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라일리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NBA에서 카리스마를 지닌 명장[1] 중 한 명이다. 이제는 프로스포츠에서 흔히 사용되는 3-peat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감독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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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
켄터키 대학 시절에 명장 아돌프 러프의 지도 하에 농구선수로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 1966년에 자신을 포함한 백인 5명 전원으로 파이널에 진출, 스타팅 멤버 5명 전원이 흑인인 텍사스 웨스턴 대학(현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이하 UTEP)을 상대로 맞붙었지만, 결국 패했다. 이 사실은 디즈니가 제작한 농구 영화 <글로리 로드(2005)>에도 잘 나와 있다.
1967년, 대학 3학년때 NBA 드래프트에 신청, 1라운드 7번으로 샌디에이고 로키츠에 지명되었고, 이곳을 필두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피닉스 선즈를 거치며 9년동안 선수생활을 했으나, 1972년 NBA 파이널 우승에 공헌한 것을 빼고 선수생활 내내 좋은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고교시절엔 카림 압둘 자바의 파워메모리얼 고교와 접전 끝에 팀을 승리로 이끌고, 대학시절엔 남동부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등 전도유망한 선수였다.[2] 이를 바탕으로 1라운드 7순위란 꽤 높은 순위에 지명되기도... 그러나 다재다능한 포워드였던 라일리는 키가 193cm에 불과해 NBA 급 포워드 신장에 미달해서 한계를 보였다.[3]
2.2. 감독 시절
2.2.1.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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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돌아와 이곳에서 중계 캐스터로 활동하다가 1979년에 팀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 당시 감독인 폴 웨스트헤드 옆에서 일하면서 1980년에 팀을 NBA 파이널 우승으로 전진하는 데 기여했다.
1980~81시즌 도중 폴 웨스트헤드 감독이 물러나자 곧바로 감독으로 승진, 9년 동안 재직하면서 빌 버트카와 랜디 펀드 코치의 보좌를 받으며 카림 압둘 자바,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마이클 쿠퍼, 자말 윌키스, 바이런 스캇, AC 그린, 커트 램비스 등을 축으로 통산 4회 파이널 우승이라는 공적을 이룩, 이 시대의 레이커스를 "쇼타임 레이커스"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2.2.2. 뉴욕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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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리 뒷편 두 번째가 제프 밴 건디 코치이다.
레이커스에서 물러난 지 1년만에 뉴욕 닉스의 감독으로 부임. 그는 제프 밴 건디 코치의 보좌를 받으며 유잉-스탁스-오클리를 중심으로 끈적끈적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팀으로 변화를 시도, 마침내 시카고 불스의 대항마로 변모하게 되었다.
초반 두 시즌 동안은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의 벽을 넘지 못하다가, 1993년에 조던이 첫번째 은퇴를 하자 팀에 행운이 돌아왔고, 마침내 1993~94시즌에 NBA 파이널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스턴 로켓츠에게 7차전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고 만다.[4]
1994~95시즌에도 포스를 과시했지만,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반전, 이른바 '''밀러 타임'''이라 부르는 반전으로 7차전만에 패배하고 만다.
시즌이 끝난 직후, 라일리는 재계약할 당시 닉스 지분/경영권 참여와 단장 겸 감독을 조건으로 내걸고 재계약을 시도하려 했지만, 뜻대로 안 되자 결국 계약 기간을 1년 앞두고 사임을 발표했다. 거기에 팀 선수인 앤서니 메이슨과의 불화와 동시에 팀내 분위기가 해이해져 "선수 장악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언론의 질타도 그의 해임을 앞당긴 원인이 되었다. 사임 당시 라일리는 "내가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이별의 이유를 밝혔다.
