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오클리

 

[image]
'''이름'''
찰스 오클리 (Charles Oakley)
'''생년월일'''
1963년 12월 18일 (60세)
'''키'''
206cm (6' 9")
'''체중'''
111kg (245 lbs)
'''출생지'''
오하이오클리블랜드
'''출신학교'''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1]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
'''소속팀'''
시카고 불스 (1985-1988)
뉴욕 닉스 (1988-1998)
토론토 랩터스 (1999-2001)
시카고 불스 (2001-2002)
워싱턴 위저즈 (2002-2003)
휴스턴 로키츠 (2004)
'''수상내역'''
NBA All-Star (1994)
All-NBA Defensive First Team (1994)
All-NBA Defensive Second Team (1998)
NBA All-Rookie First Team (1986)
NABC Division II Player of the Year (1985)
1. 소개
2. 커리어
2.1. NBA 데뷔 전
2.2. NBA 데뷔 이후
2.2.1. 시카고 불스
2.2.2. 뉴욕 닉스
2.2.3. 토론토 랩터스
2.2.4. 시카고 불스
2.2.5. 워싱턴 위저즈
2.2.6. 휴스턴 로키츠
2.2.7.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4. 터프가이 오클리


1. 소개


패트릭 유잉존 스탁스와 함께 90년대 뉴욕 닉스의 터프한 농구를 상징하는 사나이들 중 한 명이었던 선수. 강직한 성격에 할 말은 하고 사는 터프한 사나이기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이 거쳐온 구단의 구단주들과는 사이가 지금도 좋지 않다.

2. 커리어



2.1. NBA 데뷔 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오클리는, 가정형편과 거주하던 동네의 치안 모두 좋지 않았으나 다른 길로 빠지지 않았다. 미식축구와 농구에 모두 뜻이 있었으나, 버지니아 유니온에서 농구장학금을 제의해 농구를 선택하게 되어 당시 감독인 데이브 로빈슨 밑에서 농구를 배웠다. 오클리가 버지니아 유니온에서 세운 리바운드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남아있다.

