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
'''파리의 성모'''[1]
'''출생'''
기원전 18년경(?)
헤로데 왕국 나자렛
'''사망'''[2]
30년 또는 33년경(?)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예루살렘[3](?)
'''배우자'''
나자렛의 요셉
'''자녀'''
예수
'''축일'''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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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성모 마리아
'''히브리어'''
מרים, אם ישו (미르얌 임 예슈)
'''아람어'''
ܩܕܝܫܬܐ ܡܪܝܡ (Qaddishtā Maryam)
'''그리스어'''
Παναγία (Panagiá, /panaˈʝia/)[91]
Δέσποινα (déspoina, /ˈðɛ.spi.na/)[92]
Παρθένος Μαρία (Parthenos Maria)[93]
'''라틴어'''
Sancta Maria
Mater Dei
'''아랍어'''
(Maryam al-ʿadhrāʾ)
مريم بنت عمران (Maryam bint ʿImran)
'''터키어'''
Bakire Meryem
Meryem Ana
'''영어'''
Mary
Virgin Mary
Mother Mary
Mary the mother of God
Mary the mother of Jesus
"Our Lady"
'''프랑스어'''
Ste.Marie
Notre Dame
'''이탈리아어'''
Madonna("My Lady")
'''러시아어'''
Дева Мария
Богородица
'''일본어'''
聖母マリア
生神女マリヤ[94]
'''중국어'''
玛利亚(Mălìyà)

1. 개요
2. 상세
3. 성모 공경
3.1. 천주교의 입장
3.2. 초대 교회
3.3. 5세기
3.4. 중세 시대
3.5. 19세기
3.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3.7. 한국 가톨릭 교회와 성모 마리아
4. 정교회의 성모 교리
4.1. 정교회-가톨릭 성모 교리 비교
5. 평생 동정?
5.1. 가톨릭(및 정교회)의 입장
5.1.1. 잘못된 성모신심
5.2. 개신교 입장
6. 개신교의 관점
7. 이슬람의 관점
8. 유대교의 관점
9. 성모 마리아의 축일
10. 기타
11. 대중 문화에서의 성모 마리아
11.1. 종교 영화에서의 성모 마리아
11.2. 기타 창작물에서의 마리아
12. 관련 어록
1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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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독교이슬람교에서 성령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임신[4]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2. 상세


전승에 따르면 아버지는 요아킴, 어머니는 안나이며 둘 다 성인(聖人)이다.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예수를 낳았을 뿐 마리아는 평범한 인간으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5번째 항목 참고.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여인들 중 가장 복되신 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크게 공경한다.[5]정교회 또한 가톨릭 못지 않게 성모 마리아를 특별하게 여기며 이는 성인을 공경하는 전통이 있는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처녀 잉태는 그리스어로 파르쎄노예네시스[6]로, 아래의 구약성경 구절을 끌어다 왔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3-14, 공동번역성서)

이 구절의 '처녀'를 단지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위의 처녀가 히브리어로 Almah라는 단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처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Betulah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까지도 논란이 진행 중이다. 일반적인 반론은 젊은 여성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므로 주님이 보여주는 징조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한편,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새로 펴낸 성경에서는 히브리어의 뜻을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 7,13-1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논란이 되는 이사야서와는 달리 마태오 복음서에는 해당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어로 Παρθενο(Virgin, 동정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사야서에서 '젊은 여자'라는 뜻으로 저 단어를 썼다 한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동정녀인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마태오를 비롯한 복음서들은 처음부터 그리스어권에서 그리스어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으며, 그래서 구약 인용도 그리스어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어권 유대인들[7]에게 널리 쓰이던 구약성경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작된 70인역인데, 이 책에서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Παρθενο(동정녀)로 번역한 것이 그대로 복음서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이미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 해당 구절을 원 맥락에서 벗어나 처녀 출생의 신적인 기원을 가진 메시아 도래의 예언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안나와 요아킴'''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자신의 탓이라 여긴 요아킴은 기도를 위해 은둔했고, 안나는 남편의 은둔과 자식이 없는 것을 한탄하면서 하느님에게 "만일 아이를 낳게 해준다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부부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 안나가 놀라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부부는 나자렛 성벽에서 기쁨의 재회를 맛보고, 그 뒤 태어난 딸이 성모 마리아라고 한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안나의 기도대로 3살 때 예루살렘의 성전에 맡겨진다. 성모 공경이 숭배 수준으로 극심해질 시기에는 성모 마리아가 안나와 요아킴이 성벽 아래에서 만났던 그 때 잉태되었다고, 즉 예수와 같이 성관계 없이 잉태되었다는 수준으로 격상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래에 언급될 '무염시태'와 연관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아랍계 여성의 이름에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국가들에서 여성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구약에 나오는 '미리암'의 변형으로서 친족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유대 지방의 풍습 때문에 많이 사용되는 이름이다. 복음서에 '''해당 이름을 가진 사람만 3명'''이다. 영어권에서 자주 쓰이는 이름인 Mary(마리, 메리) 같은 건 모두 여기서 나온 이름이다.
반대로 예수는 당시에는 흔한 이름이었지만, 비록 이름일 뿐이긴 하나 하느님과 맞먹는 셈이 되기 때문인지 중세를 거치면서 서유럽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인명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줄어든 편이다. 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스페인어권과 중동 기독교 문화권 등에서는 여전히 Jesús(헤수스)라는 이름이 흔하게 쓰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축구선수 헤수스 나바스가 있다.
성모 마리아와 비슷할 정도로 학계에서 유명한 또 다른 마리아는 창녀[8] 혹은 과부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예수를 만나 회개했고 간혹 예수의 아내였다는 개드립이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 부활한 라자로의 누이이자 예수의 수난 전 그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바르는 막달리아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시중을 들던 마리아 베타니아 등이 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유일한 여제자였단 말도 있지만, 이는 소위 위경에 적힌 것으로 보통 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마리아는 많이 쓰는 이름이라서 성모 마리아나 다른 마리아들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가톨릭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성부, 성자, 성령를 제외하면 성인 중에서 가장 우선 가는 이로서,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한 위격의 현세적 어머니다운 대접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남편인 나자렛의 성 요셉과 함께 '''대한민국수호성인''', 정확히 말하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호칭[9]으로서의 수호성인이다. 여러가지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는 호칭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며, 한국 가톨릭의 중심지인 '''명동성당의 주보성인'''이기도 하다. 광복절과 성모승천 대축일[10]이 겹치는 것도 한국 가톨릭계에서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3. 성모 공경



3.1. 천주교의 입장


성경에는 직접 언급이 없고 전승상으로 근거한다. 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비록 공식적인 의견 표명은 아니었지만, 요한 복음서 14장 3절을 성모 승천에 대한 교의적 근거로 인용하였다. 성모 승천 교의 역사의 끝자락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는 사도헌장《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룩한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모든 입증과 확신은 거룩한 전승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성모 승천은 수세기 전부터 기독교인들 사이에 공연히 믿어져 오던 전승이었다. 비록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믿을 만한 교회의 전승으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구세사(救世史)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 등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우선 마리아 이전에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이미 승천, 즉 육신과 영혼이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은 사례가 있다.
  • 에녹
>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에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히브 11:5)
  • 모세[11]
>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단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 (유다 1:9)
  • 엘리야
>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2열왕 2:1-5)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례를 봤을 때, 마리아 역시 그러한 들어올림의 대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렇게 큰 무리라고 볼 수는 없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하늘나라로 들어 올려졌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에게 죄가 없다면, 죽음이 그녀를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며 지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여 낳았으며, 그를 양육하였으며, 십자가 밑에서 그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며 곁을 지켜주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기 어머니인 마리아를 각별히 여겨 에녹과 엘리야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의 육신도 하늘나라로 들어 올렸을 것이다.

우리 그분 거처로 들어가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리세. 주님, 일어나시어 당신의 안식처로 드소서. 당신께서, 당신 권능의 궤와 함께 드소서. (시 132:7-8)

가톨릭 교회는 상단의 구절을 보고 이미 성모 승천이 예정된 일이었다고 보고 있다.
마리아는 새로운 계약 궤이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처로 이끌었듯이, 그리스도 역시 하늘로 승천하여 자신의 거처로 백성들을 이끈다.
요한 묵시록 12장을 보면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릴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다.
성모 승천 교의 공격에 대해서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가톨릭과 밀접한 성미술(聖美術)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성모 승천을 주제로 그려진 성화는 비오 12세교황무류성의 이름으로 믿을 교리로 선포한 20세기를 훌쩍 넘은 14세기에도 등장하고(심지어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이다.)[12], 이탈리아에 정말 널리고 널린 성모 승천이라는 의미의 산타 마리아 아순타(Santa Maria Assunta)라는 이름을 지닌 성당은 르네상스 이전 시대부터 버젓이 지어지고 있었다. 위 문단에서도 성모 승천이 가톨릭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렀다는 언급이 있었으나, 그것이 비오 12세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선포한 것이 문제를 일으킬 정도의 사안이었다면 과연 성모 승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저렇게 활발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물론 선포 당시 교회 내 일부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문제될 정도의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수의견을 다수 여론의 주장으로 침소봉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예수가 묵시록에 나오는 이 사내아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은 다름 아닌 동정 마리아를 뜻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수세기에 걸쳐 발생한 성모 마리아의 발현, 즉 가르멜 산의 성모, 과달루페의 성모, 뤼뒤박의 성모, 파티마의 성모 등을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태양 내지는 발밑에 달을 두고 있다는 점,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썼다는 점 등 묵시록에서 언급된 여인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요한 묵시록 12장에서 여인이 낳은 사내아이는 하느님에게로, 그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고 나온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 하느님에게로 갔다는 뜻은 십자가상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내아이가 하늘로 올라가자 은 그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을 쫓아갔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큰 독수리의 두 날개가 주어졌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 그 뱀을 피하여 그곳에서 일 년과 이 년과 반 년 동안 보살핌을 받았다. (묵시 12:13-14)

여기서 ‘큰 독수리의 두 날개’라는 말을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휘저으며 새끼들 위를 맴돌다가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들어 올려 깃털 위에 얹어 나르듯…. (신명 32:11)

