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누스 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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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Imperator Caesar 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출생지'''
로마 제국 라누비오
'''생몰년도'''
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
'''재위 기간'''
138년 7월 10일 ~ 161년 3월 7일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2.2. 공직 경험과 양자 입적
2.3. 제위 등극
2.4. 통치 스타일과 내치
2.5. 후계자 계승 계획 변경의 속사정
2.6. 로마법 발전
2.7. 사망
3. 평가
3.1. 로마군의 질적 약화
3.2. 게르만족 관련 문제
4. 성격 및 일화


1. 소개


'''질서있는 평온(Tranquilitas ordinis)'''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 오현제로 평가받고 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 번째 황제이다. 성품과 행동 모두 겸손하고 솔직하고 자비로운 사람인 까닭에 자비로운(피우스) 황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당시 중국은 대진왕 안돈(大秦王 安敦)이라고 기록했다. 로마 제국/대중관계 문서 참조.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서기 86년 로마 근교의 도시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고향은 본국이었던 이탈리아 도시지만, 그의 가문은 속주인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으로 대대로 남프랑스의 네마우수스(Nemausus, 오늘날의 프랑스 )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89년도 집정관을 지낸 네마우수스 출신의 갈리아계 원로원 인사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이며, 어머니는 전직집정관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의 딸 아리아 파딜라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태어날 당시 풀네임은 부모와 외조부의 이름에서 각각 따온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rrius Antoninus)였다.
안토니누스의 할아버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는 갈리아 출신의 신참급 원로원 의원으로, 코르불로 휘하에서 제3 갈리카 군단장을 지냈고 네 황제의 해의 내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여 보결 집정관, 여러 총독직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공동으로 정규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안토니누스의 아버지 역시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집정관을 역임했다. 따라서 본가인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는 비교적 새로운 귀족 가문이면서도 플라비우스 왕조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제국의 최상위층으로 고속 출세한 가문이었다.
반면 안토니누스의 외가는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 시대 동안 매우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 가문이었다. 외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교양인이자 청렴한 원로원 중진 의원으로도 존경을 받던 전직 집정관이었다. 그는 저명한 원로원 의원이자 학자인 소 플리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고, 네르바 황제로부터 “올곧은 사람”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안토니누스는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귀족층, 그중에서도 핵심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는 89년에 집정관을 지낸 직후 사망했고, 안토니누스의 모친 아리아 파딜라는 98년 집정관을 지내게 되는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1]과 재혼해 이부 여동생인 아리아 루풀라와 율리아 파딜라를 낳았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여느 로마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재혼 직후부터 외조부의 사실상 양자가 되었고, 유년기때부터 이탈리아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어받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승계가 아닌 정식승계 차원의 가문계승이었다.

