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 유잉

 


[image]
'''뉴욕 닉스 No. 33'''
'''조지타운 호야스 감독 '''
'''패트릭 알로이셔스 유잉
(Patrick Aloysius Ewing)
'''
'''생년월일'''
1962년 8월 5일 (62세)
'''국적'''
[image] 자메이카, [image] 미국
'''출신지'''
자메이카 킹스턴
'''신장'''
213cm (7' 0")
'''체중'''
109kg[1]
'''출신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5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뉴욕 닉스 지명'''
'''소속팀'''
'''뉴욕 닉스 (1985-2000)'''
시애틀 슈퍼소닉스 (2000-2001)
올랜도 매직 (2001-2002)
'''지도자 경력'''
워싱턴 위저즈 어시스턴트 코치 (2002-2003)
휴스턴 로키츠 어시스턴트 코치 (2003-2006)
올랜도 매직 어시스턴트 코치 (2007-2012)
샬럿 밥캣츠-호네츠 어시스턴트 코치 (2013-2017)
조지타운 대학교 감독 (2017-)
'''등번호'''
'''33번 - 뉴욕 닉스''' / 시애틀 슈퍼소닉스
6번 - 올랜도 매직 [2]
'''수상내역'''
'''올-NBA 퍼스트 팀 (1990)'''
'''올-NBA 세컨드 팀 6회 (1988-1989, 1991-1993, 1997)'''
NBA 올스타 11회 (1986, 1988-1997)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1988-1989, 1992)
'''NBA 올해의 신인상 (1986)'''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6)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85)
NCAA 챔피언 (1984)
NCAA 파이널 포 MOP (1984)
'''네이미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뉴욕 닉스 영구결번'''
No. 33
1. 개요
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2.1.1. 어린 시절
2.1.2. 호야스의 파괴자
2.2. NBA 커리어
2.2.1. 뉴욕으로의 입성
2.2.2. 뉴욕의 왕
2.2.3. 갱스터의 결성, 그리고 조던. 조던. 조던.
2.2.4. 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2.2.5. 사실상 마지막이었던 우승 도전의 기회. 그러나...
2.2.7. 마지막 불꽃, 그리고 쓸쓸한 은퇴
2.2.8. 유잉 무용론(Ewing Theory), 일리가 있는가?
2.2.8.1. 유잉 무용론의 배경
2.2.8.2. 타당한가?
3. NBA Career Statistics
4. 플레이스타일
5.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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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KING OF NEW YORK'''
NBA 선수. '''90년대 4대''' 한 명으로,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윌리스 리드의 뒤를 이었으며, 모든 뉴욕 시민들이 사랑했던 8~90년대 뉴욕 닉스의 심장. 별명은 뉴욕의 왕(The King of New York), 동부의 야수(The Beast of the East), 호야스[3]의 파괴자(The Hoya Destroya) 등이지만, 널리 알려진 별명은 킹콩[4], 그리고 한국 한정 고릴라. [5]
NBA 원년팀으로 2016에 70년째를 맞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 중 블래처리포트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닉스 선수로 꼽혔다. 블래처리포트 외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역대 닉스 선수들의 랭킹을 꼽았을때 절대로 Top 3에서 빠지지 않는 선수.
여담으로 한국 올드팬 중에서는 그의 성을 "이윙"이라고 기억하는 경우도 많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언론에서 실제로 이런 표기를 쓴 적도 있었다. Ewing을 Ew-ing으로 읽지 않고 E-wing으로 읽은 것. 한국어 화자들은 w를 음절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앞 음절을 끊는 경향이 있어서 생겼던 일. 비슷한 예로 이완 맥그리거[6], 마이클 오웬[7] 등이 있다.

2. 커리어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1993)

2.1. NBA 데뷔 이전



2.1.1. 어린 시절


독특하게도 그는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킹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농구보다도 크리켓과 축구를 하며 자라났지만, 12살에 가족들이 미국 매사추세츠로 이민을 결정하게 되면서 그는 미국에서의 삶과 동시에 농구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2.1.2. 호야스의 파괴자


[image]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고등학교 시절에 이를 즈음에 이미 그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ESPN Sports Century 유잉편에서 한 기자의 회상에 따르면 유잉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다른 팀 선수들은 "불공평하잖아. 너넨 패트릭 유잉이 있는데..."라고 불평할 정도로 급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당연히 상대팀 팬들 입장에선 악의 축 취급이어서 '''유잉이 문맹이다'''[8]를 포함해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대형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많은 대학들은 리쿠르팅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유잉은 그 중 워싱턴 D.C.의 농구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지타운 대학교는 당시 존 톰슨 주니어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9] 존 톰슨은 보스턴 셀틱스에서 빌 러셀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던 센터로, 조지타운 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선수생활 경력을 살려서 뛰어난 센터를 조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유잉이었다.[10] 그런 덕분인지 존 톰슨은 유잉의 엄청난 덩치와 잠재력을 폭발시키면서 대학 무대를 평정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유잉은 굉장히 독특한 패션을 추구했는데, 반팔 셔츠를 유니폼 안에 입은 일종의 레이어드 패션이었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유잉에 대해 전미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걸출한 신입생의 합류와 맹활약에 힘입어 조지타운 대학은 82년 March Madness에서 숱한 대학을 박살내며 결승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거기서 마주하게 된 대학은 바로 딘 스미스 산하에서의 첫 우승을 노리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타힐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는 제임스 워디[11], 샘 퍼킨스[12][13]라는 막강한 프론트 코트를 갖추고 있었던 강팀이었다. 그러나 조지타운은 유잉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수비[14]를 통해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덕분에 당시 게임은 근소한 차이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접전이 이어졌다. 17초를 남긴 상태에서 1점 차이로 조지타운의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고, 노스 캐롤라이나의 공격 차례가 되었다. 조지타운은 1점 리드를 지키기 위해 수비를 견고히 다지고 있었고, 특히 워디에게 모든 수비가 집중적인 디나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지미 블랙은 워디에게 패스를 투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신입생 가드 한 명이 오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어렵사리 볼을 건넸고, 그는 노마크 상태에서 가볍게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역전시키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이어지는 조지타운의 공격에서 스틸을 성공시키며 1982 NCAA 챔피언에 등극하고, 결승골을 성공시킨 신입생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15][16]
첫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유잉은 고작 1학년인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또한 절치부심하며 NCAA 우승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2학년이 된 다음해에는 고작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3학년이 되자 그는 다시금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조지타운과 만나게 된 대학은 바로 "PHI SLAMA JAMA"라 불리던 휴스턴 대학이었다. 당시 휴스턴 대학은 전년도 파이널 준우승팀인데도 토너먼트 MOP를 수상한 최대의 라이벌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강팀이었다. 자메이카산 야수와 나이지리아산 괴물센터간의 대결은 전미를 흥분시켰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결승전에서 유잉은 올라주원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O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유잉은 84년 LA 올림픽 대표팀에 주전으로 당당히 선발되었으며, 조던 등과 함께 팀을 금메달로 이끈다.
이어지는 84-85 시즌 당시 동년배였던 올라주원과 조던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드래프트를 위해 대거 얼리 엔트리를 제출한 가운데, 유잉은 묵묵히 조지타운에서 졸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유잉이 만약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얼리 엔트리를 제출했다면, 84년 드래프트의 1번픽은 유잉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대학무대에서 유잉의 가치는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센터 보강이 절실했던 포틀랜드가 30년 동안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도 없었을 듯. 진지하게 생각하면 당시 기록을 보면 포틀랜드건 시카고건 모든 팀들의 1순위는 하킴이었기 때문에 유잉을 못 뽑은 포틀랜드는 당연히 하킴을 뽑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래 센터를 원했었고, 센터가 아닌 가드 조던을 뽑았다고 시무룩했던 '''시카고가 얼씨구나 하고 부위를 뽑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잉과 그 이전에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랠프 샘슨이 막강 트윈타워를 휴스턴에서 결성하고, Phi Slamma Jamma 콤보인 하킴과 드렉슬러가 프로에서 재회한 포틀랜드가 왕조를 이룩하고, 시카고 불스는 역대 최강의 선수를 못 뽑아 하위권 탈출에 실패하는 등 NBA 구도가 크게 뒤흔들렸을 것이다.
또한 비록 센터가 아니란 이유로 밀렸지만, 당시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석권했던 조던이 4위까지 밀렸는데 안 뽑는 건 미친 짓이기 때문에(원래 4위로 뽑힌 샘 퍼킨스는 조던과 1년 선배로 6피트9인치 포워드고 조던보다 실력이 현저히 딸린다) 당연히 댈러스 매버릭스가 조던을 뽑았을 것이다. 이때 댈러스는 사상 처음으로 5할 승률 이상을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하는 등 강팀으로 발돋음하던 시기였는데, 여기에 조던이 합류했다면 단연 우승후보로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 즉, 80년대 중반 서부에서는 레이커스 독주에 휴스턴이 그나마 견제하는 체제였는데, 두 팀의 전력은 크게 변화없이 댈러스, 포틀랜드의 전력이 크게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랬다면 보스턴이 필라델피아, 밀워키 등의 도전에 힘겨워했던 동부처럼 혼전이 있었을 것이고 기존 역사에서처럼 레이커스가 80년대에 9번이나 당연한 듯 파이널에 올라가긴 힘들었을 것이고, 매직과 버드의 평가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돌아온 85년 March Madness에서 유잉은 다시금 팀을 결승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해낸다. 빌라노바 대학과의 결승에서 조지타운은 2점차 아쉬운 석패를 거뒀지만[17], 결승진출 3번, 우승1번, 주요 올해의 대학선수상 석권이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유잉은 역대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다가오는 85년 드래프트는 유잉 드래프트가 될 것이란 왁자지껄한 분위기 아래 유잉은 대학을 마치고 NBA에 입성하게 된다.

2.2. NBA 커리어



2.2.1. 뉴욕으로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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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드래프트는 앞서 말한대로 "유잉 드래프트"라 불렸다. 당시 유잉의 스카우팅 리포트 장점란에 쓰여 있는 말은 단 한 문장. "Are you kidding?" 전년도에 하위권 성적을 거둔 팀들은 어떻게든 1순위 픽을 잡아 유잉을 영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로터리 추첨 당일 모두의 시선은 데이비드 스턴의 손에 쏠렸다. 드래프트 당일보다도 로터리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물론 1순위는 이견없이 유잉일테니, 누가 유잉을 뽑게 될 지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 모든 팀이 사라지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뉴욕 닉스만이 남은 상태에서 2순위에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당첨 되었음을 알리자 뉴욕 팬들은 그야말로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이후 열린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이견의 여지없이 1순위로 뉴욕에 입성하게 되었다.[18][19]
당시 뉴욕 닉스는 그렇게까지 나쁜 팀은 아니었다. 빌 카트라이트와 버나드 킹, 제랄드 윌킨스 등으로 이루어진 라인업은 닉스를 꽤 괜찮은 팀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팀이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에 유잉을 영입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유잉은 데뷔 직후 첫 시즌인 1985-86 시즌에서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50경기에 출장하며 20득점, 9리바운드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팀을 이끌었다. 결정적으로 유잉은 당초 대학 시절 선보인 뛰어난 수비력 탓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적은 그의 재능이 빌 러셀보다도 대단할 것이라는 평가마저 듣게 만들었다. 물론 주전급 베테랑들이 대거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팀 성적은 여전히 나락인 상태였지만, 스스로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0게임이나 결장하면서도 일궈낸 성적인 탓에 충분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공로로 신인왕에 선정된다.[20][21]
이어지는 2년차에 유잉은 카트라이트와 함께 트윈타워를 구축하고 주 포지션인 센터가 아닌 파워 포워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여전히 애틀랜틱 디비전의 최하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건 당시 닉스가 굉장히 불운이 심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빌 카트라이트는 84-85시즌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유잉의 루키 시즌인 85-86시즌에는 단 두경기만 뛰었다. 버나드 킹은 84-85시즌 득점왕이었으나 다음 시즌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 뛰었고, 제럴드 그린은 그냥 롤플레이어였다. 킹은 유잉의 2년차이던 86-87시즌에도 불과 6경기밖에 못 뛰었고 카트라이트는 58경기를 뛰었으나 이미 하락세가 완연했다. 결국 유잉 외에 위력적인 선수가 없었던 것.
어느 덧 3년차 시즌에 접어든 유잉에게 팀은 새로운 파트너를 선사해주었다. 프로비덴스 대학의 코치를 맡고 있던 30대의 젊은 감독인 릭 피티노와 브루클린 출신의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마크 잭슨은 약점이던 가드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서 신인왕까지 거머쥐었고, 유잉은 그와 함께 빌 카트라이트를 제치고 주전 센터로 도약하면서 팀을 이끌면서 결국 데뷔 3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래리 버드가 이끌었던 강팀인 보스턴 셀틱스였는데, 1승 3패로 1회전 탈락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유잉은 첫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더 이상 풋내기 선수가 아님을 과시하였고,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2.2.2. 뉴욕의 왕


1988-89 시즌이 다가오면서 닉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전까지 닉스를 지탱해왔던 기둥 중 하나인 빌 카트라이트를 트레이드하기로 한 것이다. 닉스 구단은 노쇠화를 보이면서 이제 유잉에게도 밀려나버린 후보 센터 대신 주전 센터인 유잉을 보좌하면서 그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만한 블루워커 보디가드[22]를 물색하던 중, 닉스는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빌 카트라이트의 맞트레이드를 성공시킨다.
찰스 오클리는 당시 어린 팀이던 시카고 불스에서 군기반장이자 조던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조던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때문에 당시 시카고 불스가 피스톤즈 배드 보이즈의 조던 룰이라 불리는 집단 다구리에서 조던을 보호하던 찰스 오클리 대신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로 하자 조던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빌 카트라이트는 나이도 새파란 에이스의 분노를 한 몸에 받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실제로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진정한 팀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참고로 오클리는 조던이 위저즈로 복귀했을 때도 먼저 영입을 주도할만큼 친한 사이이며, 구단주인 현재도 사석에 조던이 나타날 때면 늘상 함께 다니는 사이일 정도.
물론, 불스가 이 트레이드를 한 이유는 센터 빌 카트라이트에 대한 필요도 있었지만, 87~88년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지명한 클렘슨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를 주전으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랜트는 구단의 기대대로 불스 첫번째 3연패 왕조의 넘버3로 대활약했다. 사실 선수 개개인의 실력만 따지면 전성기 기준 그랜트와 오클리는 비슷하거나, 골밑에서 더 터프하고 중거리슛 능력도 그랜트에 근접한 오클리가 더 가치가 있었지만 이 트래이드로 불스는 7-1이란 좋은 신장에 골밑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센터 빌 카트라이트를 구했다는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오클리와 그랜트를 둘 다 데리고 있었다면, 둘 다 센터를 소화하기 힘든만큼 당시 기준으로 훨씬 더 뛰어난 오클리를 중용해야했고 결국 그랜트란 유망주는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닉스의 경우 유잉-카트라이트 트윈타워는 둘 다 순수센터에 가깝고 기동력도 그렇게까지 좋진 못해(트윈타워는 적어도 둘 중 하나가 포워드급 기동력을 갖고 있어야 효용성이 있다) 생각보다 효율이 떨어지던 걸 파워 포워드 오클리와 바꾸면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결국 윈윈 트레이드.
이를 통해 닉스는 앞으로 팀의 중심은 유잉이며, 그를 통해 우승을 일궈낼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에서 닉스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바클리가 이끌던 필라델피아와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을 제치고 52승 30패라는, 전년도에 비해 파격적으로 상승한 승률로 애틀랜틱 디비전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만난 필라델피아를 3-0으로 스윕하면서 기대감을 높이던 닉스는 2라운드에서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시카고에게 2승 4패로 탈락,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권을 빼앗기고 유잉은 대학 시절의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다음 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긋지긋한 유잉과 닉스의 조던에 대한 악연의 시작점에 불과한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시즌, 닉스는 스투 잭슨을 코치로 맞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 해에 유잉은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게 되는데, 전 경기인 82경기를 출장하면서 28.6점, 10.9리바운드, 4블락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유잉은 처음으로 All-NBA First Team에 선정되는 경사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팀은 전년대비 하락한 승수에 머무르고 말았고, 진출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강팀 보스턴 셀틱스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2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승 4패의 성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에도 닉스는 유잉의 분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첫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3패로 스윕을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2.3. 갱스터의 결성, 그리고 조던. 조던. 조던.