위의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때, 독수리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이며 두 날개는 하느님의 두 천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인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고 자기 처소로 날아가 뱀을 피하여 피신했다는 구절은 곧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 의해서 하늘나라에 들어 올려졌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교부들은 창세기를 검토하면서 성모 승천을 확신하였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동정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인류 구원 사업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들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공동 운명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창세 3:15)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사탄과 마리아 사이에, 타락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적개심이 형성되리라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다.
성모 승천 교의를 입증하는 모든 논리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로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완전한 궁전이 되기 위해서는 원죄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8세기의 교부 성 제르마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정 마리아가 원죄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잉태된 순간 받게 되는 육신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세 요소가 태중에서부터 이미 완전무결해져야만 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에 의해 제2의 하와로서, 즉 티 없이 깨끗한 상태로 창조되어야만 했다. 그녀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육신은 원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만 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의 뜻에 불복종했을 때, 하느님에게서 받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때가 되면 영혼과 정신 그리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의 세례를 통해서만 새로운 마음과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의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이나 교회의 전승 그 어디에서도 마리아가 여느 인간처럼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마리아가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이미 새로운 몸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녀는 원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원죄에 전혀 물듦 없이 잉태되도록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다. [13]
마리아가 여느 인간처럼 단순히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으로서만 생겨난 자손이었다면, 마리아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부모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는 달랐다. 하느님은 특별히 손을 써서 마리아가 태중에 잉태될 때 미리 그녀를 원죄로부터 차단하여 그녀가 티 없이 깨끗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마리아는 원죄 없는 여인이 됨으로써 주의 어머니가 될 자격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태중에 잉태될 때 원죄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육신과 정신,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 온전히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지지하는 성경상의 증거는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하와가 죄를 범한 후 그녀에게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은 하와에게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창세 3:16)

라고 예고하였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원죄를 물려받지 않고 흠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낳을 때는 원죄의 산물로 나타나는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논리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성경에도 고통 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진통을 겪기 전에 해산하고 산고가 오기 전에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누가 이런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한 나라가 단 한 번 만에 태어날 수 있느냐? 한 민족이 단 한 번 만에 태어날 수 있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이 오자마자 자식들을 낳는다. (이사 66:7-8)

위에서 언급한 논리로 볼 때 마리아의 육신은 여느 인간처럼 땅속에 묻혀 의미없이 소멸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늘나라로 들어 올려졌거나 죽은 상태에서 부활하여 하늘나라로 들어 올려졌다는 신학적 논리로 도출된다. 이 두 가지 논리 가운데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교회는 유보적인 상태다. 어쨌든 새로운 하와이자 세상의 어머니로서 티 없이 깨끗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육신과 정신, 영혼은 때가 되자 하늘나라로 들어 올려져 영광스러운 빛의 존재로 변화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보통 인간은 지금의 육신은 결국 소멸하며, 소멸하지 않는 불사의 몸을 갖기 위해서는 최후의 심판 날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창세기, 이사야서, 요한 묵시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성경 구절을 전부 종합해 보면 동정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내용이라 본다.

3.2. 초대 교회


'''성모 공경은 2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14] 천사의 인사가 마리아 공경의 역사적 기원이다. 이것은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파견자인 천사가 나자렛 처녀에게 보여준 존경과 영광의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천사는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하였던 것과 그녀에게 주어진 성소 때문에 존경하고 영광을 드린다. 또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마리아를 보자마자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공경을 드린다.
2세기에 유행했던 위경인 <야고보의 유아 복음서>에는 성모 마리아의 출생, 성장, 수태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하와(이브)의 안티테제로서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브의 불순종을 동정녀의 순종('''Fiat voluntas tua''')으로 말소하고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 동정녀는 여성의 대변자가 된다.
성모 공경은 5세기 초에 신학적 논쟁에 휩싸인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안티오키아 학파의 거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마리아론을 주요 쟁점으로 삼았다. 이 논쟁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성모 공경에 대해서는 두 신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었으나, 그녀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가 문제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취임했던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체만을 낳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반발하여 치릴로가 이끌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동정녀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기존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이렇게 전개된 논쟁에서, 우선 민간을 포함하여 당시 기독교 사회에 두루 성모 공경 신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 논쟁은 마리아론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론이다. 인간이자 동정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명제를 예수의 입장에서 풀면, 예수는 참 하느님이면서 참 인간(마리아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러한 명제가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인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서 이를 막고자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체만을 낳았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의도 자체만으로는 기독교 입장에서도 결코 이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논쟁이 계속되면서 네스토리우스는 전체 교회의 뜻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통합적으로 보는 사유를 거부하고 둘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애초에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용어는 이미 3세기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니시오스출처의 문헌, 그리고 시리아 지역의 전례문[출처]에서 등장했고,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성모 찬가 중 하나인 'Sub tuum praecidium'(Ὑπὸ τὴν σὴν εὐσπλαγχνίαν)의 원문의 창작 시기 역시 루마니아계 영국인 파피루스학자 에드가 로벨의 연구에 따르면 3세기 중반이다. 다른 의견인 로버츠의 의견을 보아도 4세기 초반이다. 이를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비단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성모 공경 행위가 초대교회 시절부터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의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 공인이 콘스탄티누스 시대 4세기 초중반이었고, 기독교 국교화는 그보다 후인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였으니, 강제화 후 이교 신앙이 유입되어 이미 존재했던 성모 공경 문화가 '''이후에''' 상당수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성모 공경 행위의 '''근본'''마저 이교 풍습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3.3. 5세기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이 신학적 정당성을 얻고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기독교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자', 그리스어로는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Theotokos[15])임을 선언했다. 패배한 네스토리우스는 면직되고 파문된 후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다. 이후 성모 공경은 거침없이 확산되어, 기독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에 이르게 되고, 후대에 이르면 교회에서 그리스도 다음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17]

3.4. 중세 시대


중세를 지나면서, 특히 유럽흑사병이 돌았을 때 이를 주의 징벌로 해석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면서, 신자들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자애로운 성모'''.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엄격한 심판자로, 마리아를 자비로운 어머니로 이해하였고, 성모 마리아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기 보다는 기적적인 도움을 청하는 기도의 대상으로 국한되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 마리아에 관한 많은 작품들은 외경을 근거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한 것들이 많았다. 물론 과장되고 잘못된 마리아 신심을 바로잡으려는 신학자들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서 대 알베르토는 성모 마리아는 모든 성인들보다 최고의 공경을 받아야 하지만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을 받을 수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당시 많은 작가들이 잊고 있었던 마리아와 그리스도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항상 주지시켰다. 그는 물론 마리아의 중개성을 인정하지만, 그 중개는 항상 간접적인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의 영예는 왕의 영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성질을 지니시는 것이므로 마리아는 신적 영예를 요구하지 못한다. 그분의 아드님은 그의 신성을 그 어머니로부터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3.5. 19세기


18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하느님의 사적 계시를 전해주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마리아 신심을 더욱 확장시켰다. 지금까지 성모 발현에 대한 수많은 보고가 있었지만 교회 교도권이 그 진실성을 인정한 성모 발현은 다음의 10번이다. 멕시코의 과달루페(1531년), 프랑스 파리의 뤼 뒤 박(1830년), 프랑스의 라 살레트(1846년), 프랑스의 루르드(1858년), 프랑스의 퐁멩(1871년), 아일랜드의 녹(1879년), 포르투갈의 파티마(1917년), 벨기에의 보랭(1932년), 벨기에의 바뇌(193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1945년).
이 외에 미국의 베이사이드나 우리나라 나주의 성모 발현, 스페인의 가라반달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나주 성모동산의 경우 관할 교구인 광주대교구의 당시 교구장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가 나주 성모동산이 더 이상 가톨릭교회와 일치 화합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교령을 2008년 1월 반포하였다.
한편 메주고리예의 성모 발현은 아직 조사 중에 있어서 최종 결정이 유보된 상태다.

3.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하여 성모 신심에 대한 중용을 찾게 되고, 성모 마리아는 '교회와 신자들의 모범인 성모'라는 이미지로 제자리를 찾고 그에 맞는 자리를 잡게 된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 문헌 교의 헌장 부분의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 부분에 잘 나와 있다. 분명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는 구별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으며, 성모로서 그 어떤 성인보다 공경하는 것[18]뿐이지 절대로 숭배가 아니라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엘리사벳이 말했듯, '''최고로 복되신 여인'''이며, 역사에 그녀보다 더 아름답고 능력있는 여인들이 많을지 몰라도, 성모 마리아만큼 복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가톨릭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 중에는 성모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한 군대를 모토로 한 레지오 마리애가 있다. 여기서 쓰는 성모상은 뱀을 발로 밟고 있는 뤼뒤박의 무염시태 성모상이다.
터키에페스(Efes) 근처에 위치한 뷜뷜 산(Bülbül dağı)에는 성모가 사도 요한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는 집의 유적이 있다. 한 수녀가 환시를 통해 성모님의 집을 찾았는데, 우연히 닿은 그곳이 환시에서 본 집과 주변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지로 공인된 곳이다. 무슬림터키인들은 이 집을 찾아와서 소원(!)을 빌고 가는데, 종이에 소원을 적은 다음 성모의 집 주변의 나무에 매달아놓는다. 또한 성모의 집 근처에 있는 우물의 물은 영험한 치유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 가톨릭 신자들도 많이들 떠나는 성지순례 여행패키지에도 파트모스 섬과 함께 반드시 들어가는 곳.

3.7. 한국 가톨릭 교회와 성모 마리아


한국 가톨릭은 교회 형성 시기부터 성모 공경을 통한 마리아 신심 운동을 활발히 펼쳐오고 있다. 신자들은 「천주실의」,「성경직해광익」,「주교요지」 등 서학서를 통해 마리아에 대한 이해를 키웠고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 신심을 함양했다. 박해시대 관헌에 체포된 신자들은 모진 고문에도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신앙을 증거했고, 순교 직전까지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의 성모신심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확산됐다.[19] 조선대목구는 놀랍게도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탄생했다. 유럽에서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이 성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대목구 설정을 반포한 것이다.
조선 땅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던 성모 신심, 특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대한 신심과 전통을 한국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주교로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칭송해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이를 허락했다.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2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원죄없으신 성모 성심회'를 설립, 신자들의 성모신심 운동을 체계화ㆍ조직화했다. 한국 가톨릭 마리아 신심 단체의 효시인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매주 정기 모임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많이 바쳤다.
제6대 조선교구장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는 1877년 재입국한 후,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이탁이 저술한 「성모성월」을 한글 번역본으로 간행해 유포함으로써 성모 공경을 더욱 신장시켰다. 한글 번역본 「성모성월」의 내용은 서문에서 성모성월에 대한 해설과 1822년 비오 7세 교황이 공포한 ‘성모 성월 및 성모 공경에 관한 대사문’이 수록되어 있고, 본문에는 5월의 ‘성모 성월’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총 32일 분량의 묵상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각 날은 그날의 주제에 대한 설명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에 이어 덕행 실천, 기도 지향, 성인 행적의 예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성모 성월을 정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모 마리아님을 예로써 공경하는 달을 정한 첫 번째 이유는 성모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평생토록 주시는 온갖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이다.……성모성월을 정한 2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주의 성총이며, 이는 잠시라도 멀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하여 선종하는 것은 모두 천주 성총의 도우심 때문이니,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 성모님의 인자하심에 의뢰하지 않고 이 성총을 얻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대 어찌 성모님을 공경하고 성모님께 기도하는 데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3번째 이유는 성모 성월이 성모님을 특별히 열애하고 공경하는 거룩한 때와 가르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 한국 가톨릭은 1898년 명동성당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한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8월 15일은 바로 성모승천대축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민족의 해방을 성모 마리아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 성모 신심은 더 확산됐는데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파티마의 성모 신심이 급속도로 퍼졌다. 1950년 전후로 레지오 마리애, 파티마의 성모 사도직(푸른군대), 성모 기사회 등 성모신심 운동 및 사도직 활동이 도입됐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리 선포 100주년이 되던 1954년 한국 주교단은 성모 성년 대회를 개최하고 다시 한 번 한국 가톨릭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공식적으로 봉헌했다.
아울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한반도와 한국 가톨릭교회를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또 대구대교구 성모당,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 등 성모 순례지를 지정, 신자들의 건전한 성모신심을 함양시키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성모 마리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4. 정교회의 성모 교리


정교회 역시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며"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천상의 모후로서 찬미를 받는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무염시태는 부정한다.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원죄의 관련성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에''' 1854년 서방 교회에서 무염시태를 선포한 것과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교리상 이렇게 본다.