2.2. 공직 경험과 양자 입적


아버지가 89년 직후 사망하고, 어머니가 남편과 사별한 직후 재혼하면서 안토니누스는 외조부 손에서 자랐다. 막강한 외가의 도움을 받은 안토니누스는 아버지 역할을 해준 외조부에게 훌륭한 가르침과 예의를 배웠다. 그를 친아들처럼 키워준 외조부는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모두 유산으로 넘겨줬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일찍부터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안토니누스는 110년에서 115년 사이에 덕망 높은 원로원 의원이자 3차례나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2]의 딸이며 미인으로도 유명했던,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대 파우스티나)과 결혼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훗날 양자이자 사위이며 후임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부가 됐는데,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파우스티나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2남 2녀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두 아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한 138년 이전에 자녀 없이 요절했고, 장녀 역시 실바누스라는 귀족 자제와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35년 요절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자녀 중 그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생존한 자녀는 막내딸인 소 파우스티나(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3]였다.
원로원 귀족의 아들이자 막강한 외가와 처가까지 가진 안토니누스는 당시 로마 엘리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경험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을 선사받았는데,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로부터 훌륭한 인품과 일 처리를 인정받아 120년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을 경험했고, 프린켑스 자문회 의원까지 임명됐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신임해 본국 이탈리아 반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관직들을 정직하고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평온하고 목가적인 성품답게 안토니누스는 황제에게 아부를 하거나 어떤 공직도 먼저 지원한 적도 없었고, 120년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한 직후에는 은퇴한 뒤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지방의 로리움 사유지 시골 전원 저택에서 여생을 즐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4]
그가 행정가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휴식을 고려할 무렵, 티부르(티볼리) 별궁에서 지내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병에 걸려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고독감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황후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아일리우스)[5]라는 양자를 받아들여 공식 후계자로 선정했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는 좋은 집안 출신으로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상당한 미남이었고,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후계자로 임명한 이후부터 막대한 돈을 군인들과 시민들에게 뿌려대 황제 후보로 손색없었다. 그러나 그는 병약했고 상당히 호리호리한 데다 군무 경험이 부족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가 군무 경험을 쌓고 병약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며 그를 제국의 최전방인 판노니아(오늘날의 헝가리, 오스트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파견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히려 아일리우스의 건강을 악화시켜 추운 판노니아에서 폐렴을 얻고 심한 각혈을 하다가 138년 요절하고 만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 요절 직후인 138년부터 후계자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는데,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차기 황제 후보가 바로 안토니누스였다. 하드리아누스가 주목한 안토니누스는 이 당시 뛰어난 능력과 인품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으면서도, 원로원 내에서 가장 부유한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본래부터 교양 있으며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큰 반발 세력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양자로 삼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입양법상 필수 조건인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나이 차이였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이 법을 바꾸면서 마지막 걸림돌을 손쉽게 제거해버렸다. 이후 그는 안토니누스를 불러 양자로 삼기 전, 나이가 적지 않은 자신의 후계자 이후도 대비하기 위해 안토니누스의 처조카인 17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작고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7살짜리 아들 루키우스 아일리누스 베루스를 그의 양자들로 삼도록 했다. 이때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요구 조건을 수락했으며,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입적돼 공식 후계자가 되었다.

2.3. 제위 등극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 안토니누스는 피우스라는 별칭대로 로마인들이 말하는 귀족으로서의 위엄과 덕성을 갖춘 평온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히 엄격한 사람이었던 그는 광장히 키가 크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웅변 실력도 뛰어났던 그는 뛰어난 기품과 교양을 갖추면서도 겸손하고 근면했다. 또한 정직한 데다 침착한 사람이었고, 법률 지식과 행정 지식이 굉장히 해박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근교에 많은 수의 벽돌 공장과 이탈리아 내 소유지들을 가진 최고 부자였는데, 사치와는 거리가 상당히 먼 사람답게 매우 소박하고 단조로운 사생활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정적이 거의 없던 그의 황제 수락은 처음부터 무사평온이었고, 23년의 재위 기간 내내 한결 같았다.
그가 즉위할 당시, 원로원에서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정책들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수성 위주의 제국 정책과 헬레니즘 성향에 대해 상당히 못 마땅해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하드리아누스가 발표한 법령들과 고시들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이런 움직임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강력한 반대와 설득으로 좌절됐다. 이때 안토니누스는 원로원에게 “하드리아누스의 모든 기억들을 무효화하겠다는 것은 곧바로 저의 입양과 계승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아니냐”고 지적하면서, 원로원을 설득시키고 나아가 전임자의 신격화와 그에 따른 영예 수여를 설득했다. 이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한때 동료이자 친구였던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원성 높던 몇 가지 조치들[6]을 없애겠다고 하고, 실제로 합의대로 원로원 의원들을 구명해줬다. 따라서 원로원에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호소대로 하드리아누스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가까운 행동을 하지 않았고, 새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 중 생활고를 겪고 있던 인사들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면서도 원로원이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도록 해줬다. 이는 원로원과 안토니누스의 관계를 상당히 향상시켰다.

