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드노트(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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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MS 드레드노트(Dreadnought)는 1906년에 취역한 영국의 전함이다. 1905년에 착공. 당대의 혁신적인 전함으로, 드레드노트급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형태의 전함들을 유행시켰다.
2. 드레드노트급과 노급
일본과 한국에서 통용되는 노급이라는 명칭은 당시 일본이 드레드노트를 "ドレッドノート(도렛도노-토)"라고 부르거나 앞 글자만 따서 ド급(도급)이라고 부르는 데 일본어에서 해당 발음이 나오는 한자 중에 하나인 弩를 붙여서 만든 것. 결과적으로 노급은 드레드노트급과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
3. 제원
4. 상세
드레드노트란 이름의 유래는 Dread(공포, 두려움) + nought(없음, 없다)의 두 단어를 합친 것으로 "두려울 것이 없는 (자)"란 뜻이다.[1] 이후로 '매우 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드레드노트라는 이름이 붙은 배는 이 전함이 처음은 아니며, 1573년 영국(잉글랜드 왕국)에서 41문의 대포를 가진 갤리온 '드레드노트(Dreadnought)'가 건조된 이후 계속 함명이 이어졌다. 드레드노트란 이름의 함 목록은 드레드노트 문서를 참고할 것. 해군 함정의 경우 기존 함선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흔하다.[2]
기본적으로 이 배에 요구되었던 것은 다음의 3가지이다.
- 화력 측면에서, 주포를 단일 구경으로 통일하고 최대한 많은 포문을 한 함정에 탑재함으로서, 동일한 탄도를 가진 화포 다수를 동시에 같은 사격제원으로 발포, 일정한 탄착을 형성케 함으로서, 명중률이 극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곡사를 통해 가능한 한 원거리에서부터 명중탄을 내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부포[3] 를 폐지하고 그렇게 얻은 여유 부력 및 공간으로 주포의 문수를 최대한 늘린다.
- 아울러 이와 같은 화력의 우위를 기본으로 하고, 자함이 상정한 표준적인 교전거리 내에서는 적어도 자기 자신의 화력에 대해 확실한 방어력을 확보함으로써 절대적인 생존성을 확보한다.
- 마지막으로, 당시 최첨단 설비였던 증기터빈을 주 동력으로 탑재하여 충분한 고속성능을 확보한다. 이를 통해 21노트의 고속을 달성했는데, 이전 구형전함의 16~18노트에 비해 크게 우위였고, 한 체급 아래인 장갑순양함과 비슷한 속도였다.
물론 반대도 많았다. 일단 드레드노트 급의 전함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전함보다도 거대하고 비쌌거니와 그 효과 역시 분명치 않았으며[8] , 무엇보다도 '''그동안 존재했던 구식전함 전체를 완전 도태시키는 결과'''를 불러서, 장차 외국과의 군비경쟁에서 '''둘 다 제로로부터 시작하거나, 고작해야 두세 척 차이로 시작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9][10]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급의 전함은 해군경 피셔 제독의 강력한 오퍼에 힘입어 실제로 건조되었고, 최초 기대대로 등장과 동시에 전드레드노트형 전함, 당시까지 표준전함이라고 불리던 전함 전체를 일시에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의 건함 경쟁은 바로 이 드레드노트의 컨셉을 이어받은 드레드노트형 전함의 보유 척수에서 벌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배 자체는 등장 후 단 몇 년 만에 같은 컨셉의 훨씬 거대하고 강력한 전함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그 가치를 잃어, 1차 세계 대전 당시엔 이미 2선급 함정이었다. 물론 수훈 자체는 없지 않아서, 1915년 3월 18일에 독일 해군의 잠수함 U-29[11] 을 '''들이받아 격침'''시키는 수훈을 올렸다. 이는 1차 세계 대전에서 전함이 잠수함을 격침시킨 유일한 사례이다.[12] 이를 제외하고는 1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전 드레드노트형 전함만으로 구성된 제3전함전대의 기함으로서 활동하였으며, 종전 후인 1919년에 퇴역했다.
이후 예비함으로 돌려졌고 1923년에 해체되었다. 건함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중요한 전함이라 HMS 빅토리[13] 처럼 영구현역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념으로 보존할 수도 있었지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주력함 총톤수의 제약이 생기면서 보존이 불가능[14] 해졌다. 디스커버리에서 뽑은 최고의 10대 군함에도 들지 못했다… [15]
추가하자면 일본군 해군의 공고급 순양전함이 영국에서 제작된 것이기에 슈퍼 드레드노트급으로도 분류가 가능한데 아무튼 공고급의 도입 이후에 일본 해군은 대부분 드레드노트급을 기초로 전함을 설계했고 일본 해군 전함 테크트리의 최상부 야마토급 전함 역시 이 영향을 받았다.(물론 미국도 비슷하지만…)
5. 흑역사
1910년 2월 7일, 전함 드레드노트는 (당시 외무부 차관이었던) 찰스 하딩 명의로 된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전보의 내용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 온 일군의 왕족들이 드레드노트를 견학할 예정이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흑인으로 분장한 가짜였는데, 이 그룹의 리더는 이전부터 장난꾼으로 유명했던 호레이스 드 베르 콜이었고, 그 중에는 나중에 유명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될 버지니아 스티븐[16] 도 남장을 하고 끼어 있었다. 콜은 외무부 관리로 위장했고 버지니아 울프의 남동생 애드리언은 독일인 통역, 울프 외 3인이 아비시니아 황족으로 분장했다.