성모께서 잉태되신 순간부터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존재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성모 마리아 역시 모든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요아킴과 안나 사이에서 탄생하셨으며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세주로 불릴 수 있으며 성모 마리아는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구세주를 받아들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이다.[20]

정교회의 성모 교리 역시 가톨릭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에 대한 가르침이 다르다. 우선 정교회에서는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도 다른 인간들처럼 원죄가 있었지만,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모희보(聖母喜報, Ευαγγελισμός της Θεοτόκου)[21]'를 받은 시점에서 원죄가 사라졌다"는 '무염'''수'''태'를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또한 하늘로 들어올려졌다는 몽소승천 역시 직접적으로 승천을 교리로 가르치지는 않으며, 단지 나중에 사도들이 성모 마리아의 무덤을 열어보니 비어 있었다는 '성모 안식(Dormitio)'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교리가 아닌 '전승'의 차원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8월 15일이 가톨릭에서는 성모승천대축일이지만 정교회에서는 성모안식축일이다.
정교회에서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은 성모 마리아가 태중에 있었을 때부터 원죄가 없을 경우, 원죄에서 해방됨으로 인류와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세르게이 불가꼬프(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는 '''교황이 마리아의 순결의 원천을 '기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완덕과 신심과 경건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고 말하면서 '원죄 없는 잉태'라는 서방 교리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한다.
정교회에서는 물론 성모 신심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신학이나 교리상이 아니라 이미지와 상징과 의식을 통해서이다. 동방 교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콘의 이미지대로 성모 마리아는 '''동정녀의 이미지보다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친숙'''하다.
정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임종 때 열한 제자들이 자리를 지켰는데, 3일 후 늦게 도착한 사도 토마스가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하는 성모를 목격하고 성모의 허리띠를 받았다고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사도 토마스는 다른 11명의 사도를 불러 이들이 성모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고 하는데, 복음서에서 예수 부활을 기록한 내용과 강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반면 가톨릭의 전승에서는 성모의 시신이 그대로 천사들에 의해 들어올려져 하늘로 올라가 영혼과 다시 결합되었다는 것과, 부활 후 천국에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것의 2가지 전승이 공존한다. 교황 비오 12세가 성모 승천을 정식 교리로 확정할 당시의 교령은, 이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 애매한 면이 있다.

4.1. 정교회-가톨릭 성모 교리 비교


가톨릭 성모 4대 교리에 대해서 정교회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성모 교리
가톨릭
정교회
테오토코스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 (Theotokos), Deipara
인정
인정
성모 평생동정
Αέιπαρθενος (Aiparthenos)
인정
인정
성모 무염시태
(원죄 없이 잉태되심)
Immaculata Conceptio,
Παναγία (Panayia), Άχραντος (Ahrandos)
인정[22]
무염'''수태'''만 인정

성모몽소승천[23]
(하늘로 들어올림 '''받으심''')
Assumptio (Κοίμησις Θεοτόκου)
인정[24]
전승으로 인정
(다소 차이)
가톨릭에선 신자로서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교리이다. 특히 무염시태 교리와 몽소승천 교리는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에 근거하여 선포된 교리이기도 하다.
정교회에선 테오토코스와 평생동정은 교회 분열 이전 교리라서 공유하나 무염시태는 가톨릭에서 19세기에 독자적으로 선포한 교리이기에 다른 입장이다. 성모 승천에 대해서는 전승 내용은 가톨릭과 비슷하나 성모 승천(Assumption)보단 성모 안식(Dormi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모든 인간처럼 죽음을 피해 갈 수 없고[25] 육신의 죽음을 겪고나서 육체가 승천한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 Dormition of the Virgin (정교회 이콘)>

5. 평생 동정?


성경에는 예수의 형제로 야고보, 유다 등이 있다는 언급이 나오고 나오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의 형제들인지 친척인지 여부를 놓고 해석이 갈린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성모는 영원한 동정녀라고 보기 때문에 친척 혹은 이복형제로 보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동복 형제로 간주한다.
성경이 기록된 후의 기독교 내에서는 처녀 잉태와 함께 처녀 탄생에 대한 믿음이 발전되었다. 처녀 탄생은 처녀막이 파열되지 않고 기적적이고 고통없이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이며 2세기의 야고보의 원복음 19-20장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이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이것을 계시된 교리로 간주했으나 현재는 처녀 탄생에 대해서는 조금은 변화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26]
2세기 기독교 내에는 성모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가진 신자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파문당하는 일은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팔레스타인 유다교 출신 개종자로 추정되는 헤게시푸스는 '예수의 형제와 자매'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자녀라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Protevangelium Jacobi)에서는 예수의 형제들은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난 자식으로 보았다. 현재 가톨릭의 공식 입장에 해당하는 예수의 형제들이 사촌에 해당한다는 관점은 4세기에 예로니무스의 저서 '헬비디우스에 반대하여'(Against Helvidius)[27]에서 최초로 옹호되었으며, 서방 교회에서는 메인라인(mainline) 개신교 교파에서 '예수의 형제와 자매'가 실제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기 이전에는 루터나 칼빈 등도 평생 동정을 받아들였다.[28]

5.1. 가톨릭(및 정교회)의 입장


교의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가톨릭과 정교회는 개신교의 '오직 성경으로'와는 달리, 교회 전승의 권위도 인정한다.[29] 따라서 초대 보편 교회에서 발생하고 교부들에게 인정받은 평생동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교의가 성경 및 역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우선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그들의 제자이자 후계자들인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옹호했다. 4세기 초엽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rus von Alexandreia, †311)는 마리아에게 이 칭호를 부여하였다. 서방교회의 암브로시오(Ambrosius,†397)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 동방교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와 시리아의 에프렘(Ephram,†373)은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관철시킨 대표적인 교부들이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 베드로 크리솔로고 등의 교부들에게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이 삼중형식으로 고백되고 있다. 이후 교부들의 이론들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확증되었다. 라테란 공의회(649)는 이 입장을 재천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교회헌장 52항, 57항).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가톨릭에선, 아델포스와 아델페가 일반적으로 친형제와 친누이를 가리키는 건 맞으나 반드시 친혈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 5장 22~24절에서 말하는 형제가 친형제만을 의미한다고 보면, 문맥상 이상하다. 앞뒤 구절에서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보편적인 교리를 말하는 예수가, '친형제' 에게만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웃에게도 화내지 말고 욕하지 말라는 의도로 말했고, 따라서 해당 구절의 아델포스는 이웃을 친형제처럼 여기라는 뜻에서 썼다고 본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34~35절에선 예수를 중심으로 맺어진 영적 가족 관계 안에서의 형제 자매를 표현하기 위해 아델포스를 사용했고, 마르코 복음 6장 3절에서는 가까운 혈족을 뜻한다. 그리고 창세기 29장 12절에서는 '형제'나 '친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히'를 '아델포스'로 번역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라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사람들이 한때는 몰라도 끝까지 예수를 배척했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요한이 대타로 마리아를 보살폈다는 개신교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신약은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그런데 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졌고,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아람 문자가 아닌 히브리어 문자로 써서 문법과 발음 면에서 정통 아람어와 차이가 있는, 일종의 히브리화 된 아람어를 사용했다. 즉, 유대인의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고, 예수가 그리스어가 아닌 아람어로 말한 걸 볼 때, 아람어로 형제나 친척을 뜻하는 말이 그리스어 '아델포스'로 쓰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신약성경 내부의 용례에서 아델포스가 친형제를 넘어선 용례로 명백한 구절들이 있기에, 이 단어를 셈족의 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개신교의 비판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을 왜 확정된 교의로 가르치는가?"의 차원이라면 결국 '교회의 권위'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가 되겠으나,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성경의 본문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동정 성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요셉이다. 마리아의 남편인 나자렛의 요셉도 평생 동정을 지켰다는 전승이 가톨릭 전승이 있으나, 이것은 도그마가 아니다. 즉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 정교회에서는 복음서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가 낳은 자식이고, 즉 마리아는 요셉의 후처라는 것을 믿는다. 정교회 전승대로라면 마리아와 요셉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을 것이다. 요셉의 나이는 알수 없는데, 다만 여자와 달리 당시 유대인 남성은 가난하거나 토라를 배우는 학습시기이면, 조혼이 아닌 20세 무렵에도 결혼 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문화원 20세 무렵에 결혼해서 15년후 사망이라해도 당시 의료 수준과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공생활 전에 사망했다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는 내용은 신약 외경 <야고보 복음서>에도 기록된 내용인데, 여기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와 재혼할 당시 이미 나이가 '''80'''이었고, 이미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이 있었으며, 그 중 야고보가 이 야고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문헌은 현재 어느기독교 종파에서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기에, 정교회가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는 전승을 받아들였다는 사실과는 별개지만, 정경 여부와는 별개로 2세기 중반 저술되었기에 참고 자료로는 가능하다.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신약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라고 언급되는 야고보이다. 이 야고보는 서방 교회 전례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되어 있지만, 가톨릭 교의상으로는 동일 인물 유무가 확정된게 아니다. 아래에서는 알패오의 아들과의 '동일인물설'과 '별개인물설'을 각각 검토할 것이다.
우선 동일인물설이다.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마태 13, 55)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다음은 열두 제자의 명단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1-4)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6-19)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4-16)

다음은 십자가 곁의 여인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 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또한 유다 서간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인사합니다.(유다 1,1)

여기서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요한 복음서, 유다 서간만 조합하여도,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 가능하다.
1. 야고보와 유다와 요셉(=요세)은 예수의 형제로 불린다.(마르 6,3)
2. 야고보와 요셉(=요세)은 어머니가 같으며, 그녀는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다.(마르 15,40)[30]
3. 요셉(=요세)의 형제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마르 15,40)
4. 야고보와 유다 서간의 저자(로 내세워지는) 유다는 아버지가 같다.(유다 1,1)
5. 야고보의 아버지는 알패오이다(마태 10,3)[31]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마르 15,40) = 주님의 동생 야고보(갈라 1,19) = 유다 서간의 저자(라고 내세워지는) 유다의 형제 야고보(유다 1,1)가 되는 것이다. 추가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살로메를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본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5,40) =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로[32]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래 개신교 입장의 서술에선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갈라 2,9)

를 근거로 야고보가 예수의 친형제가 틀림없다고 하는데, 야고보가 케파보다 앞에 있는 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유다파의 신자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사람이여서라고 볼 수도 있으며(2,12),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친척이라서 그렇다고 봐도 된다. 즉 갈라티아서를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친형제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구분하는 별개인물설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런 주장은 최근 들어 반론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장에서는 열두 사도와 예수님의 형제들을 완전히 구분합니다(1,12-14). 바오로 사도도 야고보와 열두 사도를 구분합니다(1코린 15,5-7). 또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뽑으신 후였습니다(3장). 나아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는 말을 들으며 배척을 받으셨을 때에는 이미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였습니다(마르 6장).