2.4. 통치 스타일과 내치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전임자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원격 조정으로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7]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체제를 다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공로에 의한 결과였지만 안토니누스의 뛰어난 행정 조정 능력도 크게 공헌했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인사 정책을 거의 바꾸지 않았고, 정년이 다 돼서야 바꿀 정도로 철저하게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따랐다.
그 결과는 로마 제국의 유례 없는 평화였다. 그가 통치한 23년 동안 자연 재해나 가끔씩 일어나는 분쟁[8]을 제외하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물론 항상 게을리 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던 안토니누스의 통치 철학이 그런 평화를 낳기도 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끊임없는 시찰에 의한 성과가 더 큰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재위 하에 로마 제국은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다.
안토니누스는 통치 스타일처럼 내치에 상당히 전념하면서 본국 이탈리아 각 분야 사업에 대한 넉넉한 자금 지원과 본국 내 사회복지에 힘쎴다. 이때 그는 대규모 토목사업에도 힘써 본국 내 주요 항구인 오스티아, 푸테올리, 테라키나 등을 개선, 개량하면서 오스티아에 새로운 공중 목욕탕을, 카푸아에 새로운 원형 극장을 건설케 했다. 또 어린이 교육과 빈민층에 대한 식량 지원 및 교육 지원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이런 안토니누스의 시혜 정책은 본국 외 속주들에도 적용되었는데 과거 하드리아누스 시절 황제의 방문으로 막대한 부담에 시달린 그리스, 소아시아, 에게 해 일대의 여러 속주들에 대해서 세금 인하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지원이 있었다.
이처럼 안토니누스 피우스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와 속주들에 자선사업과 세금 인하, 토목 공사 등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티베리우스가 남긴 유산에 버금가는 2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에 남겨줬다. 그 이유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워낙 꼼꼼한 일 처리와 재무 행정 관리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나치다 할 정도로 황제 개인의 모든 생활이 검소했기 때문이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화려한 별궁과 정원들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휴일에 유일하다시피한 사치(?)라고는 과거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로마 근교의 개인 사유지로 이동해 시골 생활을 즐기며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한 뒤, 친구들을 불러 소박한 저녁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2.5. 후계자 계승 계획 변경의 속사정


