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립 교향악단

 

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симфонический оркестр России
영어: State Symphony Orchestra of the Russian Federation (Russian State Symphony Orchestra)
1. 개요
2. 연혁
3. 역대 음악 감독
4. 특징


1. 개요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립 관현악단. 항목 명칭은 약칭이고, 공식 명칭은 이 악단을 키운 장본인이자, 창단 이래 가장 오래 음악 감독을 맡았던 지휘자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의 이름을 넣어 'E.F.스베틀라노프 명칭 러시아 연방 국립 아카데미 교향악단(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симфонический оркестр России имени Е.Ф.Светланова, State Academic Symphony Orchestra of the Russian Federation named after E.F.Svetlanov)' 이라고 부른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아예 '스베틀라노프 교향악단' 이라고 약칭하기도 하는 듯.[1] 홈페이지
과거 전성기 시절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소련 국립 교향악단'''이라는 압박감 있는 명칭으로 서방과 국내에 유명했다. 90년 이전에는 명칭에 걸맞는 강렬한 사운드로 세계에 깊은 인상은 준 오케스트라였으나 90년대 이후 러시아 개방화 및 경제 위기로 우수한 단원들이 서방으로 유출되면서 악단의 실력과 고유의 사운드가 많이 약화되었다.

2. 연혁


1936년에 수도인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하고 창단되었는데, 당시 명칭은 체제가 체제였던 만큼 '''소련 국립 교향악단'''이었다. 이 악단을 창단을 주도했던 알렉산드르 가우크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리히 클라이버가 공동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첫 공연은 그해 10월에 있었고, 알렉산드르 가우크에리히 클라이버가 특별 공동으로 지휘했다. 하지만 실권은 창단을 주두한 가우크에게 있었고, 이에 에리히 클라이버는 단 몇개월만에 직책을 사임하고 나갔다.
가우크는 1941년까지 재임하면서 악단의 연주곡을 러시아/소련 음악 중심으로 확충함과 동시에 악단의 연주력 등 기반도 다져놓았다. 하지만 가우크가 사임하고 후임으로 나탄 라흘린이 들어온 직후 독소전쟁이 터졌고, 여타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를 떠나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등지의 도시를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종전 후 1년 뒤에는 콘스탄틴 이바노프가 제3대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악단 상황을 바로잡고 가우크 시대의 연주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악단의 진짜 리즈시절은 이바노프의 후임으로 들어온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재임기에 있었다. 스베틀라노프는 부임 당시 지휘자로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인 30대의 나이였지만, 러시아 악단 특유의 야성적인 힘과 폭넓은 표현력을 최대한 끌어내 서방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동시에 러시아 관현악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연주와 녹음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러시아 5인조차이콥스키에서 동시대 작곡가들이었던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관현악곡들을 소련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 등에 취입했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후 악단 명칭도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으로 바꾸었다. 영문 정식 명칭은 State Symphony Orchestra of the Russian Federation이었는데, Russian State Symphony Orchestra로 축약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사회에서 빚어진 심각한 경제난 등의 혼란은 이 악단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많은 연주자들이 수입이 별로인 악단 활동 보다는 카바레나 나이트클럽 등에서 오부리를 뛰거나 개인 레슨 등에 치중하는 등 막장화 되었다.
게다가 스베틀라노프 자신도 러시아 보다는 훨씬 페이가 높았던 일본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결국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해 빡친 러시아 문화부에서 해고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스베틀라노프가 물러나고 나서 이 오케스트라의 존재감 역시 크게 약해지고 만다.
후임으로는 마르크 고렌슈테인이 내정되어 있었다가 바실리 시나이스키가 대타로 들어가 2002년까지 재임했으며, 시나이스키 사임 후에는 다시 고렌슈테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고렌슈테인도 임기 중이던 2011년에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참가한 아르메니아 첼리스트와 트러블을 빚은 것이 화근이 되어 물러났고, 후임으로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3년 계약으로 부임했다.

3. 역대 음악 감독


  • 알렉산드르 가우크 (Александр Гаук, Alexander Gauk, 재임 기간 1936-1941)
  • 에리히 클라이버 (Erich Kleiber, 1936, 공동 상임 지휘자)
  • 나탄 라흘린 (Натан Рахлин, Nathan Rakhlin, 재임 기간 1941-1945)
  • 콘스탄틴 이바노프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 Konstantin Ivanov, 재임 기간 1946-1965)
  •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Евгений Светланов, Evgeny Svetlanov, 재임 기간 1965-2000)
  • 바실리 시나이스키 (Василий Синайский, Vassily Sinaisky, 재임 기간 2000-2002)
  • 마르크 고렌슈테인 (Марк Горенштейн, Mark Gorenstein, 재임 기간 2002-2011)
  •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Владимир Юровский, Vladimir Jurowski, 재임 기간 2011-)