이런 반론을 따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야고보와 동일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우리는 사실상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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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 of the epistle identifies himself as "James" (1:1). Because several persons in the NT bear this name, it is necessary to settle on his identity by a process of elimination. Two men of this name were among the apostles of Jesus: James the son of Zebedee (Mk 1:19; 3:17) and James the son of Alphaeus (Lk 6:15; Acts 1:13).

No doubt these figures possessed the requisite authority to instruct the Church in writing, but most scholars think it improbable that either one wrote the Letter of James—the former was martyred in A.D. 44, probably too early to have been the author (Acts 12:2), and very little is known about the latter beyond the fact of his enrollment among the Twelve. '''Instead, scholars through the centuries have given preference to a third figure of the apostolic age: James of Jerusalem, also known as "the Lord's brother" (Gal 1:19). This James was a kinsman of Jesus (Mk 6:3).''' He was also a witness to the Resurrection (1 Cor 15:7) and later became one of the "pillars" (Gal 2:9) of the earliest 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 (Acts 12:17; 15:13-21; 21:17-18).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LETTER OF SAINT JAMES

The writer of the letter calls himself "Jude" (in Greek, Ioudas) and was known to his readers as the "brother of James" (Jude 1). Several persons mentioned in the NT share this popular Jewish name, including the early Christian prophet "Judas called Barsabbas" (Acts 15:22) and the two apostles "Judas the son of James" (Lk 6:16), also called "Thaddaeus" (Mk 3:18), and "Judas Iscariot" (Mt 10:4; Lk 6:16).

Though some have attributed the letter to the first or second of these figures, and others have declared him to be otherwise unknown, the majority of scholars identify the author with still another "Judas", who is listed in the Gospels as one of the four kinsmen of Jesus (Mt 13:55; Mk 6:3). This is the only Judas in the NT who is known to have had a brother named James. This also explains how readers could be expected to identify the author simply by the mention of his brother's name. '''James, after all, was a prominent figure in apostolic times as the leader of the Jerusalem Church following the departure of Peter from the city (Acts 12:17; 15:13; 21:18). He was popularly known as "the Lord's brother" (Gal 1:19).'''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LETTER OF SAINT JUDE

야고보 서간은 당시의 서한체 관례에 따라 첫머리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힌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1,1). 여기서 야고보는 누구를 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이른바 장 야고보: 마르 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차야고보: 마르 3,18)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II.23.4)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 12,17; 15,13; 1코린 15,7; 갈라 1,19;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인물은 십중팔구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40년대 초에 순교하였고(사도 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한님성서연구소, 『성서 입문 : 하권』, 정태현, 2018년 6쇄, 교회인가 2008, 663-664쪽[33]

Beside the figure of James the Greater, son of Zebedee, of whom we spoke last Wednesday, another James appears in the Gospels, known as "the Lesser". He is also included in the list of the Twelve Apostles personally chosen by Jesus and is always specified as "the son of Alphaeus" (Mt 10:3; Mk 3:18; Lk 5; Acts 1:13). '''He has often been identified with another James, called "the Younger" (cf. Mk 15:40), the son of a Mary (cf. ibid.), possibly "Mary the wife of Clopas", who stood, according to the Fourth Gospel, at the foot of the Cross with the Mother of Jesus (cf. Jn 19:25).'''

He also came from Nazareth and was probably related to Jesus (cf. Mt 13:55; Mk 6:3); according to Semitic custom he is called "brother" (Mk 6:3; Gal 1:19).

The book of the Acts of the Apostles emphasizes the prominent role that this latter James played in the Church of Jerusalem. At the Apostolic Council celebrated there after the death of James the Greater he declared, together with the others, that pagans could be received into the Church without first submitting to circumcision (cf. Acts 15:13). St. Paul, who attributes a specific appearance of the Risen One to James (cf. 1 Cor 17:7), even named James before Cephas-Peter on the occasion of his visit to Jerusalem, describing him as a "pillar" of that Church on a par with Peter (cf. Gal 2:9).

Subsequently, Judeo-Christians considered him their main reference point. The Letter that bears the name of James is also attributed to him and is included in the New Testament canon. In it, he is not presented as a "brother of the Lord" but a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Jas 1:1).

'''Among experts, the question of the identity of these two figures with the same name, James son of Alphaeus and 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is disputed. With reference to the period of Jesus' earthly life, the Gospel traditions have not kept for us any account of either one of them.'''

베네딕토 16세 #

즉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마르 15,40)[34] = 주님의 동생 야고보(갈라 1,19) = 유다 서간의 저자(라고 내세워지는) 유다의 형제 야고보(유다 1,1)로 보는 것도 가톨릭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볼 경우 위 발췌문 중 사도 명단을 말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님의 동생 야고보=작은 야고보'에 대한 구절이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더라도 위의 논리 전개에서
1. 야고보와 유다와 요셉(=요세)은 예수의 형제로 불린다.(마르 6,3)
2. 야고보와 요셉(=요세)은 어머니가 같으며, 그녀는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다.(마르 15,40)
3. 요셉(=요세)의 형제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마르 15,40)
4. 야고보와 유다 서간의 저자(로 내세워지는) 유다는 아버지가 같다.(유다 1,1)

이렇게만 달라질 뿐, 근본적인 의문인 '형제라는게 친형제를 뜻하는가?'에는 여전히 '그렇다'는 단정이 불다능하며, 특히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5,40)를 동일 인물로 본다면,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어머니는 성모의 동명이인 마리아이며 아버지는 클로파스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또한 클로파스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마르코 15장 40절의 '마리아', 곧 요세와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는 성모가 아니다. 그녀를 성모라고 가정한다면 복음사가가 "그분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5.1.1. 잘못된 성모신심


성모신심에 대한 세부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의 경우 잘못된 성모신심의 위험성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잘못된 성모신심이란 성모 마리아를 단순히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는 수준을 넘어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과 동일시 여기거나 여신으로 숭배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성모 숭배를 교리로 하는 집단은 4세기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고 가톨릭은 이 때마다 파문과 성사 참여자 자동 파문이라는 처벌로 제제해왔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 큰 골칫거리처럼 여겨지고 있는 마리아의 구원방주도 바로 잘못된 성모신심에서 시작된 단체라고 할 것이다. 마리아의 구원방주는 성모 마리아를 예수보다 더욱 중요시여겨서,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성모상을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 라고 부르며 숭배하는 등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2. 개신교 입장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마리아론 같은 교리가 없다. 더군다나 요셉이 재혼이라는 성경구절도 없고, 마리아의 후반생은 더더구나 성경에서 아예 언급이 없으므로 "오직 성경"을 모토로 삼는 개신교에선 아예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일부 고교회파 성공회 종파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에서는 예수의 형제들은 당연히 예수를 낳은 후 요셉과 마리아가 동침해서 낳은 자식으로 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12세에 성년의식을 치르고 역시 10대에 조혼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도 마리아와 재혼한 것이 아니라 초혼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개신교 입장에서 따라 만든 영화 등 창작물에서는 요셉도 20대의 팔팔한 청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에서 요셉의 나이는 알 수 없는데, 정교회의 전승대로라면 이미 장성한 자식이 있는 장년 또는 노년의 재혼 남성이어야한다. 혹은 전혀 근거는 없고, 전술된 기사에선 30대로 추정된 근거가 요셉의 사망시점을 당시 평균수명인 45세로 가정하여 역산하여 그럴수도 있다는 소리고, 다만 여자와 달리 당시 유대인 남성은 가난하거나 토라를 배우는 학습시기이면, 조혼이 아닌 20세 무렵에도 결혼 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에 # 이스라엘 문화원 20세 무렵에 결혼해서 15년후 사망이라해도 당시 의료 수준과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역시 초혼이 가능한 나이대이다. 즉 정교회 주장대로 요셉이 최소 30대 이상 재혼 이라 볼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이 설명대로라면 귀족이나 부자도 아닌 목수 직업의 요셉이 다 늙어 죽을 나이에 10대 소녀를 매매혼으로 데려왔다는 것인데 전혀 설득력이 없다.
평생 동정에 대하여 논하면, 우선, 당시 유대사회에 대한 지식에 비추어 볼때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의도를 가지면서 결혼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 가톨릭 학자들이 에세네 파 등의 종파를 예로 들고 있으나 이들의 금욕 생활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며, 주류에서 물러난 소규모 공동체의 금욕주의는 결혼 관계에 들어간 십대 여성이 처녀성을 지키기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점은 전혀 조명해주지 않는다.[35]
한편 그리스어 성경[36]에 친형제를 의미하는 단어 아델포스(αδελφός)로 쓰인 단어를 사촌 혹은 의붓형제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에 텍스트 그대로 친형제라고 본다. 비록 히브리어 및 아람어에서 형제를 의미하는 단어(אח, ˒āḥ)와 사촌을 의미하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구약에서 ˒āḥ가 명확히 사촌으로 해석되는 구절은 (아마도 하나 정도로) 매우 적기 때문에 양쪽을 동일한 단어로 지칭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해당 구절에서 ˒āḥ 또는 αδελφός가 사촌이라는 의미로 등장할 때에는 문맥 내에서 다른 구절로 사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반면 신약에서 예수의 형제를 언급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모친이 함께 등장함으로써 정반대의 인상을 준다.[37]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친형제와 구별되는 친척을 가리키는 단어로 싱게논(συγγενὸν)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실제 친형제와 친족을 구분했다고 보고있다. 바울 역시 야고보를 '주의 형제(αδελφός) 야고보'로 부르는 반면, 사촌 혹은 조카는 아넵시오스(ἀνεψιὸς)라고 표기하여 친형제와 친족을 구분했음을 보여준다.[38]
요한복음 19장 26-27절을 보면 예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였으나, 이는 예수의 형제들이 그 당시엔 예수를 배척했고[39]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임종을 지키고, 그를 매우 따랐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해당 부분의 묘사가 마리아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공관복음서의 묘사와 모순되는 점을 들어 역사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표하기도 한다.
형제가 예수를 배척했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했다는 주장은 성서에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자식들에 대해서 분명치 않기 때문에 해석상 다른 의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당시 여러 형제가 있는 중에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 그 어머니는 당연히 둘째 아들이 모셔야 했으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성경에는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평생동정 및 요셉의 전처 자식들에 대한 설명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역시 문헌상 불분명한 부분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추가로 예수 옆에 서있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비교해보면
마태복음 27장 56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가복음 15장 40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요한복음 19장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비교해보면 사촌 육촌 혹은 그냥 가까운 사이를 뜻하는 형제설이라는 주장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일단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친동생 야고보가 사실은 글로바(알패오)의 아들과 동일인물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십자가 옆에 정확히 몇 명이나 서 있었는지 정확히 언급이 없다. 때문에 누가 누군지 정확히 짐작하기 힘들다. 4명만 있었다고 가정하고 저 구절에 나오는 인물을 일일히 대응해보면, '''이모''', '''살로메''',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란 구절로 인해, 살로메가 예수님의 이모였고,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이종사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마가가 그 전에, 특히 사도들을 불러모으는 장면에서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불렀던 인물을 갑자기 작은 야고보라고 부를 이유가 없고, 바울역시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난 장면을 제외하면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은 전혀 쓰이지 않는 것을 볼 때 두 인물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40]
또한 바울 서신의 야고보에 대한 서술도 위의 결론을 강화한다고 보고 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개역개정판 (갈라디아서 2장 9절)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가톨릭 성경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 9절)