2.2. NBA 데뷔 이후



2.2.1. 시카고 불스


1985 드래프트에서 고향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드래프트된 오클리였지만, 직후 트레이드를 통해서 마이클 조던(1984 데뷔)이 있는 시카고 불스로 가게되었다.
마이클 조던 원맨팀으로 불리던 당시의 불스에서 오클리는 골밑에서 집중 공략을 당하며 말그대로 얻어맞던 조던의 든든한 보디가드로 활약했다. 70~80년대 암흑기를 매직 vs 버드로 막 벗어나는 당시 NBA는 이 시기 루디 톰자노비치항목에 나와있는 그 사건에서 그러했듯 모든 미국의 스포츠에게 만연했던 마초이즘과 과격함이 있었다. 현재라고 마초이즘이 없는건 아니지만 당시엔 공격자들을 보호하는 규칙이 적었다.
대표적인게 플래그런트 파울 (공격자를 부상입히려는 의도가 보이는 악의적인 반칙)인데 현재는 플래그런트 파울시 파울당한 선수가 자유투 2개 받고, 팀의 공격권이 유지되는데다가 플래그런트 1은 두개 받으면 퇴장, 강도가 더 높은 2는 즉시 퇴장이라는 높은 페널티가 있기 때문에 과격한 파울이 그때보다 훨씬 적다. 그런데 이 파울은 80-81시즌에야 도입되었는데, 이때부터 90-91시즌까지는 플래그런트 시 파울당한 팀에서 아무나 자유투를 쏠 수 있다는 페널티밖에 없었다. 문제는 빅맨의 비중이 컸던 시대가 지나고 득점의 비중이 점점 외곽으로 옮겨갔는데 래리 버드나 마이클 조던처럼 슛 잘 쏘는 선수들에겐 의미없는 페널티였던 것. 도입 당시엔 진짜 악의적으로 일부러 부상 입히려는 정신나간 선수가 있을거라 상상 못했겠지만 문제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빌 레임비어같은 악질은 실제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2]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파울 강도나 "거칠다", "더티하다"고 여겨지는 정도가 달랐다.
다른 요소 중 하나는 팔꿈치 (엘보우) 사용으로 현재는 고의가 아니라도 팔꿈치를 과도하게 사용하다 컨택이 일어나면 벌금이나 징계를 받는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골밑기술이 미숙해 팔꿈치로 여럿 골로 보낸 드와이트 하워드와 슛 후 플라핑하면서 팔꿈치로 수비수를 치다가 마누 지노빌리를 다치게 한 코비 브라이언트. 그러나 당시엔 그런 룰이 없어서 팔꿈치로 부상이 종종 일어났다. 가장 악의적인 케이스는 칼 말론이었지만, 말론과 달리 더티플레이어가 아니었던 빌 카트라이트도 균형을 잘 못 잡고 다소 둔한 편이라 팔을 휘두르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다른 센터들에게 부상을 입히곤 했다. 특히 91시즌에 하킴을 부상입혔을때 휴스턴은 길길히 날뛰면서 리그 사무국에 항의했는데, 아니러니한건 그의 부상 당시 케니 스미스, 버논 맥스웰 등이 스텝 업하며 11연승을 달렸다는 것. 아무튼 카트라이트는 리그로부터 "팔꿈치 보호대를 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그는 무시했다. 카트라이트의 인격이나 평판을 생각하면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은 적지만, 현재처럼 규제가 있는 환경이라면 보호대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룰의 부재로 선수들이 많이 보호 못 받던 시절. 현재 룰들은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골밑 몸싸움이나 거친 수비등에 관대했기 때문에 어느 팀에나 빅맨들은 몸싸움을 거칠다 못해 살벌하게 했고, 팀의 주득점원인 에이스를 상대 수비로부터 보호하는 보디가드격 선수가 있었다. 특히 오클리는 불스에서 뛰던 시절, 상대팀 선수들이 조던에게 하드파울이라도 할라 치면 조용히 다가가서... "한 번만 더 마이클에게 그따위 짓 했다간 니 허리를 뒤로 접어주마"라고 나지막히 속삭였다는... 그리고 실제로 경기가 과열될라 치면 제일 먼저 조던 앞으로 달려가 조던을 위협하려는 상대팀 선수를 막아섰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의 오클리를 탐탁지 않아한 단장 제리 크라우스는 1988년, 닉스와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빌 카트라이트와 오클리를 트레이드 시켜버린다.[3]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사적으로도 친했던 오클리를 동의없이 트레이드 한 것에 마이클 조던은 빡쳤고, 빌 카트라이트와 조던은 초반에 사이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아이재아 토마스(...)와도 뛸 수 있었을 조던은 시즌에 들어가면서는 카트라이트의 공헌도를 인정했고, 베테랑 카트라이트는 제왕적인 조던의 리더쉽 뒷면에서 팀원들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2.2.2. 뉴욕 닉스


트레이드로 가게 된 닉스에서 오클리는 골 밑에서 크게 존재감을 발휘하면서 패트릭 유잉과 함께 뉴욕을 이끌었다. 하지만 닉스는 번번히 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막히곤했고, 1992년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라일리는 패트릭 유잉을 중심으로 끈적한 수비와 코트 위에서 싸움도 불사하는 터프한 사나이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가고자 했고, 이 스타일에 제대로 적응한 오클리는 뉴욕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1994년 뉴욕의 터프가이들은 파이널에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준우승. 1995년은 인디애나, 96년은 또 불스, 97년은 새롭게 라이벌이 형성된 히트, 98년은 또 인디애나에게 패했다. 98시즌은 유잉이 30경기도 못뛰고 부상을 당하며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오클리는 다시 트레이드 되었다. 사실상 유잉 중심 90년대 닉스는 막을 내리고 스프리웰, 휴스턴의 트윈 테러로 그 중심이 이동했다.

2.2.3. 토론토 랩터스


오클리가 가게 되었을 당시의 토론토는 막 창단한 티를 벗지 못한 리그 하위권 팀으로, 여기서도 오클리는 젊은 선수들을 독려하면서 좋은 활약을 했지만, 2001년 부진한 모습을 보인 빈스 카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팀 캐미스트리를 해친다는 구단의 판단으로 다시 팀을 옮기게 되었다. [4][5]

2.2.4. 시카고 불스


트레이드로 13년만에 시카고로 돌아온 오클리였지만, 이 당시 불스는 마이클 조던의 2차 은퇴 이후 암흑기 시절이었고, 오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1시즌을 보낸 이후 오클리는 워싱턴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2.2.5. 워싱턴 위저즈


위저즈에서 오클리는 두 번째로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조던과 오랜만에 같은 팀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위자즈를 플레이오프로는 이끌지 못했고, 조던은 2003년 세 번째로 은퇴했다.

