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1. 개요
조선의 관료이자 학자. 호는 환재. 연암 박지원의 손자.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있던 가계는 아니었고 박지원 때부터 소위 북학파로서 당쟁을 거부하는 탕평을 모토로 하는 노론 계열의 일파에 불과했다. 탕평은 할아버지 박지원이 제창했지만 이미 세도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와 노론, 소론, 남인 등 붕당의 문제가 아니던 시절이다.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는 붙지 못하고 음서로 현감 등을 지내며 아버지 박지원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하는데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박규수는 부모가 결혼한지 8년만에 얻은 귀한 아들로 태몽이 학이라 규학이 원래 이름이었다.
2. 생애
박규수가 태어난 때는 영조와 정조 시기의 르네상스도 끝나고 서양 학문이 청나라를 통해 조금씩 소개되던 때였다. 특히 조부 박지원은 열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서양의 존재와 청나라가 서양을 겪은 내용들을 인맥이나 청나라 서적을 통해 조선에 들여 왔다. 박규수는 그래서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있으며 지동설을 정설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16살 때 태양, 지구, 지구의 위성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배움을 정리하는 정도의 시로 3별을 '환약'으로 표현하는 점이 재미있다.
박규수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 나이 많은 유학 선배들도 서로 친구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조부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폭넓은 배움을 익혔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다.[1] . 약관의 나이에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박규수는 효명세자와도 깊은 친분을 자랑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2] 을 세워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에 딱 맞는 젊은 인재로서 중용됐다. 아직 정식 대과에 급제도 못한 상태였지만 효명세자는 경연 자리에도 박규수를 배석시키고 견해를 들었고 박지원의 사상에 관심을 보여 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올리라고 박규수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곧 요절했고 이 충격으로 박규수는 관직에서 물러난 채 20여 년간 칩거했다. 효명세자의 다음 대는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 헌종이라 세도 정치의 횡포는 효명세자의 개혁 시도에 대한 역사적 반동으로 더욱 심해졌다. 만약 효명세자가 정치적 행동을 계속하려 했다 치더라도 있을 곳은 없었을 것이다.
20년이 흘러 1848년 효명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던 헌종도 슬슬 병색이 완연하고 세도 정치의 악폐가 해결될 기미가 없자 박규수는 다시 벼슬길로 출사한다. 헌종은 박규수를 불러 '내 너를 너무 늦게 알아봤다. 부친의 총애를 받던 너를 중용하겠다.'라고 말을 하였다. 세도 정치에 눌려 술로 일관하던 헌종이 아직 뜻을 꺾지 않았다는 증거. 그러나 박규수는 안동 김씨들로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있었다. 뒷배경도 별로 없다시피하는 박규수가 요직에 앉을리 없었다. 외직인 용강(오늘날 북한 남포특별시 룡강군) 현령이 된 박규수에게 비보가 닥치는데 헌종이 승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에게는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철종이 즉위한 것인데 문제는 강화도 도령 철종은 더 힘이 없었다.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시절 사귄 여자도 의문사하고 진실은 묻힌 채 안동 김씨의 핵심 김문근의 딸을 비로 맞아야 할 정도였다. 박규수는 외직을 전전하는 동안 이런저런 실학의 흔적들을 찾아 머리 속에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세상에 대한 비관도 상당했던 모양인데 이 때 남긴 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대충 내용은 '조선 조 내내 글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벼슬길을 피하고 안분지족을 즐겼던 것은 깨끗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결코 청렴 결백 등으로 미화할만한 것이 아니다. 권력에 눌려 뜻을 펼 수 없으니 도망간 것일 따름'이라며 평가 절하했다. 틀린 말은 결코 아니지만 세도 정치에 상처입고 시니컬해진 박규수의 마음이 느껴진다.
