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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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당.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좌파(사민주의) 정당'''이기도 하다. 대표적 수권정당으로 영국 노동당 등과 함께 유럽 사회주의 좌파 진영을 주도해왔다. 수정주의 논쟁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사회민주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행동원칙으로 민주적 의사결정과 기본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를 실현함으로써 민주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을 강령으로 한다.[1][2]
2. 내부 정파
사회민주당 내의 정파는 크게 케인스주의 사회민주주의자(이하 당 내 좌파)와 제3의 길주의자(이하 당 내 우파) 두 정파로 나뉜다.
당 내 우파는 어젠다 2010을 강력히 지지하지만, 당 내 좌파는 고전적인 좌파적 정책과 복지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를 주장하며 최근 몇 년간 어젠다 2010을 바탕으로 시행된 경제적 자유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복지 국가가 축소되었으며 이를 지지하는 당 내 우파를 비판했다.
2003년도에 발표된 어젠다 2010의 반작용으로, 2005년에 당 내부에서 탈당 운동이 있었다. 탈당파는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2007년도에 좌파당 창당에 참여했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다시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 복원을 시도 중이다.
3. 역사
3.1. 초창기 (창당 ~ 1914)
독일 통일 이전인 1863년 페르디난트 라살이 창당한 전독일노동자동맹이 원류이다. 1869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만든 사회민주노동당과 합당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당명을 바꿨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反사회주의 정책과 이를 기초로 한 탄압으로 제도권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편법적으로만 참여했다. 이 시기 사회민주당은 정치조직으로서 산업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을 표방하면서 정당의 틀을 갖춰나가는 중이었고, 노동운동과 친화적이었다.[3]
1890년 총선에서 대약진하고 이 선거에서 패한 비스마르크가 물러 난 뒤엔 빌헬름 2세에 의해 반사회주의법이 폐기되면서 오늘날의 당명인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핵심 이념 및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말년의 엥겔스가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사회민주당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흔히 공산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호칭되지만 인적 계보로만 본다면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직계이고 후의 소련 볼셰비키, 독일 공산당이나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좌파당은 오히려 방계에 가깝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이념 취급을 받았을 시절이라 이 시절 포지션은 극좌였다.
이후 제국의회 선거에서 꾸준히 주요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당시 독일 제국의 선거제도가 현재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인 데다가 계급투표 성향이 강했고, 도시지역에 의석수가 인구에 비해 덜 배정되어 있어서 집권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제도권 진출을 통한 사회주의 성립이라는 수정론적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사민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카를 카우츠키는 '우리 당은 혁명적이지만 혁명은 하지 않는다.'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전히 당의 핵심이념은 마르크스주의였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적극적, 폭력적 활동과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확산을 주도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기반을 갖추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르크스적인 역사 발전론에 따라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이론의 토대였는데, 이는 이후에 자본주의의 '자동 붕괴론'으로 이름 지어졌다.
독일에서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1912년 총선에서 드디어 원내 1당이 되는 쾌거를 이룩했고, 중도 자유주의 세력과 합치면 의회 과반수를 넘길 정도로 넉넉하게 세를 확보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전쟁 수행을 위한 독일의 국채 발행을 지지하는 데서 시작하여 독일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아직 자본주의의 후진국인) 러시아 따위에게 독일이 무너지면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에 더 가까운, 즉 공산주의에 더 가까운) 독일 내 사회주의의 기반도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였지만, 한편으로는 국제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된다. 이로 인해 당 내부에서는 반전을 주장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소수파'가 독일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갔다.[4]
3.2.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합국에서 전범으로 취급한 빌헬름 2세와 독일 군부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독일 군부는 사회민주당에 전후처리를 떠맡겼다.
11월 혁명으로 제2제국이 종식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받아들였던 수정론적 관점을 당의 핵심목표로 구체화하며, 혁명론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제도권 정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대신 혁명론은 독일 공산당이 가져가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독일 신정부 구성에 큰 공헌을 했으며, 신생 바이마르 헌법에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러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항들을 삽입하는 등 성공적으로 새 국가의 출발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무엇보다 11월 혁명에서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이 중도층의 호응을 얻었으며, 우파에서도 '''이념은 다르지만 대화는 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 것이 큰 효과를 얻었다. 덕분에 중도우파인 독일 민주당이나 가톨릭 중앙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공화국 초기에는 다수의 총리를 배출하는 등 내각을 주도했다.
