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르 해전

 

▲ 트라팔가르 해전 기념화[1]
'''트라팔가르 해전
Battle of Trafalgar '''
'''날짜'''
1805년 10월 21일
'''장소'''
트라팔가르 곶
'''원인'''
영국의 나폴레옹 해군력 분쇄 시도.
'''교전국'''
영국
<^|1>프랑스 제1제국
스페인
'''지휘관'''
호레이쇼 넬슨 제독†
커스버트 콜링우드 제독
피에르 빌뇌브 제독
그라비나 제독†
'''병력'''
기함 HMS 빅토리
기함 뷔생토르
<^|1>27척
프랑스: 18척
스페인: 15척
'''피해'''
전사자 449 명
부상자 1,246 명
1척 침몰
21척 나포
'''결과'''
프랑스 - 스페인 연합함대의 참패.
대영제국[2] 해군의 압승.
1. 개요
2. 배경
3. 전투
3.1. 르두터블빅토리의 혈전
3.2. 전투의 종료
4. 결과
5. 전투의 영향
6. 이후
7. 창작물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호레이쇼 넬슨의 깃발 신호 문장

마스트가 버틸 수 있는 한 을 더 펼쳐라.

좀 더 근접하여 교전하라(Close Action).

호레이쇼 넬슨의 깃발 신호 문장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해전 후 호레이쇼 넬슨의 마지막 유언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서쪽의 트라팔가르 곶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프랑스 해군-스페인 해군 연합함대의 결전. 보통 국내에선 트라팔가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범선 시대의 마지막 대해전이자, 영국의 막강 해군력 신화를 대표하는 전투들 가운데 하나다. 한편으로는 영국이 자랑하는 대제독 넬슨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했다.
영국을 공략하려던 나폴레옹의 의도가 이 해전의 패배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는 내용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전투의 배경과 결과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좀 더 자세한 전개나 결과를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를 참조하면 좋다.

2. 배경


이미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마지막 장애물 영국을 박살내고자 했다. 1803년 영국은 바로 전 해 체결된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고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였다. 또한 영국은 지상군 전력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끌어들였다. 일명 오스트리아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시작이었다.
선전포고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권을 가로막는 마지막 방해물인 영국을 박살내기 위해 1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새로 편성하여 영불 해협과 접한 불로뉴 해안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해협 건너편인 영국에 상륙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을 와해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봉쇄를 뚫고 영국 해군을 와해시킨다는 것은 프랑스의 해군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은 천재적 전략가인 나폴레옹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전부 섬멸할 필요까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 군대를 상륙시키는 데 필요한 6시간을 포함해서 '''딱 24시간''' 동안의 영불 해협의 제해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불 해협을 방어하는 영국 해군을 섬멸하고 24시간 동안만 영불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으면 6시간 안에 18만 명의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상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상전에서 그때까지 불패를 자랑하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나폴레옹 본인의 몫이었으므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이른바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이어서 후반기 보여주는 판단착오나 실수는 거의 없었다.[3] 반면, 대불동맹군은 아직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털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 해군의 임무였다. 나폴레옹은 해군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동맹국이 된 스페인 함대까지 끌어들인 후에 연합 해군으로 하여금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함대를 유인하여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후, 영국 해군 함대가 분산된 이후에 프랑스 해군함대를 집결하여 영국 해협함대를 상대하며 영불해협에서 수송함대가 무사히 해협을 횡단할 시간을 벌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해군에 정확한 시간에 육군식으로 맞추는 요구를 했는데, 범선 시대에 해군이 그런 정확한 타임테이블을 맞출 수는 없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가장 경험많고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에게도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한 요구였다. 물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함대를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후에 시간을 끈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전열함이라는 전함들의 특성과 바다 기후의 특성을 간과한 것은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게다가 이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해전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었던 제독인 트레빌이 갑자기 사망한 것. 트레빌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영국 해군을 격파한 적도 있고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아이티 쪽에 프랑스군을 보내는 임무에서도 중추를 맡아 잘 수행하기도 하는 등 경험있던 제독이다. 무엇보다 항구에서 방어한 것이기는 해도 넬슨을 막아낸 적도 있었는데 1804년에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4] 이 공백을 채워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나폴레옹도 한참 고민했으며, 급기야 나폴레옹은 후보 3명을 비서에게 언급하며 누가 제일 나은지 묻는다(...). 비서는 패전이긴 해도 해전 경험이 있기는 했던 빌뇌브를 선택했으며[5] 결국 빌뇌브가 툴롱 함대 및 연합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넬슨의 느슨한 포위망을 뚫고 출발하게 된다.[6]
그래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무사히 카디스 항에 도착하여 그라비나 제독의 스페인 함대와 합류하였고, 1805년 4월에 서인도 제도를 습격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지중해에 있던 호레이쇼 넬슨은 황급히 서인도 제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빌뇌브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귀환하던 중 칼더 제독의 영국군 함대와 만나 교착에 빠졌다(피니스테리 곶 해전. 1805. 7. 22). 그리고 자신의 연합함대의 부족한 실력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자신없던 빌뇌브는 영불해협으로 항진하지 않고 카디스로 대피했다. 이 순간에 이미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image]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피니스터리 곶에서 빌뇌브의 연합함대를 격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빌뇌브의 함대가 카디스에 박혀 있던 사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라인 강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주둔 중이던 영국 진공군을 라인 강 방면으로 돌렸다. 사실상 영국 진공을 포기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진공을 위해 단단히 훈련시켜 두었던 이 군대를 십분활용해 대륙에서 동맹군을 탈탈 털어버린 후 빌뇌브에게 이탈리아 공격을 위한 육군 수송을 지시하며 나폴리로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넬슨의 함대가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스페인 주력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애초에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함대 실력 수준을 잘 알았던 빌뇌브는 함대 수리 및 보급문제로 출항을 보류 중이었으나[7] 여기에 크게 화가 난 나폴레옹 1세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항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필 이날은 카디스 항 앞바다의 바람이 약하고 파도가 높은 날이었다. 잠시후 서로 마주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 함대는 교전에 들어간다.

