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image]
'''이름'''
Robert Jermain Thomas
'''생몰'''
1839년 9월 7일 ~ 1866년 9월 5일 (26세)
'''출생지'''
영국 웨일즈 라야다
'''학력'''
영국 런던 대학교 시스템 뉴 칼리지 신학과 졸업
'''가족'''
아내 : 캐롤라인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3. 순교자 논란


1. 개요


영국개신교 선교사.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조선에서 사망한[1]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지만 토마스가 평양 군민들에게 맞아 죽은 이유는 포교 때문이 아니라 침략 행위 때문이었다.[2]

2. 생애


영국 웨일스 중부 라야다라는 작은 마을에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라야다 지역의 작은 회중 교회의 사역자인 아버지를 두어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토마스는 1859년 런던 대학교 시스템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정식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목회보다는 해외 선교 사역에 뜻을 둔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부인인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몇 달간의 긴 여행 끝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때마침에 부인이 임신하던 중이라 중국에 한 동안 머물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부인인 캐롤라인이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 유산하게 되고 결국 사망한다. 토마스는 이 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 후, 중국내 사립학교 '앵글로-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직을 맡아줄 것을 런던 선교회 중국 지부장에게 제안받았으나, 토마스는 고민 끝에 이를 거절한다. 이후 토마스는 마음을 정리한 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외 선교에 다시 집중하게된다. 중국에서 조선인 가톨릭 신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1865년 조선에 잠입하여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 활동을 벌이다 배가 파손되어 중국으로 돌아간 후, 베이징에 있는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잠시동안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나게된다.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진입한 후, 평양 관민들에게 통상 수교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에 만경대 한사정까지 올라갔다. 그들의 행동을 막아선 중군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르자, 평양성 관민들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는 소총과 대포를 관민들에게 마구잡이 쏘아대 사태는 더욱 더 악하되었다. 결국 제너렬셔먼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었고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 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하여 대동강 물에 페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 결국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잔당들과 함께 사로잡혀 결박당한채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죽는다.

3. 순교자 논란


영국 웨일즈 출신인 토마스가 미국 프레스턴의 상선을 타게 된 것은 측량이나 통상과는 별 관련 없이 선교 목적이 맞다. 토마스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처음 조선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 중인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1865년 9월 13일 조선 연평도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지하 교회화되어었던 가톨릭 신도들의 도움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4달 정도 하였고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태풍을 만났다. 결국 배는 좌초되어 목숨만을 건져서 1866년 1월 베이징으로 다시 복귀했다. 1866년 4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서 자신의 선교가 조선땅에서 뿌리를 내려 평양에서 자신이 전파한 한문성경이 퍼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다 마침 프랑스 배를 타려다가 무산되고 꿩 대신 닭으로 찾은 게 제너럴 셔먼호였다. 따라서 토마스는 배를 얻어 타고 온 것이지 자청해서 무장 상선을 선동하여 끌고 침략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에서의 토마스의 역할은 평양지와 패강록에 의하면 단순한 통역이 아닌 대화창구였다. 심지어 권총과 환도로 무장[3]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환재집을 보면 토마스가 조선인 관리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성을 냈다는 대목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배를 얻어타고 통역을 맡은 정도가 아니다.
제너럴 셔먼호에 탄 인원은 토마스와 영국인 호가드를 비롯해 '''서양인은 5명이고(덴마크인 선장 1명, 영국인 토마스 목사 포함 2명 미국인 2명), 나머지 14명의 선원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다.''' 무장 상선이란 용어 때문에 군함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시기 이전 전근대 시절 원양으로 나가는 선박은 상선이고 수송선이고 연락선이고 간에 포로 무장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4] 이 20여 명이 구경 나온 조선군민 7명을 사살하고 자재와 식량을 나눠줬더니 되려 약탈했다.
통상 목적의 이양선은 이 시기 이전인 순조, 헌종, 철종 시대부터 여러 차례 보고되었고 조선정부는 통상은 거부하되 잘 달래보냈기에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된 이유는 이들이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해적질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 주둔 조선군을 통솔하던 박규수는 개화파의 효시로 유명한 인물이며 토마스 선교사 및 생존자들을 죽이지 않으려던 사람이었다. 개화파였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서양인 5인을 제외한 중국인 선원이 10여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사건 때 평양 주민들이 중국인 선원까지 죽여버리자 조정에서도 청에서 항의할 것이 두려워 난색을 표했다(다행히 청나라 조정에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일각에선 한국 개신교계가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사건을 긍정적으로 포장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조선 개신교계에서 이때 죽은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기리고 토마스 교회를 세웠다.[5] 6.25 전쟁 당시 평양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도시가 황폐화되었는데, 2009년에 평양 과학 기술 대학을 지으면서 우연히 그 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6]는 1928년 평양에 도마스 교회를 세우고 1935년에는 도마스호라는 배도 건조하며 토마스를 널리 알렸다. 개신교계가 주장하는 토마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오문환이 연구/주장한 것들에 기반한다. 다만 1903년생인 오문환이 1866년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얼마나 연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오문환이 토마스 알리기를 시작한 1926년은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이 된 시점이었다. [7]
1865년에 있었던 토마스의 첫 조선 선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가능한 것이고 두 번째 입국도 북경에서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지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북경 책임자인 윌리엄슨은 1855년 런던 선교회를 사임하고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 주재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 선교 시도에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는 토마스 목사의 상관도 아니며 토마스는 일개 지원자였는데, 토마스 목사의 교파는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아닌 웨일즈 출신 회중교회다.
순교 여부에 대해 한국 개신교에서도 논란이 없는 건 아니다. 선교 목적으로 입국을 시도한 건 맞는데, 포교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침략 행위 때문에 죽었는데 무슨 순교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종종 있다. 어쨌거나 토마스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죽은 개신교 선교사이긴 했지만 결국 해적일당으로 죽은 거라서... 그리고 조선땅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토마스가 아닌 독일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였다.[8]
간혹 토마스가 자신을 잡아 죽이려던 평양 주민들에게 성경을 뿌리다가 박춘권이라는 사람의 창에 맞아 죽었고, 이 사람이 그 성경을 구해 읽기 시작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1907년 평양 대부흥 때 어엿한 장로가 되어 있었더라... 하는 극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오문환의 연구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 출처불명의 설로 보인다.
[1] 분노한 평양 군민들에게 죽었다.[2] 처음으로 순교한 외국의 기독교 (가톨릭) 선교사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당한 청나라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이다. 백인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토마스보다 6달 먼저 참수당한 성(聖)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를 비롯한 9명 프랑스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한국 103위 순교성인).[3] 당대 서구에서도 해적행위는 사형이었고, 무장하고 있었다면 재론의 여지도 없었다.[4] 원해에는 서양 선박끼리 만나도 무법천지였고 대항해시대 때는 사략해적도 있었다.[5] 평양에 있었던 교회이기 때문에 북한 정권이 수립된 뒤 폐쇄된다.[6] 신사참배 문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7] 천주교의 초기 선교기록은 조선인 신도들의 네트워크와 기록,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 등이 있어 정부의 공식기록과 교차검증도 가능하지만 토마스가 죽었을 때는 아직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오문환은 토마스를 연구하면서 교차검증이나 연구방법이 없이 정부기록이나 참여자들의 기록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지만, 문헌이나 공식기록과 오문환의 연구/주장은 많이 다르다.[8] 귀츨라프는 1830년대에 조선에 왔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