패전 직후의 혼란과 프랑스군-벨기에군의 루르 점령 등 내외적 악재로 여러 차례 곤경에 빠졌다. 이후 사회가 좀 안정된 1928년 총선에서 승리, 다시 연정을 구성해 이번엔 제대로 나라를 꾸려나가려 했는데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렸다.
대공황과 뒤이은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 사회민주당은 중도지지층 다수를 우파 및 나치에, 좌파 지지층 다수를 공산당에 빼앗겼다. 1930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해 헤르만 뮐러 총리를 해임하면서 총리직까지 잃게 된다. 사민당은 꾸준히 과반은 아니어도 원내 1당이었으니 다른 정당의 협조를 얻어 의회 과반의 지지도 얻지 못한 대통령 내각[5] 따위 불신임을 때려버리면 될 일이지만, 나치당과 공산당이 공공연히 공화국을 끝장내겠다고 선동하는 마당에 불신임 때렸다간 나치 혹은 공산당이 집권해 공화국이 작살날 것 같아 불신임을 포기했다. 이 시기 사민당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부재하여 위기를 헤쳐가지 못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활동 금지 및 정당해산을 당했다. 나치가 강성하던 1932년 이후로도 줄곧 원내 제2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국 주도권을 쥐지 못한 것이 끝내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당의 핵심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국외망명을 떠났다.[6]
3.3. 전후 쿠르트 슈마허의 당수 취임과 기나긴 야당 시절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나치 독일이 망한 후, 1945년 5월 외국에 망명했던 기존 사민당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쿠르트 슈마허 등 국내에 남아 계속 나치에게 저항했던 세력이 결합하여 미국과 영국 군정청의 승인 하에 당을 부활시켰다. 그런데 이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독일 동부에서는 오토 그로테볼이 별도의 사민당 세력을 조직해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했지만 쿠르트 슈마허의 강력한 반대 아래 저지되었다. 이에 반발한 동독 지역 사민당은 단독으로 공산당과 합당해 사회주의통일당을 구성해 사민당으로부터 이탈해나갔다.
서부 독일에 잔존한 사회민주당은 쿠르트 슈마허의 주도 아래 하노버에서 재구성되는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회민주당이 당내 계파 싸움 등으로 무력하게 무너진 전례를 반성해 당수에게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슈마허는 강력하게 스탈린과 소련을 비판하고 반공주의를 주장했지만 사회주의자로서 미국과 프랑스이 독일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독일의 자결권을 주장하면서 연합군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7]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 후 최초의 서독 민간인 정부 구성을 위해 치뤄진 1949년 제1회 독일연방공화국 총선에서 사민당이 제1당 자리를 차지해 헤르만 뮐러 총리 집권 이후 19년만에 집권 여당 자리로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슈마허는 여기서 한발 더나가 중공업 국유화 및 계획경제 채택을 주장하고 미국의 마셜 플랜을 비난하는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련을 ''''제5의 점령국''''[8] 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는데 이게 서독 국민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이미 연합군 군정기에 서독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에 적응한데다가, 서독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지대로 남아야한다던 슈마허와 사민당의 생각과 달리, 전후 복구와 냉전의 시작이라는 현실 국면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서독 국민들은 생각을 바꿔 콘라트 아데나워와 기민련을 지지해 총리 자리를 넘겨줬다.[9]
쓰라린 패배를 겪었지만 이후 독일의 제1야당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축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1952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슈마허가 뇌졸중으로 급사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거기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우는 서독의 경제 부흥이 계속되면서 아데나워 총리와 기민련의 위세는 더할 수 없이 높아졌고 사민당은 에리히 올렌하워가 새로운 당수로 취임한 뒤 치른 두번의 총선에서 기민련-기사련 연합에게 2연속으로 대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결과가 이렇게 되자 자기들도 케케묵은 마르크스주의로는 결코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변모하는 대변화를 꾀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도 서독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기세에 눌려 만년야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3.4. 다시 찾아온 전성기와 전후 첫 총리 배출