하드리아누스는 오촌당숙 트라야누스의 아내로 자신에게는 당숙모가 되는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의 권유로 트라야누스의 조카딸 비비아 사비나과 일찍이 결혼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사촌 하드리아누스 아버지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보호자가 된 트라야누스가 크게 내켜하지 않은 결혼이었고,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중매로 맺어졌다. 동시대 하드리아누스의 아내인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보좌했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처럼 하드리아누스는 아내와 관계가 특별히 다정하지 않았고, 수에토니우스를 비롯한 황궁관료들이 황후와 가깝거나 가까워지는 것을 안 좋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부부는 자녀가 없었는데, 136년 육십이 된 황제는 건강이 악화되자 에트루리아의 오랜 귀족가문 태생의 아주 휼륭한 귀족청년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양자 겸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는 아주 휼륭한 후계자임에도 138년 1월 추운 판노니아에서 폐결핵에 걸려 요절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양자 요절 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친인척 관계였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때 자신의 먼친척이 되는 안니우스 베루스의 손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9]도 안토니누스의 후임 황제로 정해놓았다. 또 그는 자신의 양손녀 케이오니아 파비아를 마르쿠스의 배필로 정해놓고 약혼시킨 뒤 9살도 안 된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의 딸 소 파우스티나와 정혼시킨 다음 죽었다. 즉, 로마황제나 공화정 시대 명문귀족들이 자신의 혈육이 장성할때까지 그 혈육의 가까운 남자친인척을 그 혈육의 보호자 겸 징검다리로 하는 방식으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후계를 정했다.
그런데 ‘징검다리’ 위치가 된 안토니누스는 즉위 직후, 처조카 마르쿠스의 배우자를 아내 대 파우스티나와 상의 후 자신의 딸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루키우스 베루스와 딸의 정혼을 없던 일로 바꾸고 하드리아누스의 손녀 케이오니아 파비아를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좋은 명문가 원로원 귀족자제와 결혼시킨 뒤 루키우스 베루스의 매형이 된 이 남자와 그 일가를 후원해주는 방식으로 후계구도를 완전히 개편해버린다[10]. 다시 말하면,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계획을 이 계획의 장기 알이 된 안토니누스가 바꾼건데, 이때 그는 자신의 위치를 징검다리 바지사장에서 장인이자 고모부가 사위를 양자 겸 가문 후계자 삼아 넘기는 관례를 활용해 바꾸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를 좋은 명문가에 시집보내 자신과 마르쿠스, 루키우스 형제의 우호세력을 더 늘리는 전략으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는 방법으로 나름 깔끔하게 수정했다.
사실 이런 안토니누스의 행동은 당시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이야기가 나왔고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결혼 정책이 후임자를 생각하지 않은 결정이고, 당사자인 안토니누스 부부와 이들 부부의 딸 소 파우스티나에게 너무 불리했기 때문이다. 안토니누스 부부는 말년이 되면서 까칠해지고 참을성이 없어지는 황제의 일방적인 조건 제시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원한 것도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아울러 안토니누스는 즉위 후 하드리아누스의 계획을 온전히 따를 경우 징검다리식으로 마르쿠스가 장성할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불안정성을 가지게 될 상황이 됐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친조카, 처조카라서 본래부터 한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황제와 황후 신분이 된 상황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조카에게 의지하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돼 이는 누가 보더라도 우스운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원래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파우스티나의 상대는 마르쿠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루키우스 베루스이지만 루키우스 쪽이 한참 동생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고 한다. 나이대로는 마르쿠스 쪽이 파우스티나와 더 맞았고[11], 로마귀족과 상류층의 결혼에서 남자와 여자의 평균 초혼연령을 생각하면 안토니누스 입장에서 자신과 딸 모두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약속을 파기해야만 했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시한 조건을 일부 바꿨는데, 그럼에도 기본틀이었던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유지해 그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사위로 맞이해, 고모부가 처조카를 사위 삼아 가문의 대를 잇는 로마귀족들의 흔한 방법으로 명분을 얻게 된다. 즉, 이 계획 변경으로 마르쿠스의 황제 즉위 명분도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서 안토니누스의 명분으로 넘어가게 된다.[12] [13]

2.6. 로마법 발전


오현제 중 한 명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최대 업적으로 학자들이 평가하는 것은 로마법 발전 부분이다. 안토니누스는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법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답게 로마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원래부터 탁월한 행정가였던 그는 다른 황제들처럼 5명의 법률가들에게 자문회의에서 법률적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법률적 지식이 해박한 데다, 자신을 보좌하는 법률가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법률가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재위 기간 중 법률 정비에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재판에서 유죄 사실이 입증되기 전까지 누구도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규정과 재판에서 판사들의 견해가 팽팽히 맞설 때에는 피고는 반드시 불확정의 이익을 받아야한다는 규정을 법적으로 확립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나타나는 오래된 원칙이고, 로마에서도 계속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피우스 황제 이후도 마찬가지다. 물론 저건 명목상이고 전근대 시절이 그렇지만 권력자에게 찍히면 저런 거 그냥 무시당했다. 이외에도 그는 상속과 노예들의 처우 문제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이를 법으로 명확히 했다. 이때 그는 이전까지 애매하게 해석되기도 하던 상속법을 명쾌하게 정리했고, 가부장에게 종속된 가족 내 약자들(특히 노예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면서 국가적으로 노예들의 해방을 장려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치세기 동안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학대할 경우, 과거와 달리 처벌이 엄격히 시행됐고 벌금 역시 상당히 올랐다. 또 이탈리아 및 속주 전역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던 인신매매에 대해서도 무관용으로 강하게 처벌했다. 아울러 로마군 내 탈영병에게 행해지던 가혹한 처벌을 법적으로 완화시켰다. 동시에 전쟁 포로로 잡은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 역시 10년간 광산에서 노역 후 자유민으로 풀어주도록 바꿨다. 이외에도 그는 유대인들의 할례 인정, 기독교 탄압 제지 등의 조치를 내려 엄격히 시행했다.

