남편&전 시가와의 사이가 더 좋아졌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이혼하고 할 일 없이 소일하던 마그다는 심심풀이로 베를린 스포츠궁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놀러갔다가 깊은 감명을 받고 그 날 즉시 나치당에 입당한다. 매우 열성적이어서 재벌집 마나님 출신이면서도 무급으로 베를린 나치당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에 나섰고 이때 괴벨스를 만난다. 이미 이 시절엔 괴벨스는 국회의원도 되고 나치당 베를린 대관구장이 된 터라 대학 시절 애인에게 손 벌리는 것처럼 안습 상황은 아니었으나 출신 배경 차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괴벨스가 약간 꿀리는 감도 없지 않았다. 생부와 모친과 옛 시가인 크반트 가문까지 모두 결혼에 반대했지만 첫 아이를 밴 상태에서 조용하게 결혼했다. 이후 인맥과 영향력으로 괴벨스가 출세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남편보다 더 열렬한 총통 추종자에다 히틀러도 마그다를 좋아했기 때문에 독신인 히틀러를 돕는 제3제국 퍼스트 레이디로 불릴 정도였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능통해서 다른 외국어[11] 에 약한 괴벨스나 히틀러를 대신해서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고 다리를 놓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괴벨스가 한때 권력층에 밀려나 찬밥이 되었을 때도[12] 마그다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은 탄탄했다. 괴벨스가 리다 바로바와 바람이 났을 때는 괴벨스의 오른팔 선전부 차관이며 연하인 카를 항케와 맞바람을 피우며 이혼도 불사했지만 히틀러가 간곡하게 달래고 괴벨스가 아이들을 뺏는다는 으름장에 굴복하고 재결합한다.
제3제국의 다산정책을 몸소 실천해서 전 남편에게서 하랄트를, 괴벨스 사이에서 1남 5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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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순서는 헬가(1932년 9월 1일), 힐데(1934년 4월 13일), 헬무트(1935년 10월 2일), 홀데(1937년 2월 19일), 헤다(1938년 5월 5일), 하이데(1940년 10월 29일). 아들 헬무트는 마그다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았다가 요절한 아들 이름 헬무트를 그대로 붙였다. 맏딸 헬가는 죽을 때 12세였는데 무척 영리하여 일찍부터 히틀러의 귀여움을 받았다. 참고로 전부 H로 시작하는데 '''총통을 기린답시고'''[13]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진 맨 위의 공군 상사 비행복[14] 을 입은 이는 아내 마그다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랄트 크반트[15] 로, 괴벨스는 그도 양아들로 함께 데려와 키웠다. 헬가는 똑똑해서 괴벨스가 기대하며 아낀 반면 외아들 헬무트는 자주 공상에 빠져서 '남자애 혼자 여자 형제들 사이에 키워서 저러나' 하고 괴벨스가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나치 패망 직전 총통벙커에서 자살하기 전에 자기 자식들을 다 죽였다. 아이들의 시신(그냥 잠자는 듯한 모습이지만 시신이다보니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 클릭시 주의 요망) 괴벨스 가족의 시신은 소련군이 입수했는데 맏딸 헬가는 얼굴에 저항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 몰락과 유사하게 예방 주사 놓는다고 SS 군의관을 시켜 모르핀을 투여하고, 자고 있을 때 부부가 직접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괴벨스는 아이들을 해치기 전에 망설였지만 마그다가 적극적으로 죽였다.[16] 그 이유가 '''총통 각하가 없는 세상 따위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라니, 역시 보통 나치 빠순이가 아니다. 마그다와 친한 알베르트 슈페어가 남긴 회고록을 제외하고는 마그다가 나서서 죽였다는 증언이 일치한다. 슈페어 회고록에선 총통 벙커에서 마지막으로 마그다와 인사할 때 괴벨스가 질투해서 둘만의 이야기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원망도 한다.