1965년 총선에서도 패배의 쓴물을 마시며 후일을 기약하는듯 했지만, 키징어가 치열한 기민련 내 당내 다툼에서 승리해 총리 후보가 되자 반격의 실마리를 잡게된다. 이전 자민당의 배신으로 인한 에크하르트 내각 붕괴에 앙심을 품고 있던 키징어는 모두의 생각을 뒤엎고 사민당 쪽에 손을 내밀었고, 당시 당수로 취임해있던 빌리 브란트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10] , 1966년에 기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연립 여당 자리에 오르게 됐다.[11] 빌리 브란트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 직에 올라 사민당의 집권 역량을 쌓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대 공산권 강경 정책을 밀어붙이는 기민련과 대 공산권 유화 정책을 주장하는 사민당의 연정이 애초부터 오래가긴 힘든 상황이었고, 1969년 총선을 앞두고 대연정이 붕괴되면서 이제 서독 정가는 키징어와 브란트의 진검 승부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68 혁명의 분위기가 서독의 전역을 감싸면서 '''과거 청산'''이 총선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고, 안그래도 오랜 기민련의 집권으로 국민들의 염증이 보통이 아닌 상태에서 나치 부역 경력이 있는 키징어가 위기에 몰리게 됐다. 결국 1969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전후 처음으로 총리를 배출하게 된다.''' 정확히 얘기하면 총선에서는 키징어의 기민련/기사련에게 13석 차이로 패배했지만, 1966년 정부 구성 당시 키징어의 배신에 이를 갈고 있던 자민당이 아예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로 협의하면서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까지 합치면 사민당으로서는 무려 39년만에 겪는 경사였다.
이후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차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화해 시도를 통해 좋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빌리 브란트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를 방문해 전쟁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직접 무릎끓고 사죄한 사건은 전세계에 좋은 의미로 충공깽을 선사했다.[12] 그덕분에 1972년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기민련/기사련 연합을 아예 눌러버리고 제1당으로 등극하며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도 성장기가 끝난 서독 경제에 찾아온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민심을 집어삼켰고 1974년에는 브란트 총리의 비서 하나가 동독 간첩으로 확인되자 브란트가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등 위기를 겪었고, 재무부 장관이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후임 총리에 올라 이 위기를 수습했다.
슈미트 총리는 철저하게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확장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자 했으며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했다. 한편 국내 안보적으로는 극좌파들의 테러행위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극한 대립 속에서 NATO를 통해 리더십을 보여주는 등 능수능란한 정치 능력을 발휘했고 1976년과 1980년 총선에서 연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정해나갔다.[13] 하지만 확정재정정책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재정적자가 심해지자 자민당과 노선갈등 역시 격렬해졌고 결국 1982년에는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헬무트 콜의 기민련-기사련 연합과 함께 독일 역사상 최초의 내각불신임결의를 제출하자, 별수없이 기민련의 콜에게 정권을 내주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3.5. 제1야당 복귀, 동서독 통일과 제3의 길을 통한 재집권
이후 헬무트 콜 총리가 두 번 선거를 연승하면서 장기 집권, 다시 한번 오랜 기간 제1야당의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콜의 화려한 외교력에 비해 당시 기민련 정부의 내치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1989년 즈음해서는 서독 국민들의 지지가 사민당으로 모아지며 정권 교체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된다. 그런데 이때 사민당을 비롯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국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동서독 통일이었다.