연이은 플레이오프에서의 탈락로 좌절감을 맛보던 닉스와 유잉에게 더 이상 플레이오프 진출은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동부의 신흥 강호였던 시카고 불스가 첫 우승을 거둠으로써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80년대를 마감시킨 마당에 그들 또한 우승을 통해 리그의 명문으로 위상을 새롭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을 내딪기 위해 닉스 구단은 명장을 영입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팻 라일리였다. 80년대 매직 존슨을 앞세운 '''쇼타임 레이커스'''의 수장인 팻 라일리의 영입은 닉스 구단의 우승에 대한 열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리고 팻 라일리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밑그림을 팀에게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숨막히는 질식수비로 대표되는 90년대 닉스, 갱스터의 시작이었다. 화끈한 공격농구를 지향하던 팻 라일리의 레이커스와 정 반대되는 모습을 드러낸 닉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드러냈지만, 라일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색깔에 걸맞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 / 중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인다. 자비에 맥다니엘과 앤서니 메이슨, 존 스탁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메이슨과 스탁스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는 터라 닉스 구단과 라일리에 대한 팬들의 의구심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시즌, 돌아온 닉스는 그야말로 숨도 못쉬는 페인트존을 자랑하는 질식수비를 선보이며 승수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득점을 내줄바에는 파울을 안겨주마(...)라는 정신으로 하드파울과 거친 몸싸움 무장한 채 상대를 압도해나갔으며, 이 가운데에는 바로 뉴욕의 왕이자 닉스의 심장인 유잉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거친 농구를 펼치며 언제나처럼 진출한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그들은 숙적인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이전까지의 대결에서 닉스는 언제나 조던에게 페인트존을 유린당하며 넉다운 되는 매번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라일리는 어차피 조던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아래 스탁스와 윌킨스를 번갈아붙이며 외곽을 틀어막는 한편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조던이 페네트레이션을 시도할 경우 유잉을 중심으로 오클리, 맥다니엘, 메이슨 등이 페인트 존을 방어하며 점프를 뛰는 순간 샌드위치(...)로 압살하고, 이도저도 안될 경우 하드파울을 범하는 수비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시도하던 조던 룰과도 유사한 전략이었는데, 룰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거친 플레이를 통해 조던을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면서 그의 활약을 제한시키는 전략이었다.[23] 이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고, 최종전까지 가보지도 못하던 기존의 시리즈와 달리 최종 7차전까지 경기를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는 유잉이 경기중 발목을 삐어 절뚝거리면서도 골밑에서 잇달아 앤드원을 얻어내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유잉 커리어 중에서도 손꼽히는 순간 중 하나.[24]
그리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린 7차전. 고작 2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긴장감은 결승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유잉과 닉스는 이 경기를 통해 첫 왕좌로의 등극을 꿈꾸고 있었고, 전년도 우승팀인 시카고와 조던은 왕조 건설로 이어지는 2연패를 위한 여정에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탈락이라는 위기에 몰린 마이클 조던은 그 상황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조던은 42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 3블락이라는 기록을 내며 그를 전담마크하던 스탁스를 6반칙 퇴장시키고, 윌킨스와 유잉은 5반칙에 몰리도록 맹활약하며 110 대 81이라는 스코어로 닉스를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25] 유잉은 22점, 9리바운드를 따내며 분전했지만, 또 다시 조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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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18일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좌측 뒷열부터 시계방향으로, 찰스 바클리, 유잉, 칼 말론,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이러한 좌절을 겪고 난 오프 시즌 동안에는 유잉에게 즐거운 경험 또한 있었다. 시즌 종료 후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에서 유잉이 드림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NBA의 전설들이 함께한 드림팀에서 유잉은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센터로 활약하며 금메달을 획득한다. 유잉은 원래 자메이카 국적이었지만, 조지타운 대학에 진학할 때 미국 국적을 취득해서 드림팀 1에서 선발되는데 문제가 없었다. 라이벌이었던 올라주원은 드림팀 1 당시 여전히 나이지리아 국적을 지니고 있어서 선발되지 않았고, 후에 애틀랜타 올림픽이 벌어질 때 비로소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드림팀3에 선발될 수 있었다.
1992-93 시즌이 시작될 무렵, 닉스는 이제까지 활약해왔던 마크 잭슨 대신 닥 리버스를 영입하였다. 완숙미를 더해가던 유잉은 경기당 평균 24점, 12리바운드의 호성적을 거두며 팀을 이끌었고, 더불어 더욱 다져진 조직력을 과시하던 닉스는 이 해 60승, 7할대의 성적을 처음으로 거두며[26]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하고,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그렇게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인디애나 페이서스, 샬럿 호네츠를 완파하며 순항한 닉스는 또 다시 조던과 만나게 된다. 전년도의 아픔을 설욕하기 위해 전의를 다지던 닉스는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치뤄진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유잉은 25점 17리바운드, 26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카고의 페인트 존을 짓밟았고, 드디어 유잉과 닉스의 고난도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연이은 4경기에서 닉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조던을 보좌하던 피펜의 맹활약으로 인해 4연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결국 또 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2.2.4. 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1993-94 시즌, 조던이 3연패 이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닉스에게 동부 컨퍼런스는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파죽지세로 달린 시즌 동안 유잉은 전년과 같이 맹활약하였고,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2라운드에서 스카티 피펜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7차전에 이르는 혈투를 펼친 끝에 승리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지 밀러가 이끄는 페이서스와 7차전까지의 접전 끝에 승리한 유잉의 앞에 등장한 것은 바로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키츠였다. 대학시절 맞붙었던 사실과 현재의 경기들이 연일 매스컴에 비교 보도되는 떠들썩한 와중에 5차전까지 전적은 3승 2패로 닉스의 우위인 상태. 그러나 6차전에서 스탁스가 던진 슈팅이 올라주원에게 블락당하고, 연이은 7차전에서 스탁스가 1할대 야투율이라는 엽기적인 성공률을 보이는 상태에서 유잉은 패배하고, 올라주원은 오래전 아픔을 설욕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마지막 경기인 7차전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은 스탁스에게 있었지만, 5차전을 제외하면 시리즈 내내 올라주원에게 무력하게 밀리는 모습[27][28] 을 보인 유잉 또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이 부진의 이유를 분석해보면 닉스 팀을 떠나서 유잉 개인에게 휴스턴 로키츠란 팀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유잉은 하킴과 비교해 비교적 공격범위가 좁고 공격패턴이 단순했다. 그런데 당시는 둘 다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양 팀의 공격이 상당히 뻑뻑하게 돌아갔다(실제로 양팀 중 하나라도 100점을 넘긴 경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상시 유잉은 점퍼의 경우, 주 공격루트가 패스를 받아 넣는 방식이었는데, 휴스턴의 강한 팀 수비 때문에 좋은 패스를 받아 점퍼를 넣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1대1 공격을 많이 해야했다. 문제는 유잉이 1대1을 (특급선수들 중에선)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것. 하킴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풀어갔는데, 유잉의 경우 1대1에서 주 공격루트가 페이더웨이 혹은 러닝점프훅 등이 있었는데 전부 성공률이 높은 방법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의 점퍼는 4대 센터들 중에 가장 뛰어난 편이었지만 센터란 특성상 수비를 달고 쏘는 슛은 확률이 매우 낮았다. 결국 공격에선 답답한 모습만 보였던 것.
여담이지만 이듬해 휴스턴은 파워 포워드 오티스 쏘프를 트레이드하고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데, 드렉슬러의 존재로 확실한 2옵션을 얻었지만 대신 팀수비는 비교적 헐거워지게 된다. 94 시즌 로키츠는 NBA에서 팀 득점 전체 15위, 팀 실점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확실한 수비팀의 모습이었지만, 95 시즌엔 팀 득점은 전체 7위로 올라간 반면 팀 실점은 12위로 폭락하고 파이널에선 4경기 연속으로 올랜도 매직에게 100점 이상을 내준다. (반면 94시즌엔 닉스에겐 91점을 두번, 90점을 세번 내주고 나머지는 80점대/70점대 실점) 물론 매직 자체가 닉스보다 공격력이 훨씬 좋은 팀이긴 했지만 수비력 자체, 특히 쏘프의 부재로 골밑 수비력이 크게 떨어졌던 것. 만약 닉스가 95 파이널에 진출해 리벤지 매치를 벌였다면 적어도 유잉의 공격루트는 확실히 숨통이 트였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훨씬 더 좋은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한 끗 차이로 놓쳐버리고 만 우승은 이후 그의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이 때 닉스와 유잉이 6,7차전 중 한 경기만 잡아 우승에 성공했다면 유잉은 4대 센터 중 가장 먼저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는 엄청난 프리미엄 덕택에 최소한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승은 로키츠와 올라주원의 차지였고, 다음 시즌까지 우승을 차지해 마이클 조던에 이은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그 당시 4대 센터 서열에서 올라주원이 나머지 셋을 앞질러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에도 플레이오프에 나선 유잉과 닉스는 전년도의 설욕을 다짐하던 레지 밀러에게 MSG에서 맹폭격을 당하며 고배를 마시게 된다. 마지막 7차전 종료 직전 2점차에서 유잉이 날린 회심의 레이업슛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조차도 올라가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의 결과를 맞았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팻 라일리도 떠나버리고,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유잉에게 이제 우승은 그야말로 선수 생활의 황혼을 장식해줄 마지막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1995-96 시즌 돌아온 조던, 새로이 영입된 데니스 로드맨과 더불어 최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시카고 불스는 닉스를 가볍게 물리치며 희망을 또 다시 빼앗아 버렸다. 다음해 1996-97 시즌은 스승이었던 팻 라일리와 조지타운의 후배였던 알론조 모닝이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가,[29][30] 그 다음해에는 닉스 킬러로 자리매김한 레지 밀러의 페이서스가 유잉의 희망을 앗아갔고, 마이클 조던이 또 다시 3연패를 이룩하는 사이에 어느 덧 유잉은 그저 그런 강팀의 그저 그런 에이스이자 일상과도 같은 부상에 시달리는 퇴물센터 정도로 폄하되며 선수 생활의 황혼에 접어들고 있었다.

2.2.5. 사실상 마지막이었던 우승 도전의 기회. 그러나...


1997-98 시즌은 닉스가 젊은 유망주들 셋에 그해 뽑은 신인까지 4명을 모두 팔아치우고 즉시전력감인 크리스 더들리와 크리스 밀즈까지 데려오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우승에 도전했던 해였다. 우선 닉스는 FA가 된 유잉을 4년 6천 8백만 달러의 대형 계약으로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31] 또한 닉스의 약점이었던 유잉을 보좌할 수 있는 백업 센터로 포틀랜드의 주전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32], 찰스 오클리래리 존슨을 보좌할 프론트 코트의 제 3의 포워드로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주전 스몰 포워드로 활약하다가 오프시즌 보스턴 셀틱스와 FA 계약을 맺었던 크리스 밀즈를 데려왔다.[33] 타 팀의 주전 선수 두 명을 벤치멤버로 영입한 탓에 그 해 닉스는 백업 멤버들만으로도 웬만한 중위권 팀 수준의 주전 라인업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엄청난 뎁스를 자랑했다.[34] 유명 스포츠 전문지인 스포트 일러스트레이티드(SI)에서 시즌 개막 전 우승 후보로 또 한번의 3연패에 도전하는 시카고 불스가 아닌 뉴욕 닉스를 꼽았을 정도로 이 시즌 닉스의 기대감은 컸다.
'''그러나 닉스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이 닥쳐왔다! 달리 말하자면 유잉과 뉴욕의 마지막 남은 우승의 꿈이 그대로 날아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12월 20일 밀워키 벅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유잉이 2쿼터 종료 직전 덩크를 시도하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매치업 상대인 앤드류 랭의 파울로 코트에 넘어질 때 오른손이 자신의 몸에 깔려버리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당시 부상 직후 장면) 오른손을 쓰지 못해 왼손으로만 자유투 2개를 던진 뒤(당연히 둘 다 실패) 바로 코트를 떠나 병원행. 진단 결과 손목이 골절되고 인대가 찢어져버린 큰 부상으로 재활에만 최소 6개월에서 최대 9-12개월 이상이 걸리는 치명적인 중상이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유잉의 선수 생명에 확인사살을 가할 수도 있는 마지막 결정타였다. 그 전까지 10년 동안 겨우 20게임만 빠졌을 정도로 건실하게 닉스의 골밑을 지켜줬던 유잉이 없는 채로 시즌을 치른다는 것은 닉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잉은 시즌 아웃되었고 다음날 전 세계 언론의 NBA 소식 머릿기사가 '''"유잉과 닉스의 우승의 꿈은 이로서 끝났다"'''였다.
선수 생활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고통받았던 유잉이었지만 이런 시즌 아웃급 부상은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유잉의 나이로 보나, 미래를 포기하고 그 시즌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팀 사정으로 보나 사실상 마지막 우승 도전 기회나 다름없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부상이었다. 슛을 던지는 오른손의 손목 부상은 이미 노장 센터가 되어버린 유잉이 가진 유일한 경쟁력이었던 미드레인지 점퍼의 정확도마저 앗아가버리는 슬픈 결과를 낳았다. 올스타 투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부상으로 올스타전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애석한 것은 하필 이 해 올스타전이 본인 선수 생활 가운데 유일하게 닉스의 홈구장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올스타전이었다는 것. 유잉은 염원하던 우승의 꿈 뿐만 아니라, 뉴욕의 홈팬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주전 센터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은 꿈마저 날려보내야만 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은 우승에 대한 꿈과 열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도 출전이 불가능한 시즌 아웃급 부상이었지만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꼭 돌아오겠다며 동료들에게 어떻게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부상 이후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벤치에서 팀 동료들을 응원했다. 유잉이 부상당한 직후 잠깐 휘청거렸던 닉스는 전열을 추스르고 다시 승수를 쌓아나가기 시작, 결국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2번 시드 마이애미 히트와 난투극까지 불사하는 결전 끝에 업셋을 달성하고 2라운드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상대는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였고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시리즈 2차전 원정경기에서 드디어 스타팅 센터로 복귀한 것이다. 6개월만의 복귀로 경기 감각이 저하돼 시리즈 동안 야투율이 35%밖에 되지 않는 등 고전했지만, 정규시즌보다 더 치열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경기당 33분을 출전하며 평균 14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유잉이 정상 컨디션으로 뛰지 못하는 닉스에게 페이서스는 버거운 상대였고 닉스와 유잉은 또 한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분루를 삼킨다.