2.7. 사망


23년간의 행복한 통치 및 평화로운 감시를 마친 이후, 안토니누스는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후계를 넘기고 노환으로 병사했다. 즉위 후 몇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아내인 대 파우스티나의 죽음으로 홀아비가 됐는데, 아내의 노예를 정부로 삼을 뿐 재혼하지 않고 평생 아내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사망에 대해 로마 시대 전기 작가들은 황제가 고령임에도 평소처럼 저녁식사에서 치즈를 많이 먹은 것이 원인이 돼 다음날 밤 구토를 하고 열병으로 진전돼 하루 뒤에는 상태가 심하게 악화됐다고 한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명을 직감한 듯, 통치권을 서둘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넘기며 마지막 정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기 직전 통치권을 이양받았는데, 안토니누스는 이 보고를 받은 직후 당직 중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에게 군호로 '침착'이라는 말을 남기고 잠을 자듯 몸을 뒤척이더니 161년 3월 7일, 자신이 유독 좋아했던 로마 근처의 로리움 내 소박한 시골 집에서 평온히 세상을 떠났다.
당연한 말일텐데, 안토니누스는 젊은 시절부터 널리 인망을 얻은 탓에 그가 가족들 앞에서 잠자듯 편안하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로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본국과 속주를 가리지 않고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앞다투어 죽은 황제에게 온갖 영예를 경쟁하듯 수여하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원로원에서는 어떤 논쟁 없이 신격화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시신은 로리움 내 시골 사유지를 떠나 로마에 도착한 직후,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됐다. 그런데 이때 황제의 시신은 성대한 장례 의식 속에서 20년 전 사망한 아내와 젊은 시절 요절한 두 친 아들 곁에 매장됐음에도 화장되지 않고 시신 매장 방식으로 안치됐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로 당시 유행 중인 시신 매장 형태로 영면에 들어간 황제가 됐다.

3. 평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후임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4] 때 들이 닥친 온갖 재해 및 이민족의 칩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23년의 통치 기간 내내 평화 그 자체를 경험한 황제였다. 그래서 그를 비판할 때 사람들은 안토니누스가 치세 당시 미리 문제점에 대비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15] 그렇지만 빡빡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이후 조금 나른한 안토니누스의 통치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의견들을 보면 “하드리아누스 역시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고, 안토니누스도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다. 그런 두 황제가 모두 훗날을 대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당대 사람들은 자그마치 4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황제들에게 시달리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조차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비판할 때 그가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즉위 전 변방 경험을 어느 정도는 가질 수 있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저 자기 곁에 붙잡아 두기만 한 건 분명한 실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1. 로마군의 질적 약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비판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면 바로 국방비 절감에 따른 로마 정예 병력의 질적 약화일 것이다. 그가 통치하던 23년의 기간 동안 분명히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라는 말에 걸맞게 제국의 위엄과 힘이 국경선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전임자들인 트라야누스의 군사적 업적들과 하드리아누스가 전역을 순방하면서 로마군을 효율적이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공헌 덕분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속된 평화의 결과, 안토니누스는 치세 내내 로마군의 비용 절감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는 것에만 힘을 쏟았다.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로마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고, 하드리아누스 시대보다 훨씬 고립주의적인 수동적 방어 체계로 로마군의 방어 시스템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까닭에 그가 죽고 난 뒤 고스란히 나라를 물려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즉위 직후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와중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외적들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다르게 볼 여지도 있다. 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방만한 재정운영[16]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시절에 은화 함유량을 86.5%까지 떨어뜨려야 했고 그래서 수세적인 정책을 펼쳤을 수도 있다.[17]