의붓아들인 하랄트 크반트는 전쟁 전 공군에 사병으로 입대, 부사관 시절 사관후보생을 지원해 공수부대 장교로 복무했다. 1941년 크레타 전투 때 부상당하기도 했고, 1944년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영국 육군의 포로가 되었기에 살아남았다. 최종 계급은 공군 중위였다. 마그다가 죽기 전 총통벙커에서 보낸 편지는 기적적으로 하랄트에게 전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전후에는 크반트 가문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활동하다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친부자 관계는 아니었으나 양아버지와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했던 것 같다. 여담으로 2014년 10월, 하랄트의 친족이자 BMW의 대주주인 요한나 크반트[17] 가 독일 최고 부호 반열에 올랐다고 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보도했다. 요한나 크반트와 그녀의 두 아들딸의 BMW 지분을 합하면 46.7%에 달하는데, 이에 따르면 크반트 일가의 재산은 245억 파운드(약 '''42조 2983억 원''')에 달한다.#
4. 저작
괴벨스의 저작으로 가장 방대한 자료는 '괴벨스의 일기' 이다. 20대 중반(1923년)부터 거의 매일 꼼꼼하게 쓴 일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나치 시대, 괴벨스와 히틀러 등 기타 나치 인사들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1차 자료다.[18] 2만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라서 1~2년 또는 2~3년 정도의 양으로 나눠서 출판했고(시대순은 아니다) 전쟁 말기에 쓴 일기는 동독에 남아있어서 90년대에나 연구가 시작되었고 훨씬 늦게 발간되었다. 괴벨스의 인물평이나 당시 시대 여론이나 루머들이 솔직하게 적혀있다. 그렇지만 일기라고 해서 완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쓴 것만은 아닌 게 나치 집권 후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사후 20년 출판을 조건으로 막대한 선인세를 받고 팔았기에 히틀러나 나치 정권에 대해선 완전히 자기검열 없이 쓴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저작으론 몇 차례의 개작을 거친 반(半)자전적 소설 <미하엘>이 있다. 자전적 소설이 아닌 반자전적 소설인 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리하르트 플리스게스(Richard Flisges)가 노동자로 일하다 광산에서 사고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집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미하엘 포어만(Michael Vormann)은 현실의 친구 플리스게스와 괴벨스 자신을 투영하여 암울한 환경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저자 본인부터가 그다지 좋은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했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집권 후 불티나게 팔려서 10쇄를 넘게 찍어냈다. 대한민국에도 2017년 4월에 번역, 출간 되었다.
그 밖에 베를린 관구장 시절 공산당이 집회 때 연극을 이용하는 걸 따라한답시고 정치적인 희곡을 몇 편 썼지만 역시 평은 좋지 않다. 나치당 입당 하기 전 실업자일 때 언론사에 발표한 논문이 6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나치당 시절 정치적으로 쓴 글 모음(영문판). 1920년대~1933년, 1933년~1945년.
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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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철천지 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19]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 1935년 12월 4일 연설.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상 의미에 있어 민중 심리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 시간 민중의 맥박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 1935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20]
"이 얼마나 이상한 민족입니까! 다른 민족이라면 저항하기 위해 대중들이 봉기했을 겁니다. 가련한 독일! 상놈의 나라! 불량한 나라! 유대인들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우리를 평가했습니다!!"
- 1928년 베를린 거리 연설
'''독일이여 깨어나라!(Deutschland Erwache!)'''[21]
유대인 언론들의 프로파간다는 마치 우리가 자신들을 학대한다며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린 저 더러운 유대인들의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 1933년 포츠담 궁전에서
SA와 당원동지 여러분! 빨갱이들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빨갱이들은 들어라.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두들겨 패주겠다!'''
-1933년 포츠담 궁전에서
'''메마른 대지가 비바람을 갈망하듯 단 한 사람을 원합니다. 단 한 사람!! 민족이여 깨어나라! 폭풍이여 몰아쳐라!'''[22]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면서 일기장에 쓴 말. 후에 이 말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가로질러 차를 몰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모든 것을 상세하게 둘러보았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짐승들 뿐이다.''' 때문에 이것은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외과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칼로 절단을 하되 아주 사정 없이 잘라내야 한다.'''
- 1939년 폴란드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 주의'이다."'''
'''인민 대중이란 작은 거짓말보다는 더 큰 거짓말에 속는다.'''[23]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24]
'''"여론조사라는 것은 대상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25]
'''"묻겠다, 제군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전쟁을 원하는가?"'''
5.1. 그의 말로 잘못 알려진 것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 괴벨스의 어록이라 하여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하지만 출처는 없고, 외국에서는 이 말 자체가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국내의 누군가가 괴벨스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 괴벨스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출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마저 기사에 인용하는 수준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유명하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시리즈에서 사망시 출력되는 대사로 나오며 미국에서도 괴벨스의 말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26]
내용상 비슷한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프로그래머 알베르토 브란돌리니가 2013년에 공표한 '헛소리 비대칭성 원리'(Bullshit asymmetry principle)가 있다.#
'''당신이 거짓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대중들은 그것을 믿게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도 믿게 된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 이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등장하지만 괴벨스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다. 1946년 미국 의회에서 발행한 서적에서 처음 나온 말이며, 이 서적의 발언에는 인용한 출처나 원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역시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선전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요점만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긴 한다.