2.2.6. 기적의 8번 시드, 기적의 파이널행


1998-99 시즌, 선수노조의 파업에 의한 직장폐쇄로 인해 단축시즌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유잉은 이미 전성기의 실력을 잃었고, 농구선수에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팀 또한 더 이상 유잉에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고, 슈팅 가드인 앨런 휴스턴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에 오랜 동료였던 스탁스와 오클리를 보내고 라트렐 스프리웰이라는 걸출한 슈팅 가드를 영입해 트윈 테러를 결성함과 동시에 더불어 젊은 센터 마커스 캠비를 영입하면서 유잉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시즌, 유잉은 캠비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전 센터로 출장했다. 전년에 비해 현격히 감소한 득점력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유잉은 여전히 골밑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그를 통해 공격을 책임지는 트윈 테러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하지만 시즌을 치를수록 아킬레스건 부상이 악화되어 가던 유잉은 시즌 개막 후 약 한달 뒤 밀워키 벅스전에서 점프볼 후 착지 과정에서 아킬레스건에 충격을 입고 그대로 경기에서 이탈 한 뒤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며, 유잉의 이탈 후로 팀 성적 또한 곤두박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를 놓고 다퉈야만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유잉의 컴백과 함께 다시 승수를 쌓아나가기 시작하며 샬럿 호네츠를 1게임차로 간신히 따돌리고 결국 막차인 8번시드를 획득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시작된 플레이오프. 8번 시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마이애미 히트는 팻 라일리의 지휘 아래 알론조 모닝과 팀 하더웨이를 주축으로 그 옛날 닉스만큼 전투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마이애미의 원-사이드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유잉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수비에 집중하며 팀을 이끌었고, 특히 최종전이었던 5차전에서 알론조 모닝을 공수에서 압도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8번 시드로 1번 시드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특히 유잉은 이 당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사실상 공격에서는 거의 참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수비에서는 그야말로 상대를 압살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사실상 뛸 수 없던 상태였음에도 무려 32분여를 출전하면서 9점 15리바운드 4블록을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 이후로도 5차전까지 전 경기를 출전한 것도 모자라 5차전에서는 무려 40여분을 출전하며 22점 11리바운드를 기록, 무려 NBA 역사상 1번 시드를 1라운드에서 격파한 2번째 팀이 됐다. 1라운드에서 1번 시드를 꺾으며 사기가 오른 닉스는 상위 시드인 애틀랜타 호크스를 4연승으로 스윕시키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정규시즌 성적은 단연 애틀랜타의 우위였고 수비의 핵 디켐베 무톰보를 축으로 탄탄한 전력을 구축한 팀이었지만, 당시 이미 인간탈환의 경지를 넘어선 유잉의 인간승리와 닉스의 신들린 플레이에 애틀랜타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4게임 연속으로 완패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인디애나와의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에서 유잉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보일 정도로 아킬레스건 상태가 좋지 못했다. 심지어 주변 지인들 마저 "왜 몸상태가 저지경인데 아무도 말리지 않느냐."는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 심지어 고질적인 부상 부위였던 무릎 부상도 다시 악화되면서 사실상 공격 가담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유잉은 그 몸으로 무려 40분을 뛰며 16득점 10리바운드로 인사이드를 지키며 팀의 선승에 공헌했다. 선수 시절부터 소름끼칠 정도의 냉정함과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페이서스 감독 래리 버드마저도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벙찐 표정으로 '''"유잉의 아킬레스건 부상에 대해서는 이골이 날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유잉이 정말 부상 선수가 맞긴 한거냐? 만약 우리팀의 릭 스미츠가 오늘 그처럼 뛰었다면 앞으로 우린 그를 1년 동안은 볼 수 없었을 거다."''' 라는 말로 팀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팀 주전 선수까지 디스해가며 유잉의 투혼을 이례적으로 칭찬하였고, 레지 밀러 또한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2차전에서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다. 유잉은 그 다음 2차전에도 변함없이 출전했으나 이미 그의 신체능력과 정신력은 한계점을 한참 지나간지 오래였다. 그 전부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시한폭탄같았던 그는 결국 2차전에서 무릎, 아킬레스건에 동시다발적으로 빨간불이 들어오고 만다. 유잉은 2차전에서 경기 종료 2초 전 와이드 오픈 찬스로 역전 찬스를 잡았지만, 그는 이미 무릎과 아킬레스건이 마비되다시피 하여 아예 하체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상체와 양쪽 팔(그나마도 오른쪽 손목 역시 전 시즌 치명적인 골절, 인대 부상으로 사용이 거의 불가능했던 수준이었다)로만 슛을 던졌다. 이 슛은 결국 여지없이 빗나갔고, 이것은 사실상 유잉의 시즌 아웃을 의미했다. 닉스 팬들은 역전을 하지 못한 것 보다 더 이상 유잉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지어 2차전이 끝나고 난 후 더 이상 출장을 강행한다면 농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의료진의 경고까지 받게 되었고, 유잉은 이후 3차전부터는 더 이상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고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의 투혼에 사기가 오른 닉스는 래리 존슨과 마커스 캠비의 분전을 앞세워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8번 시드로는 사상 최초로 파이널에 진출하는 전율의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기적의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의 역사를 달성할 즈음엔 전 세계의 농구팬들이 뉴욕 닉스의 투혼에 감동하였고, 파이널 상대팀인 스퍼스 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28팀 팬들 대부분이 대동단결하여 닉스를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파이널에서도 출전할 수 없었던 유잉이었지만, 늘 닉스 라커룸에는 가슴 부위에 선명하게 1999 NBA 파이널 패치가 붙은 유잉의 유니폼이 걸려있었다. 코트에서 함께 뛰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코트 위의 동료들과 함께 하겠다는, 간절히 우승을 염원하는 유잉과 동료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파이널을 앞둔 닉스는 리더인 유잉을 잃어버린 데 이어, 컨퍼런스 파이널 승리의 1등 공신이었던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마저 각각 가정사와 등부상 악화로 인해 파이널 기간동안 제대로 된 컨디션으로 뛸 수가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건재했지만, 프론트 코트가 초토화된 닉스에게 있어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의 트윈 타워를 앞세운 스퍼스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모든 전문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스퍼스의 우승을 점쳤다. 단 한명의 전문가만이 닉스의 우승을 점쳤을 뿐으로 역대 파이널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원사이드한 예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감독 제프 밴 건디의 전술과 백업 멤버들의 투혼으로 매 경기를 접전으로 몰아가며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언제나 그랬듯이 코트를 휘저었고, 정상 컨디션이 아닌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을 대신해 크리스 더들리와 커트 토마스가 스퍼스의 트윈 타워를 맞아 악착같이 버텨냈다. 하지만 결과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무르며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고, 그렇게 유잉의 마지막 파이널은 끝이 나고 말았다.[36] 하지만 상대팀인 스퍼스 선수들도 닉스의 투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리오 엘리는 우승 달성 후 "만약 패트릭 유잉과 래리 존슨이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을 것이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는 말로 닉스를 인정했다. 한 마디로 팀과 우승이라는 목적 아래 인간탈환의 화룡점정을 찍은 유잉과 유잉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인간승리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든 뉴욕은 "불가능이란 없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라는 격언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솟구치게하는 기적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2.2.7. 마지막 불꽃, 그리고 쓸쓸한 은퇴


다음 시즌인 1999-2000 시즌에도 유잉은 여전히 닉스에서 뛰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당했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유잉은 시즌 초반 20경기를 결장하였고[37], 12월 10일 필라델피아와의 홈경기에서 간신히 컴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38세의 노장이었던 유잉은 그 컴백 이후 정규시즌 동안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고 남은 62경기를 모두 선발로 출전하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더 이상 전성기와 같은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공격에서는 스스로 트윈테러에 이은 제 3옵션을 자처했고, 대신 유잉은 리바운드와 블로킹, 박스아웃에 집중하며 여전히 닉스 프론트 코트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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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경기가 끝날 때 마다 유잉은 골절 부상을 입었던 손목과 이미 연골이 다 닳아서 없어져버린 양쪽 무릎을 얼음팩으로 둘둘 말고, 아킬레스건을 다친 발목 부상 부위는 얼음통에 담그고 있어야 하는 처참한 몰골이었고, 진통제까지 써야할 정도로 몸상태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그는 매 경기당 32.8분을 소화하며 경기당 평균 15득점 9.7리바운드로 더블-더블에 준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4대 센터 가운데 유잉과 같은 나이에 유잉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한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잉과 같은 나이대의 올라주원 44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3.8분 10.3득점 6.2리바운드, 데이비드 로빈슨 64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6.2분 8.5득점 7.9리바운드, 샤킬 오닐 53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3.4분 12득점 6.7리바운드. 4대 센터 중 가장 평가가 낮은 유잉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늦은 나이까지 더블-더블이 가능한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는 유잉이었다. 나머지 세 선수가 선수 생활 전반을 운동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해왔던지라 30대 후반에 그만큼 낙폭이 컸던 것에 비해, 이미 데뷔 초 무릎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모두 상실했던 유잉은 그 때부터 신체능력보다는 철저한 기본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많은 나이와 만신창이가 된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저런 준수한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
모두가 닉스의 우승은 안된다고,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유잉 그 자신은 우승이라는 선수 생활 마지막 목표를 향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졌다. 기자들이 우승에 대해 물을 때마다 유잉은 "시즌이 끝난 다음에 얘기합시다. 그 때쯤이면 내 손엔 챔피언 반지가 끼워져 있을테니까." 라는 말로 일축하며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했다. 당시 닉스의 담당 기자 중 한 명은 '''이미 농구선수로 뛸 수 있는 몸이 아니지만 게임에 대한 열정이 그를 뛰게 만들고 있다'''는 말로 유잉의 정신력을 극찬하였다. 그 시즌 초반 불의의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던 또다른 무관의 제왕 찰스 바클리 도 유잉을 일컬어 '''설령 유잉이 챔피언십 트로피를 뉴욕으로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유잉의 활약으로 닉스는 세 시즌만에 다시 정규시즌 50승 고지를 탈환하며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빈스 카터트레이시 맥그레디가 이끌던 토론토 랩터스. 워낙 당시 카터의 퍼포먼스가 쩔었고 마침 닉스는 정규시즌에서 토론토에 1승 3패로 열세였던지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낸 토론토의 사기는 무척 높았고 업셋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던 시리즈였다. 하지만 유잉과 닉스는 토론토를 3연승으로 스윕시켜버리며 관광을 보내버린다. 그리고 다음 2라운드의 상대는 4년 연속으로 만나게 된 라일리의 히트. 닉스와 히트는 다시 한 번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끝에 결국 닉스는 7차전에서 83-82의 1점차 승리를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유잉은 무려 42분을 뛰며 15득점 18리바운드, 최종 7차전에서는 20득점 10리바운드 2블록슛과 더불어 결승점이 되는 역전 투핸드 덩크를 작렬시키며 위기상황에서 앞장서 팀을 이끌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또 다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만나게 되었다. 인디애나는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닉스 또한 주전과 백업 가리지 않고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을 위해 허슬도 불사하며 맞불을 놓았다. 4차전까지 시리즈 스코어는 서로 2승 2패를 기록했지만 레지 밀러와 제일런 로즈의 불붙은 공격력 앞에 결국 5차전과 6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2승 4패로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6차전 종료 직전 MSG의 뉴욕팬들은 자기팀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쳐주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격려해 주는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아쉽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페이서스에 패배했지만 유잉은 또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닉스를 이끌어 가려 하였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몇년 전부터 일부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불거져나온 유잉 무용론을 비롯해 트윈 테러를 주축으로 리빌딩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팀은 유잉을 트레이드하는 방안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많은 루머들이 양산되며 유잉을 들쑤시게 되었는데 유잉 본인도 이제 이런 반응들에 질렸다면서 트레이드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지경까지 갔음에도 대부분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유잉을 트레이드하겠느냐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몇몇 제안이 틀어져서 잔류하는가 싶었으나...
2000-01 시즌을 얼마 앞두지 않은 9월말, 닉스의 GM인 스캇 레이든[38]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다. 패트릭 유잉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 시켜버린 것이다![39] 15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뛰어온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를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이 결정에 팬들은 분노하였고, 유잉은 그렇게 정든 팀을 떠나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주전 센터로 새 시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시애틀은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에 맞서 인사이드를 지켜줄 센터를 절실히 원했고 그 결과 유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유잉은 노쇠화와 부상 후유증 덕택에 제한적인 플레잉 타임만을 소화할 수 밖에 없어 기대한 만큼의 활약은 해 주지 못했다.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15년을 헌신적으로 뛰어온 친정팀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가 내성적인 성격의 유잉에게는 그의 얼마 남지 않은 기량마저 좀먹는 요소였으리라.
그러나 한국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유잉이 트레이드된 것은 '''본인의 의사'''였다. 트레이드 당시 기사를 보면 https://nypost.com/2001/12/09/why-ewing-wanted-out-of-new-york/amp/ 위에 언급된 유잉 무용론을 포함해 온갖 말도 안되는 비난에 질린 유잉이 2000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팀은 "시즌 종료될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트레이드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 시킨 것. 또한 유잉은 2016년에 Fox Sports와 가진 인터뷰에서도(https://www.foxsports.com/nba/story/patrick-ewing-new-york-knicks-trade-033016) 당시 팀동료들로부터 "유잉이 없는게 낫다"는 뒷얘기가 나와 질린 나머지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전했다. 즉, 사실 스캇 레이든과 뉴욕 프런트는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한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대체할 센터가 없었던 닉스는 유잉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게 이때 트레이드를 보면 닉스는 기껏 받아온게 전성기가 한참 지난 스윙맨 글렌 라이스였고 나머지는 허접쓰레기들 뿐이었다. 심지어 라이스는 당시 트윈테러가 있던 뉴욕 입장에서 필요한 선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이 당시 과한 연봉을 받고 있었다고는 하나 고작 1년만 지나면 만기가 되는 상황이었다. 즉, 닉스 입장에서 저딴 매물들을 받고 프랜차이즈 스타를 팔아버렸다는 것만 봐도 이 트레이드의 주요 목적이 오직 급하게 유잉을 보내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유잉은 트레이드를 요구한 걸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이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유잉은 올랜도 매직과 2년 계약을 맺었다. 이미 그랜트 힐이 33번을 달고 있어 본인은 3+3이자 드림팀 1당시의 배번인 6번을 달고 활약했다. 비록 전성기의 실력은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지만, 데뷔 후 커리어 최초로 백업 센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온전히 팀에 헌신하였고 가끔씩 전성기의 실력을 뽐내며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기도 해 클래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2001-02 시즌 종료 후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만족할만한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우승과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만은 정말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은퇴 직후 그 분이 계신 워싱턴 위저즈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2003년 2월 28일 뉴욕 닉스의 홈경기에서 공식 은퇴식과 함께 그의 배번 33번이 영구결번되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I always will be a knick, I always will be a New Yorker. Thank you very much."
[image]
뉴욕의 심장 유잉이 은퇴 직전 타향살이 중에 만난 휴스턴 로키츠의 레전드 하킴 올라주원과 펼치는 안습 대결 한 컷.[40]

2.2.8. 유잉 무용론(Ewing Theory), 일리가 있는가?


사실 유잉은 좋은 스탯에 비해 실제 경기에서 영향력은 그리 높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잉이 없었을때 닉스가 더 나은 경기력을 발휘했다는 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년에 기량이 심하게 떨어진 유잉은, 상성에서 밀리는 일부팀과 경기에서 기용을 제한적으로 하는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말년의 유잉이라도 평균 이상의 좋은 선수였고, 커리어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말도 안되는 소리'''일 뿐이다.
유잉 무용론을 언급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빌 시몬스이다.[41] [42] 시몬스는 유잉이 빠진 닉스가 좋은 성적을 기록한 적이 있다는 걸 계기로 "스타 선수가 빠지고, 팬들/언론에서 끝났다고 하는데 오히려 팀은 잘 나갈 수 있다"는 Ewing Theory를 언급했다.[43] 또 그는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본인이 아닌 친구 "Dave Cirilli"를 언급했다.

2.2.8.1. 유잉 무용론의 배경

유잉 무용론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99년 플레이오프, 동부컨퍼런스 결승이었다. [44]
당시 상황을 정리하자면, 닉스와 페이서스는 둘 다 당시 하프코트 팀이었다. 페이서스는 마크 잭슨이 볼을 피딩 해주면 릭 스미츠-데일 데이비스/안토니오 데이비스(후보)가 스크린을 걸어주는 사이 크리스 멀린과 레지 밀러가 볼을 받아서 슛을 쏘는 득점을 하는 구조였다. 닉스는 에이스 패트릭 유잉의 포스트업을 중심으로 커트 토마스가 파워 포워드로 받혀주고, 찰리 워드가 볼을 피딩하고 앨런 휴스턴-래리 존슨 듀오가 득점을 지원, 벤치에서 라트렐 스프리웰이 활기를 불어넣는 팀이었다.
그런데 이때 2차전 이후 부상으로 유잉이 빠지자 일시적으로 커트 토마스-크리스 더들리 체제로 갔다가 아예 더들리를 센터로 세우고 당시 스몰 포워드였던 래리 존슨이 파워 포워드로 올라가고, 백업이었던 스프리웰을 스몰 포워드로 기용하는 스몰라인업을 세운 것이다.
문제는 당시 페이서스는 마크 잭슨-레지 밀러-크리스 멀린 트리오가 모두 30대 중반이라 운동능력이 떨어져서 20대 후반이던 라트렐 스프리웰-앨런 휴스턴의 에너지 넘치는 백코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존슨은 원래 파워 포워드였던 선수라 오히려 스몰라인업의 4번으로 빛났다. 저렇게 되니 페이서스는 상성에서 밀리며 남은 네 경기에서 1승3패로 밀리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 스몰라인업의 위력을 본 닉스는 다음 시즌 스프리웰을 주전 SF로 올리고 (그전까지 그는 슈팅 가드가 주 포지션이었다), 존슨을 붙박이 주전 PF로 쓰게 된다. 물론 센터는 유잉.
문제는 위에 언급된대로 2000시즌에 페이서스와 플옵에서 재대결이었다. 앞서 언급된 대로 늙고 느린 페이서스는 오히려 유잉 위주의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는 감당할 수 있었으나[45], 에너지 넘치는 닉스의 스몰라인업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컨퍼런스 파이널 6경기동안 닉스는 유잉이 빠진 두 경기(3,4차전)를 모두 이긴 반면, 유잉이 뛴 네 경기(1, 2, 5, 6차전)를 전패하고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고 유잉 무용론은 절정에 달했다.
이를 근거로 시몬스는 다른 유잉 이론의 해당자를 언급했다. 여기서 언급된 선수들은 97년 드래프트에서 팀 던컨에 이어 2순위로 지명된 키스 밴 혼, 대학 시절의 페이튼 매닝, 켄 그리피 주니어, 엘진 베일러 등이 있다.