이즈음 마이애미 히트는 라일리에게 감독 및 사장 겸임과 추후 경영진 합류 약속을 내걸었고, 라일리는 이를 수락하여 히트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마이애미 행은 또다른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그해 9월에 라일리가 닉스 감독 계약을 1년 앞두고 마이애미로 협상 후 이적했기 때문에 법적 분쟁으로 번졌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2003년 래리 브라운이 필라델피아에서 디트로이트로 갔을 때 필라델피아 구단 측이 "괘씸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는데, 라일리 건은 법적으로 파장이 커졌기 때문에 그 비난의 정도가 더 큰 것이다. 결국 닉스는 마이애미로부터 1만 달러의 현금과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받는 조건으로 라일리와의 계약을 취소해서 이를 문제삼지 않겠다고 합의하여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는 마이애미와 뉴욕 두 팀 사이가 틀어진 큰 이유이기도 하다.[5]
2.2.3. 마이애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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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들어온 팻 라일리는 이전까지 글렌 라이스 중심의 중위권+비인기팀이었던 마이애미 히트의 체질개선을 시작했다. 그는 부임 첫 해에 샬럿 호네츠에서 알론조 모닝, 1996년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팀 하더웨이를 트레이드로 각각 영입한 뒤 12월에는 자신의 오른팔인 랜디 펀드를 단장으로 불러들여 순식간에 동부의 강호로 급부상, 1996~97시즌에는 프랜차이즈 사상 최다 성적인 61승을 기록하기도 했다.[6] 게다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뉴욕 닉스와의 피 튀기는 라이벌리를 주도하기도 했다.
2000년에 P.J. 브라운 등 패싸움 농구의 주역들을 샬럿 호네츠의 앤서니 메이슨 등과 맞바꿔 팀을 바꾸고자 했으나, 알론조 모닝의 신장이상으로 팀에서 빠지고 메이슨 등 대형 트레이드로 사들인 선수들이 제 활약을 못해 2001~02시즌부터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연거푸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선수들이 라일리의 지도방식에 불만을 드러내기에 이르자 결국 2002~03시즌을 끝으로 어시스턴트 코치 스탠 밴 건디에게 물려주고 사임하였다. 이후 구단 사장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리빌딩에 전념하면서 케런 버틀러와 드웨인 웨이드를 드래프트로 지명하고, 외국리그에서 뛰고있던 유도니스 하슬렘같은 숨은 인재도 찾아내는 등 초석을 다졌고, 2004년 플레이오프에 2라운드까지 진출하면서 어느정도 성공적인 리빌딩을 마쳤다. 그후 샤킬 오닐, 앤트완 워커, 제이슨 윌리엄스 등을 데려오면서 팀을 단번에 우승후보권 팀으로 끌어올렸다.
2005-06시즌 중반 스탠 밴 건디 감독이 사임하고 감독직에 복귀했다.[7] 감독 복귀 이후 2006년에 댈러스 매버릭스를 꺾고 파이널에서 승리하며,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시즌에 07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4전 전패로 깨졌고, 또 다음시즌에는 주축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로 15승 67패라는 최악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팻 라일리는 자신의 오른팔인 에릭 스폴스트라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면서 지도자 일선에서 물러났고, 랜디 펀드 단장과도 12년만에 결별했다.
2.3. 경영자 시절
사장직 전념 이후에 또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인 2010년에 클리블랜드에서 르브론 제임스를 영입, 르브론-웨이드-보쉬를 축으로 한 빅 3 라인업으로 2011~12 시즌에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상대로 파이널에서 2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2012~13시즌에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꺾고 또다시 우승 트로피를 손에 들었다. 2번의 파이널 패배를 겪긴 했지만 빅3가 가동된 4시즌동안 파이널 진출 4회에 파이널 우승 2회를 거두었으니 남는 장사긴 하다.
2014-15 시즌부터 르브론이 고향팀인 클리블랜드로 돌아가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일단은 드웨인 웨이드 - 크리스 보쉬 둘을 주축으로 계속 윈나우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하산 화이트사이드라는 해외리그 출신 센터가 갑툭튀해서 어느새 팀의 주전 센터로 자리잡았다. 그 외에도 디온 웨이터스, 제임스 존슨, 타일러 존슨 등 타 팀에서 애매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선수들을 팀의 핵심 멤버로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선수들에게 마구잡이로 연장계약을 선물한 것은 나중에 후폭풍을 몰고 오게 된다.