3.2. 게르만족 관련 문제


안토니누스 황제 시기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은 먼 게르만 부족에게 박살나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 부족이 로마에 직접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안토니누스가 묵살한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족에게 합병당하고, 로마 제국은 결국 더 공격적이고 야만화 된 자들인 먼 게르만족(고트족, 반달족 등등)의 대규모 공세에 시달리게 되는 데 일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안토니누스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기 로마 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나 같이 지적하는 것은 로마 제국 국경선 바깥의 게르만족의 사회 조직과 군사 조직이 성공하고 갈수록 로마 제국의 총력전 전략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이걸 어디서 배우고 있었던 걸까? 다름 아닌 로마 제국이다. 이렇게 점차 성장해가고 있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족"을 제압해서 인력까지 얻게 된다면?
물론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통해 이들을 우방으로 삼고 이들과 함께 이들의 영토에서 먼 게르만족을 견제하였다면 후대 황제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매사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을뿐더러 오히려 "가까운 게르만족"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원교근공'''은 외교의 진리였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설이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사학계에 제기되었던 주장들이라곤 해도 대부분 옛날 학설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나마 연구가 일찍부터 잘 이뤄진 로마 제국사 전기 부분은 이 점이 크게 단점으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합리적인 연구와 분석이 비교적 근래 한국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서구 학계에서는 이미 90년대에 다 논쟁 끝난 부분[18]으로 이뤄진, 후기에 접어들수록 틀린 부분은 많아질 수밖엔 없다.
카이사르의 경우를 예로 든다고 해도, 한창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갈리아 족을 도와 이들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갈리아 족의 세력을 유지시킨 뒤 점차 로마화를 시켜 갈리아 전역을 로마 땅으로 삼는 데 성공했던 건 그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까지 포함하는 대대적인 정벌까지 수반되어야 했다.
먼 게르만족에게 밀리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족의 처지도 이때의 갈리아족과 마찬가지라곤 하지만, 게르만족을 엄연히 타자로 여겼던 갈리아인들과 "가까운 게르만인"들의 환경이 같을까? 게다가 종국엔 "가까운 게르만족"까지 결국은 진압해야 되는데? 이런 걸 하려면 또 다시 대규모 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토니누스에게 군사적 식견과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맞지만, 그에게도 그리고 당대의 로마인들에게도 이런 것을 포함한 결단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뿐더러 실천했다고 한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인 무장이 아무 때나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때의 게르만족은 카이사르 시절의 게르만족과는 전투력이 또 달랐다. 후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와는 달리 고전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시대의 로마군이 카이사르보다 멍청하고 군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게르만족 사회 자체의 조직력과 군사력이 성장한 게 이유다. 무엇보다 실제로 갈리아를 평정했던 카이사르조차 자칫 잘못했으면 갈리아 원정을 처참히 실패하고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3세기가 되면 게르만족은 한차원 더 성장한다.
그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때는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긴 했지만 결국 국경 지대에서 횡포를 부리는 게르만족을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무찌르는 데 성공했던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환경이 비교적 유리했던 안토니누스 시대 때는 선제적으로 공격을 감행했거든 확실히 결과는 더욱 나았을 것이고, 안토니누스가 이를 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안토니누스의 군사적 식견과 역량이 하드리아누스나 트라야누스만 못했던 것이 이유라는 추론은 물론 일리가 있다.

J.B 번리는 안토니누스를 두고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에 안주하였으며 잠재적 위기에 대한 대처를 하려들지 않은 것이 그의 죽음 이후의 재앙에 노출시켰고, 따라서 현명한 통치자로 볼 수가 없다라는 비판을 하였다. 그리고 Ernst Kornemann이라는 학자는 그의 통치는 기회의 낭비의 연속일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이는 호전적인 게르만족의 잠재적인 위협을 우호적인 게르만족과 "연합해 싸우는 예방 전쟁"을 통해 외부 영토에서 저지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안토니누스는 평화에 지나치게 안주하여 방치하였고, 그로써 호전적인 게르만족을 로마가 직접 상대해야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예방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당 설들은 물론 일리는 있으나, 당대 게르만족 사회의 성장에 대한 연구가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위에서 제기된 문제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안토니누스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있다.