게바 혹은 케바는 사도 베드로의 유대인식 이름(아람어)이고 오히려 베드로가 헬라어식 이름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원어민(?)은 당연히 게바라고 불렀을 것이다.[41]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지도자 순서를 말할때 '''야고보 베드로 순'''으로 말했다는건 야고보가 사도 베드로보다 서열이 앞섰다는걸 의미한다.[42] 당시 3대 제자 대(大) 야고보,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주후 44년경에 헤롯에게 살해 당해서 교회에 없던 것이 확실하고, 대 야고보의 사망 시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따라서 개신교측에서는 '''해당 인물은 소(小)야고보 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아닌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보고 있다. 왜냐 하면 소 야고보는 성경상에서 12사도의 행적과 베드로의 위치를 볼 때 베드로 앞에 설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서 상으로 베드로보다도 앞서 나오는 인물 야고보는 예수의 육신의 친형제 야고보일수밖에 없다.''' '즉, '''예수의 형제라는 지위 말고는 12 사도 중 으뜸이라는 사도 베드로 보다 앞서 불릴 만한 인물이 없다고 본다.'''
성서외의 기록 역시 야고보가 예수의 형제라는 이론을 지지한다. 성서 기록자외에 예수를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저자 중 하나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야고보를 αδελφός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그가 쓴 책에서는 ἀνεψιὸς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따라서 최소한 요세푸스는 친형제인 αδελφός와 그외의 친족을 가르키는 ἀνεψιὸς를 구분해서 사용하였으며, 야고보를 예수의 친형제로 보았다고 하여야 한다.[43] 아울러 αδελφός가 의붓 형제라는 의미를 명확히 담고 있는 예가 신약성서에 없다는 점에서 정교회의 설명 역시 개연성이 없다고 본다.[44]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된 2세기 경의 교회사가 헤게시푸스 역시 다음과 같이 αδελφός와 ἀνεψιὸς를 구별하면서 야고보를 '주님의 αδελφός'로 지칭한다.[45]

Διαδεχεται την εκκλησιαν μετα την των αποστολων ο '''αδελφος''' του κυριου Ιακωβος, ο ονομασθεις υπο παντων δικαιος απο των του Χριστου χρονων μεχρι και ημων. επει πολλοι Ιακωβοι εκαλουντο, ουτος δε εκ κοιλιας μητρος αυτου αγιος ην.

James, the '''brother''' of the Lord, succeeded to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in conjunction with the apostles. He has been called the just by all from the times of Christ to the present day, for there were many that bore the name of James. He was holy from the womb of his mother.

Και μετα το μαρτυρησαι Ιακωβον τον δικαιον ως και ο κυριος επι τω αυτω λογω, παλιν ο εκ θειου αυτου Συμεων ο του Κλωπα καθισταται επισκοπος, ον προεθεντο παντες οντα '''ανεψιον''' του κυριου δευτερον. δια τουτο εκαλουν την εκκλησιαν παρθενον ουπω γαρ εφθαρτο ακοαις ματαιαις.

The same author also describes the beginnings of the heresies which arose in his time in the following words: And after James the just had suffered martyrdom, as the Lord had also on the same account, Symeon, the son of the uncle of the Lord, Clopas, was appointed the next bishop. All proposed him as second bishop because he was a '''cousin''' of the Lord. Therefore they called the church a virgin, for it was not yet corrupted by vain discourses

아울러 2세기의 다른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 역시 신약성경의 기록만을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46]
따라서 개신교에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성경에 근거도 없고 당시 풍속과도 거리가 멀며, 되려 이교적 요소와 짬뽕된 결과라 보기 때문에 부정한다. 성상에 관대하다 알려진 성공회와 루터교회[47]조차 평생 동정에 대한 견해는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부정하는 입장이다.

6. 개신교의 관점


상술했듯 성모 신심은 원래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것은''' 가톨릭 교회도 인정[48]하며, 성경 외의 기록은 1세기에는 없고 2세기의 문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초기 종교개혁가들은 성모신심의 일부(평생동정설 등)는 받아들였지만, 당시 중세 교회에 만연했던 방식의 성모공경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49][50]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저작을 기존 가톨릭 마리아 찬양가와 기도문을[51] 인용하였고 평생동정설을 믿긴했다. 그러나 같은시대 루터의 동료나 후대학자들은 그것을 그의 시대적 한계로 여긴다. 'semper reformanda' 원칙에 의거하여 루터나 칼뱅이라해도[52] 틀린것은 틀리다고 지적할수 있고 이런 논의는 전혀 금기시 되지 않으며 다른 주제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53] 마르틴 루터는 한때 집안 가업인 광산업의 수호성인인 안나(마리아의 모친)을 극진히 공경했고, 법대생에서 수도자가 된 계기인 벼락을 맞을 때 "성 안나여! 성모 마리아여! 나를 구해주십시오! 라고 외쳤지만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그때 당시 자신이 '''마리아나 안나가 아닌 그리스도를 외쳐야 했다고 후회'''했다. 또한 가톨릭의 성인공경과 성유물 성상등의 개혁운동에서 이러한 전통을 없애버릴것을 찬성했다. 다만 안드레아스 칼슈타트나 츠빙글리, 재세례파 등 자신보다 더 과격하게 개혁하려는 사람들과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도 있었고, 믿음이 약한 형제들과 기존 관습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유용하니[54] 도끼나 망치로 작살내는것은 부적당하다고 본것일뿐이다.[55] 루터는 기존 가톨릭 교회 관습인 성모공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이들이 성모마리아를 부르며 그녀를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경배한다.

이렇게 해서 성모마리아는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종의 혐오스러운 우상이 되어버리고 만것이다.[56]

당연히 그런고로 루터는 말그대로의 인간으로써의 공경만 할 뿐 기존 가톨릭 관습에 대해선 숭배라며 못마땅하게 보았다. 루터는 '몽소승천도 성경에 근거가 없다 하여 부정했다.'''이는 장 칼뱅의 개혁주의에도 이어져서 현재 개신교에선 마리아에 대해 "예수의 육체의 모친"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당연히 반발한다.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들어 종교개혁 시기 초기에는 개신교에서도 가톨릭 성인 공경과 같은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신학 핵심인 이신칭의를 강조하려고 보속과 사면이라는 기존 가톨릭 교리와 면벌부 효력, 교황의 대사 권한에 대한 토론이지 성모 공경은 매우 부차적인 문제이기에 당연히 다루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신학이론상 토론 제의지 가톨릭 교회의 모든 문제점을 95개조로 들어서 비판한게 아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면죄부와 연관돼서 성유물 숭배[57] 를 비판하며 성인에 대한 교리까지 역시 나아가 비판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잘 못 알고 있는 내용.[58] 95개조 반박문 75번 항목을 들어 가톨릭과 같은 마리아공경을 주장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마틴 루터, 면죄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교황청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 요하네스 테첼이 '''면죄부를 사면 성모마리아를 강간해도 깨끗이 용서받는다는 사기'''를 치고 다녔기 때문에 비판한 내용일 뿐이다. 하느님의 어머니도 육신의 어머니란 뜻일뿐이다. 루터의 저작중에 평생동정설을 인정하고, 기존의 성모찬가를 그대로 인용한 기도문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시대적 한계이지 그리고 교황청의 공식 입장과 전통이 변치 않는 가톨릭 교회와 달리 개신교에선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견해도 역사성을 인정하여 참고 대상일뿐이지 교리도 아니요 개신교회의 창시자란 용어 자체도 쓰지 않는다.[59]
성모 공경을 부정하는 이유는 기존 교회, 즉 교황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에 대해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으로만'''[60] 근거로 하여 기존 관습 및 교리에서 성경에서 명확히 도출되는 것 외의 명제를 믿을 교리라고 선포하는 것을 부정한다.
구체적인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는, 우선 누가복음의 '평안할지어다(Χαίρε, Chaire)'를 가톨릭에서는 누가복음의 저자가 스바냐서의 배경을 인용하여 마리아를 시온의 딸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해당 단어는 당시 일상적인 인사말로 쓰여진 것이고 누가가 해당 구절에서 메시아적인 기쁨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였다면 자신이 다른 곳에서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유프라네인(Euphranein)과 같이 더 분명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해당 구절은 특정한 상징의 증거는 아니라고 본다. 이어지는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역시 룻기2:4[61]에서 예시된 것처럼 일상적으로 쓰이던 인사말이다.[62]
또한 누가가 마리아를 언약궤나 성막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순전히 추측이다. 이는 '덮으시리니'에 해당하는 단어인 'Episkiazein'이 하나님의 임재의 여러 형태를 묘사하는데 활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도출한 결론이나 정확히 말하자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케루빔이 궤를 덮고 있다고 말하며, 더욱이 궤와 성막은 하나님의 실재로 덮인 유일한 장소가 아니다.[63] 또한 요한 묵시록 12장을 보면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역시 창세기의 요셉 일화에서 이스라엘의 12아들을 12별로 묘사하는 것과 일치하는 묘사임을 들어 마리아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주로 해석하고 있다. [64]
개신교의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해준, '''본받을 만한 인물'''[65]이다. 가톨릭처럼 돋보이는 성모신심까진 아니더라도, 성경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한 의인으로 대한다. 다만 마리아가 모든 인간중에서 특별히 마리아 뿐만 아니라 요셉과 세례요한 처럼 의인으로 보나 인간이기에 더 높이 공경해야 할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공경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없다.
현재 개신교 중에서 루터교회성공회와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 성모 공경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공회에는 성모신심 단체도 존재한다.참고 다만 루터파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소위 '아디아포라'[66] 문제에 관해 다른 종교개혁가들보다 유연한 면도 있었고, 루터가 죽은지 바로 1년 뒤 1547년도 슈말칼덴 종교전쟁이 일어나 신교도 지역이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은 황제군에 초토화 당하면서[67] 종교개혁 초기상태의 입장에서 가톨릭 교리를 일부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대거 후퇴하였다. 이른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일뿐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가의 뜻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68] 성공회도 옥스포드 운동 이후 가톨릭식 관습을 대거 복구시켰고 성모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의 모본으로 보며 신앙을 본받지만, 자체를 기도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무염시태와 몽소승천도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통공기도 중보자 역할도 부정하는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원래는 없어야 할 성모송이 일부 국가의 루터회와 성공회에도 있는 것이다.[69]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장 14절)