2.2.8.2. 타당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유잉의 활약으로 이길 수 있엇던 경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유잉이 없이 이긴 경기에만 초점을 맞춘 지극히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보는 결과론이다.
일단 당시 99년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자. 위에서 언급된 대로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상성상 빠르고 다이나믹한 스몰라인업엔 쥐약이었던 팀이었다. 실제로 당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는(말년이라 발이 늦어진) 유잉이 주전 라인업에서 빠지는게 더 유리하다.
하지만 다른 팀을 상대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 스몰라인업의 센터였던 크리스 더들리나 커트 토마스가 '''샤킬 오닐과 매치업할 수 있겠는가?'''[46] 더 중요하게는 97년부터 4년 연속 혈투를 벌였던 마이애미 히트의 알론조 모닝과? 그리고 이처럼 센터가 강한 팀과 매치업했을 때 유잉이 없이는 에로사항이 꽃이 핀다. 유잉이 없었다면 당시 오닐을 제치고 올NBA퍼스트팀에 올르는 등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모닝을 닉스가 넘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47] 그리고 이 동부를 평정하고 파이널까지 올라온 닉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패배하는 것도 유잉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페이서스는 골밑 공격력이 비교적 약한 점프슈팅팀이라[48] 사실상 센터없이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성의 중요한 예로, 07시즌 당시 MVP 디르크 노비츠키가 이끌던 67승의 댈러스 매버릭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1라운드에 패배했는데, 그렇다면 매버릭스는 허접스레기 정규시즌용 팀일까? 전혀 아니다.[49]
무엇보다 이 이론은 당시 경기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에게조차 빈축을 샀다. 당시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는 유잉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멍청이들(fools)' 이라는 한 마디로 종결을 지었으며, 트윈 테러의 한 축이었던 라트렐 스프리웰 또한 '유잉 없이 이긴 경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유잉 없이 게임을 뛰는 것은 유잉과 함께 뛰는 경기보다 몇 배는 힘이 든다'고 점잖게 일침을 놓았을 정도.
실제로 99년 히트와의 플옵 최종전에서 앨런 휴스턴의 0.4초 버저비터로 극적인 업셋을 달성한 경기에서는 모닝을 압도했던[50] 유잉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런 클러치 상황을 만들 수조차도 없었고, 이듬해 히트와의 플옵 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뒤진 일리미네이션에서 두 경기동안 35득점 28리바운드를 쓸어담으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결정적으로 유잉이 떠난 후 글렌 라이스를 데려와 트리플 테러를 구축했던 2001년에 정규시즌 성적의 하락은 물론, 플레이오프에서도 근 13년만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맛보며 기나긴 닉스 암흑기의 서막을 알렸다.
애초에 이렇게 눈 앞의 승패 기록만 보고 판단하는 건 변화무쌍하며 온갖 변수가 있는 농구란 스포츠의 특성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농구가 비록 야구나 축구보다 변수가 적다고 하나 96시즌에 72승 거두던 챔피언 팀 불스가 꼴찌팀 랩터스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같은 팀의 전력이라도 컨디션이나 상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이 시리즈에서 이긴 경기나 진 경기가 모두 동일한 조건(양 팀 선수들의 컨디션, 전술 등)에서 벌어지고 딱 유잉의 존재 유무만 차이가 난게 아닌 이상 이걸 갖고 "유잉이 없으니 이겼네?"라고 하는 건 1차원적 발상이다. 같은 선수라도 컨디션에 따라 10점 넣고, 40점 넣는 등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유잉 무용론은 겉으로 드러난 승-패 기록, 스탯만 보기 때문에 실제 경기 내용은 반영하지 않는다. 유잉은 당시까지만 해도 포스트업에서 위력적인 선수였고, 그가 골밑에 있기만 해도 수비가 몰려 스프리웰같은 돌파위주 선수들에게 숨통이 트인다. 또한 집중수비를 받는 주득점원이 해주는 득점은 아무 수비 없이 받아먹기로 하는 득점과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전성기급 수비력은 아니었지만 7피트 신장에 훌륭한 수비센스를 갖고 있는 유잉이 골밑에서 버티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
추가로 이 유잉 무용론을 커리어 전체로 확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더더욱 생억지다. 페이서스와 상성 문제가 불거진 유잉은 만 37세로 느려질대로 느려진 선수였다. 이때 유잉이라면 상대에 따라 기용을 제한하는 게 말이 될 수 있지만 전성기 때 유잉은 기동력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전성기가 지나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동력이 저하된 이후에도 아주 말년(만 36~37세 부근) 전까진 기동력 저하가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워낙 하프코트에서 위력이 강했기에... 당장 만 35세에 가깝던 97시즌에 올 NBA 세컨드 팀에 들엇던게 유잉이었다. 샤킬 오닐이 유잉에 밀려 이 시즌 서드팀에 그쳤을 정도. 그런데 그 오닐만 하더라도 발이 심하게 느려진 2000년대 중반까지 최정상급 선수로 위용을 보였다. 아무리 발이 늦어서 속공시 애로사항이 생긴다고 해도, 하프코트에서 상대방을 박살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유잉 무용론은 '''말년의''' 유잉이 '''일부 팀들'''을 상대로 상성에서 밀려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이지, 진짜 유잉이 없어야 팀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다.
또한 위의 유잉 무용론의 예시로 된 선수들의 케이스가 모두 타당한 것도 아니다(농구선수 항목이므로 여기선 농구선수들만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베일러의 경우, "그가 72시즌 초반에 은퇴하자 레이커스는 33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면서 그를 과대평가받은 선수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시 베일러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실력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선수였다'''. 베일러가 슈퍼스타급 실력을 발휘한 건 사실상 70시즌이 마지막이었다(24점 10.4리바운드). 그 다음 시즌에 그는 부상으로 2경기에서 10점 5.5리바운드에 그쳤으며, 72시즌엔 9경기 11.8점 6.3리바운드에 그쳤다.
즉, 유잉 무용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베일러가 화려한 스탯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팀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가 은퇴했음에도 팀이 우승했다"가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실력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팀에 도움이 못 됐었다"가 맞는 것이다.
위대한 선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기량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스스로 현실을 인정하고 작아진 롤을 감수하며 팀에 헌신하는 모습이야말로 베테랑의 품격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유잉 또한 닉스에서의 말년 시절엔 1, 2옵션을 앨런 휴스턴과 라트렐 스프리웰에게 양보하면서 공격에서의 롤을 대폭 줄이고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스탯상으로는 경기당 평균 15.0득점 9.7리바운드로 크게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년의 모습을 두고 과대해석하며 "봐라. 명성에 비해 실제 공헌도는 형편없네"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유잉 무용론의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다. 해당 슈퍼스타가 잘해서 팀이 잘했을 때, 또한 그 선수가 빠져서 팀이 힘들었을 때는 안 보고, '''이 이론에 맞는 일부 케이스만 보고 전체인양 부각시킨다는 것.''' 유잉의 경우, 그가 빠져서 잘 나갔을 때는 말년에, 그것도 일부 경기에서밖에 없다. 베일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걸 갖고 전체인양 확장하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유잉의 리더쉽과 그의 가치에 대한 본 한 국내팬의 글

3. NBA Career Statistics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85-86
50
35.4
.474
.000
.739
20.0
9.0
2.0
1.1
2.1
3.4
.526
17.4
86-87
63
35.0
.503
.000
.713
21.5
8.8
1.7
1.4
2.3
3.6
.549
18.9
87-88
82
31.0
.555
.000
.716
20.2
8.2
1.5
1.3
3.0
3.5
.594
21.9
88-89
80
36.2
.567
.000
.746
22.7
9.3
2.4
1.5
3.5
3.3
.607
22.1
89-90
82
38.6
.551
.250
.775
28.6
10.9
2.2
1.0
4.0
3.4
.599
25.8
90-91
81
38.3
.514
.000
.745
26.6
11.2
3.0
1.0
3.2
3.6
.561
23.7
91-92
82
38.4
.522
.167
.738
24.0
11.2
1.9
1.1
3.0
2.5
.563
22.8
92-93
81
37.1
.503
.143
.719
24.2
12.1
1.9
0.9
2.0
3.3
.546
20.8
93-94
79
37.6
.496
.286
.765
24.5
11.2
2.3
1.1
2.7
3.3
.551
22.9
94-95
79
37.0
.503
.286
.750
23.9
11.0
2.7
0.9
2.0
3.2
.555
21.9
95-96
76
36.6
.466
.143
.761
22.5
10.6
2.1
0.9
2.4
2.9
.516
20.9
96-97
78
37.0
.488
.222
.754
22.4
10.7
2.0
0.9
2.4
3.4
.548
21.3
97-98
26
32.6
.504
.000
.724
20.8
10.2
1.1
0.6
2.2
3.0
.557
23.3
98-99
38
34.2
.435
.000
.706
17.3
9.9
1.1
0.8
2.6
2.6
.491
19.4
99-00
62
32.8
.466
.000
.731
15.0
9.7
0.9
0.6
1.4
2.3
.516
16.9
00-01
79
26.7
.430
.000
.685
9.6
7.4
1.2
0.7
1.2
1.9
.478
12.9
01-02
65
13.9
.444
.000
.701
6.0
4.0
0.5
0.3
0.7
1.0
.497
14.4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87-88
4
38.3
.491
.000
.864
18.8
12.8
2.5
1.5
3.3
2.8
.562
20.7
88-89
9
37.8
.486
-
.750
19.9
10.0
2.2
1.0
2.0
1.7
.536
19.1
89-90
10
39.5
.521
.500
.823
29.4
10.5
3.1
1.3
2.0
2.7
.579
25.4
90-91
3
36.7
.400
-
.778
16.7
10.0
2.0
0.3
1.7
3.7
.472
10.3
91-92
12
40.2
.456
.000
.740
22.7
11.1
2.3
0.6
2.6
1.9
.502
19.9
92-93
15
40.3
.512
1.000
.638
25.5
10.9
2.4
1.1
2.1
2.6
.535
21.6
93-94
25
41.3
.437
.364
.755
21.9
11.7
2.6
1.3
3.0
3.3
.495
20.6
94-95
11
36.3
.513
.333
.686
19.0
9.6
2.5
0.5
2.3
2.7
.559
18.9
95-96
8
41.0
.474
.500
.651
21.5
10.6
1.9
0.1
3.1
3.8
.522
18.1
96-97
9
39.7
.527
.000
.643
22.6
10.6
1.9
0.3
2.4
3.0
.547
21.0
97-98
4
33.0
.357
-
.593
14.0
8.0
1.3
0.8
1.3
2.5
.412
10.7
98-99
11
31.5
.430
-
.778
13.1
8.7
0.5
0.6
0.7
0.9
.477
17.0
99-00
14
32.9
.418
-
.697
14.6
9.5
0.4
1.1
1.4
1.9
.488
17.9
01-02
4
16.8
.324
.000
.588
6.5
5.5
1.0
0.3
1.0
0.5
.400
13.8


4. 플레이스타일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지만 이른바 4대 센터[51]라고 불리는 센터 중 하나이다.
NBA에서 83~87년 5시즌 연속으로 드래프트 전체 1위로 지명된 센터중 1명으로 224cm의 엄청난 키에도 뛰어난 스피드로 휴스턴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불과 3시즌만에 무릎이 망가지며 단명한 83년 드래프트 1위 랄프 샘슨, 그 랄프 샘슨과 트윈 타워를 이루었으며 화려한 피벗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인 84년 드래프트 1위 하킴 올라주원, 85년 패트릭 유잉, 부상으로 롱런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패싱센스와 득점력을 보여준 86년 전체 1위 브래드 도허티, 빠른 스피드로 페이스업과 속공을 즐기는 87년 드래프트 전체 1위 데이비드 로빈슨[52]으로 이어지는 특급 센터 계보중 한명으로 유잉은 테크닉, 스피드, 파워 어느 카테고리에서도 독보적인 우위를 가진건 아니었지만[53], 기본기에 충실하고 골밑 안정감이 뛰어난 센터이자, 센터의 교과서이자 이상적인 모델로 불린다. 샤킬 오닐 등장 이전에는 가장 강력한 파워 센터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커리어 전성기때는 큰 보폭으로 치고 들어가는 드랍 스텝에 이어 바로 덩크로 찍어버리는 공격루트를 많이 보여줬다.[54] [55]
젊은 시절 무릎 부상 이후로는 공격의 다변화와 골밑 공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드레인지 슈팅을 장착하였는데, 유잉의 슛은 릴리즈포인트가 높은데다가 릴리즈 순간을 의도적으로 매우 늦게 가져가 상대 선수가 알고도 블로킹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비거리까지 매우 길어 3점 라인 근처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으며 심심찮게 3점슛까지 꽃아넣을 정도였다. 이 미들점퍼 하나만큼은 4대 센터 중에서도 단연 탑으로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덤으로 센터 중에서도 매우 정확한 핑거롤과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 슛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투스텝 돌파를 제일 잘 쓰던 선수이기도 했다.[56]
최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는 다른 4대 센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운동능력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 속공농구에도 제법 강세를 보일 정도였다. 특히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과의 호흡이 환상적이어서 잭슨과 함께 뛰던 90 시즌엔 경기당 무려 28.6점까지 올리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퍼스트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91-92 시즌부터 득점력이 25점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기량의 저하는 아니고 이때부터 부임한 감독 팻 라일리가 기존 스튜 잭슨 체제의 빠른 농구를 버리고 수비 위주의 느린 페이스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과 프로 시절의 유잉이 가장 다른 점은 순간움직임이다. 대학 시절 유잉은 점프력/민첩성/파워 면에서 그야말로 괴물이었다.[57] 그러나 지속된 부상은 그의 운동능력을 많이 앗아갔고, 프로 중반부터는 무릎이 워낙 안 좋아서 재빨리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성에 비해서 리바운드가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리바운드는 높이도 중요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데(특히 공격리바운드) 좀 굼뜬 편이라 높이나 파워에 비해 그렇게 잘 잡는 편은 아니었다.
수비의 경우 라이벌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에 비해선 한끝 떨어지는 편이었다.[58] 그러나 기본적으로 높이[59]와 파워를 둘 다 갖추고 있어서 1대1 수비에서 매우 강했으며, 하킴이나 제독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센스가 매우 뛰어나서 도움수비를 포함한 팀 수비에서도 일급이었다.[60] 특히 시리즈 30블럭을 기록했던 1994년 파이널에서 휴스턴 선수들이 골밑으로 들어오는 족족 신들린 듯 쳐내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닉스는 90년대 최강의 수비팀이었으며, 이 팀에서 최고의 수비수이자 팀 수비의 핵은 바로 유잉이었다.
실제로 유잉은 루키 시즌부터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는 선수였지만, 그가 데뷔할 당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그를 "수비 전문 선수(defense specialist)"라고 부르고 있으며 "프로농구가 공격력을 보이는 시대가 된 마당에, 압도적인 수비력을 통해 게임을 지배하는 유잉의 능력은 흔치 않은 자산이다"라고 설명했다.[61] 프로데뷔 이후에도 유잉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수비력이었다.
공격의 경우 다른 4대 센터들과 비교해서 가장 부족한 건 1대1 능력이다. 유잉의 경기를 보면 의외로 파워로 상대방을 압도해 득점을 넣는 장면은 별로 없다.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 훅슛과 페이더웨이가 있긴 하지만 주무기로 삼을 만한 건 아니었고, 주로 패스를 받아 점프슛을 넣는 편. 물론 그렇다고 1대1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샤킬 오닐처럼 매치업을 압살하며 30점을 넣는 스타일은 아니었다.[62] 유잉이 새가슴이라는 오해를 받은게 공격에서 이른바 "폭발"하는 경기가 별로 없어서인데, 사실 유잉은 고득점을 꾸준히 넣어주는 선수지 초고득점을 퍼붓는 스타일은 아니다. 대신 매 경기마다 감이 좋은 날은 35득점, 컨디션이 나빠도 20득점은 꾸준히 올려주는 스타일로 이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센터 포지션으로는 최상급의 공격력이다. 게다가 유잉은 새가슴이라는 오해와 달리 승부가 결정되는 위닝샷이나 클러치 샷을 꽤 많이 넣을 정도로 상당한 강심장이다.
그런데 의외로 결정적인 순간에 레이업을 놓친 적이 몇 번 있는데 가장 큰 실수는 95년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최종 7차전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으로 만들수도 있었던 핑거롤을 놓친 것이다. 이 핑거롤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닉스는 시리즈에서 탈락해버리고 말았는데, 아이러니하게 유잉의 핑거롤은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위에 언급된대로 라이벌들에 비해 운동능력이 떨어지다보니 골대 근처에서 "내려놓는" 제독이나 올라주원, 아예 덩크를 찍는 오닐과 달리 손끝 감각에 의존해 "던지는" 편에 가까웠는데, 이러다보니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63]
전체적으로 보면 공격/수비/리바운드 중 어떤 것도 S급 수준은 아니었지만 모든 분야에서 AAA급을 찍을만했던 훌륭한 선수.[64]