4. 성격 및 일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겸손하고 솔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만년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기한테 개긴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칙령을 내리자 앞장서서 이를 막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고발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 이유를 하드리아누스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해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이름에 붙여지는 '피우스(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은 이 때문에 생겨났다. 정책 결정 시 친구들과 숙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정보를 보고 판단해야 하는 황제로서 과히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안토니누스의 친구들이 대부분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라 굳이 걸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19]
태어나면서부터 엘리트 계층이었고 자신도 이를 자각하고 있었다. 황제 즉위 직후 관례적으로 내리는 하사금을 몽땅 원래 자기 재산에서 충당해 버릴 정도로 공과 사의 구별에 엄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유머감각과 온화함도 갖추고 있었다니. (동시대 인물들의 평처럼) 천상 '신사'. 사자 사냥을 좋아한 전임 황제와 달리 낚시를 좋아했고 황제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물론 약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토니누스의 최대 약점은 황실 여인들이었다. 먼저 황제는 네 자녀 중 유일하게 오래 산 막내딸 소(小) 파우스티나를 몹시 아낀 딸바보였다. 따라서 그는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몹시 아꼈고, 그녀와 사위 마르쿠스, 그리고 또 다른 양자 루키우스를 문자 그대로 끼고 살았다. 아울러 그는 막내딸 못지 않게 아내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를 사랑했던 애처가이면서도 유독 아내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은 공처가였다고 한다. 따라서 "맹세코, 나는 아내 없는 궁전에서 사느니 차라리 아내와 함께 기아라 섬[20]에서 살겠다."[21]고 하면서도, 정작 아내의 기 쎈 성격과 그 성격으로 벌어진 방종하고 단정치 못한 품행 탓에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는 아내가 죽기 전까지 그녀의 성격으로 벌어진 일이 있을 때마다 슬픈 마음으로 여러 번 참았다고 하는데, 아내 대 파우스티나 사후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다른 여인들은 양자이자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와 유일한 그의 첩실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였다.
마르쿠스의 친모인 도미티아 루킬라가 안토니누스 시대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시누이였던 파우스티나 생전부터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마르쿠스에게도 시누이(마르쿠스의 장모이자 고모)처럼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래서 안토니누스는 처조카이자 사위이며 양자인 마르쿠스처럼 그녀의 영향을 받았고, 이들 여인들의 영향 탓에 아내의 친조카인 마르쿠스의 배필을 바꾼게 아니냐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안토니누스는 이 두 여인 외에도 아내가 생전 총애하던 노예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를 몹시 아꼈고, 아내가 죽은 이후에는 이 여자를 자신의 정부(첩)로 삼고 그녀와 사실혼 관계였다고 한다. 또 황제는 그녀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피우스의 시대 내내 이들 세 여인의 입김은 상당했는데, 이들의 개입은 상당했고 첩실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의 도움으로 근위대장 자리에 오른 인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이런 황제에게 발레리우스 호물루스는 도미티아 루킬라가 황제가 주재하는 아폴로 신전 제사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농담삼아 "저 여자(도미티아 루킬라)는 폐하의 날이 끝나고 자신의 아들이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겁니다"라고 이야기까지 들었던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이 사람의 말이 워낙 뼈있는 농담이면서도 상황을 봐가며 한 까닭에, 안토니누스의 반응은 성격처럼 그냥 평화롭게 넘어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그는 이후에도 이 농담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본인이 이를 간접적으로 인정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안토니누스는 별명처럼 워낙 신사라서 시민이나 비(非) 로마인 및 주변 민족, 심지어 자신의 권한 안에 있는 노예와 클리엔테스들에게 유독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이런 그를 전설적인 로마의 초기 왕이자 아이밀리우스 가의 시조인 누마 왕과 비교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안토니누스는 23년 내내 온화한 성품으로 누마처럼 종교의식도 성실히 수행하고 운을 타고 났다고 할 정도로 재위 내내 평온한 치세를 보냈기 때문이다.