2.2.6. 휴스턴 로키츠


위저즈에서 미련없이 떠난 오클리는 휴스턴에서 10일 계약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7.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오클리는 여러 곳의 의류생산업체를 운영하면서 사장님이 되었다. 몇몇 의류의 디자인은 자신이 직접하기도 하는 듯.
거침없는 발언으로 구단주들에게 밉보인건지 뉴욕에서 10년을 뛴 레전드지만, 뉴욕 닉스 경기에 초청받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다. 2017년 2월에는 성적부진도 모자라 GM과 선수가 서로 싸우면서 개판이 되고 있는 팀에 대해 뉴욕 구단주에게 항의하려고 했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기도 했다.
조던과는 함께 불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인연 덕분인지 지금까지도 사이 좋은 친구 관계이다. 조던의 다른 친구들인 찰스 바클리, 패트릭 유잉보다도 사적으로 훨씬 가까운 친우관계라 실제로 클럽이나 바에서 조던과 함께 목격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6]

3. 플레이 스타일


빅맨으로서 크지 않은 사이즈[7][8]임에도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 당대 손꼽히는 리바운드 능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당대 블루워커형 빅맨의 대명사인 동시에 의외로 슛레인지가 길어 쏠쏠하게 중거리 슛을 꽂아줄 수 있었고[9] 욱여넣기도 곧잘 해주며 두 자리수 득점이 가능한 꽤 준수한 공격수이기도 했다. 비록 한번 뿐이지만 올스타에도 선정된 적이 있는 선수다.
또한 센스도 상당히 뛰어난 선수였는데, 시카고 불스 시절 상대 공격 직후에 조던이 반대쪽 코트로 총알같이 뛰어가면 빠르게 장거리 패스를 잘 꽂아주던 선수가 바로 오클리였다. 물론 빌 월튼블라디 디박 수준의 패서는 아니었지만, 재빠른 판단력으로 센스있는 플레이를 하는데 능했으며, 커리어 하이 평균 3.6어시스트도 이 플레이를 종종 하던 86-87시즌에 나왔다.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강력한 박스아웃 능력으로 리바운드가 뛰어났던 선수인데, 87-88시즌 당시 역사상 가장 치열한 리바운드왕 레이스를 펼쳤다.
당시 오클리는 LA 클리퍼스의 마이클 케이지란 선수와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었는데, 오클리는 시즌 마지막에서 두번째 경기에서 무려 '''35개''' 리바운드를 잡고 케이지는 그 다음날 경기에서 23개를 잡으며 오클리가 앞서나갔다. 이때 오클리의 기록은 12.9개, 케이지는 12.61개였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오클리가 21개를 잡으며 정확히 시즌 평균 13.00개를 기록했다. 케이지가 리바운드 왕좌를 차지하려면 무려 28개를 잡았어야 했는데, 케이지는 한번도 23개를 넘겨본 적이 없기에 다소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시애틀과의 최종전에서 무려 '''30개'''를 잡아내며 최종적으로 13.03개를 기록, 리바운드왕에 오른다.[10]
약점이라면 수비범위가 그리 넓지 않고 높이가 낮다는 점인데, 당시엔 외곽슛이 현재만큼 중시되지 않아 코트를 좁게 썼기 때문에 수비범위는 별 지장이 없었으며, 높이가 낮은 점은 그의 골밑 파트너가 당대 최고의 블러커 중 하나인 패트릭 유잉이란 점에서 상쇄되었다. 실제로 유잉과 오클리의 궁합이 상당히 좋았는데, 위에 언급된 공격 외에 수비에서도 상대공격수가 거친 오클리를 겨우 뚫고나면 골밑에 패트릭 유잉과 마주치는 극악의 상성이었다. 1선의 존 스탁스, 2선의 오클리, 최종 수비수 패트릭 유잉 조합은 돌파를 주무기로 삼는 선수들에게 그야말로 극악의 상성이었으며, 이는 최전성기 마이클 조던에게도 어느 정도 통할 정도였다.
동시대의 스카티 피펜과 더불어 공격자파울 유도에 가장 능한 선수 중 한명이었는데, 오클리 본인이 워낙 터프했기 때문에 샤킬 오닐같은 거구들을 상대로도 주저없이 공격자파울 유도를 하고, 같이 넘어진 다음에 파울이 불리면 신나서 벌떡 일어나 포효를 하곤 했다. 찰스 바클리, 칼 말론과 더불어 오닐을 상대로 힘에서 밀린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던 몇 안되는 선수로, 오닐이 신장의 우위를 살려서 득점하려고 하면 하드파울로[11] 거꾸러뜨리거나 공격자파울 유도를 하거나 빠르게 공만 쳐내는 영리한 수비를 할 줄 아는 선수였다.