5. 이것저것


패트릭 유잉 항목이 생성된 초반에는 주인공이 유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은 조던의 유잉 관광스토리가 절반이 넘었었다(...). 안습. 뭐 조던의 피해자야 차고 넘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독 그는 하필 조던과 동년배에 1년 차이로 데뷔, 전성기도 겹치고 컨퍼런스까지 같은 덕분에 정말이지 매년 치이다시피 했다. 게다가 4대 센터 가운데 홀로 우승 경험도, MVP와 같은 상복도, 동료들 운도 없었다. 스탯 우위도 없는 탓에 평가 또한 나머지 3인방(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가장 안좋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은근히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맞붙은 94 파이널에서 올라주원의 휴스턴에게 3승 4패로 1승이 모자라 우승을 놓치는 바람에... 적어도 이 때 한 경기만 더 이겨서 우승을 한 번 했다면 4대 센터 중 최초로 우승을 달성한 프리미엄 때문에라도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획실했기 때문에 유잉 커리어에 있어서는 가장 아쉬운 부분.[65] 속칭 4대 센터의 첫판왕(...)
그래도 선수 자체의 인지도나 인기로 치면 데이비드 로빈슨보다는 우위다.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도 하거니와 80~90년대 조던에 집중된 매스컴 덕분에 매년 치이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이 돼서 그런 듯. 심지어 매년 치이는 게 불쌍해서 안티조던 유잉빠가 된 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 한편 플레이 스타일도 [66] 정말 센터의 표준과도 같기에 90년대 NBA 열풍이 불었을 당시 흔히 센터 하면 떠오르는 선수로 대부분 패트릭 유잉을 꼽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연재된 슬램덩크의 채치수 또한 연습경기에서 33번을 달고 있는 걸 보면...
조던 외에도 스카티 피펜[67][68], 앤퍼니 하더웨이에게도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장면들도 상당히 멋진 모습들이라 하이라이트에 자주 나온다...
기본적으로 워낙 팔이 긴 편인데 흰색 보호대를 양손팔목에 착용해서 신기하게 더 길어보인다. 또한 슛품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지먀 미들점퍼시 타점이 워낙 높아서 사실상 블록이 불가능 했던 센터이다. 사실 슛폼 자체는 정석에서 거리가 먼, 엄청나게 높이 팔을 치켜들고 던지면서 마지막엔 거의 한손으로만 던지는 (정석폼은 거의 마지막까지 왼손이 받혀준다) 특이한 폼인데다 슛릴리스 타이밍도 엄청 늦다. 거의 점프가 정점을 찍고 내려올때 쏘는 수준인데, 데이비드 로빈슨 역시 폼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타이밍이 느렸다. 물론 둘 다 이런 폼으로도 성공률이 높았다. 다만 슛을 릴리스할때의 슛터치 자체는 굉장히 부드러웠기 때문에 예쁜 곡선을 그리며 림에 빨려들어가곤 했다.
반대로 손은 거대한 덩치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작다. 이는 긴 팔과 정반대로 센터로선 단점인데, 센터는 볼을 잡고(드리블 없이) 바로 하는 플레이가 많아 볼캐칭 및 볼핸들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 다만 모제스 말론처럼 한 손으로 볼을 못 잡을 정도로 작은 건 아니라 결정적인 단점까진 아니었다. 원핸드 덩크도 무난하게 할 정도는 되고.
NBA 관련 글을 보면 palm (한 손으로 공을 움켜잡는 것)을 못 한다는 묘사나 본인의 언급이 나오는 선수들이 종종 보이는데 카멜로 앤서니, 케빈 듀란트,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빅맨인데도 거의 일반인 수준으로 손이 작은 모제스 말론 등이 있다. 그런데 코비는 본인 입으로 공을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한 선수인데 사진을 찾아보면 분명 경기 중 공을 한 손으로 잡고 수비와 대치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한 손으로 못 잡는다"는 의미가 경기 중 자유자재로 한 손으로 잡고 마음대로 갖고노는 수준이란 걸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구공은 표면의 돌기가 있고 그 재질 덕분에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손 크기와 악력이 있으면 한손으로 잡는게 크게 어렵진 않고, 특히 NBA 규격 농구공은 국제규격 공보다 더 잡기 쉽다. 코비의 경우에도 보듯 손이 작다곤 해도 20cm는 가볍게 넘기는 저 선수들이 실제로 공을 못 잡을리는 없다. 그러나 palming을 잘하는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처럼 공을 마치 핸드볼처럼 쥐고 허공에다 휘젓거나 한손으로 잡고 패스를 하는 척 하다가 다시 끌어와서 슛을 하는 등 갖고 노는 수준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공이 손 안에 쏙 들어와 그냥 가볍게 쥐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악력을 이용해 겨우 잡는 수준이면 손가락까지 힘을 주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런 볼핸들링은 못하고,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손가락까지 이용해야 공을 잡는 수준이기 때문에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하고 다니는 것이다. 즉, 정지상태에서 잠깐 한 손으로 잡는 것까지만 가능하다면 NBA 기준으론 palming이 불가능한 것.
그리고 실력 자체도 4대 센터 중 조금 부족하다고 평가받긴 해도 상당히 근소한 차이다. 베스트5에 해당하는 All-NBA 퍼스트 팀에 딱 한번 선정되긴 했지만, 당시 센터진의 뎁스가 워낙 깊어 매번 근소한 차이로 밀린 것일 뿐이었다.[69] [70]
여담이지만 디안드레 조던이 2016년 퍼스트 팀에 들면서 미친 센터진 뎁스로 퍼스트 팀에 한번밖에 못 올랐던 유잉의 안습함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비록 스탯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조던은 이 시즌이 12.7점 13.8리바운드 2.3블럭을 기록했는데, 이는 유잉이 1999 시즌에 37세의 나이로 기록한 17.3점 9.9리바운드 2.6블럭보다 크게 낫다고 하기도 힘들다. 물론 효율 면에서 조던이 크게 앞서지만, 유잉은 꽤나 위력적인 공격옵션인 반면 조던은 폴이 없으면 거의 득점을 못하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유잉이 퍼스트 팀에 오를 당시는 28.6점, 10.9리바운드, 4블락이었다. 이걸 보면 퍼스트 팀 센터 자리의 추락한 위상이 엿보인다. 유잉 시대에는 MVP 후보 센터도 All-NBA 세컨드나 서드팀으로 밀려났고(유잉 본인도 93년도에 팀을 60승으로 이끌며 유력한 MVP 후보였지만 세컨드 팀에 그쳤다), 퍼스트 팀은 정말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던은 MVP 후보에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도 된적이 없다. 유잉 시대까지 갈것도 없이 08-09 시즌에 MVP 투표 2위에 퍼스트 팀에 오른 드와이트 하워드와 비교해봐도 올해 디안드레 조던의 위상은 민망할 정도로 밀린다. 그런데 하워드만 하더라도 퍼스트 팀 횟수가 유잉보다 훨씬 많지만 일반적으로 유잉보다 아래로 평가받는다. 즉, 올해 수상자 발표로 인해 '''NBA 역대 가장 위대한 50인에 꼽히고 센터 중 역대 Top 10 안에 든다고 평가받는 패트릭 유잉과, (올해 포함) 데뷔 후 8년 동안 올스타에 선정되지 못한 디안드레 조던이 동일하게 퍼스트 팀 1회가 되었다.'''
유잉은 실제로 1989 시즌부터 1995년까지 7년간 6번이나 MVP 투표 5위 이내에 들었다. 하필 역대 최고의 선수와 동시대에 그의 라이벌 세 명이 전부 MVP를 탈 정도의 괴물들이라 그렇지 다른 시대였으면 유잉도 퍼스트 팀 단골에 MVP를 노려볼만한 선수였다.
현역 시절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그 무릎 부상 덕택에 대학 시절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상실한 채로 NBA 커리어를 보냈다. 커리어 내내 총 4차례의 무릎 수술을 받았다. 경기 때 착용한 양 무릎의 두툼한 무릎 보호대는 유잉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한편 선수 생활 전반을 박살낸(...) 조던과 사이는 좋은 편이다. 조던의 불스와 플옵에서 다섯 번이나 만나 전부 다 졌다. 조던이 플옵에 진출한 적이 13번에 불과하고 초창기에는 팀 전력이 매우 약해서 1라운드에서 광탈당하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유잉의 닉스는 거의 연례행사급으로 불스에게 깨진 셈. 특히 불스의 첫 스리핏 기간인 91~93 시즌에는 3년 연속으로 불스에게 패배했는데, 93 시즌 닉스가 유잉 시대 최고성적인 60승을 거뒀고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있었으며 시리즈 초반 2승0패로 앞서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점. 유잉 시절에 유일하게 불스에게 거둔 플옵 승리는 94년이었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때는 조던이 없었다. 조던은 이를 두고 "마치 동네 깡패(bully)가 형이 없을때 동생을 괴롭힌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고, 복귀한 이후 붙은 96 시즌에 4승1패로 승리했다. 다만 이때 닉스는 불스에게 플옵에서 패배를 안긴 유일한 동부팀이었다.
조던이 절친한 친구로 지내는 몇 안되는 스타 플레이어. 조던의 워싱턴 복귀 당시 유잉은 친구의 소속팀인 워싱턴 코치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또 같이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고. 그 영화가 바로 스페이스 잼. 다만 이 영화의 평가야 다들 알다시피 최악이라.. 같이 뛰었던 동료 선수들은 물론 타 팀의 많은 선수들과도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택인지 은퇴식에 와서 축하해 준 선수들 중 닉스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최고의 절친은 대학 후배이기도 한 알론조 모닝.
반면 선수 생활 동안 언론과는 썩 좋지 않은 관계였는데 이는 극성스럽기 짝이 없던 뉴욕 언론에 대해 유잉이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71] 말이 많아야 기사거리가 늘어나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말없이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의 유잉은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때때로 리그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임해야 하는 경기 후 인터뷰마저 거부하여 벌금을 물기 일쑤였다.
또한 현역 시절엔 90년대 4대 센터 중 가장 말석의 자리에 놓였지만(그래도 NBA 역사상 센터 포지션 Top 10급이다) 뒤집어 말하면 NBA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센터 10명 중 네 명이 한 시대에서 전성기를 누렸을 정도로 90년대 초중반의 센터진의 뎁스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한 포지션에 이렇게까지 좋은 선수들이 몰린 건 역사적으로 봐도 드물다. 또한 모닝, 무톰보, 디박, 스미츠 등 정말 좋은 센터들도 있었다.
사실 가장 나이 많은 유잉(62년생)부터 막내 오닐(72년생)까지 무려 10년에 달하는 나이 차이가 있어 이들이 동시에 전성기를 맞은 적은 없다. 다만 오닐을 빼면 63년생인 하킴, 65년생인 제독까지 해서 세명이 90년대 초반에 전성기가 거의 겹쳤기 때문에 (로빈슨의 스탯상 전성기는 9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는 래리 버드팀 던컨과 비슷하게 완성된 기량을 지니고 데뷔한 선수라 사실상 데뷔와 동시에 전성기 시작이었다. 실제로 데뷔할때 나이가 이미 만 24세였다) 셋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몸상태가 안 좋아 전성기가 가장 짧았던 유잉이 30대 초반을 넘어가 약간씩 하락세를 그리던 92-93시즌, 93-94시즌 정도가 넷이 가장 왕성하게 대립하던 시기인데, 유잉이 최전성기가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 전성기 범위 내에 있었고 오닐은 아직 성장중이긴 했지만 거의 완성된 기량이었고 (피지컬상으론 레이커스 시절보다 이때가 더 뛰어났다) 하킴과 제독은 기량과 신체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시점이었다.
현역 은퇴 후 코치로서는 4명 중 가장 좋은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워싱턴 위저즈 - 휴스턴 로키츠 - 올랜도 매직을 거쳐 2013-14 시즌부터 그 분이 계신 샬럿 밥캐츠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오랜 코칭기간 동안 감독 수업도 꾸준히 쌓아왔으며 2013년 11월 8일부터 샬럿의 스티브 클리포드 감독이 심장 수술로 몇 경기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어 비록 정식은 아닌 감독 대행이긴 하지만 어쨌든 커리어 첫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했다.[72]
현역 시절 샤킬 오닐과 같은 컨퍼런스였던 탓에 4대 센터 중에서도 유독 그와 매치업을 자주 하며 신경전이 잦았다. 특히 오닐은 경기장 안팎에서 유잉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1999년 직장폐쇄 당시 선수협을 비판하며 회장이었던 유잉까지 싸잡아 독설을 날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닐은 은퇴 후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번 드러내었고, 특히 자신이 진행하는 NBA Game Time 프로그램에서 유잉을 만나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유잉이 자신의 어릴적 영웅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유잉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라데 영화에서 제자가 최고가 되려면 스승을 이겨야 했던 것처럼, 유잉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밀어붙여야만 유잉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잉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위대한 승부사이자 위대한 선수로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역대 Top 5 센터에 유잉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객관적인 커리어는 오닐이 유잉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오닐의 이러한 자기고백은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73]
의외의 사실은 오닐과 매치업한 선수 중 한 경기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쌓은 선수가 다름 아닌 유잉이었다는 점. 정규시즌 기준으로 오닐과 매치업해서 한 경기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유잉이 유일하다.[74] 또한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무려 8경기나 30득점 이상을 뽑아내 오닐을 상대로 가장 많은 30득점 이상을 뽑아낸 선수이기도 하다. 오닐이 NBA에 입성할 무렵 유잉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 실제로 데뷔 초창기만 해도 유잉이 오닐보다 우세했다. 골밑에서는 밀렸지만, 기술적으로 우월한 유잉이 종합적으로 더 좋은 경기를 펼친 것. 실제 유잉과 오닐이 맞붙은 경기의 스탯을 보면, 오닐의 신인 시즌과 2년차 시즌 동안 유잉은 28.2점 13.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오닐은 24.6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다만 팬들 사이에서는 유독 유잉이 오닐에게 처절하게 밀렸다는 인상이 강한데, 이는 첫째로 실제로 유잉이 우세한 경기력을 펼쳐도 일단 힘에서 밀렸기 때문에 겉보기로 보면 유잉이 크게 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고(예를 들어 오닐은 유잉을 힘으로 밀쳐내고 덩크를 꽂아넣으면 유잉은 중거리 점퍼를 꽂아넣어 응수하는 식. 똑같은 2점이지만 언뜻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두번째는 둘이 같이 뛴 건 10년 정도 되는데 오닐의 3년차 때부터는 매치업에서 유잉이 확실히 밀리기 시작했고 세번째로는 두 선수가 상성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다. 유잉은 데뷔 초부터 무릎에 두툼한 보호대를 하고 다닐 정도로 무릎이 고질적으로 매우 안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닐이 등장하기 전까지 올스타급 이상 센터 중 최고로 꼽힐 만한 파워를 갖고도 균형을 잘 못 잡고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노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이런 성향이 더욱 심해졌는데(의도치 않게 예능에서 몸개그를 펼치는 서장훈도 비슷한 케이스) 이때 오닐이 막강한 파워로 툭툭 치고들어갈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데다가, 유잉같은 거구들이 몸까지 망가지면 한번 넘어지면 비틀거리며 잘 못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 더욱 힘을 못 썼던 것이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데이비드 로빈슨같은 민첩한 센터들은 이를 스피드로 만회했지만 유잉은 그런 스피드도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 더욱 고생했다.
투박한 외모 덕택에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대학 전공이 미술(!)이다. 실제로 굉장히 명석하고 똑똑한 인텔리 타입이라고 한다. 전성기 시절에 NBA 선수들이 꼽은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진출했을 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선수는?" 이라는 설문 항목에서 유잉이 1위로 꼽혔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75]
1993년 오프시즌때 우리나라에 유잉 농구화 홍보를 겸해서 2박 3일간 방한했던 적이 있다.[76] 사업 때문에 방문한 것이지만 그 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클리닉은 물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쇼, 스포츠'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산간벽지 초등학교에 방문해 농구대를 기증하고 어린이 농구 후원 활동을 벌이는 등 짧은 시간 동안 봉사도 많이 해 주고 간 편.