[1] 존 그링거 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율리우스 루푸스의 직계후손인 그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어머니의 재혼 상대가 되면서까지 결혼한 이유는 안토니누스 외가가 가진 영향력 때문이라고 한다. 재혼 후 그는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는 과정에서 생긴 보결 집정관 자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차기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의 즉위 과정에서 새 황제의 등극을 인정하는 중책을 책임지게 됐다.[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이다.[3] 130년생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황후이며, 콤모두스의 어머니이다.[4]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휴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개인 사유지에 있는 시골집에서 닭을 키우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가정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을 즐겼다.[5] 본명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로 저 이름은 후계자로 선정되면서 개명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 초기에 숙청한 선황제의 4명의 중신들 중 한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사이에 자식이 있었던 그를 후계자로 삼은 건 하드리아누스 입장에선 정치 노선은 달랐으나 분명 애국자였던 그들에 대한 나름의 속죄였을지도 모른다.[6] 본국 이탈리아 내에 설치된 4구역 판사직 폐지, 하드리아누스가 임종하면서 일부 원로원 의원들의 처벌을 수락하고 이들의 법적 보호를 박탈한 명령[7]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에 설치된 안토니누스 성벽.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달리 이 성벽은 기본적인 감시 기능을 확장한 개념이었다. 철저하게 수성으로 일관한 안토니누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8] 그나마도 안토니누스의 편지 한 통으로 해결하곤 했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외조카가 낳은 딸이었다. 따라서 손이 많지 않고, 친척도 많이 없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혈연상 멀어도 몇 안 되는 먼친척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10]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자녀 중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딸 파딜라와 결혼했다.[11] 마르쿠스가 한살 연상[12] 파우스티나와 이혼을 하려면 자신의 황제의 직위도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파우스티나가 금슬이 좋아서 어느 정도는 핑계거리로 댄 것이기도 하다.[13] 게다가 파우스티나는 그 당시 기준이나 오늘날 기준으로 소문이나 후대 콤모두스 암살 후 기록처럼 그렇게 음탕한 편은 아니었으나 정숙한 부인이라곤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운신 폭이 이 때문에 좁아진 건 확실해 어쩔 수 없이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준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14] 안토니누스의 사위이자 양자, 처조카[15] 물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엄연히 '''황제'''다.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로 인해 피곤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훗날의 문제를 대비하지 않았던 것까지 괜찮다고 할 수는 없다.[16] 트라야누스랑 달리 전쟁은 하지 않아서 전리품은 없고 황제의 제국 순행으로 지출은 매우 늘었다.로마만 그런 건 아니지만 권력자의 순행은 온갖 행사와 축제로 많은 경비가 지출된다. 더군다나 즉위시 국고에 넣어야 할 부채 8억 세스테르티우스를 탕감해주기까지 했다.[17] 은화의 은 함유량은 네로 황제 이후로 지속적으로 감소 하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나 세베루스 황제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줄였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런 게 절대 아니다.[18] 3세기의 위기를 로마 체제 자체에서만 찾고,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해선 도외시하던 잘못된 연구 경향들을 말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평화 정책에 대한 건이 아니다.[19] 사실 이런 모습은 세종대왕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20] 에게해에 위치한 섬으로 로마시대 범법자들이 유배되는 곳으로 유명했다.[21] 일부 책들에서는 황제가 막내딸 파우스티나를 빗대 한 말로 나오는데, 사실은 동명이인의 아내 대 파우스티나를 거론하면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