3. 전투


[image]
트라팔가르 해전 상황. '''붉은색 화살표'''가 돌격하는 영국 함대. 오른쪽의 '''푸른색 선박'''은 프랑스 함선, '''검은색 선박'''은 스페인 함선이다.
10월 20일, 카디스를 출항하여 항해하던 연합함대의 시야에 대규모 전열함들로 구성된 함대가 포착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였다. 영국 함대는 전열함 27척과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프랑스는 전열함 18척과 프리깃 8척, 스페인은 전열함 15척으로 함대를 구성한 상태였다.
양군이 서로 대치 중이던 10월 21일, 넬슨은 '''잉글랜드는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8]는 메시지를 깃발 신호로 보낸 후, 선제포격과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진형 한가운데를 돌파하여, 단종진을 이룬 채로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전투 현장에서의 숫적 우위를 확보하여 각개격파하고자 했다. 이 전술에 연합함대는 삽시간에 분단되어 전투지휘가 이루어지지 않고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한 채 개별 선박 단위로 저항하다 격파당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당시의 해전 양상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이야 바다 어디서든 구축함의 미사일 시정거리 안에 들면 버튼 눌러서 미사일 쏘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물론 배의 형태 자체는 지금과 같은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은 형태지만, 무기가 그냥 '대포'였다. 이런 대포들은 포탄이 그냥 쇳덩이라, 쏘면 포탄이 다른 배에 맞고 폭발하지 않고 그냥 나아가던 방향대로 쭉 나가서 다른 배를 관통하는 방식이었다.[9] 또한 배의 형태상 함선의 앞뒤에는 포를 별로 놓지 못하고 좌우에만 많이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전후와 좌우의 화력차이가 극심했다.
따라서 내 함선의 측면을 얼마나 오래 다른 배로 향하게 할 수 있는지가 포격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첫번째 조건이었다. 상술했듯이 함선의 전후면은 화력이 매우 부족하고, 측면의 화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당시 포격전은 '내 배의 전후면은 절대 내주지 않고, 측면만 내줘서 대포를 맞더라도 나도 그만큼은 쏜다.'라는 전략이었다. 그래도 간혹 배와 배가 평행이 아니라 직각으로 만나서 한 쪽이 신나게 얻어맞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는데, 이런 배치는 '종사'(Raking)대형이라고 한다. 즉, 일반적으로는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넬슨의 함대가 어느 지점에서 배를 돌려서, 프랑스+스페인 함대와 평행하게 선 다음 대포를 쏘는것이 당시의 해전 양상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영국 해군과는 다르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포격에 있어서도 '함체'가 아니라 '돛대'쪽을 쏘도록 훈련했다. 전열함의 돛대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거대한 하나의 나무가 아니라, 큰 통나무 두 세개를 이어붙인 형태였고,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에 밧줄로 선체에 고정하는 형태였다. 흔히 전열함하면 생각나는 그 치렁치렁한 밧줄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바람에서 돛대를 덜 흔들리게 하려고 연결해 놓은 것이다.
어차피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전열함을 보면, 선체보다는 돛대가 더 크게 보이고, 선체에 구멍이 나면 병사들이 어떻게든 수리를 하여 전투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지만, 돛대를 맞추면 전열함이 그 자리에 서 버리기 때문에 훨씬 전투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당시 함선들은 장교들과 선원들이 많은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기동하기 힘들었고, 함대전에서 일단 난전에 돌입하게 되면 당시의 신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되어 그냥 일단 적 배에 쏘고보는 전투가 일상이었다. 따라서 선원들의 숙련도나 장교들의 경험과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가능하면 난전을 피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구성한 채로, 즉 단순하고 정적인 기동만을 하면서 큰 변화가 없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넬슨의 신묘한 전략적 사고가 발동한다. 영국 해군은 장대한 역사를 가진 반면, 프랑스 해군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스페인이야 아르마다가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 모인 연합함대 선원들의 항해나 포격실력은 영국 해군보다 미숙했다. 그래서 넬슨은, '''종사를 당하더라도 어차피 쟤네들은 많이 못 맞출거 같으니까, 일단 치고 들어가서 우리가 종사를 퍼붓자'''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전술교범과 반대되는 작전을 구상한 것이다.
영국 해군이 약 1.6km의 거리를 두고 11자로 자기들한테 돌진하는 것을 본 연합함대 함장들은 처음에는 저게 뭐하는거지 의아해 하다가도, 바보는 아닌지라 넬슨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생전 처음보는 전술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어 일단 상대의 돛대를 향해서 대포를 쏘긴 했지만, 포격 실력이 부족해서 명중탄을 거의 맞추지 못했다. 실제로 전열의 최선두에서 연합 함대를 치고 들어간 로열 소버린 호는 상대에게 종사를 허용했음에도 고작 10분만 포격을 받았다.
이렇듯 영국 함대가 전열 가운데를 완전히 쪼개고 들어오면서 종사를 당하게 된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이렇게 영국 함대가 이전의 상식인 단종진과 전열전술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 원래 영국은 전열전술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함대 운용을 한 나머지 미노르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이때 희생양으로 책임자인 빙 제독을 처형한 뒤, 이 전열 전술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하다 대안을 한가지 제시되었다. 리처드 하우 제독이 고안한, 전열을 유지하되 상황에 따라 약간은 융통성있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크게 개선된 교전법으로, 이걸 그외에 다른 제독들이 연구하여 만들어낸것이 후에 '넬슨 터치'라고 이름이 붙는 중앙 돌파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적인 신호체계와 함대 운용교리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중앙 돌파 전술은 난전시 깃발에 의한 신호가 무력해지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전열내에 적함이 없으면 마냥 노는 게 아니라 지시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아군함을 지원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짜여졌고, 트라팔가르 해전 전날, 넬슨 제독은 각 함선의 지휘관들을 모아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며 그 때문에 해군성에서 함장들에게 따지면 언제나처럼 자신이 모두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였다. 이 중앙 돌파 전술이 채택되자마자 해전의 양상은 아군함 2척이 적함 1척을 사이에 끼고 두들기는 양상이 자주 보이게 된다.
물론 전열 전술이 전혀 쓸모없어졌다거나 영국 함대가 전열 전술을 전혀 사용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전열 돌파 전술은 어디까지나 트라팔가르 해전같이 훈련도와 조직력이 떨어진 함대 상대로는 유효하지만 전열이 제대로 구성된 함대를 상대로는 오히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한 예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영국 함대의 로드니 제독은 전열 돌파 전술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 최고의 방어전 전문가인 드 기생 백작이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굳건한 전열을 유지하는 방어적 전열 전술을 구사하자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열함들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당시 드 기생 백작은 영국 함대측에서 전열 돌파를 시도할 상황에 대한 대응법이 적힌 교전수칙을 모든 함장들에게 제공하고 그에 대한 훈련과 설명도 충분히 시행해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당시에는 프랑스 해군의 수병들 훈련이 대단히 잘 되어있었던 것도 프랑스 함대가 크게 활약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유능한 해군 장교들을 잃었고 새로이 그 자리를 메꾼 나폴레옹의 하수인들은 대규모의 함대를 운용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넬슨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채긴 했어도 조함술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함량 미달이었기에 궤멸을 피할 수 없었다.
[image]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빌뇌브 제독이 탑승했던 기함인 토낭급 80문 2단층 전열함 뷔생토르(Bucentaur) 호의 모형. 뷔생토르는 전투 초반 빅토리의 포격으로 대파되어 기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3.1. 르두터블빅토리의 혈전


