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론조 모닝
1. 개요
90년대를 풍미한 NBA의 올스타급 센터 중 하나. 별명은 조(Zo).
2. 커리어
2.1. NBA입성 이전
부모님이 10대의 나이로 자신을 낳은지라 양육원에서 자라왔고, 자신이 원해서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 부모가 이혼하는등 평탄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한 모닝은 연습에 몰두하며 농구 실력을 발전시켜 나갔고, 인디안 리버 고등학교에 입학할때는 이미 뛰어난 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며 모교의 51연승을 이끌고, 2학년 때는 평균 25득점 15리바운드 12블록슛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를 기록하며 유망주로 각광받았다.
이후 자신의 우상인 패트릭 유잉의[2]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에 진학해, 입학한 해에 블락왕 타이틀을 거머 쥐고, 졸업반이 되어서는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는 등 순탄대로를 걸었고, 1992년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지명되었다. (1순위는 샤킬 오닐...)
2.2. 샬럿 호네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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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에서는 드래프트 동기생이기도 한 샤킬 오닐이라는 괴물의 임팩트에는 못미쳤지만, 첫해에 평균 21.0 득점, 10.3 리바운드, 3.47 블락슛으로 맹활약하며 올 루키 퍼스트 팀에도 선정되고, 작년 1순위 래리 존슨과 단신가드 먹시 보그스, 슈터 델 커리[3] 의 힘으로 첫 플레이오프를 일궈낸다. 모닝도 보스턴 셀틱스와의 1라운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버저비터를 터트리며 2라운드행을 이끌정도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2라운드에서는 자신의 우상인 유잉의 닉스를 만나 탈락했지만. 이후로도 올스타급 빅맨으로 활약했다.
오닐의 임팩트에는 못미치더라도 매년 엘리트 센터의 상징인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을 해 주었고, 깔끔한 외모와 호전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였다. 이런 모닝을 샬럿 입장에선 은퇴까지 함께 할 프랜차이즈 스타로 여겼고, 홈 구장 앞에 동상(!)까지 세워주며 그와 계속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모닝은 3년차 시즌을 마치고 구단과 재계약 연봉 협상에서 이견이 발생하고, 이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결국 구단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팀 동료 래리 존슨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계약인 12년 8,400만달러의 계약을 안겨준 탓. 모닝은 래리 존슨 이상의 대우를 원했지만, 샬럿으로서는 그 요구를 들어줄래야 들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3. 마이애미 히트 시절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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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연봉 재계약 협상의 이견을 극복하지 못한 샬럿은 1995-96 시즌 개막을 단 하루(!) 앞둔 시점에서 모닝을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 시켜버렸다. 이 댓가로 샬럿은 글렌 라이스, 맷 가이거 등을 받았다. 마이애미가 모닝을 영입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 시즌부터 새로 감독을 맡은 팻 라일리가 강한 센터를 축으로 한 농구를 선호했기 때문.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이야 마이애미에서 영구결번이 될 정도로 마이애미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은 모닝이지만, 당시만 해도 모닝의 마이애미 행은 팬들에게 매우 어색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팀의 간판스타가 시즌 개막을 단 하루 앞두고 트레이드 되어버린건 전무후무한 일인데다, 당시 신생팀 이미지를 벗지 못한건 마찬가지였어도 앞날이 창창해보였던 샬럿과 달리 마이애미는 루징 프랜차이즈로 인식되던 때여서 더더욱 그러했다.[4] 하지만 모닝은 명장 라일리의 지도와 더불어 이후 트레이드로 합류한 팀 하더웨이, PJ 브라운 등과 함께 팀을 플레이오프 막차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물론 1라운드에서 72승 시카고에 시리즈스코어 0-3으로 스윕당하긴 했지만 히트가 이전의 약팀 이미지에서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올라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모닝 또한 플레이스타일이 샬럿 시절보다 더욱 전투적으로 변했다. 샬럿 시절만 해도 깔끔한 용모와 플레이를 펼쳤던 그였지만, 히트 시절부터는 머리도 스킨 헤드로 밀고 코트에서 더욱 호전적으로 플레이하며 'Warrior(전사)'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시점.