동유럽 혁명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동독의 공산 독재가 붕괴, 1990년 최초의 동독에서 자유 선거가 실시됐다. 사민당과 기민련은 독일의 통일 방식을 두고 이 선거에서 다시 충돌했다. 정작 이 정국을 위한 물밑 작업인 동방정책을 주도한 사민당에서는 급진적 통일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했는데, 사민당의 주장을 자유에 굶주린 동독 주민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급진 통일 및 화폐 통합을 주장한 동독 기민련이 압승을 거뒀고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열린 1990년 12월 첫 동서독 통합 연방의회 선거에서도 기민련-기사련 연합이 압승하면서 정권 탈환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후 콜은 통일 총리로서 초반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곧 급진적인 통일의 부작용이 구 서독과 동독 지역에서 모두 발생하면서 빠르게 인기를 잃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3의 길을 주창한 사민당 내 우파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당수 자리에 오른뒤 1998년 총선에서 무려 기존에 비해 의석을 46석이나 늘리며 제1당을 탈환, 녹색당과 독일 역사상 최초의 적녹연정을 만들며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독일에 도입해 콜 총리 임기말 경제 하강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엘베 강 홍수 때 강력한 리더쉽을 보여줘 2002년 총선에서도 과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슈뢰더의 핵심 정책인 하르츠 개혁을 둘러싼 사민당 내 좌우파의 갈등, 골디락스 경제가 마무리되면서 시작된 경기 침체의 분위기로 2005년에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총선에서 패배하고 말았다.[14] 기민련-기사당 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에게 총리를 넘겨주는 대신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7년간의 재집권을 마무리하고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3.6. 두번의 대연정과 추락
2010년 이후로는 지지층 일부가 녹색당이나 좌파당으로 옮겨가는 지지층 이탈 현상과 함께 여론조사상 지지율이 녹색당보다도 뒤지는 위기에 처한 상태였고 2013년 총선에서 제2당이 되었다. 기민당과 대연정 협상에 착수했다. 결국 주요 쟁점이었던 시간당 8.5 유로의 최저임금제 도입을 관철시키며 대연정에 참가하였다. 사민당은 내각에서 6개의 장관직을 얻었으며, 지그마어 가브리엘 당수는 경제부 장관을 맡으면서 환경부 소관이었던 에너지 분야를 가져왔고, 부총리를 겸하게 되면서 내각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들어서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이 점점 하락하자 사민당은 기민/기사련을 버리고 좌파당[15] , 녹색당과 연대할 생각이 있는 듯 하다. (일명 적적녹 연대)
2017년 2월 여론조사에서 '''잠시''' 지지율 1위를 찍었다. 무려 일주일만에 10%가 수직 상승했는데, 이 지지율 상승의 비결에는 고졸 블루워커 출신으로 청년시절부터 사민당에서 활동하여 유럽의회 의장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인 마르틴 슐츠를 가브리엘 당수가 깜짝스럽게 총리 후보로 내세우고 당수 직도 이양한 덕분으로, 독일에서도 슐츠 효과라고 부르는 중. 메르켈의 장기 집권에 따분해 하는 유권자들과 극우들의 거짓말, 선동퍼레이드에 피로함을 느낀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모양세로,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게다가 슐츠는 '누가 더 독일 내 사회문제를 잘 해결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는 39%대 14%로 메르켈 총리를 무려 25% 차로 압도하고 있어 동서독 통일 후 첫 적적녹 연대도 꿈이 아닌 듯 싶다. 2월 18일 정당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이 33%, 기민당이 32%로 나타났다.
2017년 독일 총선 전 대통령 간선 선거에서 외교부장관이였던 사회민주당 출신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전후 사민당 출신 독일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다.
그러나 메르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지 못한 채 자를란트 주 의회 선거에서 대참패 하며 다시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결국 9월 총선을 앞두고 '''통일세 폐지'''를 공약으로 걸었다.#
이에 대해 슐츠 측은 비대칭적 동원해제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비판했다. 메르켈이 정치적 쟁점에 대해 견해를 밝히지 않음으로서 국민들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드는 전략이라는 것.#
그러는 와중 총선을 1달 앞두고 사민당에 대한 큰 의혹이 터졌다. 니더작센의 주 총리가 디젤게이트 사건에 관한 연설문을 사전에 폭스바겐 측에 보여주고 폭스바겐의 입맛에 따라 연설문이 수정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좌파당과 주 연립 여당인 녹색당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가 사민당 출신 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러시아 국영석유 기업 이사로 스카웃 되가면서 또 한번 독일 정계에 충격을 주었다.
2017년 연초에는 집권여당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슐츠 효과는 달랑 2주였고 이후로는 지지율이 떨어지다가 계속 침체하며 20% 극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기민/가사련의 지지율은 30후반을 찍고 있다. 특히나 심각한 것은 19세기와 바이마르 시기부터 꾸준하게 사민당 지지층이었던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대폭 잃은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사민당이 슈뢰더 시절에도 친 시장정책을 폈고, 최근 우파정당과 연정에 참여하며 친시장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에 실망한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등을 돌리고,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극우정당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FT는 분석했다. 지난 5월 치러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당에 밀려 패배한 것이 노동자들의 변심을 방증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인구 1천800만의 최대인구주이자 사민당 텃밭으로, 사민당은 이 지역을 지난 46년간 장악해왔다.