팀 역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드웨인 웨이드가 2015-16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지만, 금액에서 의견 차를 보이고 시장에 나와서 결국 시카고 불스와 계약한다. 드웨인 웨이드 항목에도 적혀있지만 웨이드는 데뷔 후 팀내 최고 연봉자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묵묵히 뛰어왔는데, 이번 오프시즌에도 하산 화이트사이드 재계약을 선물하느라 쓸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웨이드에 성에 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을 제시하고 불스로의 이적을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하산 화이트사이드, 타일러 존슨, 디온 웨이터스, 제임스 존슨 등 선수들에게 선물한 계약들은 2017-18 시즌 이후 팀의 재정 유동성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우승권과는 거리가 먼 전력임에도 리그 전체 연봉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싼 연봉에 가성비 좋은 활약을 펼치던 선수들이 재계약 이후에는 하나같이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특히 타일러 존슨은 4년 50M이라는 겉보기에는 부담없는 연봉을 받지만, 첫 2년에는 6M가량을 받고 뒤의 2년에는 19M을 받는 특이한 계약 구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버페이로 전락했다.
옥석과 같은 선수들을 데려와서 키워낸 것은 물론 뛰어난 성과지만, 장기계약을 남발하며 팀의 샐러리 유동성을 해쳤다는 점에서 경영자로서의 능력은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
3. 감독 스타일
그의 전술은 대체로 센터를 기반으로 한 수비가 특기이며, '''농구판 카테나치오'''라고 일컬어진다. 레이커스 때는 물 흐르는 듯한 올 코트 게임을 전개하다가 닉스 때는 피지컬한 하프 코트 디펜스로 페이스를 만드는 스타일을 구사해냈다.
히트의 수비 시스템[8] 을 설명하는 글로, 올드 스쿨 + 느린 페이스 + 강력한 대인수비 + 압도적인 골밑 수비를 바탕으로 한 잠그기 농구. 팻 라일리의 농구는 '''모든 포제션에서 상대에게 쉬운 슛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려하는 정말로 수비에 올인하는 시스템이었다.'''[9]
카림 압둘 자바의 LA 레이커스, 패트릭 유잉의 뉴욕 닉스, 알론조 모닝(1기)과 샤킬 오닐(2기)의 마이애미 히트등 팻 라일리는 감독시절 항상 최고의 골밑 수비력을 갖춘 센터를 가지고 있었다. 라일리는 이 센터를 하프코트 수비의 최종장벽으로 세우고 커트 램비스&AC 그린, 찰스 오클리, PJ 브라운, 유도니스 하슬렘같이 활동범위가 넓고 몸싸움에 능한 올드스쿨 몸빵형 파워포워드를 센터의 보디가드로 세웠다. 한줄로 요약하면 채치수-강백호급은 항상 됐다는 것.[10]
여기에 양쪽 윙은 강력한 맨투맨 수비를 갖춘 선수를 세우고, 탑에서부터 포인트가드가 상대 볼 핸들러가 감히 픽앤롤 시도도 못할 정도로 압박수비를 하며, 만약 픽앤롤이 됐다고 쳐도 파워포워드가 볼핸들러를 무지막지하게 압박하는 헷지를 펼친다. 그렇게 억지로 뚫고 들어오면 골밑에는 센터가...
이런 수비를 NBA 농구인 48분 내내 하려면 라인업 전체에 어마어마한 체력소모와 운동량을 요구하고, 특히나 센터는 무조건 블록 슛이 탁월하고 골밑 지키기 수비가 능해야 한다. 센터가 둘중 하나만 안되어도 성립이 되지 않는 수비 구조이다. 처음부터 라일리 팀의 1,2,3번은 센터에 대한 무한 믿음을 바탕으로 압박수비를 펼치면서[11] 모든 포제션에 컨테스트를 가져가면서 저득점 경기를 유지한다.[12]
공격은 수비에 비하면 심플한 구조로써 기본적으로 좋은 센터가 라인업에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엔트리패스를 통해 센터가 인사이드에서 공을 가지고 찬스를 만들면서 외곽에 뿌려주는 인앤아웃으로 패스를 돌리면서 노마크 찬스를 만들어내는 올드스쿨형 구조가 된다. 지역방어가 불가능했던 2000년대 이전까지의 NBA농구에 최적화된 스타일이다.