4. 터프가이 오클리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오클리는 괄괄한 성격 뿐 아니라 힘도 무지하게 센 선수였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덤벼들고, 반대로 오클리에겐 NBA에서 누구도 쉽게 덤벼들 생각을 못할 정도로 당시 터프한 사나이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몸 담은 팀 대부분에서 군기대장을 맡았는데, 토론토 랩터스에서는 팀룰을 어기면 위반자에게 벌금을 내던지, 찰스 오클리에게 처분을 맡기던지(...) 둘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고 한다. 당연히 오클리에게 덤벼드는 겁을 상실한 선수는 없었다고 한다. 초창기에 비쩍 마른 스카티 피펜을 (장난이지만) 멱살을 잡고 허수아비처럼 흔들면서 "이 놈시키 루키인데! 나한테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되지!"라고 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그는 키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몸무게도 그렇게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같은 포지션인 파워포워드들이나 센터들도 오히려 힘에선 압도할 정도였다. 당시 파워 포워드로도 평균 이하인 신장과 그리 대단하지 않은 스피드와 점프력으로 그렇게 리바운드를 잡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 강력한 힘과 당당한 체격으로 박스아웃을 잘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싸움도 꽤나 하고 다녔는데, 마찬가지로 천하장사인 찰스 바클리와 말년에 한번 제대로 붙은 적이 있다. 또한 말년에 불스로 돌아왔을 때 브래드 밀러와 함께 샤킬 오닐에게 하드 파울을 했으나, 오닐이 정작 주범인 오클리는 제쳐두고 원래 더티 플레이를 잘 안 하는 (사실 이때도 하드파울한건 오클리고 밀러는 살짝 컨택이 있던 정도) 밀러에게 주먹을 휘둘러 만만한 상대에게 덤빈다고 훗날 TNT 방송 동료들에게 신나게 비웃음을 당했다. 심지어 이때 밀러에게 날린 게 어이없을 정도로 빗나간 헛방이라 더더욱 놀림받았다.
여담으로 "키가 크면 덩치도 크다"고 여기는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키가 213cm나 되고 몸무게도 오클리보다 더 나가는 밀러가 무시받는게 의아할 수 있겠지만, NBA센터들 정도로 키가 크면 오히려 너무 길어져서 근력이 떨어질 수 있다. (물론 샤킬 오닐처럼 키가 커도 몸무게와 근육량 자체가 상식 이상으로 많으면 예외다.) 실제로 드래프트 컴바인 신체검사 결과를 보면 벤치프레스 평균 수치가 가장 높은 포지션은 바로 파워 포워드이다. 스몰 포워드까지는 일반적으로 파워가 그리 중시되는 포지션이 아니니, 파워를 키우면서 너무 길진 않은 파워 포워드들이 힘이 가장 센 것. 실제로 2004-05시즌을 앞둔 프리시즌 당시 시카고와 워싱턴 사이에서 벌어진 난투극에서 213cm/121kg이나 나가는 거구 브랜든 헤이우드가 206cm에 몸무게도 훨씬 적게 나가는 안토니오 데이비스에게 테이크다운 당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그런데 오클리는 그 파워 포워드들 중에서도 바클리와 더불어 거의 최강자니 딱히 파워가 부각되지도 않는 기술형 센터인 밀러와는 비교불가였다.
닉스의 래리 존슨과 히트의 알론조 모닝이 붙은 그 유명한 싸움 (싸움 말리던 제프 밴 건디 감독이 죽어라 모닝의 다리에 메달린 굴욕장면을 연출했던 그 싸움) 당시 모닝의 멱살을 잡아서 더 이상 못 싸우게 말린 것도 오클리다. 당연히 모닝도 오클리의 머리를 밀며 밀쳐냈으나 오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 이전 버전에는 버지니아 대학교로 잘못 기재되어 있었다. 오클리가 나온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는 리치먼드에 소재한 역사적 흑인대학(HBCU)으로, 버지니아 대학교 시스템 소속도 아니다. 스포츠도 NCAA Division II 소속으로, Division I의 메이저 컨퍼런스 ACC에서도 명문 대접받는 버지니아와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무명학교인 셈. 