6. 그를 다룬 것들
6.1. 서적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가 지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김태희 역)' 으로 국내 발간되어 있다.
원서 제목은 그냥 <파울 요제프 괴벨스>인데 국내판에서 대중선동의 심리학이라 써놔서 제3제국의 선동정책을 다룬 책인지, 심리학을 다룬 책인지 헷갈리게 만들어 놨다. 내용은 그냥 파울 요제프 괴벨스 평전이다. 하지만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깊게 다룬 책 중에 거의 유일하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선동내용 중에 예나에 이은 라이프치히를 공간적으로 가깝다 식으로 번역한 사소한 오역[27] 이 있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현재 나무위키 파울 요제프 괴벨스 문서의 상당 부분이 이 책이 출처.
6.2. 영화 몰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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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울리히 마테스(Ulrich Matthes). 스크린샷을 보면 알겠지만 캐스팅이 실제랑 별로 안 닮았다. 아래 부분은 여단지도자[28] 빌헬름 몽케(Brigadeführer Wilhelm Mohnke)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몽케:
* '''... Herr Minister, wenn diese Männer nicht bewaffnen können, dann können sie nicht kämpfen. Sie sterben sinnlos.'''
* '''... 장관님, 이 사람들에게 무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맞서 싸우지 못합니다. 모두 개죽음을 당할 겁니다.'''[29]
괴벨스:
* '''Ich kann kein Mitgefühl empfinden. Ich wiederhole: Ich kann da kein Mitgefühl empfinden! Das Volk hat dieses Schicksal selbst gewählt. Ja, das macht für manche Leute ein Überraschung sein. Geben Sie sich keinen Illusionen hin. Wir haben das Volk ja nicht gezwungen. Es hat uns selbst beauftragt. Jetzt wird Ihnen eben das Hälschen durchgeschnitten.'''
* '''난 그들(국민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는데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단 말이요! 모두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에요. 네, 어떤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면 안되지.[30]
우리는 한 번도 국민들에게 우리를 뽑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우릴 선택했으니,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거지.
실제론 패망 직전 4월 21일 선전부 직원들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과거 국제연맹 탈퇴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독일 민족의 절대 다수가 양보의 정치에 반대하고 명예와 모험의 정치에 찬성한 것, 즉 독일 민족 스스로가 현재와 같은 상황을 원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부하가 되라고 강요한 적이 없으며, 이 모든 것은 당신들이 저지른 짓이니, 당신들은 곧 목이 잘릴 것이다.''' 라 하고 비웃으며 나갔다고 한다. 영화상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친위대 안에서도 열렬한 히틀러 숭배자들이 배속되는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LSSAH)' 출신의 친위대 소장인 빌헬름 몬케''', 거기다 국민돌격대가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죽어가는 게 무의미하다고 했다가 저런 말을 들었다. 그야말로 그나마 남아있던 충성심마저 산산조각날 지경의 충격적인 신이다. 마지막에 '''같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표정의 썩소를 짓는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에 의한 비극의 책임이 나치당만이 아닌 그들에 동의한 독일 국민 모두에게 있다는 씁쓸하지만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31][32] 다운폴/패러디 항목도 참조할 것.
7. 어떤 인간인가?
지금까지도 나치당 내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들은 당연히 히틀러, 괴링, 힘러, 괴벨스 정도인데[33] , 여기서도 괴벨스는 유별나다. 심지어 히틀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34]'''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
'''- 오토 야콥스, 속기사'''
애초에 히틀러는 나치당 최종보스라서 당연히 다른 쫄따구보다 악명이 높지만, 괴벨스는 나치당 내에서도 손꼽히는 악마였다. 사실 괴벨스는 나치당 내 여러 유형 중에서도 워낙 특별한 유형이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35] 괴링은 흔해 빠진 부패한 유형이고 힘러같이 광신적 충성심과 사명감에 불타 돌쇠처럼 기계적으로 나치에 충성한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반면 괴벨스는 북독일 라인란트 출신 노동자 계층 출신이란 점에서 프티부르주아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 히틀러와 통하는 면이 있었으며, 둘 다 반 자본주의적이고 반 권위적이며 현란한 선동가이며 연설가였다. 또한 괴벨스는 금발이고 키가 크며 건장한 모습이 대부분인 아리안족과는 달리 흑발에 키가 작고 발을 저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뛰어난 말솜씨와 교활함으로 자신의 장애를 극복했으며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인기 비결이기도 했다. 괴벨스는 권위를 혐오했지만 추구했고 지성인 출신이지만 연설은 지성적인 언어를 쓰진 않았다.