슬램덩크의 북산이 수비적 성향의 팀을 짠다면, 라일리식 수비가 가능은 하다. 일단 최고의 수비형 센터 채치수가 골밑에 있고, 송태섭,정대만,서태웅 모두 대인 수비력이 뛰어나며 강백호는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채치수를 보좌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시스템을 쓸 경우 정대만,서태웅의 체력이 제일 큰 문제이고, 강백호가 상대 픽앤롤때 헷지를 적절하게 나갈 전술이해도가 없다는 약점은 있기 때문에 고교레벨에선 쓰기가 매우 어려운 전술인건 사실.
4. 역대 감독 성적
5. 기타
- 2008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워낙 우승을 많이 한 성공적인 커리어라 부각이 되진 않지만 마이클 조던의 가장 큰 희생자 중 하나이다. 닉스를 이끌던 92, 93년, 그리고 히트를 이끌던 96,97년에 붙어 다 졌다. 이 중 96년만 빼고 우승을 노려볼 만한 게 더욱 아쉬운 점. [13] 라일리보다 더 조던에게 호되게 당한 건 닉스의 에이스였던 패트릭 유잉 뿐인데, 그는 5전 전패...
- 승리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인데 웨이드를 주축으로 우승했을 당시 비서진에게 르브론 계약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등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르브론이 떠난 이후 개판된 팀을 탱킹하지 않고 불과 2년만에 플옵에 진출시킬만한 라인업을 완성시켰다.
- 수많은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선수들과 함께 했다. 감독 시절엔 카림 압둘 자바(1969년 1라운드 1순위)-마이클 톰슨(1978년 1라운드 1순위)[14] -매직 존슨(1979년 1라운드 1순위)-제임스 워디(1982년 1라운드 1순위)-패트릭 유잉(1985년 1라운드 1순위)-샤킬 오닐(1992년 1라운드 1순위) 등과 호흡을 맞췄다. 감독을 맡진 않았지만, 마이애미 사장 시절으로만 보면 르브론 제임스(2003년 1라운드 1순위)와도 인연이 있다.
- 래리 브라운과 그렉 포포비치, 필 잭슨, 척 데일리 등처럼 NBA의 베스트 드레서로 유명했으며, 도트무늬 넥타이를 즐겨 맨다. 손대범의 저서 에 따르면 그가 올백머리를 한 이유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라서 그랬다는 일화 때문이었다. 1981년 11월 19일 감독 취임 당시 기자회견에서 해당 머리스타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리 버스 구단주가 못마땅했다.
- 여담인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마이애미 히트의 단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이유도 아닌 르브론 제임스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라면 팻 라일리의 은퇴계획은 르브론 제임스가 계약 기간이 1년 정도 남았을 때 르브론 제임스의 마이애미 히트와의 장기계약을 체결 시킨 후 남은 기간 동안 히트의 10년동안의 챔피언쉽 도전을 할 수 있는 팀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르브론 제임스가 구단과의 아무런 상의 없이 옵트 아웃을 독선적으로 했고 아무런 통보[15] 도 받지 못한 팻 라일리는 멘붕 그자체였고 그 때부터 목표가 르브론 제임스 없이도 다시 팀을 강하게 만들어 우승하고 르브론 제임스의 우승계획을 무너뜨리려 아직까지 계속 재임하고 있다고 한다.
- 욕쟁이 이기도 한데, 대표적으로 2018년 지미 버틀러를 필두로한 미네소타와의 트레이드에서 성사 직전에 상대 단장이 더 많은픽을 요구하자 바로 '응 마더 X커'박고 트레이드를 끝장낸적이 있다.