그 다음 1996-97 시즌엔 61승을 거두면서 디비전 우승과 함께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히트 구단 역사상 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몇년간 컨퍼런스 최상위권에 위치하며 모닝 또한 1998-99 시즌엔 올 NBA 퍼스트팀 센터및 블락왕 2회, 2년 연속 수비왕 등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 시즌의 MVP는 유타 재즈의 칼 말론에게 돌아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MVP는 모닝이 받았어야 했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닝에게 있어서는 최 전성기였던 시즌이었다. 그러나 팀은 계속해서 플레이오프 탈락을 하며 고배를 마셨다. 특히 그 시점에서 라이벌리를 형성한 뉴욕 닉스에겐 늘 시드에서 앞서고도 3년 연속으로 업셋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2.4. 마이애미 히트 시절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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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권 전력임에도 번번히 플옵에서 물을 먹던 히트는 밀레니엄에 시작되는 첫 시즌인 2000-01시즌을 앞두고 작정하고 전력보강을 했다. 당시 FA로 풀린 선수들 중 손꼽히던 포틀랜드의 브라이언 그랜트를 라이벌 뉴욕 닉스와의 쟁탈전 끝에 결국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에디 존스와 앤서니 메이슨이라는 준수한 주전급들을 잇달아 영입하며 순식간에 디펜딩 챔피언 LA 레이커스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이런 히트에 생각지도 못한 재앙이 닥쳐왔다. 시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 2000년 10월경 모닝은 신장 이상, 정확히 말하면 국소분절사구체경화증이라는 병이 있다는것이 알려지며 무기한 결장을 하게 되었다. 시즌이 막바지에 다른 3월 말에야 간신히 복귀했지만 13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그나마도 주전으로 나온 경기는 3경기에 불과했을 정도로 모닝은 이 시즌 팀에 전혀 도움을 되지 못했다. 이 시즌 히트의 로스터가 워낙 좋았던 탓에 모닝 없이도 50승을 달성하며 3번 시드로 여유있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긴 했지만, 모닝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우승 도전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6번 시드 샬럿에 3게임 연속 15점차 이상의 대패로 스윕당하며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고, 3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했지만 몸 상태 때문에 전성기의 반도 못미치는 활약을 한 모닝에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5]
그나마 시즌 말미에 복귀했기 때문에 다음 시즌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닝은 병의 후유증으로 전성기의 기량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01-02시즌은 모처럼 75경기를 출전해 경기당 32.7분을 뛰면서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했지만, 그가 기록한 성적은 평균 15.7득점 8.4리바운드 2.5블록슛이라는 전성기에 한참 못미치는 활약이었다. 그나마 올스타 주전 센터로 선발된 것이 모닝으로서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나마도 계속 뛰어준다면 좋았겠지만 신장병이 악화된 탓에 모닝은 그 다음 시즌인 2002-03시즌을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채 통으로 날리게 된다. 마침 이 시즌이 히트와의 계약 마지막 해였지만, 히트로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닝과 재계약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모닝은 히트와 결별하게 된다.