위의 성모관련 교리 4가지에 대해서는,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모친'만 인정'''하고 그 이외는 불인정하거나 '그거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데?' 혹은 '그게 왜 필요한데?'라는 태도를 지닌 것에 가깝다. 천주모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시는 방법"으로서의 의미이지 '''그 개인이 가지는 특별한 위치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 8장 58절에 나온 것처럼, 예수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존재한다면 예수의 신성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의 논리.[70]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조건인 무죄성은 이사야 선지지의 예언인 동정녀 탄생 자체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원죄가 사라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개신교는 마리아가 죄가 있더라도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해 원죄가 유전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무염시태/무염수태뿐 아니라 평생동정이나 몽소승천 같은 교리도 구원에 필요없고 계시될 필요도 없는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개신교 교파에서는 가톨릭 전통의 성인공경을 '성인 숭배'로 보아서 금지하고 비판해 왔고 현재도 비판하고 있다.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그나마 교회전통이 남았다고 인정하는 성공회[71]와 루터교도 포함이다.[72] 이들 두 교파는 자신들이 진정한 '공경'을 하고 있고 가톨릭 전통은 숭배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물론 개신교는 개교회 특성이 강하여 성공회나 루터교회의 지역적 성향에 따라 여타 다른 개신교 개혁교단만큼 강하게 비판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사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서 (겉보기에) 가장 큰 차이점으로 여겨지는 마리아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엔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개신교측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의 성인제도, 성유물, 죽은자를 위한 미사와 통공 등, 가톨릭교회의 성인 공경과 성상문제등 여러점을 비판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개신교측 '이신칭의'와 만인사제론 교리를 들어 교황수위권, 사제제도, 7성사 등 이였고, 현재 개신교에서 크게 비판하는 마리아 교리의 확정은 상술한대로 종교개혁 시기 이전에 있었던 평생 동정과 테오토코스 교리를 제외하면 19세기와 20세기에 가톨릭 교회에서도 논란 끝에 전승에서 교의적 가르침으로 확정된 것이라 이로인해 비교적 현대에 새로운 교의적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초기 종교개혁가들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전통을 인습으로 바라보아 비판한 측면이라면 현재 개신교회는 교의적으로도 틀어졌다는 점이 달라진 것이다.
가톨릭의 성모 교리가 초대교회부터 전승이라고 주장하는데 현재 개신교 교회 사가들은 그런 입장을 부정한다. 이는 개신교 뿐만이 아니라 한스 큉[73] 같은 일부 현대 가톨릭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유대인의 풍습에서는 '''성유물이나 성상, 성인공경 자체가 없었고'''[74] 초대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로 퍼져나간게 사실이며 오히려 세간의 인식과 정반대로 초대교회 건축은 개신교처럼 매우 단순했다. 이후 현지인들이 유입되고 로마 국교화 전후로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개종한하는데 4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시절 로마제국에서 강제 기독교화 된 과정에서 이교도 사원들은 대거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종교인들이 많은 이질적인 풍속들이 들어왔다. 특히 헬라 문화권의 현지인들이 섬기던 아르테미스('''아데미''') 등 지모신 숭배[75] 풍습이 교회 내에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고있다.[76]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톨릭의 성모 교리는 19세기~20세기에 전승에서 교의로 확정된것이 사실이고 이것도 가톨릭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한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 공경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 개신교는 목사를 숭배한다는 물타기를 하고 있는데, 특정 신도들 위주로 목사를 지나치게 쫓아다니거나 선지자취급하는 폐해는 자주 있지만 그것이 교리와 교회 정통 방식은 아니며 개신교는 만인사제론을 바탕으로 사제계급조차 부정하여 가톨릭 처럼 수직적인 조직이 아니다.. 초기 종교개혁가들의 성모 신심과 달리 개신교에서 전통을 잃어버리고 가톨릭을 공격한다는 주장도 오해에 가깝다. 중세에는 한때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모 공경을 넘어서 일부 지역에선 성당의 제단앞에 성모상이 설치 될 정도라 가톨릭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 근대에도 18세기 무렵 프랑스를 중심으로 가톨릭 전통과 교리를 에서도 더 나아간 마리아 숭배 운동이 있었고, 이는 개신교의 주 비판대상이었다. 가톨릭의 무염시태 교리는 1854년에야 가톨릭에서 확정 되었고, 중보자 교리는 20세기 초반 베네딕토 15세 시절, 몽소승천은 1950년, 교회의 어머니 교리, 천상의 모후 같은 교리는 20세기 중반에야 확정 되었으며, 교리로 채택되지 않았으나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1959)에서 마리아를 구원의 공동중재자라며 교회론에 포함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격렬한 논쟁 이후 최종 투표 당시엔 1,114표를 얻은 반대파(50.9%)가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77] 따라서 가톨릭 교회가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전승을 교의적으로 선언하면서 개신교와 교의적 차이가 벌어진 것으로 봐야할 것이며, 루터나 칼뱅 등은 (당시에는 교의가 아니라 전승 차원이던) 몽소승천 등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실 초기 기독교에서도 현재의 가톨릭의 교리가 논쟁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 하여 마리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오리게네스는 마리아의 신앙심이 일시적으로나마 흔들린 적이 있다고 신도와 주교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지안의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강생순간에 '깨끗하게 정화되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말을 즉시 믿지 못하고 감히 질문을 했으며, 가나에서 괜히 나서다가 면박을 당했으며, 예수의 형제들처럼 그 분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고 마리아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는 성행위를 통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원죄를 면할 수 있었으나 마리아는 성행위를 통해 태어났으며, 따라서 원죄 없이 잉태된 것은 아니었으나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보았다. [78]
이후 중세기에도 일부 소수파가 아닌 가톨릭에서도 널리 존경받는 성 베르나르도 및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만일 원죄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성모 마리아도 원죄에 물들었다고 보았으나[79] 그의 다른 저작보다 인기가 적었고, 훗날 둔스 스코투스의 마리아론이 승리를 거둬 교의화 된것이다.[80]

19세기 교황 무류성 교리 선포에 반발해 떨어져 나간 복고 가톨릭 교회는[81] 역시 교황 무류성으로 선포된 무염시태 교리은 인정하지 않고 북유럽 가톨릭계의 반발에 교황청에서 나중에 교의 선포 배경을 발표하기를, 교황의 독단이 아니라 프랑스쪽 주교들에게 여론조사한결과 90% 이상이 찬성하여 교리로 선포했다고 해명했는데 당시 무염시태 교리에 부정적이던 북유럽은 쏙 빼놓고 성모 발현으로 오랜만에 부흥이 된 프랑스 교구들에게만 중요한 교리 문제를 '''여론조사'''로 했다하여 비판이 거셌다.
아울러 최근에는 가톨릭 내에서도 마가 3:21, 31-35의 해석에 있어서 "분명히 마가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그의 친족들"중에 예수님을 포함시킨다. 마가는 더 나아가 예수님이 밖에 서 있는 친혈육을 안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과 구분하는 것으로 기록한다."[82]라고 언급하는 등 적어도 마가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다.[83]
한국에서는 현재 교회일치 운동 참여와 상관없이 거의 개신교 모든 교파에서 가톨릭측 성모 교리에 대해선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는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교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 하면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 전승도 효력이 있다고 주장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의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황무류설로 선포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일치에 긍정적인 교단도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교리에 부정적이기 때문.
개신교의 입장에서 가톨릭 교회 마리아론 대략적 비판 내용은 다음과, 이곳과, 이곳 등으로 모두 장로교 출신의 신학자들, 즉 보수적 개신교의 개혁주의적 관점들이다. 구태여 위키상 참/거짓 논쟁을 하기보단 그들의 저작이나 문헌을 확인하여 참조하기 바란다.

7. 이슬람의 관점


이슬람에서도 마리아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사실 쿠란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여성이며 가장 뛰어난 여성이라고 할 정도. 쿠란에서 유일하게 본명으로 등장하는 여성이다. 예수(이사)도 '이븐 마르얌(마리아의 아들)'로 16번이나 부른다.
여기서도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일화가 있다. 홀로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예전에 했던 처벌대로 던지는 돌에 맞는 벌을 당할 뻔했지만, 포대기에 싸인 어린 예수가 입을 열어서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예언자를 낳은 어머니로서 대우하는데, 꾸란의 제 19번째 장(=수라)은 마리아의 장이며, 여기서는 복음서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성모의 수태와 성장, 예수의 어린 시절 같은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대체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승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마리아의 장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겸손함과 신에 대한 복종, 그리고 기적들을 찬양할 뿐 예수의 신성화나 성모 신심에 대해서는 분명한 메시지로 경계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 마리아에 대한 칭송에 예수의 신성성 부정도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다.[84]
쿠란에 의하면 마리아는 이므란의 딸[85]로 되어있는데, 이 이므란은 아론과 모세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에 대하여는 아론의 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6] 이는 명백하게 모순되는데, 아론과 모세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1800년 즈음이고, 마리아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5~4년 정도다. 천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 무슬림들의 반론은 셈계 어휘에서 ‘계승자 내지 후손’을 ‘형제’로 부르는 관습이 있다고 하여 ‘아론의 누이’라는 표현은 아론의 후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쿠란이 쓰여질 때 당시에도 여성의 인권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여자 한 명 한 명까지 누구의 후손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힘들 것이고, 또한 성경이나 쿠란에도 여성을 누군가의 후손, 후계자라는 의미로 '누이'라고 서술한 전례 역시 없다.게다가 아버지 이름까지 모세, 아론의 아버지와 같은 데다가 확인 사살로 아랍어로 아론의 누이 미리암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표기가 같다. 사실 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인 여성 이름 미리암의 그리스어 표기이다.