그 와중에 프랑스 74문 전열함 르두터블(Redoutable)이 영국함대 기함 HMS 빅토리에 접현, 돌격해 오면서 백병전투가 벌어졌다. 함선의 덩치나 승무원 숫자로는 배가 크고 갑판이 높은 빅토리가 압도했으나, 르두터블은 이때 당시 프랑스 함대 승무원 중 가장 정예인 수병들을 태우고 있었고, 르두터블의 함장인 장 자크 에티엔 루카스(Jean Jacques Étienne Lucas)는 카디스에 숨어있는 동안 포격전으로는 영국 함대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열심히 머스킷 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 선상 백병전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육박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선상 백병전이란 개념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연결해서 구식 전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19세기 초 당시의 유럽 해군도 100% 포격전만으로 전투를 치루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시의 화포로도 함선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어려웠다. 일방적인 포격을 가해서 격침 직전까지 가게 할 정도의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적함의 점령 및 포로 나포를 위해선 결국 적함으로 직접 뛰어드는 백병전이 필요했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당시 프랑스-스페인 해군의 전체적인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르두터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기간에 열심히 훈련을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선상 백병전 능력이라도 향상시켜서 비교우위를 점하자는 게 루카스 함장의 판단이었고, 이 판단은 적어도 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선 매우 유효했다.
실제로 백병전에 들어가자 빅토리의 수병들은 상갑판에 모여있다가 르두터블에서 가한 집단 수류탄 투척 공격에 200개 이상의 수류탄이 거의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수병들 수십 명이 짐짝 던져지듯이 나가 떨어졌다. 여기에 르두터블의 마스트 위에서 가해지는 머스킷 소총사격에도 피해가 막대했는데, 넬슨 제독도 마스트 위에서 사격하던 저격수에 피격당해 그 부상으로 해전 종료 직후에 전사하였다. 넬슨의 전사 원인은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 함장이 적극적으로 수류탄 투척 훈련과 장루 머스킷 사격훈련을 시킨 것도 있지만 넬슨이 장루 사격[10]에 의한 화재를 염려하여 장루사격을 금지한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일로 배를 잃은 일은 없었기에 자기 손발만 묶은 대 뻘짓. 거기다 부하들이 저격을 염려해 수수한 제복을 입도록 권유했지만 그를 거절하고 늘 입던대로 금실장식에 훈장이 여럿 달아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고, 결국은 장루 저격수에게 저격당했다. 각종 기록화에서는 빅토리의 함장과 장교들이 갑판에 쓰러진 넬슨의 주위에서 그의 임종을 지키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갑판 밑으로 후송되고 난 뒤 몇 시간 후에 사망했다. 실제로 저랬으면 당시 전투 상황을 보자면 유언을 제대로 말하기 전에 추가로 몇 발 더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빅토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라서 달라붙은 르두터블에게 죽어라 포격을 해댔지만 배들끼리 너무 가까이 붙어 빅토리의 3층 갑판이 더 높은 상태에서 턱밑에 붙은 르두터블의 상갑판을 포격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르두터블은 초기에 포격을 하다가 빅토리가 가까이 오자 포문을 닫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수병 대부분을 갑판과 돛대에 집합시켰기 때문에 르두터블 선체 내부에는 수병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빅토리의 강력한 포격에도 선체 내부의 사상자는 거의 없었으며 이렇다 보니 백병전에서 병력의 숫자도 르두터블이 앞서게 되었다. 빅토리가 전체 승무원은 800명 이상으로 르두터블보다 200명 넘게 더 많았지만 함포사격하는 운용인원들 때문에 빅토리의 갑판 위에는 300명 정도의 수병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수병이 갑판에 집결한 르두터블보다 백병전이 가능한 병력에서 열세였다.[11] 그래서 르두터블이 정말로 빅토리를 나포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영국 해군은 다 이긴 전투에서 기함이 함락당하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꼴이 벌어질 대 위기였다.
그러나 함대전에서 한척의 힘만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이라, 뒤따라오던 98문 전열함 HMS 테메레르의 일제포격 한방에 등선육박전을 준비하던 르두터블의 수병들은 말 그대로 대부분 전멸당하고 만다. 무려 수병 손실률 81%!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포격 한방에 상갑판에서 대기하던 수병 200여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르두터블의 정원은 643명이고 전투 후 전사자가 300명, 부상자가 222명이다. 참고로 프랑스-스페인 함대에서 르두터블을 제외한 가장 높은 손실률을 보인건 아킬레스의 64%, 영국 함대의 경우 벨레로폰의 35%가 가장 높은 손실률이었다. 이렇게 큰 손실을 기록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르두터블 수병들이 최후의 저항으로 테메레르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사격을 하며 강력히 저항한 탓에 테메레르에서도 흔히 알려진 것보다 의외로 사상자가 다수 나왔다. 거기에 르두터블에서 던진 수류탄 한개가 테메레르의 탄약고 안까지 굴러들어가 근처에서 폭발해 운이 없으면 테메레르의 탄약고에 불이 붙어 화재가 번지고 폭발할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르두터블 수병들의 투지는 아직 살아있어도 르두터블은 배 자체의 모든 펌프가 완전히 박살나고 침수가 심해져 배가 더 버티지 못할 상황이 되었고, 루카스 함장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테메레르에 항복한다. 이후 빅토리에서 르두터블로 넘어간 영국 수병들이 제일 먼저한 일은 펌프로 달려가 물 퍼내는 걸 돕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르두터블이 너무 많이 두들겨맞아서 르두터블의 자체 승무원으로는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으며, 당시 적선을 나포하면 나포 포상금이 많이 나왔지만 침몰시키면 보상금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랑스 전열함들은 같은 대포 문수의 전열함일 때 영국제 전열함보다 배가 더 크고 여유있으며 더 튼튼했기 때문에 사람만 많이 달라붙으면 침몰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리고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는 항복한 사실에 대해서 양측 모두에게 전혀 비난받지 않았다. 74문급 전열함 한 척으로는 106문함인 빅토리와의 1대1조차도 힘든데 98문함 테메레르의 협공까지 당한 이상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 오히려 빅토리와 테메레르 2척이 협공하고도 르두터블에게 진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르두터블보다 크고 강력한 함선 두 척을 상대로 분투하고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명제독인 호레이쇼 넬슨을 전사[12]시켰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르두터블 한 척으로 엄청난 이득을 봤다고 칭찬을 해줄 일인 것이다. 이후 포로 교환으로 귀국한 루카스 함장은, 비록 불가항력으로 패배했으나 최선을 다해 싸웠고 넬슨 제독을 전사하게 한 전공을 인정받아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일설에는 루카스 함장이 훈장을 받은 후 해군성에, 살아남은 르두터블의 승무원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는 말도 있다.
여담이지만 루카스 함장은 나중에 바스크 로드 해전에서도 74문 레굴러스(Regulus) 호의 함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는데, 배가 좌초되었는데도 기울어진 배에 새로 구멍을 뚫어서 포를 쏘는 기지를 발휘하며 화공선의 공격을 막아내고 배를 다시 항해할 수 있게 만들어 해군 내에서 또다시 전공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의 완전 퇴위 후에 은퇴하고 지내다 병으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루카스 함장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루카스 함장의 옛날 부하들은 물론이고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한 영국 수병들도 일부나마 함께 했다고 한다.

