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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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이다. 리 왕조는 1009년, 탕롱(Thăng Long, 지금의 하노이)으로 천도를 했고, 9대 215년간 베트남을 통치하였다.
2. 역사
1014년, 대리의 황제 단소렴이 군사를 일으켜 대월을 기습침공해 일시적으로 뚜엔꽝 성을 점령해 대월은 무너지는가 싶었지만 곧이어 리 태조 이공온의 반격으로 대리군은 물러나고, 역으로 대리의 영토를 침공하여, 오늘날 하지앙, 라오까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대월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어 리 성종 시기인 1054년에 국호도 딘 왕조 시기의 대구월(大瞿越, Đại Cồ Việt)에서 중간의 구를 뺀 대월(大越)로 바꾸었다.[7] 중국과 참파와의 대립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왕안석은 중국 남부 눙족의 금광에 대한 욕심과 그 뒤를 후원한다고 추정하는 대월을 정벌할 목적으로 교류를 금지시키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76년, 리트엉끼엣(Lý Thường Kiệt, 李常傑, 1019–1105)이 송을 먼저 선공하면서 송나라와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리트엉키엣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남국산하(南國山河)'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 시에서는 중국의 황제에 대해 리 왕조의 군주를 '남제(南帝)'[8] 라고 칭하여 중국에 대한 대등 의식을 과시하고 있다.
이 전쟁이 길어지자 서로 득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양국은 서로를 인정하는 형태로 화평조약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송 황제는 이전까지 베트남을 가리키던 교지군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안남(安南)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리 왕조는 스스로를 대외적으로 안남이라고 칭했으며, 베트남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안남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된다. 베트남 쌀을 안남미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 정도로 잘 나갔으니 참파는 수도 없이 털었다.(…) 또한 리 영종 이천조 시절에는 1154년 남은 베트남의 북서부 소수민족인 손만등을 정벌하면서 오늘날 북부 베트남 지역의 영토가 이때 거의 완성된다. 하지만 전성기도 여기까지였다.
리 왕조 후기 시대에는 리 고종 이용한이 즉위한 이후에 고종의 사치와 부패가 이어지면서 민심이 날로 악화되어갔고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 쩐투도(진수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혜종(惠宗)의 외척이 되면서 실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일어난 반란도 평정하였으며, 진수도는 1224년에 혜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딸 리펏낌(Lý Phật Kim, 李佛金)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녀가 리 왕조 마지막 황제 소황(昭皇)이다. 이후 폐위된 혜종을 자살로 내몰았다. 쩐투도는 자신의 조카인 쩐까인(Trần Cảnh, 陳煚)과 소황제를 결혼시키고 1225년에는 자신의 조카인 쩐까인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황위를 탈취하였다. 이로써 리 왕조는 멸망하였고, 왕족들은 새 왕조에 의해 몰살되었다.
소황과 그녀의 언니는 살려두었지만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가계는 이 둘을 끝으로 끊겨버렸다.[9]
베트남에서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왕조이다. 1070년에 문묘를 설치하고, 1075년에 과거를 실시했으며, 1076년에 국자감을 설치했다. 단, 리 왕조의 과거는 비정기였고 뽑는 인원이 적었다. 200년에 달하는 왕조 기간 동안 고작 8회가 시행되었으니, 과거의 활성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10]
3. 역대 군주
3.1. 계보
4. 리 왕조의 후손
하지만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진 고려로 망명하여 살아남은 후손이 몇몇 있다. 인종(仁宗)[13] 의 셋째 아들 이양혼(李陽焜, Lý Dương Côn)이 리 왕조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 북송으로 망명했다가 북송마저 금나라에 멸망하고, 남송이 세워진 후에 이웃 국가인 고려로 망명해 정착하였고, 그를 조상으로 삼는 정선 이씨가 있다. 또한 쩐씨가 왕위를 찬탈하고 리 왕조가 멸망 할 때 멸족을 두려워한 혜종의 숙부 이용상(李龍祥, Lý Long Tường)이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족이 몰살당하기 전에 고려로 망명, 귀화하면서 고려에 정착, 그를 조상으로 삼는 화산 이씨가 있다. 하지만 워낙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의 이야기가 스펙터클한 지라 정선 이씨는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감이 있다.
1996년에 베트남에서는 770년만에 리 왕조의 후예들이 왔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연다고 한다.
5. 둘러보기
[1] 외왕내제.[2] 왕조 개창자.[3] 개혁 추진.[4] 국호 변경.[5] 전성기, 영토 완성.[6] 마지막 군주.[7] 아마 瞿는 고대 베트남어의 요소를 반영한 글자이겠지만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해 보면 뭔 뜻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고 군더더기 같아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에서도 비슷하게 장수왕이 고구려(高句麗)에서 한자 뜻으로 해석하면 뭔 뜻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句를 빼서 고려(高麗)를 정식 국호로 쓰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는 후대에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냥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당대에는 국호를 바꿨다. 실제로 장수왕 이후 중국 역사서나 중원고구려비 같은 당대 금석문에 국호가 고려로 표기되기 시작한다.[8] 남제는 만춘의 초대 황제 리비가 맨 처음 쓰던 시호이기도 하다.[9] 다만, 조선에서 왕씨가 다른 성으로 바꿔서 목숨을 보존했듯이, 리 왕조의 후손들은 성을 '응우옌(Nguyễn, 阮)'으로 바꾸고 숨어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용상이 화를 피해 고려로 입국하고 나서 그의 후손들이 770년만에 속속들이 베트남으로 환국함으로서 다시금 베트남에서 리(이)왕조의 후손들을 볼수있게 되었다.[10]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11] 1202년 ~ ?. 고종의 차남이자 혜종의 이복동생이다. 1209년 환관 범병이(范秉彛)의 부하 곽복(郭卜)의 반란으로 고종이 수도에서 추방된 뒤, 궁중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진리(陳李, 원조/元祖)에 의해 반란이 평정되었으나 이후 이침의 행적은 불분명하다.[12] ? ~ 1221년. 영종의 아들로 혜문왕에 봉해졌으며 천안전(天安殿)에게 추대받아 즉위. 1216년 혜종과 진사경(陳嗣慶)에게 패배한 후에 원왕(元王)으로 강등되었으며, 1221년에 병으로 사망.[13] 리 왕조의 제4대 황제. 본명은 리깐득(Lý Càn Đức, 李乾德). 북송에 의해서 남평왕(南平王)으로 책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