2.5. 네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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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시즌을 휴식한 탓에 몸 상태에 자신이 있었던지 2003-04 시즌을 앞두고 뉴저지 네츠와 4년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고작 12경기를 벤치 멤버로 뛰고 신장병이 다시 악화되어 결국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25년간 보지 못했던 사촌인 쿠퍼의 도움으로 신장이식수술을 받는데 성공하고 성실하게 운동을 해낸 결과 이듬해인 2004-05시즌에는 다시 코트 위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미미했고, 결국 빈스 카터를 데려오기 위한 패키지로 묶여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다만 여기서 모닝이 잡음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트레이드 된 토론토에서 뛰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모닝은 신장병으로 경기를 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바이아웃을 요구했고, 토론토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바이아웃을 시켜줬다. '''그런데 그렇게 바이아웃 되고 얼마 후 히트와 베테랑 미니멈 계약을 맺고 쌩쌩하게 플레이했다'''. 결과적으로 신장병 때문이 아니라 토론토에서 뛰기 싫었다는 것을 거짓말로 모면하려 한 셈. 당시 모닝은 신장병 때문에 소속팀 뿐 아니라 타팀 팬들로부터도 많은 응원을 받던 상황이었으나, 이 사건 때문에 많은 팬들이 모닝에게 등을 돌렸고, 지금도 일부 토론토 골수팬들은 이 사건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한다. 그야말로 모닝의 흑역사 시절. 이에 대해 많은 논쟁이 오갔지만, 양측의 입장을 다 고려하더라도 이 당시 모닝의 처신은 분명히 문제가 되었고, 이후 CBA 협상에서 이른바 '알론조 모닝 룰'로 불리는 조항이 생길 정도였다.[6] 훗날 바이아웃으로 받는 연봉의 일부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토론토 팬들의 상처를 달래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7]
2.6. 마이애미 시절 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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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에서는 모닝의 전성기 시절 라이벌격이었던 샤킬 오닐이 팀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모닝은 전성기때의 다혈질적인 모습보다는 팀의 분위기를 잡는 역할과 수비형 백업 센터[8] 로서의 모습을 보이면서 2005-06 시즌엔 히트의 첫 우승을 이끄는 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블락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는데, 경기당 20분만 뛰고도 평균 2.7블락을 기록했다. 48분 환산 기준으로는 경기당 무려 6.4블락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다.
다음 시즌인 2006-07 시즌은 오닐의 결장이 잦아지며 상당한 경기를 주전 센터로 뛰었고, 경기당 20.3분을 뛰며 평균 2.3블락이라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블락으로 인사이드를 지켰다.
자신의 15번째 시즌인 2007-08시즌에도 변함없이 활약하던 와중, 12월 19일 애틀랜타 호크스 전에서 무릎 슬개건이 파열되는 중상으로 결국 시즌을 조기에 마무리하게 된다.
본인도 자신의 경력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9] 2008-09시즌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결국 2009년 1월 22일 은퇴를 선언했다. 다음달인 2월 28일 모닝의 33번이 영구결번 되었고, 2014년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센터 치고는 작은 키[10] 이지만, 순발력과 230cm에 육박하는 엄청난 윙스팬으로 골밑에서 경합해내고, 블록 슛 능력도 뛰어났다. 몸빵은 전성기 시절에는 오닐과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함을 자랑했다. 또한 공격 능력도 이미 아마추어 시절부터 좋던 미들슛등으로 뛰어난 신체로 골밑을 공략하던 오닐보다는 조금 더 다양한 옵션을 가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당대 센터들에 비하면 리바운드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 편이고, 패싱 능력도 좋은 편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대신 선수 본인의 투쟁심이 엄청난 편이다. 작은 키에도 자신 보다 큰 센터들과 밀리지 않으려는 터프한 모습을 자주 노출했는데, 가끔씩 화가 지나치다 보니 1997-98 시즌 플레이 오프에서는 친정팀 동료였던 래리 존슨과 주먹질로 싸우기도 하고, 로드맨과 태그 매치를 벌인 일도 유명하다.
4. 기타
코트 밖에서는 팬들에 대하여 항상 신사적인 매너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재단을 운영하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 선수이다.
특히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보니 고아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한다. 현재는 마이애미 히트의 부사장을 지내고 있다.
1994년 중앙일보에 "알론조 모닝의 NBA 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1화 그 당시 NBA의 인기가 절정이어서 가능했었던 기획인 듯.