현지분석으로도 독일내 양대정당인 사민당의 존재감이 없어지고 있다는 평이다. 현재 지지율은 20%에 턱걸이고 총선패배는 기정사실이다.
독일경제연구소(DIW)도 최근 사민당 지지층이 블루칼라 노동자에서 화이트칼라 근로자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며 사민당 지지자 중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7%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반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대안당)의 노동자 유권자 비율은 34%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사민당 지지층이 투표권을 포기하거나 노동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포퓰리스트 정파로 옮겨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사민당의 몰락이 슈뢰더부터 이어진 당의 우경화에 의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아닌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련의 좌경화 때문일 수도 있다. 메르켈은 본인이 보수정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난민이나 복지 정책 등에서 사민당과 크게 차이가 없는 정책을 펼치면서 좌향좌했고, 이것이 10년을 훨씬 넘게 안정적으로 독일을 운영해온 메르켈의 리더십과 합쳐지면서 사민당의 존재감이 크게 없어졌고, 결국 굳이 좌파 유권자가 사민당만을 바라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독일인의 전체적인 정치 스펙트럼은 우파보다 좌파가 약간 우세한 것에 비해서[16] 기민/기사련의 지지도가 사민당을 압도하는 것은 기민/기사련이 지속적으로 좌파적 의제도 포함하면서 중도화되는 것에 비해서 사민당은 슐츠의 당대표직 수락 이후로 선명성을 이유로 계속 좌경화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중도좌파 유권자들이 예전처럼 사민당만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제19대 독일 연방하원 총선거에서 대패했다. 출구조사 결과 전후 최저치에 해당하는 20.0%가 나왔다. 마르틴 슐츠를 새롭게 내세워 공격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나, 민심을 돌리는 데 실패했고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메르켈 수상이 연정 협상이 늦어지자 결국 사민당에게 손을 내밀었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중재 하에 대연정을 거부하던 슐츠 당수가 이에 동의하면서 결국 기민/기사와 사민간의 대연정이 시도중이나 현재 상황은 간단치 않다. 일단 대의원 투표는 가까스로 통과했으나 아직도 당내 반발이 거센데다가 연정 합의를 재협상 하라는 의견이 새로 나와서 언제 대연정이 가동될지는 불투명 하다. 사민당의 요구는 난민 상한선 폐지와 의료보험 노동 정책, 증세 등인데 메르켈은 재협상 요구를 즉시 거부했다.
결국 2018년 2월 7일에 사민당이 대연정을 수용하면서 대연정이 꾸려졌다. 기사
2018년 말 현재는 좌파의 헤게모니를 녹색당에 넘겨 주어야 할 신세. 엄청나게 상승세를 타 2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녹색당과 대조되게 지지율 15%대로 추락한 상태다.
3.7. 근황
2019년 유럽의회 총선거에서 득표율 15.8%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17] 2위인 녹색당에게 중도좌파 지지층을 큰 폭으로 빼앗긴 덕분에 독일을 위한 대안과 지지율 3위 자리를 놓고 경합을 펼치는 수준으로 몰락했다. 지속적으로 친난민-좌파 세력을 흡수한 녹색당이 일부 조사에서 기민련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것에 비하면 눈물이 날 수준.
결국 유럽의회 선거 참패로 인해 안드레아 날레스 대표가 사임했다.# 당분간 권한 대행 체제로 운영되며 후임 대표는 12월 8일 선출 예정이다.