3.2. 전투의 종료


하지만 르두터블의 저항은 말 그대로 혼자만의 분투에 불과해서 전세를 뒤집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프랑스 해군의 74문 전열함 푸귀에가 같은 74문 전열함인 르두터블을 구하러 테메레르에게 포격을 하면서 다가오며 싸우다가 결국은 98문함인 테메레르에게 화력에서 밀려 나포되는 등 다른 연합함대의 군함들이 전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별적으로 저항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초반의 돌격 이후에도 한동안 연합함대의 저항이 후부 대열을 중심으로 해서 지속되었고, 영국 군함이 크게 파손된 사례도 존재하지만, 돌격으로 인해 빌뇌브 제독의 기함인 80문급 2단층 전열함 뷔생토르가 초반에 빅토리의 포격에 완전히 불구가 되어서 행동불능, 전투불능에 신호까지 올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전열을 돌파당한 초전부터 연합함대는 제독의 지휘에서 이탈한 오합지졸이 된 것이다. 특히 단종진 선두에 있던 약 30% 정도의 함선들은 중앙과 후부 대열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파악도 못하다가 뒤늦게야 함선을 돌려서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던 데다가 중앙과 후부의 전황이 자신들의 패배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귀신같이 깨닫고 곧바로 후퇴한다. 총 네 척이 살아서 후퇴했고, 그 중 하나가 뒤에 설명할 장수만세 뒤게트루앵이다.
이렇게 해서 16시 30분을 기해 사실상 연합함대의 조직적 저항은 소멸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넬슨은 전사했다. 전투는 17시를 기해 종료되었으며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말 그대로 전멸했다.