이들은 잔지바르 국기가 걸리고 군악대가 잔지바르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17] 드레드노트를 견학했다. 견학도중 이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섞어서 급조한 엉터리 언어로 말했고, 방문용 명함은 스와힐리어로 인쇄했다. 함내를 둘러보면서는 경탄의 표시로 '붕가붕가!' 하는 감탄사를 외쳤다고 알려졌다.
이때 드레드노트의 함장은 윌리 피셔 대령이었는데, 피셔 함장은 일행 중의 버지니아 울프 남매와 사촌지간이었지만 두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해군은 한동안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단단히 굴욕을 당했다. 영국 해군은 이들을 고발했지만 법원에서는 이들이 아무런 법도 어기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방면했다.
1915년, 1차대전 중에 드레드노트가 독일 잠수함 U-29를 들이받아 격침했을 때, 드레드노트로 수신된 축전 중에 'BUNGA BUNGA' 라고 쓰여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뜻이 거의 같은 Fearless 역시 영국 해군의 함정이름으로 쓰인다.[2] 잘 알려진 예 중 하나는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 사실 미 해군 최초의 엔터프라이즈는 사실 영국 선박으로 이를 노획한 미국이 그대로 쓴 것인데 영국에도 엔터프라이즈가 보조함명으로 계속 쓰이고 있다.[3] 부포라는 표현에서 자칫하면 드레드노트 이후 전함들의 부포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과는 다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포는 이때까지의 전함에서 28~30cm급 주포와 함께 탑재한 15~20cm급 함포들을 말한다. 대구경 화포는 충분한 명중률 및 발사속도를 얻을 수 없어서,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속사성능 및 위력 면에서 주포를 보조할 수 있는 중구경 함포를 다수 탑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는 이 부포를 가리켜 중간포 또는 중구경포라고도 한다. 여기에 근접전에 쓸 속사포가 따로 탑재되므로, 예전까지의 전함은 수상함과의 교전 목적 하나만으로 3가지 함포를 탑재했다.[4] 범선시대로부터 항공모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역사적인 인물.[5] 이는 러시아와 일본 해군이 벌인 동해-대한해협 해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한 후에 분석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6]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당시 황제 빌헬름 2세의 적극적 지원하에 해군력을 대폭 증강하고 있던 독일과의 해군력 경쟁 가능성 대두였다.[7] Pre-Dreadnought. 드레드노트가 출현한 후, 바로 전단계의 전함을 드레드노트와 구분짓기 위해 사용하던 개념.[8] 특히 이 전함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인 '''단일 구경의 주포 다수에 의한 원거리 교전'''은 전드레드노트형 전함으로 이를 시도해본 일본 해군 및 이를 관전한 영국 해군 관전무관단에 의해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와 있었다.[9] 독일과의 경쟁을 예로 들면, 1906년 시점에서 영국과 독일의 전드레드노트형 전함 보유 숫자는 10:1에서 시작해서 5:2 정도까지 따라잡힌 상태였지만,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아직 1:0이었다. 독일이 지금까지 전드레드노트형 전함을 건조하던 페이스대로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산업생산력에서 영국을 거의 따라잡고 있었던 독일이 영국과 거의 같은 규모의 주력함대군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었다….[10] 그런데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건조할 때 미국은 이미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을 건조하고 있었고 일본도 사쓰마급 전함의 설계안으로서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설계한 적이 있다. 따라서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지 않았어도 드레드노트형 전함은 나타날 운명이었기에 후일의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건조하면서 한 발 앞서나간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11] 함장은 오토 베디겐. 1915년에 단독으로 영국 순양함 3척을 몇 시간만에 격침시켜 일약 영웅이 되었던 함장이다. 후에 나치 독일이 칼 되니츠를 중심으로 잠수함대를 재건하면서 처음 창설했던 잠수함 전단에도 배디겐의 이름이 붙었다.[12] 이외에 미국 전함 뉴욕도 독일 잠수함을 들이받아 격침시킨 사례가 있다.[13]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넬슨의 기함[14] 일본이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미카사를 기념함으로 보존할때도 시끄러웠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은 끝까지 주장해서 미카사를 기념함으로 보존하게 되었지만 유사시 현역으로 써먹지 못하게 선체주변에 아에 콘크리트를 부어야 했다...[15] 사실 기념함으로서 보존이 가능했으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후드를 살리기 위해 포기한다. [16] 결혼 후 성이 바뀜[17] 워낙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방문이라서 아비시니아 국기/국가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