대연정에 비판적인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와 자스키아 에스켄 공동후보가 53.0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 결과로 현재의 대연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하여 두 공동대표는 대연정에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이라며 당장의 연정 붕괴에는 선을 그었다.##
당대표 교체 이후로도 녹색당으로 이동한 지지층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좌우 연립내각에 참가하는 사민당에 대한 불만+녹색당 자체의 매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인듯. 기민련-기사련과 녹색당이 1, 2위 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2020년 3월 기준으로 15% 정도의 지지율로 독일을 위한 대안과 3위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다행인 점은 2월 있었던 함부르크 지방선거에서 4석만 잃으며 1당 지위를 지키고 적녹 연정을 유지해 페터 첸처가 시장 직을 지켰다는 것.# 사실 사민당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함부르크에서 진다는 건 사민당이 간판 내려야 된다는 소리랑도 비슷하긴 하다.
2021년 총선 총리 후보로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를 지명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여 적극적으로 재정을 풀어 타격을 최소화시킨 점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2021년 총선도 지금으로선 1당이 되긴 어려워보이는데, 여론조사상 15% 정도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반정부 행보를 보이고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과의 차이는 7%p 정도로 벌렸지만 여전히 녹색당에 밀리는 3위이며 사민당과 녹색당을 합쳐도 기민련·기사련 연합에 근소하게 뒤지고 있어# 이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집권을 위해서는 좌파연립내각(적·녹 내지 적·적·녹)이 아닌 또다시 흑적 대연정을 해야 될지도 모를 팔자다.
4. 역대 선거결과
4.1. 제국의회
1871 3석 3.2%
1874 9석 6.8%
1877 12석 9.1%
1878 9석 7,6%
1881 12석 6.1%
1884 24석 9.7%
1887 11석 10.1%
1890 35석 '''19.8%'''[18]
1893 44석 23.3%
1898 56석 27.2%[19]
1903 '''81석 31.7%'''
1907 ''43석 28.9%''[20]
1912 '''110석 34.8%'''[21]
4.2. 바이마르 하원
1919 '''163석 37.9%'''[22]
1920 ''102석 21.7%''[23]
1924(1차) ''100석 20.5%''
1924(2차) 131석 26.0%
1928 '''153석 29.8%'''[24]
1930 143석 24.5%
1932(1차) 133석 21.6%
1932(2차) ''121석 20.4%''[25]
1933 ''120석 18.3%''
4.3. 서독 하원
1949 131석 29.2%
1953 151석 28.8%
1957 169석 31.8%
1961 190석 36.2%
1965 '''202석 39.3%'''[26]
1969 '''224석 42.7%'''[27]
1972 '''230석 45.8%'''[28]
1976 214석 42.6%
1980 218석 42.9%[29]
1984 193석 38.2%
1987 186석 37.0%
4.4. 독일 하원
1990 239석 33.5%
1994 252석 36.4%
1998 '''298석 40.9%'''[30]
2002 251석 38.5%
2005 222석 34.2%[31]
2009 146석 23.0%[32]
2013 193석 25.7%[33]
2017 153석 ''20.5%''[34]
4.5. 유럽의회
1979 '''35석 40.8%'''
1984 33석 37.4%
1989 31석 37.3%
1994 40석 32.2%
1999 33석 30.7%
2004 23석 21.5%
2009 23석 20.8%
2014 27석 27.3%
2019 16석 15.8%
5. 기타
당사 이름이 빌리 브란트 하우스(Willy-Brandt-Haus)다. 포츠담 광장에서 꽤 가깝다. 독일인이 지은 건축답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전임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상이 있다.
그외 하부조직으로 국기단이 있었다. 정식명칭은 흑적금 국기단인데, 바이마르 시절에는 준군사조직이었으며, 독일 공산당의 적색선전군사동맹과 대립했다.