4. 결과


영국 함대의 선박 중 격침된(다만 콜링우드 전대에서 선두에 선 전함 몇 척은 큰 손상을 입었다) 함선은 단 한척도 없었던 반면,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합쳐서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을 나포당하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나포한 함선의 태반은 곧이어 들이닥친 태풍에 의해 침몰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크게 증강되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당시 최대의 화력를 자랑하는 전열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손실은 영국도 아까워했다. 르두터블도 이 때 침몰했다. 여담으로 나포 선박 중 유일하게 해피 엔딩을 맞이한 선박도 있었다. 스페인 함선이었던 알헤시라스(Algesiras)에 탑승했던 영국 해군의 나포조 수병들은 폭풍우가 너무 심해서 자신들만으로 함선을 운용할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갑판 밑에 수감했던 스페인 승무원들을 석방해야 했다. 당연히 이 스페인 승무원들은 배를 조종해 카디스 항구로 도망쳤다. 그나마 카디스에 입항한 뒤엔 영국군 나포조 수병들을 포로로 잡지 않고 영국 측에 인계해줬다고 한다.
[image]
커스버트 콜링우드 경의 동상. 그는 넬슨이 전사하자 함대의 지휘권을 넘겨 받아 폭풍 속에서 함대를 보존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게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대손실을 가려주지는 못한다. 일단 격침당하거나 침몰당한 함선을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탈출에 성공했다지만 양국은 3,238명이 전사하고 2,53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8,000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더 뼈아픈 상처였다. 함선이야 다시 건조하면 되지만 숙련된 선원은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프랑스 함대나 스페인 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의 선원 숙련도보다 크게 떨어지는 선원들로 함대를 구성해야 했다. 포로 중에는 함대 총사령관인 빌뇌브 제독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석방된 후 3개월이 지나 어느 호텔방에서 점심 식사 후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했다.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을 했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의 나이프는 육류를 썰어먹기 좋게 끝이 뾰족한 식칼에 가까웠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더욱이 타살설은 식사용 나이프로 굳이 자기 심장을 찌를 필요가 있느냐는 심정적 정황만 있을 뿐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승리한 것 자체는 사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숫자는 많았지만 선원들이나 장교들이나 거의 경험을 쌓지 못해서 질적으로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해군 승무원과 연합함대의 숙련도를 비교해보면 질적 차이가 확연히 나는 것이 대포 사격술만 해도 영국 해군은 1분에 1발씩 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프랑스 해군은 2분에 1발, 스페인 해군은 프랑스 해군보다 더 심해서 3~4분에 1발을 쏘는 등 뒤떨어지는 숙련도를 보였다. 근거리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던 당시인 만큼 명중율은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영국 해군은 똑같은 포문이어도 상대방보다 3~4배 높은 화력을 낼 수 있었다는 소리이다. 대포의 점화방식도 차이가 나서 영국은 부싯돌, 프랑스의 경우 심지를 사용한 탓에 함선이 흔들거릴 때의 발사 명중률은 격차가 더 컸으며, 사격교리마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당시 영국은 풍상에서 선체 사격을 선호했고, 프랑스의 경우 풍하에서 돛대 사격을 선호했는데, 전자는 선체를 직접적으로 타격, 후자는 마스트와 상부 구조물을 노려 전체적인 전투력 저하를 유도하는 식이었으나, 당시 대포의 정밀도를 보면 전자가 제일 효율이 높았다.
단, 풍하에서 돛대사격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쏜다는, 위치 상의 특성 덕에 전장이탈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침 주로 쏘게 되는 부분도 적함의 돛 부분이니 도망치기엔 더할 나위 없다. 양과 질 모두 압도적인 강자로부터 함대의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에선 합리적인 교리인 셈.
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문제는 단순히 포격대상이 선체냐 돛대냐가 아니라 해군 장병들의 기본적인 훈련도 자체가 너무 떨어져 있던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거기다 조함술까지 비교하면 연합함대는 출항하는 데만도 만 하루가 지났는데 완료를 못한 참 할 말없는 수준을 드러내었다.