은퇴한 지도 한참되었는데 그때 홍보한 농구화는 미국에서 아직도 판매하고 있다. 유잉을 잘 안다고 할수 없는 나이때의 빅뱅에 GD, 태양이 신고 나온 자료도 있고, 농구화 좋아하는 패션피플들이 좋아하신다고 한다. 유잉 초창기 시절에는 아디다스에서 유잉신발을 만들기도 했다.
아들로 패트릭 유잉 주니어가 있다.[77] 그 바람에 유잉은 시니어를 달게 되었다. 주니어가 NBA에 입성하자 유잉을 기억하던 많은 올드 팬들은 주니어가 아버지의 반만큼이라도 활약해주길 바랬지만, 호부견자인지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하부리그를 전전했으며 닉스에서 프리시즌 경기를 뛰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2011년 뉴올리언스 호네츠에서 7경기 뛴 게 유일한 nba 경력이다.
2015년 드래프트 당시 뉴욕 팬들과 언론에게 거친 야유를 받은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에게 "너는 이미 뉴욕의 선수이며, 사람들은 차차 너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격려를 건넨바 있다. 뉴욕에서의 긴 커리어 동안 극성맞은 언론과 싸워온 유잉에게는 포르징기스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았던 것 같다.[78]
2017년 4월 3일,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각종 NBA 미디어에서 팀원들이 가장 받쳐주지 않은 90년대 NBA 스타로 종종 선정된다. 90년대의 뉴욕 닉스는 전투적이고 투지넘치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이름값은 많이 떨어지는 팀이었던 것도 사실. 올라주원이 95년에 드렉슬러를 얻었던 것과 달리 닉스 프런트는 유잉을 받쳐줄 올스타급 이상의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다.
다만 팀원들에 대한 평가는 주관에 따라 갈린다. 90년대 초중반은 앤서니 메이슨, 찰스 오클리, 존 스탁스 부터 96-97시즌 이후 앨런 휴스턴, 래리 존슨, 라트렐 스프리웰, 마커스 캠비까지 멤버수준자체도 상당했다. 90년대 초중반 닉스 멤버 역시 악과 깡으로 뭉친 터프가이들이었고 인기만 적었지 멤버 수준도 당시 불스, 포틀랜드, 피닉스, 휴스턴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것이 없었다. 90년대 중후반 역시 전성기에서 내려왔지만 존슨은 팀원으로 쏠쏠했고 스프리웰은 이미 올스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 시점부터 유잉의 노쇠화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팀은 지금처럼 전성기 시절 빅3를 조합하여 우승에 도전하는 트랜드가 전혀 아니었기에 팀원 탓을 하기에는 억지가 있다. 그런 논리라면 93-94시즌 드렉슬러가 오기 전 휴스턴 또한 하킴을 제외하면 당시 닉스와 비교해서 딱히 우월하다고 여길 포지션은 없다. 루키 샘 카셀, 이제 2년 차 오리, 주전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케니 스미스 그나마 파워 포워드 오티스 도프가 올스타에 1번 선발된 적이 있지만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이 더 높은 레벨선수면 선수지 절대 도프와 비교해서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었다.
닉스가 호화멤버로 여겨질 수도 있는 98시즌부터는 유잉의 노화문제가 심했으니(만 36세) 전성기 기준으로 논하면, 닉스에 조력자형 선수들이 많고 드렉슬러나 페니 하더웨이처럼 한 팀의 에이스를 할 법한 스타급 선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닉스는 한 명의 슈퍼스타와 수준급 조력자들이 뒤를 받혀주는 잘 짜여진 팀이었다. 유잉 시절 팀의 황금기라고 할법한 92~94시즌까지(오해할 수 있는데 파이널에 오른 99시즌은 조던의 부재와 불스의 몰락으로 동부의 경쟁력이 떨어진 사이 닉스가 결승에 오른 것이지 팀으로서 전력은 이때가 더 강했다) 닉스는 매우 피지컬한 수비로 상대팀의 골밑 공략을 막아 야투율을 떨어뜨리고, 확실한 공격옵션인 유잉으로 차근차근 득점을 쌓아가며 승리를 챙기는 팀이었다. 즉, 닉스는 어디까지나 피지컬한 수비로 먹고 사는 팀인데, 수비가 뛰어나면서 거친 오클리, 메이슨, 스탁스, 엑재비어 맥다니엘스, (거친 선수는 아니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난) 제럴드 윌킨스 등은 이름값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당시 닉스에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물론 공격력으로 유명한 피닉스나 케니 스미스-"매드 맥스" 버논 맥스웰-로버트 오리-샘 카셀이 외곽에서 지원해주는 휴스턴이 더 뛰어난 공격진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만큼 닉스는 수비에서 더 강력한 팀이었다. 포인트는 당시 닉스는 멤버가 딱히 부족한 팀이라기보다는, 확실한 슈퍼스타 에이스와 팀컬러에 맞는 조력자들을 두고 있는 '''우승후보 전력의 팀'''이었으며, 유잉이 딱히 동료복이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애초에 닉스는 조던의 불스가 매번 가로막지 않았으면 충분히 결승에 오르고도 남을 전력의 강팀이었으며, 실제로 에이스 유잉이 부진했음에도 94시즌에도 7차전까지 가서 정말 한끝 차이로 우승을 놓쳤다. 운이 조금만 더 따랐다면 '''실제로 우승을 했을 것이다.''' 닉스의 불운이라면, 팀컬러 특성상 공격은 유잉이 이끄는 와중에 조력자들이 지원을 어느 정도 해주는 정도로도 충분한데 (어차피 수비로 먹고사니까) 하필 파이널 시리즈에서 유잉이 너무나 부진했고, 득점 지원을 해주던 스탁스가 하필 7차전에서 생애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또한 9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들의 공통적인 불운인, '''동시대에 6번의 우승을 쓸어담은 마이클 조던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하필 같은 컨퍼런스에서 뛰어 무려 5번이나, 심지어 본인 전성기때 3년 연속으로 붙어 모두 광탈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유잉이 딱히 동료복이 없어서 우승에 실패했다고 보긴 힘들다는 것.
93-94시즌의 휴스턴과 뉴욕 닉스는 실제 파이널에서의 모습이나 패넌트레이스 성적을 비교했을 때, 백중세의 전력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시즌 기록이나 파이널에서의 활약은 분명 하킴 올라주원의 우위였기에 적어도 해당시즌에 한해서 유잉은 올라주원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옳고, 팀전력을 탓할 수 없다. 다만 94-95시즌 우승한 휴스턴은 드락슬러라는 뛰어난 스코어러를 영입하여 콤비 체제를 형성하였고, 98-99시즌 우승한 샌 안토니오는 팀 던컨이 1옵션을 수행하였기에 팀전력이 떨어지는 뉴욕 닉스라는 말은 적절치 못하나, 대권에 도전하기에 다소 아쉬운 전력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닉스와 붙지도 않은 95년 로켓츠와 99년 스퍼스 얘기를 하는 건 적절한 비교가 아니다. 94년 '''실제로''' 휴스턴과 붙었던 닉스는 대권에 도전하기에 다소 아쉬운 전력이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는 위에 언급된 것처럼 닉스처럼 슈퍼스타+조력자들 조합으로도 충분히 우승이 가능했고, 이 유형이 바로 조던을 제외하곤 단 한명의 올스타도 없었던 91년 불스, 그리고 올라주원이 팀 내 유일한 올스타였던 '''94년 로켓츠'''였다(피펜과 쏘프는 올스타에 선정됐지만 해당년도엔 올스타에 오르지 못했고, 해당 시즌엔 스타라 보기 힘든 위치였다). 94년 당시 닉스와 로켓츠는 리그 내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에이스+조력자들이라는 '''똑같은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머지 선수들의 수준으로 보면 닉스가 더 우위라고 할 법했는데, 유잉의 조력자 중 찰스 오클리는 이제 29세로 전성기에 올라 슬슬 하락세가 시작된 쏘프보다 최소 대등 이상의 선수였다(둘 다 커리어 1회 올스타). 닉스의 가드라인은 19점을 올리며 해당 시즌 올스타에 첫 선정된 존 스탁스, 그리고 이제 전성기에 오르는 그렉 앤서니, 전성기가 확연히 지났지만 안정적인 베테랑 가드였던 닥 리버스와 데릭 하퍼가 뒤를 받혀주고 있었다. 로켓츠의 경우 가드라인은 케니 스미스, 버논 맥스웰이 버티고 있고 둘 다 터질때는 터지는 선수들이나 각각 11점, 13점에 리딩도 평범한 선수들이라 어디까지나 조력자였다. 또 하나의 포워드라인은 이제 2년차인 로버트 오리였는데, 그가 긴 팔과 훌륭한 운동능력으로 "제2의 피펜" 소리 듣던 유망주였다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언론들의 설레발섞인 띄워주기고 이때 평균 9.9점 5.4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수비도 별로 좋지 않은 평범한 유망주였을 뿐이었다. 물론 루키 샘 카셀이 플옵에서 의외로 터져주긴 했지만 그래봤자 플레이오프 통틀어 9.4점, 파이널 10점의 선수였다. 카셀이 유명해진 건 피닉스 선즈와의 7차전에서 22점을 터뜨리고 파이널 3차전에서 막판 7점을 몰아넣는 강심장 때문이지, 그의 실력은 엄연히 조력자급이었다(비유하자면 2007년 당시 디트로이트 시리즈에서 소나기 삼점을 퍼부으며 31점을 기록하고 주목받은 클리블랜드의 루키 다니엘 "부비" 깁슨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휴스턴의 가드들 중 평균 19점을 기록하고 수비세컨팀에 오른 존 스탁스 수준의 선수는 없었다. 결국 올라주원과 유잉이 각각 전성기에서 맞붙은 1994년, 두 선수는 조력자의 수준이나 팀 전력 수준에서 대동소이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닉스는 가드진에서 확연한 우위를 점했다.
즉, 같은 상황에서 맞대결을 했는데 올라주원이 공격에서 유잉을 압도하고(수비와 리바운드는 오히려 해당 시리즈 한정 유잉이 근소우위였다)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결국 유잉은 팀 전력이나 조력자 부분에서 딱히 불운을 겪었다고 보기 힘들다. 유잉의 결정적인 불운은 위에 언급된 마이클 조던의 존재였다. 유잉은 최전성기에 역대 최고의 선수를 너무 자주 만났고, 전패했다. 조던이 없었다면 93년에는 반드시 결승전에 올랐을 것이고, 닉스 특성상 92년에 캐브스를 업셋하고(당시 선수 구성상 캐브스는 진흙탕 농구에 약했다) 파이널에 올랐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랬다면 우승을 한번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소한 유잉 인생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93년에는 파이널 상대가 피닉스 선즈인데, 페이스가 빠른 공격농구를 하던 선즈 특성상 공격의 예봉을 꺾이고 진흙탕 농구로 가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피닉스 공격농구의 지휘자이던 케빈 존슨에게 쥐약처럼 작용할 선수가 바로 189cm에 괴물같은 운동능력, 탁월하고 끈질긴 맨투맨 수비력을 자랑하던 존 스탁스이다. 게다가 이때 선즈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찰스 바클리인데, 닉스의 오클리는 바클리에게 털리더라도 최소한 지저분하게 괴롭혀줄 수는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선즈는 센터수준이 한심했다는 것인데, 로스터를 통틀어 6피트10인치 이상의 선수가 하나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수비가 공격에 비해선 평범한 팀이기도 했다. 이런 팀이라면 '''유잉을 절대로 못 막는다.'''
물론 바클리는 MVP였고 실제로 해봐야하지만 만약 닉스가 93년 결승에 올랐다면 닉스 특유의 진흙탕 농구로 상성상 유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2차례 MVP에 빛나고 두번이나 결승에 오른 칼 말론이 동료복이 없어서 우승에 실패했던가? 결국 말론, 그의 동료 존 스탁턴, 그리고 유잉까지 자신들의 최전성기에, 하필 붙는 족족 자신을 깨뜨리는 사기캐가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이 유잉의 가장 큰 불운인 것이다. 산술적으로 봐도 조던처럼 짧은 시기에 6차례 우승을 한 것은, 60년대 보스턴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은 우승을 거머쥔 압도적인 페이스이다. 그만큼 한 시대에 우승을 한 사람이 쓸어담았다면, 당연히 반대급부로 동년배 다른 선수들이 우승을 그만큼 적게 할 수밖에 없다.
좀 개그성 에피소드인데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가드 겸 포워드 제일린 로즈에게 도둑질(...)을 당한 적이 있다. 로즈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실력이 늘고 있던 로즈는 유잉이 자기를 파울했다고 생각했는데 파울이 안 불리자 열 받아서 자기 위를 넘어가던 유잉의 발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비가 걸린 모양인데 이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음에 닉스가 인디애나로 원정을 왔을 때 우연히 공항에서 유잉의 짐을 발견했고, 디트로이트 본능이 발동해(...) 상자를 억지로 열어보니 VCR일체형 TV가 있어 이걸 훔쳐갔다고 한다. 그렇게 훔쳐간 TV는 몇년동안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재밌는 건 여기에 패트릭 유잉의 이름이 스티커로 붙혀져 있었는데 이걸 못 뗀 상태로 계속 두는 바람에 그의 친구나 가족들 모두 로즈가 패트릭 유잉의 TV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2020년 5월 23일, 조지타운대 감독 재임 중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격리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상태가 호전되어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자신의 트위터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 #
[1] 90년대 초반 기준이고, 90년대 중반부터는 114kg 이상이었다. 당시 센터들은 2000년대 이후 센터들보다 전체적으로 체중이 적게 나갔는데, 데이비드 로빈슨의 경우 유잉보다 키가 1인치 큰데 체중은 107kg에 불과했다. 물론 로빈슨도 이후 110kg 이상으로 체중을 불렸다.[2] 올랜도 매직은 창단시즌인 1989년부터 6번을 팬들에게 헌정하여 영구결번 시켰지만 유잉이 올랜도에서 뛰었던 01~02 한 시즌만 영구결번을 해제하고 유잉에게 등번호를 주었다. 유잉은 올랜도의 6번을 단 유일한 선수다.[3] 조지타운 대학교 닉네임인 "Hoyas"를 말한다. 조지타운의 구호인 "Hoya Saxa!(What Rocks!)"에서 따온 말이다[4] 의외로 미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대신 다른 나라들에서 자주 쓰이는 별명. 생김새 때문도 있지만,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라 불리며 활약했던 것과 더불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킹콩의 활약이 높은 싱크로를 보이는지라.. 사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흑인 선수에게 고릴라나 킹콩이라고 부르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원숭이"는 현대 사회에서는 주로 동양인을 폄훼하는데 쓰이지만, 흑인들을 폄훼하는데에도 쓰이며 애초에 생김새를 갖고 사람을 고릴라라고 부른다는게...[5] 여담으로 콧구멍 사이즈가 그야말로 웅장하다. 오백원짜리 동전도 족히 들어갈만한 사이즈이다.[6] Ew-an으로 읽어야 하는데 E-wan으로 읽은 것. 발음기호에 기반한 표기는 유언 머그레거가 된다.[7] Ow-en으로 읽어야 하는데 O-wen으로 읽은 것. 발음기호에 기반한 표기는 마이클 오언이 된다.[8] 문맹률이 0에 가까운 대한민국에서야 씨알도 안먹힐 소리지만,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엘리트급 스포츠맨, 특히 흑인 엘리트 스포츠맨을 비하하기 위한 떡밥으로 자주 이용되는 멘트이다.[9] 1999년까지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전임 감독인 존 톰슨 3세는 이 감독의 아들이다.[10] 앨런 아이버슨같은 가드 출신도 있지만 패트릭 유잉 이래로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같은 NBA에 족적을 남긴 정통파 센터들이 조지타운 대학교를 나왔다. 그외 현역 선수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센터 로이 히버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센터 그렉 먼로등이 있다.[11] 통칭 빅 게임 제임스. 후일 쇼타임 레이커스라 불리게 되는 LA 왕조에서 카림 압둘 자바, 매직 존슨과 함께 트리오를 형성했다. 별명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활약이 굉장했던 강심장을 지닌 포워드였다.[12] 댈러스 매버릭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등에서 3점이 가능한 준수한 센터로 활약했다. 팀 동료였던 조던과 NBA 파이널에서 레이커스 소속으로 한번, 슈퍼소닉스 소속으로 한번씩 만나기도(각각 91년, 96년).[13] 퍼킨스는 커리어 말미인 2000시즌에 인디애나 페이서스 소속으로 파이널을 한번 더 밟지만 레이커스에 석패하고 만다. 여담으로 60년대 셀틱스 이후 3연속 우승은 3번 달성되었는데 3차례 모두 해당팀이 (91-93불스, 96-98불스, 00-02레이커스) 우승 첫해에 파이널에서 퍼킨스의 소속팀을 꺾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연하게도 퍼킨스가 은퇴한 이후 3연속 우승팀이 등장하지 않고 있는데 징크스라고 하긴 약하지만 흥미로운 부분. [14] NBA에서 유잉은 운동능력과 기술을 겸비한 센터였지만 동시대 라이벌인 로빈슨, 올라주원, 오닐에 비하면 한끝 떨어지는 운동능력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게 대학 시절과 초창기에 무릎 부상을 자주 당해 하락한 운동능력이라는 것(실제로 닉스시절 유잉의 영상을 보면 항상 두툼한 무릎보호대를 차고 있다). 부상 전인 대학 시절 유잉의 모습을 보면 드와이트 하워드 못지 않게 야수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주체 못 할 정도로 높은 점프력을 자랑하며 노스 캐롤라이나가 슛을 쏘는 족족 쳐냈다. 오죽하면 골텐딩만 무려 5번이나 기록할 정도... NBA에서 영리하게 농구하던 유잉의 모습과 달리 샤킬 오닐이 연상될 정도로 파워풀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닐은 은퇴 후 여러번 밝혔듯이 어린 시절엔 유잉이 그의 우상이었고, 오닐의 라이벌이자 드래프트 동기, 유잉의 대학 후배이자 절친인 알론조 모닝 역시 유잉을 좋아했는데, 둘 다 대학 시절 유잉의 플레이에 반한 것이다. 그만큼 대학시절 유잉은 시원시원한 야수같은 플레이어였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그는 팀내 최고인 23점 11리바운드 4블럭슛을 기록하면서 군계일학의 활약을 보였다. 