참고로 벤 월러스가 이 학교 후배로, 두 터프가이의 인생역정을 비교해봐도 재미있다.[2] 마찬가지로 더티하고 더 피지컬한 릭 마혼보다 훨씬 욕먹는 이유가 이것이다. 최소한 마혼은 '''일부러''' 부상 입히려고는 안했다는 것.[3]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불스는 오클리를 제외하면 센터포지션이 너무 약해서 골밑 수비가 약했기 때문에 센터가 필요했던건 사실이다. 카트라이트는 비록 부상으로 하향세가 이미 한참 진행되었고 한때 20+득점도 가능했던 득점력도 많이 사라진 선수였지만, 7피트1인치의 당당한 체격과 탁월한 수비센스로 골밑수비수로서 존재감은 있었다. 게다가 이때는 오클리를 포기하면서 88년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클렘슨 출신의 젊은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의 자리를 마련했고 그랜트가 수준급 파워포워드으로 성장하면서, 불스는 그랜트-카트라이트라는 괜찮은 골밑 수비라인을 만들게 된다.[4] 번외로 이 당시 랩터스의 영입 정책은 이해할 수 없는 노선이였다. 신생팀티를 벗지 못한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카터 합류 이후 지나치게 보수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마커스 캠비(캠비와 오클리가 트레이드 되었다.) 등 95, 96년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신인선수들을 루키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놓쳤고 마크 잭슨, 델 커리, 하킴 올라주원 등 이미 전성기가 지나도 훌쩍지난 30대 후반 베테랑을 주요 타겟으로 찾는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오클리의 경우 팀 기반과 터프한 베테랑 영입이기에 관점에 따라 이해가 가는 트레이드 였지만, 그 이후 전성기가 이미 지난 선수들이 영입되었다. 물론 00/01시즌 잭슨과 커리는 팀 핵심 멤버로 활약했지만 초단기적 영입이였고 하킴은 언제든지 은퇴해도 이상할게 없는 선수였음에도 이름값에 홀린듯이 빠졌다.[5] 다만 아예 정신나간 영입은 아니다. 당시 랩터스는 젊은 슈퍼스타의 활약으로 전력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으며 01년에는 동부 우승팀이 되는 필라델피아와 2라운드에서 혈전을 펼쳤다. 또한 젊은 카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전력보강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생긴지 5년 정도밖에 안된 신생팀인데다 캐나다란 점에서 빅네임 FA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그러다보니 저런 선수들이라도 영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 선수들은 기량은 많이 떨어져도 기본 실력과 경험이 있는지라 활약이 나쁘지만은 않았다.[6] 물론 오클리가 더 친한 것도 있겠지만 그와 조던의 관계는 바클리/유잉과는 좀 다르다. 둘은 조던과 동년배인데다 드래프트 동기/올림픽 동기이고 무엇보다 조던과 동격의 슈퍼스타였다. 한마디로 조던과 아이들의 "아이들"을 자처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 당시 슈퍼스타들끼리 뭉치는걸 꺼려한데는 승부욕도 있지만 "2인자"를 자처하기 싫어했던게 컸다. 반면 오클리는 조던과 동갑에 1년 후배일 뿐이지만 그와 격이 달랐다. 조던은 듣보잡 루키인 오클리를 올스타 주간에 데리고 다니며 (그는 부상으로 경기엔 결정했지만 올스타 주간에 참석하긴 했다. 스퍼드 웹의 멋진 덩크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사시키고, 그를 큰형처럼 챙겨주었다. 물론 그 대가로 절친해진 오클리는 조던을 코트 위에서 보호해주었고...한마디로 바클리나 유잉 모두 누구를 "따라다닐" 입장은 아니지만 오클리는 아니다.