이런 영국 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현격한 전력차를 보여주는 것이 트라팔가르 해전 바로 직전에 벌어졌던 피니스테리(Finisterre) 해전이다. 이때 함대 최후미에 있던 함장 불러(Sir Edward Buller)가 지휘하는 80문짜리 2단층 전열함 몰타(HMS Malta)는 짙은 안개 덕분에 멋모르고 적함대 대열에 들어갔다가 혼자서 5척의 적함을 상대하게 되는 압도적 전력 차에도 불과하고 오히려 84문짜리 스페인 전함 산 라파엘(San Rafael) 및 74문짜리 스페인 전함 피르메(Firme)를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고 그 과정에서 전사자 5명, 부상자 40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밖에 안 입었다. 그 이유는 몰타가 영국 해군에서도 소수만 존재하던 양현 동시 대포사격 훈련이 되어있던 배들 중 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몰타는 선체 일부의 손상이 조금 심해서 전투 후에 수리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
참고로 몰타는 원래 나일 해전에서 최후반에 패배가 확정되며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던 빌뇌브 제독이 타고 있었던 프랑스제 80문 2단층 전열함 기욤 텔이라는 전열함인데 나중에 영국 해군에 나포되면서 몰타로 이름이 바뀌었다. 프랑스제 2단층 80문함은 영국제 98문함과 길이와 배수량 무게 등의 크기가 실제로 비슷했다고 한다. 포문수에서는 열세지만 프랑스제 80문 전열함의 경우 60문 정도가 36파운드 포와 24파운드 포라서 대구경 대포 탑재비율은 의외로 높았다. 나머지 20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 영국제 98문 3단층 전열함도 60여문 정도가 32파운드포와 18파운드 포였으며 나머지 30여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해군이 아무리 여러가지 장점으로 2단층 전열함을 선호했다지만 80문 함이면 98문급 함들보다 작은 거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프랑스 전열함들은 같은 급이면 영국 해군보다 배의 크기가 더 크고 더욱 튼튼했던 이유로 영국제 98문 전열함과 동급의 크기인 80문 급 2단층 전열함을 기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 해군도 멍청하거나 큰 배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게 결론이다.
그 외에 영국 해군과 타국 해군의 능력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일어난 단함교전[13]의 통계인데, 전부 합해서 약 '''200회 일어난 단함교전 중 영국 해군의 패배는 단 5회에 불과'''했다.[14] '''동등한 입장에서 타국 해군이 영국 해군과 싸우면 승률이 3%에도 못 미쳤다'''는 이야기. 그나마 미국 해군이 좀 선전한 편이었지만 이쪽은 함대의 총 전력 차가 절망적이라... 미영전쟁 당시 '''미 해군에는 전열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이 때문에 미 해군은 최대한 함대 교전을 피하고 사략 행위를 통한 통상 파괴 전술 및 단함 전투를 강요해야 했다. 만약 미 해군이 영국 해군과 대규모 함대결전을 시도했다면 궤멸을 면치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론 단함교전과 함대간 교전은 다르지만, 결국 수병의 능력은 동등한 상황에서의 교전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함대도 결국 개별 함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교전 시 영국 해군과 다른 해군의 질적 차이는 실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소설 혼블로워를 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온다.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은 영국 해군의 한끼 식사거리일뿐...
이런 형국이었으니 역으로 넬슨이나 다른 유능한 영국 제독이 입장이 바뀌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지휘했다고 해도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빌뇌브의 지휘를 평가해보면 원래 목표 자체가 그 당시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내용이었고, 그럼에도 미숙련된 함대를 이끌고 카리브 해를 왕복해서 넬슨을 오판하게 하고 넬슨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데다가 넬슨이 기존 전열전술 대신 함대를 분열후 각개격파하는 전열 파괴 전술을 쓸 것이라는 것까지는 예측했으니 나름대로 유능한 지휘관에 속했다. 단지 그가 지휘해야 할 함대의 훈련수준이 저급이었으니 다 알고 있어도 절대 불가항력이라 제독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상황을 뒤집기가 역부족이긴 했지만. 그러나 함대 지휘관의 의무에 조함 훈련 및 수병들의 조련 등을 진행하고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5. 전투의 영향