경기 최우수선수에 선정된 제임스 워디가 28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때 조던이 위닝샷을 성공시켜 노스캐롤라이나가 역전하지 못했다면 무조건 유잉이 최우수선수로 선정됐을 것이다.[15] 그때는 이후 이어지는 질기고 질긴 악연을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물론 오해는 하지 말 것이 이 둘은 절친 사이이다. 실제로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조던은 패트릭 유잉을 최고의 센터로 뽑기도. [16] 다만 조던의 슛 이후에도 시간이 남아서 역전의 기회가 있긴 했다. 그런데 조지타운대의 포인트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공을 몰고오다 마음이 급했는지 그만 상대팀의 제임스 워디에서 패스를 하고 만다(기록상 워디의 스틸로 됐지만 영상을 보면 스틸당한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주는 수준이다). 긴급한 상황이라 파울밖에 할 수 없었고, 워디가 비록 자유투를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자유투 이후 진짜 시간이 없어져서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17] 참고로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가 이길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지타운은 톱시드팀에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 중 한명이라 인정받던''' 유잉이 이끄는 팀이었고, 빌라노바는 별 스타플레이어도 없는 8번 시드의 그냥 그럭저럭 강한 팀이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는 무려 필드골 성공률 78.6%라는, 그야말로 단체로 신들렸다고 할만큼 말도 안되게 슛이 터져 승리를 거머쥔다. 감이 안 잡힌다면, 보통 농구에서 팀의 필드골 성공률은 5할만 넘어도 준수하고, 6할을 넘으면 단체로 삘받은 거고, 7할을 넘으면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는 엽기적인 수준이다. 참고로 2014 NBA 파이널 3차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전반에 75.8%를 기록했는데 '''전반 24분 동안 디펜딩 챔피언 히트를 상대로 21점차를 냈다'''. 이렇게까지 슛이 들어갔는데 2점차밖에 안 난건 오히려 유잉과 조지타운의 위엄인 셈.[18] 당시 이 과정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원래는 최하위팀 둘이 동전 던지기로 1순위를 결정하던 방식이 많은 부작용이 있다하여 로터리가 처음 적용된 해였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데이비드 스턴이 일부러 빅마켓인 뉴욕에 유잉을 주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이 많았다. 심지어 로터리 추첨에서 닉스 것만 귀퉁이가 접혀져 있어서 스턴이 그걸 일부러 뽑지 않았다는 둥... 뭐 진실은 저 너머에.[19] 참고로 패자 인디애나가 뽑은 선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웨이먼 티스데일인데, 이 선수는 인디애나, 새크라멘토, 피닉스의 주전 파워 포워드였고 15~20점 득점을 올리던 파워 포워드지만 2번픽 답지 못하게 올스타에 뽑히지도 못한 평범한 커리어를 보내고, 은퇴 후엔 재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이 해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드래프트 최고의 행운아는 유잉의 닉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타 재즈가 그리 높지도 않은 '''13순위'''로 무려 칼 말론을 뽑았기 때문에. [20] 하지만 이 당시 입었던 무릎 부상은 안타깝게도 이후 유잉에게 거의 대부분의 운동능력을 빼앗아가버리고 말았다.[21] 어이없게도 이런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당시 뉴욕 팬들은 유잉에게 버스트(bust, 유망주의 실력이 기대 이하로 드러났을때 부르는 말)라며 야유를 퍼부었는데, 당시 이들은 유잉이 바로 닉스를 우승권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지만 팀성적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24승->23승). 물론 진짜로 팀을 꼴찌권에서 우승권으로 이끄는 래리 버드같은 괴물도 있지만, 그건 진짜 역대급이고 유잉 정도의 성적이라면 bust라 불릴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뉴욕 팬들과 언론은 유잉의 선수생활 내내 과도한 기대를 걸었으며, 이에 못 미치면 주저없이 야유를 퍼부었다. 실제로 아래 언급되는 유잉의 말년 트래이드 요청에는 이런 사정도 한 몫했다. 질려버린 것. 유잉에 대한 뉴욕 팬들의 평가가 호평 일색으로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 유잉이 떠난 이후였다. 떠난 다음에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느끼게 된 것. 선수생활 내내 유잉은 팬들과 언론에게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22] 당시 NBA의 골밑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치열한 육체적 충돌의 경합무대였다. 때문에 1대1 포스트업이나 페네트레이션으로 상대 골밑을 파고드는 상대에 대한 견제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팀들은 에이스와 팀원을 보호하고, 상대방과의 충돌에서 거칠게 밀어붙이는 선수들을 한 두명씩 꼭 갖고 있었다. 이런 선수들은 수시로 주먹다짐이 벌어지던 80년대 NBA에서 팀간의 충돌이 생길 경우 에이스를 등 뒤에 보호하고 선빵(...)을 날리거나 몸빵(...)을 하는 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했다. 팀원이 전부 갱스터 분위기였던 디트로이트를 제외하면. 찰스 오클리는 이런 리더쉽이 강한 블루워커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였다.[23] 기존 버전에는 "조던의 신경을 긁는 전략"이라고 되어있었는데 닉스는 물론이고 피스톤즈의 조던룰조차도 조던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거친 플레이로 인해 스카티 피펜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편두통에 시달리며 무너진적은 있다. 닉스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조던을 육체적으로 몰아붙히는 것이었다.[24] 이때 유잉은 부상으로 실려나갔다가 코트로 복귀해 활약을 펼치는데, 이를 두고 닉스의 전설적인 해설자 마브 앨버트는 닉스 레전드인 윌리스 리드에 비유하며 "Willis Reed-like performance"라고 극찬했다. 리드는 참고로 1970년 파이널 5차전에서 부상을 입어 6차전을 통째로 결장했고, 7차전 출장마저 불확실했다. 그러나 리드는 7차전에서 극적으로 선발출장해 팀의 첫 4점을 득점했다. 그의 경기 활약은 이게 전부였지만 이 플레이로 고무된 닉스는 윌트 체임벌린-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의 황금 트리오가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제치고 구단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다. 이날 리드의 활약은 부상투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25] 6차전까지의 경기들이 대부분 10점 내외의 점수차였는데, 7차전은 29점차로 그야말로 압살.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이다.[26] 여담이지만 "유잉의 닉스"가 "조던의 불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94-95 시즌에도 닉스가 불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이때 조던은 정규시즌 종료 한달 전에야 돌아왔으니 "조던의 불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27] 94 파이널 올라주원 평득 26.9점 야투율 50.0% VS 유잉 평득 18.9점 야투율 '''36.3%'''. 유잉의 특기였던 점퍼는 파이널에서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모조리 빗나갔으며, 스탁스가 7차전에서 그 삽질을 했는데도 시리즈 전체 야투율은 유잉이 더 낮았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파이널 최다블럭 기록(5차전 8개, 시리즈 전체 30개)'''을 세우는 등 수비에서는 올라주원 못지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공격에서 저지른 삽질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수비와 리바운드만 따지면 이때 유잉은 '''12.4리바운드 4.3블럭'''을 기록하면서''' 9.1리바운드 3.9블럭'''을 기록한 하킴보다 오히려 더 큰 존재감을 보였다. 그렇지만 공격에서 워낙 부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28] TS로 보면 상황이 더 심각한데, 유잉의 시리즈 TS는 39.0%로 양팀 주전 10명 중 TS 40% 미만인 선수는 유잉 한 명뿐이다. 스탁스의 시리즈 TS는 50.3%[29] 당시 마이애미 히트와 뉴욕 닉스는 유잉과 모닝의 조지타운 선후배 맞대결, 라일리가 키워낸 두 팀이라는 점, 동일 디비전 소속이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들끓고 있었고, 이 해 시리즈에서는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난투극으로 인해 닉스는 많은 선수가 징계로 출장할 수 없게 되면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30] 다만 라이벌 관계와 별개로 모닝과 유잉은 절친한 사이였다. 실제로 유잉은 2000년 당시 모닝이 신장병을 진단받자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며 실제로 2003년에 적합판정 여부를 검사받았다. 그러나 모닝의 사촌이 이식에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실제 이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엄청난 것이 유잉이 처음 신장을 기부해주겠다고 바로 2000년 9월이었는데, 이때 그는 '''현역'''이었다. (두 시즌 후 은퇴) 물론 말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시즌만 뛰어도 천만불 이상을 벌 수 있는데 커리어를 끝장날 수 도 있는 신장 기증을 흔쾌히 결심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은 이 다큐멘터리에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peD8eflT0 다만 여기에도 나와있지만 서로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절친이면서 코트 위에선 서로 죽일 기세로 경기했다고....[31] FA가 된 첫날에 바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닉스의 제시한 계약기간과 금액에 한 번에 사인했다고 한다. 타 팀과 접촉으로 몸값이나 계약기간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유잉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닉스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선수였다.[32] 이미 전 시즌 최고의 전력을 맞췄던 닉스의 유일한 약점은 유잉을 받쳐줄 백업 센터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이 약점을 공격력은 형편없어도 수비만큼은 매 경기 10리바운드 2블록슛 이상을 보장해주던 수비형 센터의 스페셜리스트 크리스 더들리를 데려오면서 단숨에 해결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이 소식을 전하던 국내 언론 기사 제목이 '더들리 영입으로 신나는(...) 뉴욕' 이었다. 뉴욕은 그 댓가로 시라큐스 출신으로 신인 첫해 좋은 모습을 보여준 존 월라스를 포기해야 했다.[33] 크리스 밀즈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전해에 드래프티에서 뽑았던 월터 맥카티, 단테 존스, 그 해 드래프트에서 뽑은 신인 존 토마스에 샐러리 필러용으로 스캇 브룩스까지 무려 4명의 선수를 퍼줬다. 미래 따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그 해 우승만을 노리겠다는 닉스의 결단이었다.[34] 주전으로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 래리 존슨, 앨런 휴스턴, 찰리 워드-에 벤치멤버로 -크리스 더들리, 벅 윌리암스, 크리스 밀즈, 존 스탁스, 크리스 차일즈-로 베스트5를 하나 더 꾸릴 수 있었다. 앨런 휴스턴이 오기 전 닉스의 주전 슈팅 가드로 활약했던 스탁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나머지 네 명 모두 닉스에 오기 전엔 각자 타 팀의 스타팅 멤버로 활약했던 선수들이었다.[35] 그 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이 시즌 또한 출전이 유력했지만 하필 MSG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을 뛰지 못하게 되었다. 불운도 이쯤되면 정말 가지가지. 참고로 이 경기의 MVP는 하필 또 마이클 조던이다.[36] 당시 애석하게도 뉴욕 언론에서는 트윈 테러를 찬양하면서 부상에 시달리던 유잉을 신나게 까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는 이에 대해 유잉의 공격력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스탯과 무관하게 팀에게 줄 수 있는 안정감과 수비력, 정신력에서의 공헌이 있기에 비로소 결승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멍청한 놈들이라고 일갈했다.[37] 재미있는 것은 유잉이 결장했던 기간동안 유잉 대신 주전 센터를 맡아줬던 선수가 2년 전 유잉이 당했던 시즌 아웃급 부상의 원인 제공자였던 앤드류 랭이었다. 당시 밀워키 벅스 소속이었던 랭은 이후 시카고 불스를 거쳐 뉴욕 닉스에 합류하는데, 당시 닉스는 유잉의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마저 무릎 부상으로 개막전부터 출전이 불가능하게 되자 시즌 개막을 한달 여 앞두고 급히 제 3의 센터로 랭을 영입했다. 유잉에게 고의로 파울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유잉과의 관계는 별 문제 없었다고 한다.[38] 그야말로 닉스에게 잃어버린 10년을 안겨준 악의 축 2인 중 1명. 뉴욕 닉스 항목을 참조.[39]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피닉스 선즈 4팀이 연루되어 픽까지 포함하면 16명씩이나 움직인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뉴욕은 유잉과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 보내고 그 댓가로 글렌 라이스, 트레비스 나이트, 룩 롱리, 버논 멕스웰, 라자로 보렐, 블라디미르 스테파이나에 미래의 1라운드픽 2개와 2라운드픽 2개를 포함 무려 10명의 선수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중에 제대로 쓸 수 있었던 선수는 글렌 라이스 하나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트윈 테러와 포지션이 중복되어 식스맨으로만 뛸 수 밖에 없었고, 거기에다 꼴랑 1시즌만 뛰고 휴스턴 로키츠로 트레이드되어 떠났다. 리빌딩을 명목으로 받아온 1라운드픽 2개는 한 시즌도 참지 못하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마크 잭슨과 롤플레이어에 불과했던 오델라 헤링턴이랑 바꿔먹어버려 결론적으로 스캇 레이든이 유잉을 트레이드한 명분 자체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40]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하킴 역시 휴스턴과 계약 실패로 토론토 랩터스로 이적했는데, 휴스턴 팬들 또한 팀의 레전드가 이렇게 떠나버린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뭐 그나마 하킴은 기대보다 낮은 금액에 자기가 튕긴 거라 안습함이 덜하긴 했지만... 유잉은 그저 지못미...가 아니고 유잉 역시 본인의 의사대로 트레이드 된 것이다. 하킴과 마찬가지 상황. 결과적으로는 둘다 지못미지만[41] http://proxy.espn.com/espn/page2/story?id=1193711[42] 물론 시몬스가 이를 처음 언급한 것은 아니고, 후술되는 99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이후 유명해진 설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94년 파이널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슬금슬금 나오기도 했다.[43] 즉, 엄밀히 말해 정식 명칭은 "유잉 무용론"이 아니라 "유잉 이론"이지만 부정적인 뉘앙스가 숨어있는 건 마찬가지이다.[44] 그 전까지는 까놓고 말해 잘하는데 우승 못한다고 까내리는 억지에 불과했다. 94파이널에서 못 했다고는 하나(공격한정. 수비와 리바운드는 평상시처럼 강력했다. 당시 기준 파이널 기록이었던 한 경기 8블럭/시리즈 30블럭을 기록할 정도. 평균블럭과 리바운드 둘 다 하킴을 앞섰다), 플레이오프 전체에서 21.9점 11.7리바운드 3블럭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닉스는 유잉의 부진 때문에 '''졌다.''' 유잉 무용론은 "유잉이 필요없다'는 론이므로 유잉이 빠지고 나서 팀이 잘 나가야 성립하는 설인데, 이 때 닉스는 유잉이 빠지고 잘 나간 적이 없으므로 의미가 전혀 없다.[45] 당시 페이서스하면 가장 먼저 레지 밀러가 떠오르지만 사실 인디애나는 골밑라인이 매우 두터운 팀이었다. 릭 스미츠,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 3인방은 모두 올스타에 한번씩 선정된 (각각 98,00,01년) 수준급 빅맨들이었다. (다만 안토니오 데이비스는 99시즌을 끝으로 이적해 00시즌엔 데일-릭의 듀오) 게다가 223cm에 달하는 스미츠, 211cm인 데일 데이비스의 빅 라인업은 전성기 유잉이라면 모를까, 30대 후반 노장인 유잉에겐 버거운 상대였다.[46] 더들리는 종종 매치업하긴 했고, '''박살이 났다.''' 심지어 오닐 하일라이트에 빠짐없이 나오는, 오닐이 더들리를 무자비하게 밀어붙히고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은 다음 대놓고 밀어서 넘어뜨리는 플레이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열받은 더들리가 공을 오닐에게 던져 싸움이 날 뻔하기도...[47] 스몰라인업의 가장 큰 약점이 포스트플레이가 위력적인 정통센터다. 이 때문에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가 이끌던 마이애미 히트가 잘하긴 하지만 슈퍼스타급은 아니었던 로이 히버트에게 골밑이 박살나며 고전했다. 