[1] 2016년 기준 NBA 올해의 감독상 최다 수상자(3회) 세 명 중 한 명이다. 팻 라일리를 뺀 나머지 둘은 돈 넬슨과 그렉 포포비치.[2] 위에 언급된 글로리 로드에도 "올아메리칸 선수인 팻 라일리를 어떻게 막을거냐?"고 주인공에게 기자의 질문이 들어온다. 실제로 팀의 주축이었고.[3] 이런 일은 의외로 잦은데 NCAA는 전체적으로 신장이 비교적 작아 프로 데뷔할 때 한 포지션 정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센터면 파워포워드, 포워드면 가드 등) 실제로 엘튼 브랜드나 카를로스 부저는 대학시절 내내 센터였으나 성공적으로 파워포워즈 전향을 이뤄내 프로에서 올스타급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일리는 완전히 가드로 전향하진 못했는데 운동능력이 떨어지고 키가 작아 자신과 매치업되는 NBA의 2,3번들에게 고전했다.[4] 실제 1994시즌 뉴욕 닉스와 휴스턴 로키츠의 NBA 파이널은 7경기 모두 한 자릿수 점수차를 기록했을 정도로 매우 치열했다.[5] 출처 : <I LOVE NBA> - 손대범 저. 루키. 2004. p204.[6] 레이커스 감독 시절엔 60승 이상 정규시즌이 많았고, 닉스 감독으로 있을 때였던 1992-93시즌에 60승을 기록하였다. NBA 감독으로 있으면서 3팀을 정규시즌 60승으로 이끈 건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7] 이때 거의 3년만에 현장복귀였던 탓에 논란이 좀 있었다. 본인도 지난 3년간 사장으로서의 업무만 하다보니 작전집을 본적이 없었다고 인정했을 정도. 다만 스탠 밴 건디 사임전까지 마이매이의 성적이 11승10패로 우승후보로 꼽혔던 팀의 성적치고는 너무 부진했다. 팻 라일리로서는 스탠 밴 건디를 계속 밀고 가고 싶어도 중반까지의 성적이 좋지 못했고, 본인도 구단주주들의 눈치와 압박을 무시할수 없는데다, 시즌이 어느정도 지난상황에 새 감독을 찾기도 쉽지 않았을테니, 라일리의 감독복귀는 자의반 타의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8] 이 글의 전반부는 팻 라일리를, 후반부는 빅3 시절의 히트를 지휘하는 라일리의 수제자 에릭 스폴스트라가 팻 라일리 시스템을 히트 선수에 맞게 어레인지한 11~12 히트의 수비시스템을 다루고 있다.[9] 이 문단에서 설명해 놓은 전술 방향 중 느린 페이스로 극단적인 하프코트 농구 타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때는 뉴욕 닉스 감독 시절부터였다. 레이커스 감독 시절 때엔 쇼타임 농구라 불릴 정도로 빠른 공수전환을 보이는 농구를 구사했다.[10] 실제로는 고교농구 수준이긴 해도 강백호가 전술 이해도같은게 없는 초보자라 헷지같은건 못하고 송태섭이 뚫리면 바로 골밑찬스인데 채치수의 무지막지한 수비력+강백호의 운동능력을 앞세운 섀도우 블록으로 막아내는게 북산의 수비 방식이다.[11] 마치 엄마아빠를 믿고 날뛰는 애들처럼, 자기 등뒤에 강력한 센터가 있다면 '''내가 뚫려도 뒤에 센터가 막아줄 것임'''이라는 자신감을 가질수 있기 때문에 앞선에서 좀더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12] 이런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팀이 바로 샌안토니오 스퍼스. 브루스 보웬, 카와이 레너드-팀 던컨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퍼러미터 디펜더-림 프로텍터의 조합으로 2000년대 이후 4번의 우승을 차지했다.[13] 92시즌이 51승에 불과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이 팀은 91년 이후 왕조시대의 불스를 7차전까지 몰고간 두 팀 중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1998시즌 인디애나 페이서스) 그런데 98시즌의 불스와 조던은 전성기가 확연히 지났었지만 92불스는 67승이나 거두고 조던이 최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다.[14] 클레이 톰슨의 아버지[15] 실제로 계약이 1년정도 남았을 때 팻라일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을 르브론 제임스와 공유하고 긍적적인 피드백을 르브론한테 받았다고 한다.[16] 다재다능함을 르브론과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전성기 기준으로는 매직존슨이 더 우위에 있다고도 얘기했다. , 하지만 2020년 라스트 댄스 이후 고트논쟁에서 “아마 르브론이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지 않을까?”라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