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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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J'''
'''Grandmama'''
미국의 전직 농구선수. 별명은 그의 이니셜을 딴 LJ와 한 신발업체광고에서 할머니 분장을 하며 덩크를 선보여 팬들에게 불리었던 Grandmama.
2. 커리어
2.1. NBA 입성 전
텍사스 오데사 칼리지로 진학한 그는 1학년 때 평균 22.3득점, 2학년 때 29점 이상의 득점을 기록하면서 국립 주니어 칼리지 선수 협회의 올해 선수 상을 수상하였다.
3학년이 되자 그는 UNLV로 편입하여 1990년 NCAA결승전에서 득점 22점과 11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103-73'''[2] 으로 우승하였다. 다음 해인 1990-91시즌은 정규 시즌에서 27–0 무패를 기록하였고, 평균 득점 26.7점을 기록하여 아칸소 대학교를 112–105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1991년 NCAA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듀크 대학교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같은 대학교에서 2년동안 전미 퍼스트팀에 선발되었고, 올해의 서부 빅 컨퍼런스 선수상 (1990) 과 MVP 상 (1991) 을 수상하였다.
2.2. NBA 입성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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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을 받고 농구 코트를 밞은 래리 존슨은 같은 해에 NBA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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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알론조 모닝을 지명한 뒤, 함께 뛰게 된 래리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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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는 올랜도에서 열린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세드릭 세발로스에 이어 2위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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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존슨, 먹시 보그스, 알론조 모닝 (왼쪽부터)
1993년에는 샬럿 호네츠 역사상 처음으로 NBA 올스타에 선발되었고, 정규시즌에서 82경기에서 평균 22.1득점에 10.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 NBA 세컨드 팀에 선발되는 등 좋은 성적을 남겼다. 같은 해 10월에는 샬럿 호네츠와 12년간 8천 4백만 달러 계약으로 당시 NBA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계약을 맺었다. 1994년에는 세계선수권에 드림팀2의 일원으로 출장해 우승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공격적인 포워드로써 리그 평균 20득점 이상과 10리바운드를 기록하였지만, 1992-93시즌에 다친 허리디스크 이후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잃었고 점프력과 힘이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골밑 공격을 기본으로 하던 플레이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래리 존슨 자신도 플레이 스타일을 변화시킨다. 주무대가 골밑에서 점차 미들레인지와 3점 라인까지 늘려졌고, 점퍼를 바탕으로 한 평범한 플레이어로 바뀌어 버린다. 1994-95시즌에는 무려 81개의 3점슛 성공을 기록하였고, 1995년 NBA 올스타에도 선발된다. 그러나 등부상을 완치하지 못한채 94~95시즌과 95~96시즌에 분전하며 팀을 이끌지만 리바운드 수치는 점점 떨어져 버린다.
무엇보다 래리 존슨과 알론조 모닝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생기고, 두 선수 모두 팀에 대한 불만을 가져 팀을 다시 구성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95-96시즌 시작 직전 모닝은 글렌 라이스와 맷 가이거가 포함된 3:3트레이드로 마이애미 히트로, 존슨은 앤서니 메이슨과 브래드 로하스와의 2:1 트레이드로 95-96시즌이 끝나고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어 각자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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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존슨이 자신의 첫자인 L(엘)자 포즈를 하고 있다.
1996-97시즌부터 뉴욕 닉스에 트레이드 된 후, 첫 시즌 때부터 76게임을 출전하며 평균 12.8득점과 5.2리바운드 그리고 2.3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당시 닉스의 파워 포워드 자리엔 찰스 오클리가 있었기에 존슨은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전하였다. 평균 득점의 감소는 패트릭 유잉, 앨런 휴스턴, 존 스탁스에 이어 4옵션으로 뛴 탓이 크다. 부상의 여파와 롤의 축소로 인해 올스타 레벨과는 거리는 멀어졌지만 그래도 강팀의 주전급으로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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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3차전에서는 4쿼터 11.5초를 남기고 3점 슛 라인에서 드리블을 하다가 안토니오 데이비스와 접촉 후 3점슛을 쏴 넣었고, 바스켓 카운트으로 인정된 끝에 자유투 1개를 넣어 92-91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 플레이는 래리 존슨의 NBA 커리어에서 첫 손에 꼽히는 장면으로서 아직도 종종 회자된다.