4. 특징


이 악단의 전성기를 이끈 스베틀라노프가 이 악단과 거의 동의어로 각인되고 있다. 스베틀라노프 이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한 스베틀라노프 이후 잊혀진 악단이 된 감이 있다. 현재 악단의 정식 명칭에도 스베틀라노프의 이름을 기리고 있으며, 러시아 현지에서도 통상적으로 이 악단을 '스베틀라노프 오케스트라'라고 부른다고.
과거 전성기 시절에는 서방 사람들에게 영문 명칭에 들어갔던 '''USSR''' 표기의 강렬함이 먼저 다가왔고, 실제로 오케스트라의 컬러도 상당히 강렬했다. 이 오케스트라보다 먼저 서방에 유명해진 므라빈스키의 레닌그라드 필[2] 보다 더욱 소련적(강렬한)이라는 평을 받았다.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State Symphony Orchestra of the Russian Federation'로 바뀌고 나서는 1990년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창당한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Russian National Orchestra)'가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매우 잘 나갔기 때문에 혼동될 여지가 있었다.
가우크나 라흘린, 시나이스키 외에 다른 지휘자들이 기본적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재임한 까닭에 지휘자 인사 이동이 생각보다는 적은 편인데, 특히 스베틀라노프[3]는 지금도 이 악단의 황금기를 이끈 지휘자라는 평가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이 악단이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의 태반을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해 제작했다는 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대목이다. 연혁 란에 쓴 것처럼, 스베틀라노프는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아 다루지 않은 몇몇 작품들을 빼면 거의 모든 러시아 관현악 작품들을 녹음한다는 '러시아 관현악 앤솔로지' 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취임 직후부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소련 붕괴 후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특히 총 27곡에 이르는 먀스콥스키교향곡 전집은 2010년 현재까지도 단일 악단[4]과 지휘자에 의한 전곡 녹음으로서는 세계 유일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바실리 칼리니코프(1866~1901)나 안톤 아렌스키(1861~1906), 세르게이 랴푸노프(1859~1924), 안드레이 에슈파이(1925~2015) 같은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희귀작 등 이 앤솔로지 아니면 듣기 힘든 레어템까지 거의 몽땅 포괄하고 있다.
대중적으로는 60년대 후반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 녹음이 매우 유명했다. 이 녹음 덕분에 므라빈스키의 레닌그라드 필과 함께 소련의 양대 오케스트라라는 인식을 서방 대중들에게 확실히 심어줬다.
물론 러시아 작품만 들입다 판 것도 아닌데, 베토벤브람스, 브루크너 같은 서구의 표준 레퍼토리도 곧잘 다루었고 스베틀라노프 자신이 열렬한 말러빠였던 관계로 말러 교향곡 전집도 남긴 바 있다. 다만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경제가 망했어요 상태가 되면서 이렇게 푸짐하게 남긴 녹음들도 음반으로 내줄 음반사가 휘청대면서 구하기도 힘든 상태가 계속되기도 했다. 그나마 워너브라더스 계열사인 워너 뮤직의 프랑스 지사에서 2000년대 후반부터 정리해서 내놓고 있는 중.
1990년 소련이 붕괴하고 개방화가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서방으로 순회 공연도 다니게 되고 특히 일본에서 큰 환영을 받아 몇차례 일본 공연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곁다리로 1990년 일본으로 가는 길에 최초로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당시 급격하게 냉전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성국가였던 소련의 국립 교향악단이 내한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정말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 특히 1990년 일본 공연 때 녹음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후기 3대 교향곡 실황 녹음은 최고의 명연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정부의 지원도 크게 줄면서 오케스트라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능력있는 단원들은 좋은 연봉을 보장해 주는 서방 오케스트라로 대거 유출되었다.
게다가 악단의 버팀목인 스베틀라노프 역시 좋은 개런티를 주는 해외(특히 일본) 객원 지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2000년 경질되게 되었다. 스베틀라노프가 비록 경질되긴 했지만 원로 객원지휘자로 악단에 도움을 줄 것이라 예측되기도 했지만 얼마 후인 2002년 서거하고 말았다.
스베틀라노프가 짤린 뒤에도 혼란 상태가 지속되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거품경제에 힘입어 돈이 궁한 동구권 음악인들에게 돈지랄을 퍼붓던 일본 음반사들이 녹음을 해가면서 약간씩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스베틀라노프 재임 후기에 이 악단과 남긴 녹음들도 대부분 포니캐년 같은 일본 음반사에서 출시되었고, 일본 외에는 홍콩 소재 다국적 음반사인 낙소스에서도 이고르 골롭신과 드미트리 야블론스키 같은 지휘자를 기용해 녹음한 음반들을 내놓고 있다.
비록 소련 붕괴 후 입은 타격을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종종 받는 안습 상황이지만, 러시아의 대표 악단으로 국립 자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주목받고 있는 악단이다.
상주 공연장은 여타 모스크바 소재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차이콥스키 음악원의 대강당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만 여기도 다른 악단들의 스케줄 때문에 과포화 상태인지 차이콥스키 콘서트홀이나 모스크바 국제 예술회관 같은 다른 공연장에서 연주회를 개최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1] 러시아에는 워낙 국립 호칭을 받은 악단이 많고, 이외에 국립은 아니지만 '내셔널' 이라고 붙인 악단도 많아 혼동할 여지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이 때문에 사기 행각까지 벌어지고 있을 정도.[2] 1956, 1960년 DG의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 녹음으로 일찍부터 서방에 유명해졌다.[3] 재임 후기에 외부활동으로 인한 구설수로 불명예 퇴진크리를 당했지만[4] 엄밀히 따지면 단일 악단은 아닌데, 19번의 경우 관현악단이 아닌 취주악단을 위한 작품이라 러시아 국경경비대 취주악단이 섭외되어 녹음했다.[5] 당시에는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가 내한할 때 스폰서 방송사가 TV에 대대적으로 광고해서 음악 애호가들이 아닌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