8. 유대교의 관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의 호의적인 평가에 비해 매우 좋지않다. 대부분의 평가는 악의적이라고 할 정도이다. 일단 마리아 자체가 역사시대의 유대인이고, 유대인들의 역사를 충실히 남긴 유대인들답게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지만 그것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질만한 서술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정작 해당민족의 서술이므로 무시할 수는 절대 없으므로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이를 살펴보게 되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를 읽어보고 내상을 입을 정도의 서술이 매우 많다.

9. 성모 마리아의 축일


가톨릭과 정교회등의 기독교 전반에서 가장 공경받는 성인인 만큼 축일도 호칭에 따라 여러 날이 있다.[87]
날짜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2월 1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마리아 수태고지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7월 16일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참고)



8월 5일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안식 축일
성모 마리아 안식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8월 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모 탄생 축일
성모 마리아 탄생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10월 1일

성모 보호 축일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성모 입당 축일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마리아의 잉태


10. 기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것만 알고 마리아를 야훼의 아내, 천국의 왕후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최소한 성모신심을 가진 보편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떤 측면에서는''' 맞고 또다른 측면에서는 틀렸다. 이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가톨릭의 설명에 따르면, 마리아는 '''성부의 딸이자, 성자의 어머니이자, 성령의 정배'''이다.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호칭은 마리아가 진정한 성자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지[88] 성부와 성령의 어머니라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성자 예수도 참으로 한분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에 천주의 성모라 칭하는 것이다. 참고로 성부에게는 하와와 정 반대로 순명하였기에 성부의 딸이 되고, 성령으로 인하여 성자를 잉태하였기에 성령에게는 정배(배우자)가 된다. 또한 마리아를 천상의 '''모후'''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앞의 사례와 그 원리는 같다. 모후는 왕의 어머니인 태후, 대비와 같은 말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야훼로서 천상의 임금이라면, 마리아는 그 임금의 어머니로서 천상의 모후가 된다. 결국 이 모두 서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물론 성인 공경을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칭호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예수는 마리아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모'라고 불리지만 정작 예수는 자기를 낳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아이러니. 다만 십자가상에서 죽기 직전 유언으로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섬기라고 부탁하였으며[89], 그리스도교 종파를 막론하고 이 대목을 아들이 죽고 떠나는 가슴아픈 상황을 겪어야 할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긴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받아들인다.#

11. 대중 문화에서의 성모 마리아


2018년 11월 20일 디시인사이드에서 이 문서를 주제로 한 성모 마리아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11.1. 종교 영화에서의 성모 마리아


성경, 특히 예수의 일대기를 주제로 제작된 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자주 등장한다. 주로 예수의 잉태와 탄생, 유년시절, 그리고 십자가 수난 시기에 모성애와 신심(信心) 어린 성모 마리아의 열연(?)을 볼 수 있다.
천주교 계열 예술에서는 동정녀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가 장성한 뒤에도 젊은 처녀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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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자렛 예수>에서.
배우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전기 영화에도 출연한 올리비아 핫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 배우는 마야 모르겐슈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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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ght=300]]
미국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2006)에서. 배우는 케이샤 캐슬-휴스.[90]
개신교의 입장을 따라 요셉도 청년으로 초혼인 것으로 묘사된다.
미국 애니메이션 <더 크리스마스>(2017)에서. 성우는 지나 로드리게즈/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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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TV영화 <나자렛의 마리아>(2012)에서. 배우는 알리사 융.
왼쪽은 예수를 잉태해 출산한 젊은 모습, 오른쪽은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기의 중년 모습.

11.2. 기타 창작물에서의 마리아


본격 신성 모독 만화 배틀 포프에서는 쭉빵하신 누님으로 나온다.
세인트 영멘에서는 동안미인으로 나온다. 키요시라는 아이돌이 손자 같아서 귀엽다며좋아하고 할머니카트(!)를 끌고 다니는 갭모에를 보여준다. 할머니카트는 키요시의 공연을 보러다니다가 공연 대기시간에 앉을 수도 있다는 주변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의 추천으로 마련하게 되었단다. 붓다의 어머니 마야부인과는 워낙에 배경이 다른지라 2천년을 말도 못 붙이고 서먹서먹하게 지내 왔지만, 아들들의 주선으로 하계에서 한 번 만난 후로는 완전히 의기투합, 절친이 돼서 둘이 스티커 사진 찍으러 다니고 아들 흉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사이가 됐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주인공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어머니 슈미 스카이워커는 처녀의 몸으로 어느날 갑자기 아나킨을 잉태하고 낳았다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이다.
에빌리오스 시리즈메타 잘름호퍼가 에빌리오스 판 성모 마리아로 여겨진다. 하지만 험난한 삶을 살고 요절하는 등 작중 취급은 영 좋지 못하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시오자키 이바라도 외형 면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뷰티풀 군바리 90화 표지에서는 육근옥이 성모 마리아 코스프레를 한다. 물론 육근옥이 개년인 걸 아는 독자들은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는 후문이...

12. 관련 어록


'''오, 마리아여!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으로 당신 태중을 빌어 태어나셨습니다. 이 복된 왕, 지극히 풍요로우신 왕께서도 당신 앞에서만은 가난한 이 되셨고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분이 작은 이 되셨고 천사들보다 못한 신분이 되셨습니다. 마침내 참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이 인간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성 베르나르도

'''이사야가 노래하셨다. “동정녀가 잉태하리라.” 그러나 이 일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일어날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리아 안에 예언의 큰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놀라운 기적으로 충만한 마리아에게 이 예언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숨겨진 예언서의 비밀들이 알려졌다. 그녀에게서 정의의 태양이 움트고 떠오른 태양 앞에 온 땅이 빛을 내었다. 마리아 안에서 모든 상징과 표징이 이루어지고, 모든 예언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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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에프렘

'''오 복되신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보여주셨는지요! 하느님께서 온갖 은총으로 당신의 비천함과 보잘것없음을 돌보셨나이다. 당신께 하신 대로 주님께서 이제와 항상, 가난한 저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이 돌보실 것을 기억하게 하셨나이다.'''