트라팔가르 해전은 당장의 전역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고대하던 24시간 확보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실망하지 않고 이미 영국원정군의 방향을 되돌려 오스트리아 전쟁을 단행한 상태였다. 이 단호한 결단과 민첩한 기동,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적 전략전술에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대륙 동맹국들이 격파되니 영국이라고 별 수 없었다. 대불 동맹군이 나폴레옹의 손에 개발살이 나자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는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한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나폴레옹이 직접 영국을 침공할 수 없게 됨으로써 대륙 봉쇄령 및 러시아 침공으로 이어졌으니 전략적 의미도 만만치 않게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이 없어 프랑스 함대 전력이 무사히 보전되었다 하더라도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해군처럼 항구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장기간 항구 봉쇄도 포위하는 측의 배의 밧줄이나 선원 건강관리 등의 함대 유지 관리비가 많이 들어서 포위하는 측도 장기간 항구 봉쇄시에 많이 고통스러웠기에 그냥 항구에 함대만 보존시켜 놓는 게 더 현명했으나 공격적인 나폴레옹 1세 황제가 그걸 무시하고 육군식 사고방식으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가다가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피해를 자초한 거였다.

6. 이후


영국 트라팔가 광장에 가면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빅토리의 마스트 높이와 같은 55m짜리 기둥 위에서 영불해협을 바라보는 넬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넬슨 동상 주위엔 네 마리 사자 동상이 있는데 이 네 마리 사자가 앉은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프랑스 애들이 두고두고 씹는다. 사자영국의 상징인데 너넨 너네 나라 상징 동물 앉은 자세도 모르냐고(...). 영국 정부도 이 옥의 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 큰 네마리 청동 사자상은 해전에서 승리 후 적군인 프랑스 함대의 대포를 가져다 녹여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
영국 해군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꾸준히 관함식을 열고 있으며, 자국의 공격원잠을 트라팔가급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image]
테메레르급 전열함 뒤게트루앵(Duguay-Trouin)은 프랑스 함대의 전위에 배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후미에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쫓아온 80문 전열함 시저, 90문 전열함 나무르, 74문 전열함 히어로와 커레이저스 외 수척의 프리깃과의 전투 끝에 나포되어 임플라커블로 개명되었다. 이후로는 영국 해군 소속으로써 발트 해에서 러시아 제국 전열함 브세보로드를 불태워버리는 등 활약했고, 전후인 1855년에 훈련함으로 전환되었다. 위 사진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트라팔가르 해전 기념식 당시의 모습.[15] 전쟁 중에는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는데, 결국 살았다(...). 그러나 전후 영국이 이 배를 유지할 돈이 없는 관계로 1949년에 자침[16] 처분되었다. 1920년대에 모금 운동까지 해서 살린 배란 점에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아래에서 동맹국이 된 이상 프랑스의 수치를 나타내는 이런 걸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침몰할 때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를 같이 달았다고. 반면 1815년에 건조된 동료 전열함 웰즐리는 결국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2005년 6월 28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국제관함식이 열렸는데, 40여 개국의 200척 이상의 군함들이 모여 엄청난 장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 함이 잠시 사열을 위해 나왔고, 대한민국 해군충무공 이순신급 1번함인 충무공 이순신함도 참가했다. 이 관함식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전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도 함선을 보냈는데 선조들을 추모한다는 의미로 프랑스, 스페인 해군의 수병들은 검은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을 보냈다.