괴벨스에 대한 책을 썼던 롤프 호흐후트는 '스스로 열광했기에 타인을 열광시켰던 신도'라고 했던 반면 요아힘 페스트는 '최후까지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자'라고 했다. 괴벨스를 다룬 다른 작가들은 '합리적인 선동가'라든가 '장애에 대한 보상을 총통신앙과 세계관으로 대리 충족'했다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괴벨스가 가진 그만의 능력을 절대로 무시할 순 없다.''' 남들과는 다른 장애를 갖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과는 다른, 아니 오히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그만의 언변 능력으로 독일 국민들을 사로잡고 하나로 뭉쳤다. 이렇게만 보면 장애를 극복한 뛰어난 연설가로 평가받아야겠지만 '''문제는 그 뛰어난 능력을 나치즘과 히틀러를 위해 써먹었다는 점이다.''' 그의 재능만큼은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천재성을 악하고 교활한 자가 갖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까지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지 잘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8. 여담
- 윈스턴 처칠이 군 부대를 방문해서 톰슨 기관단총을 써보는 사진을 이용해서 '저런 갱단 두목 같은 전쟁광이 여러분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합니다. 처칠을 쫓아내고 우리 제3제국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겠습니까!'라는 선전문구를 영국에 뿌렸는데 정작 영국 사람들에게 대혹평만 받았다. 결국, 이 건은 괴벨스의 선전선동에서 몇 안 되는 실패로 끝맺었다. 오히려 영국 사람들의 전의만 왕성하게 만들었으니... 그런데 이게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이 광적으로 되도록 몰아간 언플이었다는 평도 있다.[36]
-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연설이 위압감으로 사람들을 흡입시킨 것과는 다르게 괴벨스는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괴벨스와 친했으며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와도 친했다고 한다.
- 그는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서 양쪽 발 길이가 달라 보조구를 착용했는데 이 때문에 연합국에선 "거짓말쟁이는 발을 끌면서 온다"는 말로 괴벨스를 조롱했다고 한다.
-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그의 시골별장은 소련군 공군사령관인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 중장(1904~1975)이 통째로 뜯어가서 러시아로 가져가서 자기 집으로 삼았다.
- TV와 라디오를 정치선전에 활용한 선구자이며 정치쇼의 원조, 공약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의 선구자이다. 또한 시장같은 장소에서 후보자가 유권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전하는 행위의 창시자이다. 그 덕분에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 최초로 정기적으로 TV 방송을 보낸 국가가 되었다.[37]
- 현재 뉴스 프로그램에서 이용되고 있는 "뚜... 뚜... 뚜.... 삐이~" 소리를 낸 뒤 본격적으로 방송이 나가는 방식은 괴벨스가 사람들을 방송에 집중하게 만들어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해 개발한 방식이라고 한다.
-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만약 괴벨스가 자살하지 않고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이 나름대로 흥한 떡밥이기도하다. 특유의 말빨로 연합국 검사측을 압도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그의 입지가 일개 관료가 아닌 나치 최고위층인지라 강렬한 인상은 남길수는 있어도 극형을 피하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괴벨스 본인은 아니지만 괴링이 실제로 재판에서 괴벨스 못지 않게 자기변호를 잘 했으나, 죄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 괴벨스 어록 항목에 있는 맨 첫번째 말은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 사회문화 문제로 등장했다.
- 장 르누아르의 반전 영화 위대한 환상을 매우 싫어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이때 괴벨스가 봤는지 '영화판 공공의 적 제 1위 Cinematic Public Enemy No. 1'라고 대놓고 발언했다. 그리고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금지되었고 연합군 공습 도중 필름 현상소에 보관되어 있던 네거티브 프린트가 파괴되었다...고 다들 알았으나 사실은 뮌헨에 있는 제3제국 영화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38] 다만 상영용 프린트는 어떻게 찾았는지 전후 다시 상영되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프린트는 소련에 갔다가 1960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으나,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던지 툴루즈 시네마테크 창고에 잠들어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다시 발굴되었으며 상태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위대한 환상 복원판은 이 네거티브 필름을 기초로 한다. 이 위대한 환상이 르누아르 커리어에서 손 꼽히는 걸작이기도 해서 이 일화는 영화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으로 꼽힌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