[7] 다만 언더사이즈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6피트 9인치 정도에 평균신장이 형성되어 있던 당대 파포들 중 약간 작은 축에 드는 정도였다. 4/5번의 역할구분이 거의 없어지고 두 포지션의 사이즈 차이가 비교적 줄어든 2010년대 초반과는 달리, 당시엔 두 포지션의 구분과 체격차이가 크다 보니 센터는 6-11~7-0 정도에서 평균신장이 형성되는 거구 집단이었던 반면 파워포워드는 6-9 정도였다. 또한 2010년대 후반에는 파포자리에 3~4번 중간 성향과 사이즈를 가진 선수들이 자주 들어가며 비교적 인게임 4번의 사이즈가 소형화된 감이 있기에, 당대로 보나 현대로 보나 오클리의 체격이 주 포지션인 4번에서 그렇게 작다고 보긴 어렵다.[8] 센터 기준으로는 언더사이즈라고는 하나, 정작 그는 시카고~뉴욕 시절로 이어지는 시기엔 계속 파워포워드로 뛰었으며 말년 두 시즌만 백업 센터로 많이 뛴 것 뿐이기에 주 매치업 상대에게 신장의 열세로 고전하는 편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센터로 더 많이 뛴 04시즌의 경우 당시 휴스턴에 주 포지션이 파워포워드인 선수만 6명이나 있었고, 원래 센터인 켈빈 케이토가 이 시즌만 주전 파워 포워드로 뛰었기 때문에 사실상 센터는 야오밍 한 명 뿐이다 보니 오클리가 합류했을 당시 백업 센터로 뛰어야 했던 것. 원래 파워포워드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4번에게 요구되는 활동량을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 센터로 컨버전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는 편이고, 은퇴 직전이라 별로 오래 뛰지도 못해서 큰 의미는 없는 출장시간이다.[9] 닉스 시절에는 패트릭 유잉이 더블팀을 받으면 오클리가 미들 점퍼로 해결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더불어 유잉의 경우 센터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미드레인지 장인이었기에, 이 둘은 막강한 수비력과 리바운드를 자랑하면서도 골밑과 중거리 양쪽에서 득점이 가능한 상성좋은 듀오였다.[10] 당시 클리퍼스는 여느때처럼 형편없는 시즌을 보냈고 시애틀을 상대로 최종전에서도 9점차이로 패배했는데, 이때 케이지는 48분을 전부 뛰면서 야투 8개를 던져 1개 성공하고 리바운드는 30개를 잡았다. "졸렬하다"라고 잘못 알려져 비난을 받는 데이비드 로빈슨의 71점의 경우, 당시 로빈슨은 44분을 뛰었고 시합은 3쿼터까지 2점차 승부였다가 4쿼터가 되서야 승부가 갈렸다. 실제로 그의 동료 존 루카스는 "(로빈슨이 득점한 건 진짜 71점이었다. 그는 48분을 뛸 수도 있었지만 44분을 뛰었다."라고 할 정도. 물론 대기록을 앞두고 있는 선수를 어느 정도 밀어주는 건 관례에 가깝지만, 최소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 대부분 득점을 한 로빈슨보다 팀이 졌는데도 48분을 꽉 채워서 뛴 케이지의 케이스가 (만약 문제삼는다면) 문제삼을 여지가 더 많긴 하다. 사실 로빈슨이 훨씬 논란의 여지가 없는데도 훨씬 더 유명한 은 로빈슨/오닐이 오클리/케이지보다 넘사벽으로 유명하고, 패자가 된 샤킬 오닐이 엄청나게 언론플레이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1] 전성기 닉스 선수들은 득점을 허용해도 깔끔하게 허용하는 법이 없었다. 92년 불스와 닉스의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보면 유잉이 부상 후유증으로 움직임이 정상적이지 못해 승부가 확 기운 7차전을 제외하면 조던이 정말 힘들게 득점하는 걸 볼 수 있다. 기껏 돌파해도 뒤에서 잡고 골밑에서 하드파울을 해버리니 공격자 입장에선 자유투로 득점을 해도 대미지가 누적되는 것. 이 때문에 돌파형 선수들에게 극악의 상성이었던게 바로 전성기의 닉스였다. 한 마디로 진흙탕 농구의 끝판왕. 룰의 한계까지 거칠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던 "배드 보이즈"로 피스톤즈와도 다른 스타일이었는데, 팀전력으로 보면 전성기 피스톤즈만큼 짜임새가 있지 않아도(피스톤즈는 닉스보다 공격을 명확히 더 잘하는 팀이있다.) 선수들 자체가 더 피지컬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