참고로 히버트 역시 느린 정통센터였으며(젊었을 때 유잉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센터를 더블팀하기 좀 더 용이해진 지역방어가 있었음에도 이 정도 위력이었다.[48] 데일/안토니오 데이비스 듀오는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 일에 특화된 빅맨들이었고, 릭 스미츠는 수준급 공격수였으나 골밑을 폭격하기보단 점프슛으로 득점지원을 하는 선수였다.[49] 댈러스 입장에선 환장할 만한 것이, 06시즌 팀 사상 역대최고승과 파이널에서 첫 두 경기를 이기고도 역전패했던 매버릭스는 그야말로 칼을 갈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고, 06-07시즌 전성기를 달리는 노비츠키를 필두로 절정의 위력을 보이며 상대한 29개팀 중 '''28개팀을 상대로 전적에서 우위였다.''' 그러나 단 한 팀, 04-05시즌 중반부까지 매버릭스를 이끌어 이들의 장단점과 이들의 감독 에어버리 존슨(당시 코치)의 스타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던 돈 넬슨 감독이 이끄는 워리어스에게는 3전 전패를 당했다. 리그 모든 팀들을 상대로 해볼만했지만, 호구잡혔던 단 한 팀과 맞붙은 것. 사실 1라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상대전적에서 앞서도 댈러스가 워낙 정규시즌에서 압도적이었던지라 "고전하겠지만 그래도 댈러스인데..."하는 시각이 많았고 업셋을 점치는 이는 소수였다.[50] 해당 경기는 22득점 11리바운드의 유잉이 21득점 5리바운드에 그친 모닝을 압도했지만 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면 압도까진 아니었다. 당시 말년이라 하락세가 뚜렷하던 유잉과 달리 8살이나 아래인 모닝은 만 29세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즈 평균 스탯으로 보면 모닝은 21.6점 8.2리바운드, 유잉은 14.6점 10.8리바운드로 오히려 모닝이 앞섰다. 그러나 상성상 모닝은 유잉을 상대하기 힘들어했는데, 중거리슛이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골밑에서 득점하는 정통센터였던 모닝 입장에선 키도 크고 팔도 긴 유잉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실제로 젊고 더 에너지가 넘치는 모닝이 정규시즌보다 리바운드가 떨어지고, 늙은 유잉은 오히려 리바운드 수치가 올라간 걸 봐도 알수 있다. 게다가 유잉은 모닝보다 평균 4분(38분 vs 34분) 적게 뛰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차이도 아니다. 또한 유잉 vs 모닝만 그런게 아니라 이때 닉스에는 마커스 캠비,크리스 더들리같이 모닝보다 키크고 높이도 높은데다 수비력이 준수한 백업센터들이 돌아가면서 골밑을 채웠고, 이들을 보좌하는 살림꾼 파워포워드 자리에는 래리 존슨,커트 토마스 같은 터프가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활동범위가 좁았던 유잉을 보좌했다. PJ 브라운이라는 유능한 파워포워드가 있었지만 히트는 골밑은 모닝에게 맡기고 팀 하더웨이,자말 매쉬번,댄 멀리같은 가드,스몰포워드쪽이 강했고 팀 전체적으로 단신팀이었던 히트는 닉스의 골밑 높이에 모닝이 고전한 약점이 찔리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51] 한국에선 시대가 완전히 다른 92년 전체 1위 샤킬 오닐을 조기 은퇴한 도허티 대신 끼워넣는다. 엄밀히 따지면 워낙 4대 요소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지, MVP를 수상한 적이 있는 로빈슨, 올라주원, 오닐, 그리고 이들과 대등히 매치업했으며 수상에 근접하기라도 해봤던 유잉에 비해 도허티는 레벨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 4대 파워 포워드들이었던 팀 던컨, 케빈 가넷, 크리스 웨버, 라쉬드 월러스도 마찬가지. 나머지 셋은 각각 퍼스트팀 경력이 있으며 MVP거나 이에 근접한 적이 있는데 월러스는 올NBA써드팀도 없다. 사실 실력으로 따지면 이때 이미 월러스보다 훨씬 좋은 선수였던 디르크 노비츠키가 꼈어야 했지만 노비츠키는 2004-05시즌에야 첫 퍼스트팀에 오를 정도로 기량이 정점에 오른 시점이 늦은데다가 이상하게 한국팬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떨어졌다. 쉬드가 워낙 말썽꾸러기 팀인 포틀랜드의 에이스로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녀 주목도가 높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던컨이 원탑에 가넷/노비츠키가 서로간의 우열없이 약간의 차이로 다음, 그 밑에 웨버에 한참 밑에 월러스를 놓는게 일반적인 평이다.[52] NBA 데뷔는 해군 의무복무를 마친 89년부터다.[53] 단, 부상과 노화로 인해 힘캐 이미지를 다소 상실해서 그렇지, 비교적 건강하던 시절엔 파워 측면에선 오닐 이전의 당대 센터 중 제일 먼저 꼽히는 인물이긴 했다.[54] 사실 샤킬 오닐이 데뷔하기 전까지 올스타급 이상 센터 중 가장 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다만 오닐처럼 압도적인 건 아니고 약간 우위를 점하는 정도. 그리고 힘에만 의존하는게 아니라 중거리슛과 러닝/점프훅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를 이용한 공격을 펼쳤다.[55] 실제로 오닐처럼 중거리슛이 전혀 없고 극단적으로 골밑에만 치중하는데도 경기당 30점 가깝게 때려박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우월한 신체로 종종 오닐과 비교되는 윌트 체임벌린도 페이더웨이슛까지 가능한 다양한 공격옵션을 자랑했다.) 중거리에서 득점을 못하는 선수는 골밑으로 오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러나 오닐은 워낙에 압도적인 신체능력(힘만 어마어마하게 센게 아니라 민첩성이나 점프력도 덩치에 비해 특급)과 사이즈를 지닌 선수라 이게 가능했던 것. 그리고 공격범위가 좁아서 그렇지 골밑에서의 득점감각과 기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56] 보폭이 매우 넓기 때문에 크게 스텝을 두번 밟으면 3점라인 부근에서 골밑까지 돌파가 가능했다. 유잉의 파워가 빛났던 게 이 부분으로, 파워가 딸리는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하면 수비벽에 꼴아박는 셈이라 볼을 흘리기 십상이다. 물론 파워가 딸려도 스피드로 돌파하는 케빈 가넷, 케빈 듀란트, 안테토쿤보같은 장신들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퍼스트스텝에 이은 돌파는 스윙맨처럼 운동능력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이 쓰지(위 세 선수들 중 쿰보와 듀란트는 사실상 스윙맨의 운동능력이다. 가넷도 당시 기준 스몰포워드를 볼 수 있을 정도 운동능력이고), 상대적으로 둔할 수밖에 없는 센터들은 많이 쓰지 않는다. 그러나 유잉의 경우 스피드는 빠르지 않지만 당시 센터들 대부분은 그의 어께빵에 견뎌내기 힘들 정도의 파워를 지녔고, 이를 바탕으로 강하게 돌파해들어가면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물론 샤킬 오닐처럼 파워부터 오닐을 압도하는 상대에게 통하는 기술은 아니었으나, 유잉은 이것 외에 기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후술하는 것처럼 (노화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까지는) 오히려 그를 상대로 앞서면 앞섰지 밀리진 않았다.[57] 신입생이던 82년 NCAA 결승에서 그는 전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던 제임스 워디에다가 샘 퍼킨스, 1학년 마이클 조던 등을 상대로 무려 4블럭을 기록했다. 더 무서운 건 골텐딩이 무려 5개. 게다가 이 골텐딩은 한창 때 자베일 맥기가 그랬던 것처럼 택도 없이 한 멍청한 플레이가 아니라 블럭이 될 수도 있었던 걸 간발의 타이밍으로 놓친 플레이였으며, 이중 일부는 블럭처럼 보이는데 골텐딩만 이렇게 많이 불렀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대학 중 최강전력이던 UNC 선수들이 슛을 쏘는 족족 뛰어올라 9번이나 쳐냈다는 얘기로, 그의 괴물같은 민첩성과 점프력을 볼 수 있다. 훗날 NBA 슈퍼스타가 되는 알론조 모닝과 샤킬 오닐이 유잉의 팬이 된 것도 이때였다. 대학시절 유잉은 웬만한 NBA선수들을 능가하는 스타였으며, 다이나믹하고 파워 넘치는 플레이로 인기가 많았다. 이런 짐승같은 모습은 프로시절 초창기에도 어느 정도 이어지지만, 이미 드래프트 전에 양 무릎에 부상이력이 있던 선수라 이를 지속하긴 무리였다.[58] 올 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에 불과해 은근히 과소평가받는게 있는데, 4대 센터는 공격보다 수비력이 더 괴물들이었다. 하킴과 로빈슨 모두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자이며 동시대엔 수비로 따지면 이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디켐베 무톰보까지 있었다. 90년대 센터 부문 경쟁이 얼마나 빡셌냐면 1999년, 2000년에 수비왕 2연패를 한 알론조 모닝이 이들한테 치여서 데뷔 후 6년 동안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한번도 못 오를 정도였다! 유잉이 그나마 89년과 92년에 하킴을 제치고 세컨드 팀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 것.[59] 유잉의 신장은 7피트에 못 미쳤다는게 중론이다. 야오밍, 무톰보와의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당시 야오와 무톰보는 휴스턴에서 선수로, 유잉은 코치로 있었다) 무톰보가 "사실 패트릭 키는 6피트 9인치(206cm)"라고 언급하자, 유잉이 "내가 6-9일지 모르겠지만 터프한(bad) 6-9이야"라고 되받아친 적이 있다. http://www.si.com/vault/2005/03/14/8254880/dinner-at-yaos 그러나 그는 팔이 '''8피트'''에 가까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길었다.[60] 마이클 조던이 1991년 파이널에서 존 스탁스와 찰스 오클리의 더블팀을 스핀무브로 말 그대로 농락하고 유잉에게 멋진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꽂은 전설적인 장면은 유잉에게 굴욕 장면으로 남아있지만 자세히 보면 두 동료가 베이스라인에서 털리고 그 발빠른 조던이 골밑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만에 골밑을 사수해서 블럭하기 직전까지 갔다.[61] http://www.nytimes.com/1985/09/29/magazine/patrick-ewing-and-the-art-of-defense.html?pagewanted=all[62] 참고로 1대1 능력이 떨어진다느니 1대1 주무기가 없다는 건 센터들이 30점에 가깝게 넣으며 MVP 랭킹 상위 5인 중 4인이 센터일 정도로 수준이 전체적으로 미친 듯이 높았던 90년대 기준이다. 센터들의 기량이 당시에 비해 전체적으로 떨어지는 2000년대 이후 기준으로 유잉의 골밑 공격력과 1대1 능력은 센터들 중엔 야오밍과 2000년대 중반 까지의 샤킬 오닐, 사실상 파워 포워드였던 전성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정도를 제외하곤 누구도 상대할 만한 선수가 없다. 사실 전성기에 득점랭킹 리그 3위까지 올렸던 유잉이라면 오닐을 제외한 나머지 둘울 포함해도 최고 자리에 놓일 만하다.[63] 사실 긴 팔과 큰 키에 비해 상당히 작은 손 탓에 레이업을 잘하기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물론 진짜 작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농구공을 소프트볼처럼 잡는 빅맨들에 비해) 이 때문에 공을 흘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64] 당연하지만 이 "S급은 아니다"란 건 어디까지나 4대 센터란 괴물들이 있던 90년대 기준이다. 득점력의 경우 위에서 언급됐다시피 최전성기 기준 '''리그 3위'''까지 찍은 적이 있는 선수고, 수비력의 경우 딱 두 번에 불과하지만 전성기의 하킴 올라주원을 제치고 세컨드 팀에 오른 적이 있는 선수다. 만약 센터진의 뎁스가 훨씬 떨어진 2000년대에 활동했다면 공수 모두 S급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알론조 모닝은 수비왕 2연패에 빛나지만 7년차가 된 99년이 되어서야 올디펜스 팀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자기보다 5살이나 많은 데이빗 로빈슨에게 98년까지 매년 밀렸다. 그런데 올라주원은 수비력이 로빈슨과 최소 동급인 선수인데, '''그 올라주원을 전성기 때 디펜스 팀에서 밀어냈던게 유잉이다.''' 유잉도 90년대만 피했다면 수비왕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그는 데뷔 당시 수비전문 선수로 평가받았었다. 다만 리바운드의 경우 그때 기준으로, 지금으로 봐도 S급은 아니고 AAA급 정도인게 맞다.[65] 이는 유잉 팬들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도 큰 차이가 아닌 단 1승이 모자라 3승 4패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기 때문에... 반면 그만큼 플옵에서 올라주원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어마어마했다. 유잉 못지 않은 피해자로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는데, 로빈슨은 정규시즌에선 올라주원과의 맞대결에서 여러번 우위를 점했으나, 95년 플레이오프에서 역대급 하이라이트 필름에 절대 빠지지 않는 드림쉐이크와 함께 호되게 털리며 이미지가 훅 가버린 탓에 로빈슨이 늘 올라주원에 발렸다고 세간에 잘못 인식이 되어버린 예가 있다.[66] 슬램덩크의 영향인지 아마추어 농구를 연상하는 건지 정통센터는 중거리에서 슛을 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NBA 기준으론 오히려 옛날부터 모든 정통센터들은 중거리슛 능력이 있었다. 60년대 윌트 체임벌린부터 시작해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쉬, 유잉, 로빈슨, 올라주원, 알론조 모닝 등 슈퍼스타 센터들은 거의 모두 중거리슈팅력이 있었다. 빌 러셀같은 수비형센터를 제외하고 공격력이 뛰어난 슈퍼스타 센터들 중 아예 슈팅력이 없는 선수는 사실상 샤킬 오닐 뿐이었다. 즉, NBA에서 센터의 표준은 오히려 어느 정도 중거리슈팅력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지 마이칸같은 4,50년대 선수가 아닌 이상.[67] 피펜의 준시그니처 라고 할수 있는 에어 모어 업템포 닉스 색상이 2017년 출시되었는데 피펜이 유잉을 상대로 인 유어 페이스를 하는 장면이 인솔에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68] 여담이지만 94년 플레이오프 동부 준결승에서 피펜이 유잉에게 덩크를 먹이고 뒷걸음치는 유잉을 손으로 마구 밀치며 넘어뜨린게 피펜의 가장 유명하고 멋진 덩크라 하일라잇에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 때문에 빡친 유잉과 닉스 선수들 사이 싸움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물론 피펜이 인성이 쓰레기라 (...) 이런 건 당연히 아니고 당시 그만큼 불스와 닉스 사이의 라이벌 관계가 극에 달했으며 (조던이 불스는 이끌던 91~93시즌 3년 연속으로 닉스를 탈락시켰다. 그러나 닉스 역시 92,93시즌에 불스를 가장 고전시킨 팀이었으며, 거친 플레이로 불스 선수들을 괴롭혔다) 실제로 이 시리즈 도중 관람온 데이빗 스턴 총재 앞에서 양팀이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두 팀 사이의 라이벌 관계는 치열했으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조던과 유잉 역시 주먹다짐을 할 뻔했었다.[69] 실제로 세컨드 팀 선정 횟수가 무려 6회에 이른다.[70] 90년대 센터진은 NBA 역사상 가장 두텁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94년, 95년의 경우 2년 연속으로 '''MVP 투표 상위 5명 중 네명이 센터였다''' (당연히 4대 센터가 그대로 들어갔다). 94년의 경우 올라주원-로빈슨-스카티 피펜-오닐-유잉 순이었고 95년은 로빈슨-오닐-칼 말론-유잉-올라주원 순이었다. 사실 개개인의 위상으로 보면 60년대의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을 따라갈 순 없으나, MVP를 노릴만한 센터가 넷이나 존재했다는게 흠좀무... 이로 인해 94년에 유잉은 MVP 투표에서 상당히 표를 얻고 엘리트 센터의 상징인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하고도 All-NBA 서드팀조차 못 오르기도 했다. 또한 93 시즌에는 막강 루키 듀오인 오닐과 알론조 모닝도 나란히 20-10을 넘기고 나란히 All-NBA 팀 입성에 실패했다.[71]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유잉이 뉴욕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대개 풋볼이나 야구, 농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뉴욕을 거친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언론과 투닥거리다 진저리를 치며 먼저 뉴욕에서 떠버린 케이스가 많았던 반면, 유잉은 아무리 가십성 기사를 써도 상대를 해주질 않았고 이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며 15년까지 이어지자 언론이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진 케이스.[72] 하필이면 감독 데뷔전이 친정팀 뉴욕 닉스전이었다. 결과는 패배(...) 감독으로서의 첫 승리는 2013년 11월 13일 보스턴 셀틱스 전에서 기록.[73] 사실 오닐의 말투 때문에 국내 팬들 사이에서 그가 유잉을 무시한다고 오해가 생긴 것도 있는데, 오닐은 "유잉이나 모닝같은 Georgetown boys는 한쪽으로 페이크하고 다른 쪽으로 멍청한 러닝점프훅(dumb-ass running jump hook)을 날린다"고 묘사했는데 정작 본인의 레파토리를 설명하면서도 똑같이 "멍청한 러닝점프훅"이라는 단어를 썼다. 전직 NBA 선수들이 여러 노가리를 까는 NBA Open court란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진 중 하나가 오닐이고 이 프로에서 오닐은 유잉에 대해 여러번 언급한 바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오닐은 '''결코 유잉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기가 성장할때 패트릭이 터프(mean)해서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선수들을 꼽으면서 유잉의 맹렬함(ferocity)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74] 다만 플레이오프까지 포함시킨다면 하킴 올라주원이 1995 파이널에서 오닐을 상대로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적이 있다. [75] 2014년 기준 선수협 회장은 크리스 폴.[76] 1993년은 농구화 대유행의 절정기로 샤킬 오닐의 시그내쳐 제품인 리복 샤크 어택이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었다.[77] 참고로 아버지와 진짜 많이 닮았다. 왕콧구멍까지 그대로 빼다박았다.[78] 그러나 결국 포르징기스(a.k.a 유니콘)는 트레이드되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