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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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전 여씨 대구월(전 레 왕조)의 초대 황제이자, 창건자. 시호는 대행황제(大行皇帝, 다이하인황데), 휘는 여환(黎桓)[1] . 후 여씨 대월(후 레 왕조)의 초대 황제인 태조 레러이와 구분하여, 시호를 딴 호칭인 여대행(黎大行, Lê Đại Hành)으로 많이 불려진다.
2. 묘호와 시호
- 묘호: 없음
- 시호: 대행황제(大行皇帝)
3. 생애
3.1. 초기와 출세
여환은 애주의 청련현, 941년 8월 10일 오씨 베트남 치하의 하남 성에서 여막(黎覔)과 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환은 유년시절 부모가 모두 죽고 고아가 되어 쓸쓸한 삶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애주의 어떤 사람이 어린 여환에게 총명함을 느끼고 어린 여환을 데려다 양자로 삼고 친아들처럼 키웠다. 여환은 고아였지만 양부모의 교육과 열성적인 자기 연마 덕분에 십이 사군 시대의 사군 중 하나인 만승왕의 밑으로 들어가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여환은 이후 정연(丁璉)[2] 의 부하가 되었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고 지혜로워 딘보린에게 신임받아 군 통솔권을 하사받았다. 여환은 딘보린을 따라 12사군을 제압하는 전투에 참전했고 여환이 참여한 딘보린 군은 12 사군의 난립을 평정했고 이어 딘보린은 오조의 오창지에게 양위받아 정조(丁朝)의 황제로 즉위한다. 물론 그 과정동안 여환 역시 딘보린 휘하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여환은 공을 인정받아 정선황에게 전국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십도장군(十道將軍)에 임명되었다.
3.2. 두석의 시해 사건
979년 선황과 그 아들 정연이 환관 두석(杜釋)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두석이 그들을 살해한 이유는 찬탈할 마음을 품고 암살한 것이였다. 그러나 두석 역시 이 소식을 들은 정국공 완복(阮匐)의 군대에 의해 허무하게 살해당한다. 문제는 비어진 황위인데,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여환은 완복과 정전(丁佃)등과 함께 정선황의 생존한 유일한 아들 딘또안을 황위에 옹립시켰다. 하지만 딘또안은 나이가 어렸고 일하기엔 부족했으므로 여환이 섭정 자격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섭정직을 맡은 여환은 황위를 손 안에 넣었고 정선황의 황후인 양씨와 사통하였으며 자신을 부왕(副王)이라 칭하였다. 여환의 횡포에 반발한 정국공 완복과 정전, 범합(范盍)은 거병을 계획하고 여환을 공격했으나 정소는 패배하여 전사, 완복은 체포당했으며 범합은 북쪽의 길리향(吉利鄉)으로 도주했으나 여환의 군대에게 체포당했다.
3.3. 북송의 침입과 즉위
이 소식을 들은 북송의 박사(博社) 후인보(侯仁寶)는 여환의 반란사건의 소식을 듣고 송태종에게 이를 알려 안남을 평정하기엔 혼란기인 지금이 기회라고 조언하여 후인보, 손전흥 등을 중심으로 육군과 수군을 구성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송의 양주수군의 침공하자 양태후는 여환에게 군권을 이양했으며 구 정조의 신하들도 위기를 막기 위해 여환에게 즉위를 건의했고 황제의 옷을 주었으며 980년 여환은 화려(華閭)에서 즉위식을 치뤄 황제로 즉위하였다. 동시에 정조의 황제 딘또안은 위왕으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북송군도 계속 남하하여 백등강까지 총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엔 송군이 이기는가 싶었지만 송 역시 요나라의 침공 가능성, 여환의 뛰어난 군 통솔력과 주요 지휘관인 후인보의 전사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송군은 철수하였다. 이어서 여환은 송나라에게 정식 책봉을 요구했고 송태종도 요구를 받아들여 993년 여환을 교지군왕, 997년 승격하여 남평왕에 책봉한다.
이와는 별개로 여환은 황제에 즉위하고 전부터 사통하던 양태후와 정식으로 혼인하였는데 이는 후세 베트남 사관들에게 윤리에 어긋난다는, 여환이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3.4. 참파 정벌과 외교 관계
송의 침입을 막아낸 대행은 이어서 참파에도 눈을 돌렸다. 982년 군사를 보내 참파왕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3] 를 죽이고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이 전쟁 이후 참파는 대구월에 조공했고, 안남의 관리 유계종은 참파로 도망가 참파왕을 참칭하였고 북송에 조공을 보냈다. 여환은 자신의 양자를 보내 참파군을 제압하고 유계종을 잡아 죽였다. 여환은 정복 사업을 펼치는 한편, 편의에도 신경써 자주 건너는 길에는 항구를 개척하였다.
북송과는 전에 정식으로 책봉받는등 화의를 맺었으나 여전히 조정 내에선 북송에게 적대적이였다. 제후왕으로써 북송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고 무시했으며 자주 군대를 보내 북송 국경과 남쪽 해안을 교란시켰고 송은 요나라, 서하의 침공을 방어하느라 급급했기에 대행에게 노략질을 자제하라고 청했으나 무시하였다.
3.5. 자국의 통치
여환은 북송의 재차 침입을 염려해 엄격한 법치제도를 마련했으며 1002년 율령을 제정하여 군사를 선발하고 전국 십도를 편리하게 나누어 중앙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목(徐穆), 반거량(范巨倆), 오자안(吳子安) 등 유능한 대신을 임명해 나라를 통치했고 운하를 개통하였다.
하지만 엄격한 정책으로 인해 지방 호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농민봉기나 소수민족의 봉기가 잦아졌다. 999년 소수민족 망인의 난과 하만동의 난, 1000년 호족인 진록(陳麓)이 난을 일으켰고 1003년 개인(蓋人)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3.6. 불교의 대중화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수많은 땅을 사당을 짓는데 사용했으며 많은 승려들을 공양하여 승려 계층은 당시 대구월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여환은 사람을 고용하여 불경 번역에 힘썼고 이 시기 여러 불상과 사찰, 불탑이 세워졌다. 대행의 이러한 불교 수용 정책은 불교를 이용해 지배체계를 확고히 하여 반란 진압과 민심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였다.
3.7. 사망과 사후 반란
대행은 1005년 사망했다. 향년 64세로 그가 묻힌 능은 덕릉(德陵)이다.
각지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행은 자신의 아들들을 전국 각지에 왕으로 봉하여 제후로 통치하게끔 했다. 반란을 막기 위해 혈연관계로 맺어진 왕자들을 보내 세력을 나누어줬으나 반란의 빌미가 되어 1005년 중종이 즉위한 지 3일만에 와조제에게 살해당했으며 폭정을 일삼던 와조제 역시 사망하자 유력한 군신들이 제위를 두고 혼란기를 일으켰다. 마침내 승리한 이공온이 즉위하여 혼란기를 평정하였다.
여환은 사망했을 당시 시호가 올려져야 했지만 사후 황자들이 황위를 두고 다투기 바뻐 미처 그에겐 묘호와 시호가 올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와조제가 사망할때까지 그저 대행황제(大行皇帝)로만 불리다가 후세에 레러이와 구분하기 위해 여대행(黎大行)이란 별칭이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