한국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직후 손학규 의원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고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1] 독일 사회민주당의 비영리 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한국사무소에서 번역한 '사회민주주의의 기초' p.95 1-3줄에서 발췌. 또한 이 문장은 사회민주당의 'Hamburger Programme 2007; 16f'를 토대로 작성되었다.[2] 우리의 역사는 민주사회주의 사상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우리의 핵심가치들은 그 속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시민권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고 모두가 착취, 억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인간적 보장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 국가, 사회질서가 요구된다. 우리에게 민주사회주의는 연대 속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의 비전이다. 민주사회주의의 실현은 우리의 영원한 과업이다. 우리의 행동원칙은 사회민주주의이다(Hamburger programme 2007: 16f).[3] 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는 노동자운동에 친화적인 좌파 내의 굉장히 오래된 논쟁이다. 일반적 좌파이론으로 보면, 당이 주로 정치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을 지향한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이를 지키기 위한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경제투쟁을 지향한다. 당은 정치조직이고 노동조합은 경제조직이다. 사회주의자법이 있을 당시 사회민주당이 군주국가에서 벗어난 법치국가, 의회의 인정, 정당의 합법화 등을 위해 투쟁했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합법화, 임금,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관리감독과 노동시간 준수를 위한 노동입법 등을 주장했다. 물론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표방했고,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를 입법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과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은 노동조합보다는 주로 야학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교양협회를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근갑, 2009.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회민주주주의 기원>, 현대의지성 참고.[4]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도 좌파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찬전여론에 적극 동참했다. 예외가 당시에 러시아 좌파 내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했던 레닌 그룹 정도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쟁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러시아 공산세력은 "제3인터네셔널"로 계승을 주장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 연방을 차린 후 코민테른(국제 공산주의자회)을 차리면서, 공산주의의 주도권은 소비에트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독소전쟁을 통해 코민테른 역시 러시아의 일국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획일적으로 위성국에 하달하는 위계조직이 된다. 현실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5] 바이마르 체제에서 의회 지지 없이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존해 유지되는 내각. 뮐러 내각 붕괴 이후 나치 독일 성립 이전까지 있었던 브뤼닝 내각이나 파펜 내각, 슐라이허 내각, 그리고 히틀러 내각이 대통령 내각이었다.[6] 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나치당에 의해 희생당한 사민당 정치인으로는 쿠르트 슈마허가 있다. 그는 나치 치하시절 내내 강제수용소에 복역하면서 매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빌리 브란트 역시 나치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스웨덴으로 망명.[7] 워낙에 연합군에 대한 비타협 노선을 견지한터라 심지어 독일 신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독일 민중의 기본권 추가 확대를 주장하며 반대표를 행사하라고 당원들에게 종용할 정도였다.[8] 쉽게 말해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연합군들의 똘마니(...)라는 비칭이다.[9] 선거 결과 사민당이 개별 정당 중엔 1위를 차지했지만(131석), 기민-기사-자민(CDU/CSU-FDP) 연정에 보수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당이 합류해 정부를 구성(208석), 사민당은 야당으로 남고 말았다.[10] 1961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으로 베를린 장벽이 촉발한 위기 탈출을 위해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서베를린으로 초대하고 군사 지원 약조를 받는 등 대활약했고 그 덕분에 국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11] 당시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의 집권 실패 이유를 단순히 기민련의 매카시즘과 서독 국민들의 레드 컴플렉스 때문만이 아니라 수권경험 부족에 따른 국민들의 외면이 크다고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정확했다.[12]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로 불리는 그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가 이 소식을 전하며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13] 76년에는 경제 실적 부진을 개인의 토론 능력으로, 80년에는 개인의 인기 하락을 경제 실적으로 만회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14] 사실만 놓고보면 선거 결과는 사민당-녹색당의 적녹연정과 기민련-기사련-자민당의 흑황연정 중 그 누구도 연정으로 과반을 만들지 못하는 무승부에 가까웠다.[15]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 통일당의 후신인데, 슈뢰더와 불화를 빚던 정통좌파 오스카 라퐁텐 파가 사민당을 탈당한 뒤 이 당과 합쳐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열렬히 디스하고 있어 서로 적대하는 사이였다.[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1&aid=0002852644&viewType=pc[17] 무려 1887년 독일 제국의회 선거 이후 132년만에 기록한 사민당 최저 득표율이다.[18] 득표율 1위 기록 원내 4당[19] 원내 2당 등극[20] 원내 4당[21] 원내 1당 등극[22] 집권[23] 1890년 이후 최저득표율[24] 집권[25] 1890년 이후 최저득표율[26] 최다득표율 기록 경신,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기민/기사련과 연정[27] 자민당과 연정[28] 역대 최다득표율[29] 1982년 자민당의 이탈로 정권상실[30] 정권교체, 역대 최다의석, 녹색당과 연정[31] 기민/기사련과 연정[32] 정권상실[33] 기민/기사련과 연정[34] 전후 최저 득표율, 기민/기사련과 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