7. 창작물


코드 기어스 세계관에서는 원래 역사와는 달리 프랑스가 영국을 이긴다. 여기서의 호레이쇼 넬슨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영국에 상륙하여 영국을 멸망시키고 영국 왕실과 귀족들을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17]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8. 관련 문서



[1] 이 그림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영국 해군의 기함 HMS 빅토리 호(그림의 왼쪽 함선)와 프랑스 해군의 르두터블(Redoutable) 호(가운데 함선)가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극적으로 구원군인 HMS 테메레르(오른쪽 함선) 호가 접근,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참조.[2]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3] 당장 영국 본토 침공이 실패한 후 나폴레옹이 단행한 오스트리아 전역과 그 마무리인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보면 나폴레옹의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은 병력이 훨씬 많은 연합군을 상대로 아주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 물론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해군 선원의 숙련도 차가 너무 커서 트레빌이 맡았어도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았겠지만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사망이었다.[5] 3명중 1명은 나폴레옹의 신임을 못 받고 있었으며 빌뇌브를 제외한 나머지 1명인 로실리 제독은 정말 해전경험이 1도 없었다. 즉, 나폴레옹이 생각해도 빌뇌브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냥 물어본 것으로 보여진다.[6] 당시 넬슨은 강유의 한중 방어선과 비슷하게 일부러 느슨한 방어선을 짜서 적을 유인했다가 전면전으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짰다. 그런데 포위망을 너무 느슨하게 했다가 오히려 빌뇌브가 탈출하게 된 것.[7] 이때 스페인과 프랑스 함장들을 모아 투표(...)를 통해 출발을 보류하는 일도 있었다. [8]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항목 참조[9] 천자총통이나 대장군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물론 비격진천뢰같은 탄들도 있기는 했다.[10] 장루(topcastle)란 돛대에 있는 일종의 망루이다. 해적 등을 다룬 해양 창작물에서 선원이 돛대의 받침대에 올라가서 주변을 정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받침대가 바로 장루이다. 당대의 머스킷은 발포시 총구 안에 있던 마개 역할을 하는 천쪼가리가 불이 붙은 채 뿜어져 나왔기에 장루 등 돛에 가까운 곳에서 함부로 사격을 했다가는 불똥이 튀어 화재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11] 당시 범선은 함포만 갑판 아래에 있을 뿐 추진을 담당하는 마스트가 위에 있었기에 상갑판이 점거당하면 그대로 패배했다. 상갑판이 점거당했다면 항행능력을 빼앗긴 셈이고 함장과 부장 등 고위 장교가 후부갑판에 있으니 이미 전사했거나 중상, 혹은 항복했다는 의미였다. 임무형 지휘체계 따윈 없던 시절이니 사관 대다수가 무력화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항복을 해야 할 이유로 충분. 설사 갑판 밑의 후임사관이 결사항전을 결심하고 수병들을 선동하여 최후까지 저항한다고 해봐야 위에서 수류탄 던지면 끝이었고 아예 해치만 잠궈버리면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대로 포로 신세나 다름없었다. 정말 미쳤다면 화약고에 불을 던져 자폭할 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로 유럽의 해군은 미쳐돌아가지 않았고 명예로운 항복 개념이 살아있던 시기라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그냥 운 없는 탄약고 유폭으로 취급되었을 거고...[12] 실제로 넬슨 사후 영국 해군 지도부는 대부분 그렇게 유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제독들이 차지하게 된다. 트라팔가르가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만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에 부사령관이며 넬슨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콜링우드 제독 같은 사람은 몇 안 되는 유능한 제독이라서 예외였다. 참고로 콜링우드 제독은 냉정 침착한 성격에 상황판단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13] 함선 간의 1대1 교전.[14] Miller, Broadsides, p.337[15] '''"영국은 제군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넬슨 제독의 개전 신호를 깃발로 표현하고 있다.[16] 선체 하부를 폭파시켰다. 근현대적 철제 군함이 아닌 목제 군함이라서 밸브를 열어 물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7] 코드 기어스 세계관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이 실패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