참고로 1996-97시즌부터 2000년대 초반 까지 뉴욕 닉스와 마이애미 히트의 라이벌 관계는 보는 이들 마저 아슬아슬했을 정도로 언제 몸싸움이 발생할지 모르는 경기가 진행되었다.[3] 당시 골밑은 굉장히 터프했고 어지간한 터치는 파울콜이 불리지도 않았으며, 두 팀 모두 빅맨들이 파이터 기질이 넘치는 선수들로 구성되었기에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할 것 없이 늘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닉스를 파이널까지 진출시킨 전임감독 팻 라일리 감독이 마이애미 히트로 옮겼고, 샬럿 호네츠 팀 동료였던 래리 존슨과 알론조 모닝은 적으로 만났으며 약 10년의 기간이 있지만 조지타운 대학교 선후배 관계인 패트릭 유잉과 알론조 모닝은 비시즌 동안 같이 훈련하는 사이로 여러모로 이야기 거리가 상당한 당시 팀 관계였다.
뉴욕 닉스 라인업은 그야말로 나쁜 녀석들 혹은 악당 이란 느낌이 줄 정도로 터프했고 앨런 휴스턴을 제외하면 인상마저 험악했다.[4] 뉴욕 닉스 그 자체였던 패트릭 유잉을 중심으로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등 그야말로 끈적이고 악발리 근성으로 뭉친 기존 뉴욕 닉스 라인업에서 존슨까지 합류하고 그 이후 라트렐 스프리웰까지 영입되어서 정점을 찍었다. 이 팀의 사령탑 제프 밴 건디 감독은 97년 마이애미 히트와 플레이오프에서 경기 중 상대방과 몸싸움이 일어나자 2미터는 가뿐히 넘고 100kg도 우스운 선수들의 바지 끄덩이를 직접 잡는 등 감독 역시 범상치 않았다.
이후 1999-00 시즌에도 여전히 주전 파워 포워드로 활약하면서 전 시즌 준우승 멤버들과 함게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존슨의 개인기록은 경기당 평균 10.7득점 5.4리바운드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며 등부상의 여파가 기량을 좀먹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였다.[5] 그래도 준수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는 않았다. 다음 시즌인 2000-01시즌도 주전으로 뛰었지만 평균 득점은 급기야 한 자릿수인 9.9득점으로 추락했고 야투율도 41.1%에 불과했다. 또한 시즌 막판 등부상 때문에 투약해온 소염제를 끊으면서 허리 부상이 더 이상 플레이하기 힘들 정도의 통증을 야기했고, 결국 시즌 아웃되었다. 당연히 플레이오프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으며 팀의 1라운드 탈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2.1. 은퇴
01/02 시즌 개막이 1달도 채 남지 않은 2001년 10월 10일 결국 닉스와 바이아웃에 합의한 후 은퇴했다. 1,000만 달러가 넘어가는 계약이 2년 더 남아있었지만 닉스는 존슨이 더 이상 NBA에서 플레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바이아웃을 결정했다. 허리 통증때문에 비시즌 트레이닝 캠프조차 치르지 못한 상태였으며, 만 32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참고로 닉스는 존슨의 부재를 대비해 클라렌스 웨더스푼과 이미 5년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3. 플레이스타일
198cm의 키로 언더사이즈 빅맨에 가까운 사이즈를 가지고 있었지만, 탄탄한 웨이트 덕분에 데뷔 시즌과 2년차 시즌에는 평균 10리바운드를 잡아낼 정도로 골밑에서의 경쟁력이 뛰어났다. 또한 투박한 외모와는 다르게 슈팅 레인지도 꽤나 넓었고, BQ도 준수했기 때문에 패싱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공격에서 다재다능한 선수였지만, 수비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운동능력이 떨어지자 빠르게 실력이 감퇴하고 말았다.[6]
4. 기타
프로필에서도 소개된 듯이 할머니로 분장해 덩크를 꽂는 등 다양한 연기를 선보인 "Grandmama" 래리 존슨의 컨버스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1] 당시 컨버스라는 스포츠웨어 회사 광고에 출연한 래리 존슨은 할머니 분장을 한 채 덩크를 하는 보기 드문 모습에 놀라면서 팬들에게 애칭을 얻었다.[2] 역대 NCAA파이널 결승 최다 득점차다.[3] 지금 히트의 사장을 맡고 있는 팻 라일리가 당시 닉스에서 히트로 감독 자리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4] 당시 조던, 페니, 힐 등 매끈하고 잘생긴 스윙맨 포지션 선수들의 인기 있던 시절이라서 더욱 닉스의 거친 이미지가 부각되었다.[5] 당시 존슨의 연봉이 1,000만달러가 넘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먹튀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6] 결국 만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