1862년 진주에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수습을 위해 안핵사로 파견됐다. 조정에 백낙신을 파면해 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로 옮겨갔는데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다.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 정책에 부정적이기는 했지만 일단 미국 함선이 들어왔고 자신의 위치에서는 통상을 허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군(장교) 이현익을 보내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침입자로 오해[3] 하고 붙잡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게 한다. 배는 불태웠어도 되도록이면 생존자들을 구해서 미국과의 교섭에 이용하고자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의 포격으로 조선인 사망자 7명을 포함해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탓에 분노한 주민들이 생존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생존자들을 내주었고 모두 주민들에게 맞아서 살해당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박규수는 우의정에 올라 고종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100여 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국서를 보냈다. 그러나 국서의 내용이 기존의 국서와는 달리 발신인이 천황으로 되어 있었고 '대일본', '칙서' 같은 황제국에서나 쓰는 용어들을 쓴 탓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박규수는 그런 문제들은 지엽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조정에서는 일본의 국서를 거부했고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포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로 인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물러난 박규수는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877년 세상을 떠났다.
3. 개화파의 스승
현대에 들어와 그는 개화파의 시조로 꼽히고 있다. 그의 개화 사상의 근원에는 조부인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실용주의가 기반에 깔려있었다. 앞서 북학파들은 청나라로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베이징에서 서양 문물들을 접했는데, 이런 연결고리는 그들의 후손 중 한 명인 박규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와 박규수 또한 서양의 정세와 문물에 정통했다고 한다.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관 유홍기 등이 박규수와 함께 했던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꼽히는 편.
일명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파의 양성소로 불렸을 정도로 박규수가 후학들인 개화파에게 남긴 영향력은 꽤 큰 편이었다. 당장 박영효역시 자신의 형과 함께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 사상을 배웠을 정도. 그리고 그것을 김옥균에게 전하면서 개화파가 형성된 것이다. 박규수의 사랑방과 관련된 개화사상가들은 우리가 흔히 국사교과서 뒷편에서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사람들이다.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서광범, 오경석, 이동인, 유홍기, 김홍집, 박정양, 홍영식, 서재필 등... 모두 박규수와 인연이 있다.
그 때문인지 개화파의 시조로서 박규수의 역할은 일본 메이지유신 주도 세력들(특히 조슈파)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과도 종종 비교된다. 다만 박규수의 개화 사상은 서양이나 일본을 너무 순수하게 바라봤다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4. 기타
1854년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1995년에 방영된 찬란한 여명에서 박병호가 연기하였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꽤 푸쉬를 받으며 개항기 조선사의 해설자 격으로 출연하고 있다. 청나라의 공친왕처럼 그 시대로선 깨어있는 사람 포지션으로 그려지는 나름 중심인물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존재감이나 행적에 비해서는 다소 부각이 과한 편. 굽시니스트도 이를 의식했는지, 작중에서 오경석과의 대화에서 박규수는 '저건 실제 내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이 만화 진행을 위한 해설 지문일 뿐'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1] 김정희는 박지원의 문인인 박제가의 제자였다.[2] 다만 세도 정치 또한 기본적으로 정조가 키워놓은 강력한 왕권에 기생한 권력이다.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를 하다가도 같은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가 대두되자 일시적이나마 몰락했던 현실과 안동 김씨가 다시 세력을 회복한 사건,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안동 김씨의 세도가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 자체가 그대로 반증. 본질은 비대화된 왕권에 비해 암울한 왕들이 계속 즉위했고 왕권에 기생하는 인척 세력들이 설쳤던 것이지 왕권 자체는 한반도 역사상 어느 왕조 어느 시기보다도 강력했던 시기이다. 신권의 왕권 견제가 사실상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한 전제 왕권은 물론 정조와 같은 현군이 집권하면 르네상스로 평가될만큼 일시적으로 좋은 체제일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현군이 등장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동시대의 서양에서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퇴행적인 사태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3] 통역을 맡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는 조선말을 해서 말은 통하는데 정확하게 뜻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