[1] 대부분 시즌을 센터로 보냈다.[2] 모닝의 33번 등번호도 유잉을 존경해서 달았다고 한다. 재밌는 우연은 모닝의 드래프트 동기이자 1순위 지명자인 샤킬 오닐 역시 유잉을 존경해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았다는 것이다. 사실 유잉의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했고 전국적인 인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그 때 딱 초~중학생 정도 나이였을 모닝이나 오닐의 우상이 되는 게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당시 유잉은 젊은 센터들 중 가장 피지컬한 스타일이었기에(유잉이 점퍼위주의 다소 정적인 스타일이 된 건 프로에서 부상 때문에 몸이 많이 망가진 이후이다. 대학 시절 그는 전성기 드와이트 하워드나 초창기 샤킬 오닐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더욱 인기를 끌었다.[3] 스테판 커리의 아버지다!![4] 엄밀히 말하면 마이애미의 안습함보다 모닝이 샬럿의 미래로 여겨졌던 것이 컸다. 당시 호네츠는 모닝, 래리 존슨, 먹시 보그스 트리오에 대한 기대감이 어찌나 컸던지 세 선수의 초상화를 도시 중심의 퍼스트 유니온 뱅크 건물에 거대한 벽화로 남길 정도였다. 웃긴 건 이 벽화가 그려진게 95년. 즉, 대대적으로 거대벽화까지 그리면서 "이 친구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라고 홍보했는데 불과 몇달만에 팀과 계약갖고 싸우다가 이적했다.(...) 게다가 다음해인 96년엔 존슨이 닉스로, 97년에는 보그스까지 떠났으니... 그려진지 몇 달만에 어색해진 이 벽화의 처분 역시 논란이 되었는데, 팬 투표 결과 마스코트인 벌 "휴고"의 모습을 대신 그려넣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투표한 호네츠 팬들 중 일부는 "최소한 마스코트는 절대 떠날 일이 없겠지..."라고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10년도 안되어 휴고 역시 팀 전체와 함께 뉴올리언즈로 떠났다.(...) 결국엔 돌아왔지만...[5] 이 시리즈에서 30.3분을 뛰면서 평균 11.7득점 5.3리바운드 2.2블록슛을 기록하며 부진했다.[6] 트레이드된 선수가 해당 팀에서 뛰는 것을 거부할 경우 소속팀이 더 많은 벌금을 물릴 재량권을 갖는다는 조항이다.[7] 하지만 모닝의 태도보다는 빈스 카터를 트레이드하고 거의 아무것도 못 받아온 거에 대해서 토론토 프런트에 더 분노한 게 많다. 또한 지금은 빈스 카터도 용서해주고 팀도 창단 첫 파이널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잘나가는 마당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최근에 유입된 랩터스 팬들은 모닝이 트레이드돼서 저런 짓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8] 시즌 중반에 모닝의 히트 합류가 확정되자 많은 팬들은 1992년 드래프트 1순위-2순위의 막강한 트윈타워를 기대했으나, 모닝과 오닐이 함께 뛸 때는 심히 좋지 않은 효율을 보였다. 이론적으로 보면 키가 센터치고 작지만 기동력이 뛰어나고 점프슛이 뛰어난 모닝이 파워 포워드로 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모닝이 커리어 내내 센터로만 뛰어왔다는 것과 샤킬 오닐은 느린 발과 아예 없는 중거리슛으로 인해 센터 외 포지션 소화가 아예 불가능한 선수였다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오닐에게 파워 포워드를 시키지 않는다는 게 당연하니 넘어가고, 모닝의 경우 커리어 초반의 래리 존슨이나 중후반의 PJ 브라운, 브라이언 그랜트 등은 모두 중거리슛이 가능하고 행동반경이 비교적 넓은 순수 포워드였다(센터겸비가 아니란 말) 이러니 모닝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순수센터에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바스켓볼 레퍼런스(http://www.basketball-reference.com/players/m/mournal01.html)의 play-by-play 항목을 보면 모닝이 파워 포워드로 가장 많이 뛴 시즌은 뉴저지 시절인 04, 05시즌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위력이 약했던 때였다. 센터 둘이 뛸 때는 둘 다 골밑에만 있으면 상상 이상으로 공수가 뻑뻑해지기 때문에 한 사람이 파워 포워드 역할을 맡아줘야 하는데, 두 선수 모두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으니 문제였다. 이 때문에 두 선수는 같이 뛸 때가 거의 없었다.[9] 참고로 찰스 바클리의 경우 1999-00시즌을 치르던 중 무릎 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당해 어이없이 은퇴할 위기에 놓였지만, 이렇게 경력을 끝낼 순 없다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재활끝에 시즌 막판 기어이 복귀하여 은퇴 경기를 치른 사례가 있었다.[10] 6피트 10인치(208cm)로 스카우터들에게는 7피트(213cm)로 속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