마르틴 루터


13. 관련 항목



[1] 19세기 한반도에 처음 진출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이다.[2] 그리스도교의 일부 종파에서는 '사망'이 아닌 '승천'으로, 육신과 영혼이 죽음을 초탈했다고 믿어진다. 성모몽소승천 참조.[3] 혹은 에페소.[4] 이슬람교에서는 기독교와 약간 다르기는 하나 처녀 잉태 자체는 인정한다.[5] 이에 대해 가톨릭에서는 하느님께만 드리는 예배인 흠숭지례보다는 아래지만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지례보다는 위인 상경지례를 드린다고 설명한다.[6] παρθενογένεσις (처녀+생성)[7] 헬레니즘 시대에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다.[8] 이 부분은 견해차가 커서 키배가 자주 벌어진다.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달리 4대 복음서 어디에도 마리아 막달레나창녀임을 암시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인'이라는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창녀 언급은 후대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착각에 의해 이러한 소문이 퍼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이미 수정해서 창녀라는 말은 안 나오고, 오히려 개신교에서 자주 써먹는 떡밥이다.[9] Immaculata 임마꿀라따. 축일은 12월 8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 불린다.[10] 이전에는 성모승천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날은 성모가 실제로 승천된 날이 아닌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기에 원래의 표기인 대축일로 수정한다.[11] 사후에 그의 주검이 하늘로 들어 올려진 것으로 전한다.[12] 위키미디어 공용 참조.[13] 개신교는 세례가 중요하긴 하지만, 세례 안 받으면 구원 못받는다고 하면 그냥 '''너 이단''' 취급한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와 마리아 무염시태와 연관짓지 않는다.[14] 기록상으로 2세기 경에 처음 등장한다. 그래서 혹자는 2세기 이전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성모 공경 사상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출처] Addai and Mari, Liturgy of. 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Book for people in English". Kaldu.org. Retrieved 2013-11-03.[15] 라틴어 번역어는 Mater Dei. 가톨릭 문서에서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다. 마찬가지로 정교회 기도문에서는 마리아를 지칭하는 말로 '테오토코스이시며…'라는 문구가 자주 들어간다.[16] 교리 자체는 1976년 딩카 4세시기부터 타 교파와의 일치를 위해 조금 수정되었다.[17] 반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미 이 때부터 훨씬 더 뒤에 등장할 개신교와 흡사한(?) 교리로 나갔으며, 지금도 네스토리우스파 고유의 전례형식[16]이 많이 남은 아시리아 동방교회 같은 경우 성상과 성화도 인정하지 않아서 이콘이 아닌 십자가에다 정교회 스타일로 입맞추는 광경을 볼 수 있다.[18] 상경지례. 성인 중에서 최고로 침.[19] 프랑스 가톨릭은 성모신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며, 성모무염시태, 성모몽소승천 교리 확립에 기여했다는 얘기도 있다.[20] Meyendorff. J <The Orthodox Church>[21] 가톨릭의 성모영보(聖母領報, Annunciatio)에 해당한다.[22] 복자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에서 공인.[23] '''절대 '몸소승천'이 아니다!''' 몽소승천은 한자로 蒙召昇天라고 쓰는데, 이를 우리말로 풀면 '부르심을 받아 하늘에 올라갔다'는 뜻이 된다. 받침 하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24] 비오 12세의 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에서 공인. 신자들도 간혹 순간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 듯(…) 여기서의 승천은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 같은 경우이고, 예수의 승천은 스스로 올라갔다 하여 'Ascensio'라는 단어를 따로 쓴다[25] <러시아 정교-역사 신학 예술> (석영중) p.225[26] 메시아의 탄생, 846p[27] 영문 번역[28] John P. Meier, marginal Jew. volume 1, Doubleday, 1991, 318-319p 이하 John P. Meier로 표기함. 여담으로 저자는 가톨릭 사제로 몬시뇰의 칭호를 받았으며, 해당 책은 가톨릭 교회의 출판 승인을 얻었다.[29] 천주교는 교회의 전승과 권위를 통한 성경형성을 말하지만 개신교는 성경의 '''자증성'''을 말하기에 천주교식 해석과 성경 형성과정을 무시한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임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경의 선후관계 그리고 교회의 개념(유형적 또는 무형적)도 다르다. 그러니 애초에 교회론에 대한 이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30] 해당 구절에는 성모와 동명이인이라는 명시는 없지만, 그녀를 성모라고 가정한다면 복음사가가 "그분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31] 루카 복음서에는 유다 타대오가 '야고보의 아들'로 되어있지만 그리스 말 본문은 '야고보의 유다'라는 뜻이기에 반드시 부자 관계로 확정할 것은 아니다.[32] 클로파스와 알패오의 관계에 대해서도 동일인물설과 별개인물설(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와 혼인한 별개의 두 인물로 보는 관점)이 있다.[33] 이하『성서 입문 : 하권』[34] 정태현 신부는 알패오의 아들을 次야고보로 말하고 베네딕토 16세는 the Lesser로 말하지만, 또한 베네딕토 16세는 the Lesser와 the Younger(마르 15,40)를 구분해서 말하므로 혼동에 주의[35] CLC, 레이몬드 E 브라운, 『메시아의 탄생』, 490~491 ; 이하 『메시아의 탄생』으로 표기, 참고로 해당 저자는 가톨릭 성서학자로 성경의 해석 문제와는 별개로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을 믿는다고 밝혔다.[36] 참고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에 번역본 외에 아람어가 원문인 성경은 없다.[37] John P. Meier, 325p[38] 다만 해당 단어가 등장하는 골로새서는 바울의 친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39] 요한복음 7장 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40] 자크 뒤켄, 『마리아』, 빗살무늬, 2005, 118-119p 이하 '자크 뒤켄'으로 표기함[41] 다른 인물이라는 소수설이 있긴하나 거의 지지받지 못한다.[42] 여담으로 개신교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과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의 발언을 근거로 당시 교회의 사실상의 수장이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였다고 본다.[43] 자크 뒤켄[44] John P. Meier, 324p[45] 원문 및 번역은 이곳에서 발췌함. [46] 성서 입문 : 하권, 664p[47] 일부 극단적 고교회파 및 리버럴파 제외[48] 가령 가톨릭 사제인 존 P. 마이어는 예수의 형제들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낳은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한다 참고[49] 비단 마리아 뿐 아니라 사도나 순교자 자체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에도 역시 비판적이다.(참고 - "성모가 아니라 성경") [50] 2세기들어 박해가 거세져서 순교자나 성모에 대한 공경이 본격화 됐다고 추정한다. 간단한 출처로 만화 초대교회사가 있다.[51] 다만 전구(기독교)를 청하는 부분을 비성경적이라고 보아 삭제했고, 누가복음에 언급된 구절만을 남겼다. 본디 이 전구를 비롯한 죽은자들에 대한 전구는 가톨릭의 전승과 가톨릭에서만 인정하는 구약(마카베오 후서 등)에만 근거한다. 현재 루터교회에서도 성모송을 인정하는 교단들에서도 이 버전으로 부른다.[52] 칼뱅도 후대 학자들, 심지어 현대에는 같은 장로교 신학자들조차 그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편이다.[53] 반대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칼빈에 주장에 기초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칼빈을 왜곡했다거나 칼빈의 몇몇 주장을 극단화 시켰거나이다.(하이퍼 칼비니즘)[54] 반대로 츠빙글리칼뱅은 성경에 명시된 관습만 받아들이는 것이 옳으며 '연약한 형제'라는 개념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55] 실제로 교회당 안에 있는 성상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교회 밖 길거리 야외 십자고상(Wegkreuz)과 성상들은 죄다 뽑아버렸다. 지금도 가톨릭 지역과 루터교회 지역이 확 차이나는 부분.[56] 루터와 미켈란젤로 (신준형의 르네상스 미술사), 루터선집(지원용, 컨콜디아사) 재인용. 지원용은 한국루터교회 목사, 컨콜디아사는 한국루터교회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이다.[57] 당시 교회에서 성유물 구매와 참배, 소지, 성지순례가 역시 면벌 효과가 있다고 교회에서 인정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있던 작센 지역만 하더라도 성안나의 엄지손가락 성모의 모유 몇방울, 예수 탄생 말구유의 나무 조각 이라며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흙이나 지푸라기 등을 성유물로 속여 순례객들에 장사질을 해먹었기 때문.[58] 1517년 당시 루터는 아직 가톨릭 교회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고 면죄부 팔이조차도 도미니코회와 마인츠 대주교만 주도하는 줄 알았다. 교황청도 처음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게 독일 내 아우구스티노회가 도미니코회가 잘 나가자 질투해서 비방하는줄 알았다.[59] 개신교에서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혁가들이 만든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지 개혁가 개개인을 성역으로 보는 게 아니다. 애초에 루터와 칼뱅 본인도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고 했지 새로운 교파를 만든다 말하지도 않았고, 루터교회란 명칭도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 극초기에는 가톨릭 진영에서 기독교가 아니라 루터를 믿는 이단이라 하여 썼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학적 진보 보수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성경이 전통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며, 그 전까지 당연히 여겼던 교리들도 성경과 충돌한다고 증명될 경우 뒤늦게라도 주저없이 바꾸거나 폐지할 수 있다.[60] 종교개혁가들의 주요 사상중 하나인 '''Sola Scriptura'''[61]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62] 메시아의 탄생, 523p[63] 메시아의 탄생, 528p[64] 앵커바이블 요한계시록 2, 크레이그 R. 쾨스터, 레이몬드 브라운은 해당구절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면서 중의적으로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65] 이국진, '굿모닝 성경' 누가복음 1장의 해설에서 발췌.[66] 단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란 뜻으로 '''성경에는 없지만 그렇다고 폐해버리면 더더욱 곤란한 관습들'''이란 의미가 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칼뱅파 간의 갈등은 성만찬 문제 외에도 어디까지 기존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남겨둘 것인가에 대한 논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논쟁에 관해서도 성만찬 만큼이나 대부분의 종교개혁 관련 신학 서적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므로 더 자세한 것은 그쪽을 알아보자.[67] 신교도 양대 제후 작센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방백 필리프 1세는 제국 추방령과 작센선제후는 궐석재판으로 사형까지 받고 나란히 체포 되었고 마그데부르크를 제외한 모든 신교도 지역이 일시적으로 카를 5세에 굴복했다.[68] 마르틴 루터 사후 가장 유력한 루터파 신학자 필립 멜란히톤은 1547년 신교도의 수도(?) 비텐베르크가 함락되자 7성사와 라틴어 예배까지 용인하려 할 정도였으며 가장 중요한 교리만 인정 받으면 중요치 않은것(?)은 양보한다는 구상이었다.[69] 한국 루터회의 경우 전례력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기념일은 인정하지만 성모송은 인정하지 않는다.[70] 그렇다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말한 테오토코스 개념이나 칼케돈 공의회의 신성과인성성이 100% 온전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테오토코스는 일종의 예수의 인성성도 같이 지님을 신학적으로 강조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개신교는 '''영지주의나 네스토리우스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됐다는 사상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71] 성공회는 교단 차원에서는 테오토코스를 제외하고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신자 개인(특히 일부 고교회파)의 신앙관으로서 가톨릭 수준의 성모신심을 특별히 문제시하지 않을 뿐이다. 성공회 신자 중에서도 특히 개신교 성향에 가까운 저교회파(복음주의파)를 중심으로 여타 개신교 교단 수준으로 가톨릭의 마리아 교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72] 그래서 이 두 교파도 성상 없는 예배당 인테리어가 가능하다. 실제로 종교의 자유가 어느정도 확립되고 건축양식이 현대 모더니즘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19~20세기에 세워진 몇몇 루터교회들은 정말로 초기 루터의 유훈을 본받아(?) 단순한 십자가와 성경책, 촛불만 덜렁 놓아둔 경우도 많다.[73] 한스큉에 대해 가톨릭이 아니며 자유주의에 물든 이단이라 평한 일부 의견이 가톨릭 내부에서 있지만, 그의 견해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서울대교구의 손희송 베네딕토 보좌주교가 한스큉의 견해를 평화신문에 세차례에 걸쳐서 소개할 만큼 나름 비중이 상당한 인물이다. 자세한건 해당인물 참조.[74]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유대 율법에서는 사체를 부정하게 본다.[75] 이는 비단 그리스 뿐 아니라 타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북유럽의 발트족들은 마리아가 이름이나 성격에서 자신들이 원래 섬겼던 지모신 마라와 비슷하다고 여겼다.[76] 때문에 강경한 보수 및 근본주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이 처음부터 기독교가 아닌, 이교신앙과 짬뽕된 그 무엇이라고 본다. 진정한 기독교(개신교)의 계보는 간간이 재야 세력들로 이어졌고 이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간주하는 것이다.[77] 이런 주장은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도 거의 반반으로 갈려서 교리는 아니나 개인적으로 믿는건 문제삼지 않는다. 요한바오로 2세는 긍정적이었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부정적. 다만 공의회에서 새롭게 교의를 해석하는 방식이 단순한 다수결로 해석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1퍼센트의 차이가 뒤집혔으면 교의가 추가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78] 자크 뒤켄, 『마리아』190-192p[79] 자크 뒤켄, 『마리아』, 193p[80] 이 때문에 'duns'란 이름은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바보 멍청이를 뜻하는 속어로 통했고, 훗날 철자가 변해 '''dunce'''가 되었다. 서구권 초등학교에서 빵점맞은 학생을 벌 줄때 씌우는 고깔모자를 가리켜 'dunce cap'이라 하는 이유.[81] 현재 복고 가톨릭 교회는 성공회와 일치를 이루었다. 이들과 교류하는 일부 루터교회에선 성모 영면까지는 인정한다.[82] 메시아의 탄생, 850p[83] 가톨릭 저자중 이와 유사한 입장을 보이는 다른 예로 다음 링크 참조 역사의 마리아, 신앙의 성모님[84]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여성의 아들일 뿐이라는 것.[85] 3:35~36이므란의 여성이 말하길 주 여 저의 태내에 있는 것을 당신에게 바치겠나니 이를 받아 주소서 당신은 모든 것을 들으시며 알고 계시나이다 그녀가 분만을 하고서 말하길 주여 저는 여자 아이를 분만하였나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분만한 것을 잘 아시도다 남자가 여자와 같지 아니하니 그녀의 이름을 마리아라 하였나이다 그녀와 그녀 의 자손을 사탄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명령하였노라[86] 19:27~28얼마 후 그녀가 아들을 안고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니 마리아여 너는 이상한 것을 가지고 왔구나 라고 조롱하더라 아론의 누이여 너의 아버지 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네 어머니도 부정한 여자가 아니었노라[87] 개신교 중에서도 성모신심이 존재하는 성공회와 루터교회에만 성모축일이 존재하고,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나머지 개신교 교단에서는 성모축일이 없는 경우가 많다.[88] 만일 마리아가 예수의 진정한 어머니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고대부터 유서가 깊은 단성론 이단이 된다. 아담이라면 모를까(이도 상징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어떻게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가?[89] 요한 복음 19장 25~27절[90] 뉴질랜드 배우로 마오리족 혈통이다. 촬영 당시 '''만 16세'''. 영화 <웨일 라이더>로 2004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최연소 후보로 오른 기록도 있고, 스타워즈 시스의 복수에서 나부의 새 여왕 역으로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