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창설
1658년 7월 29일
한국 진출
1831년 9월 9일[1]
한자
巴里外邦傳敎會
프랑스어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MEP)
라틴어
Societas Parisiensis missionum ad exteras gentes
영어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1. 창립과 창립정신
2. 한국 진출
3.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4. 현황
5. 외부링크


1. 창립과 창립정신


17세기에 포르투갈스페인은 전세계를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려 종교적으로 로마와의 계약, 이른바 포교상의 ‘보호권’에 의하여 복음 전파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황청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이러한 종교상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布敎熱)을 이용하여 1658년 선교단체의 설립은 물론,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L. de la Motte) 두 신부를 주교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오늘의 태국)으로 파견하였다. 1664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신학교는 교구 사제뿐만 아니라 선교 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1) 동인도에 프랑스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하는 계획을 구상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제일 첫째 목표이며, 그 계획을 실제로 수립한 교황청의 첫째 의도는 이교인들의 회개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이교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었다. 다름 아니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나 그 자녀들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에 올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 교회에 걸쳐서 해 주셨던 것과 같이, 각 지방에 성직자단을 구성하고 교계제도를 설립시킨다는 원칙이었다. 그 길만이 단시일 내에 완전한 그리스도교를 형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관계자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의 교회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 그러므로 파리의 신학교로부터 배출된 모든 일꾼들은 그들이 일하게 될 지역에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에 충분한 정도의 신자들이 생기고 그들로부터 목자들을 선발해 낼 수가 있는 단계에 이르면 즉시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자기네들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의 존재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해 나갈 만한 단계에 이르면, 성청의 허락을 받아서 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모든 설비들을 방인 사제들에게 넘겨 주고 물러나 다른 곳을 찾아가 일해야 한다.

3) 따라서 그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

'''둘째, 새 신자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

'''셋째,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일.'''

여기서 둘째보다는 첫째가,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일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 中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布敎史)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교 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선교의 우선 순위를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두었으며, 기존의 포르투갈식 선교와는 달리 정치 세력의 비호에서 벗어났기에 제국주의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3]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 회장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게 된다. 결국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170여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본회는 약 2,000여명의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한국인은 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오랜 역사 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순교했는데,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순교했고, 10명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 최근 50년 동안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추방되었고(1949년 ∼ 1953년), 1970년대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철수해야만 되었다(1975년 ∼ 1976년).

2. 한국 진출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 레오 12세는,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 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 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4]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엔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1849년에는 2번째 한국인 사제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배출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5]를 치른 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 리델, 페롱, 칼레 신부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1887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 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대구 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에 교계 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 대목구, 평양·연길·의란·전주·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 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10년 61명의 성직자 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수녀회도 창립했다. 루이 델랑드 신부(한국명 남대영)는 예수성심시녀회를, 피에르 생제르 신부(한국명 성재덕) 신부는 성가소비녀회를 세워, 한국 땅에서 한국인 수녀들을 양성하였다.
현지 적응을 겸해 입국한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이름을 변형한 한국식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일부 명단은 아래 표와 같다. 세례명은 국내 표기를 따랐다.
프랑스 이름
한국식 이름
세례명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6]
소(蘇) 주교
바르톨로메오
로랑 앵베르[7]
범세형
라우렌시오
피에르 모방
나백다록
베드로
자크 샤스탕
정아각백
야고보
장 조제프 페레올[8]
고(高) 주교
요한
시몽 베르뇌[9]
장경일
시메온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10]
안돈이
안토니오
펠릭스 클레르 리델[11]
이복명
펠릭스
스타니슬라스 페롱
권 신부
스타니슬라오
장 블랑[12]
백규삼
요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13]
민덕효
아우구스티노
니콜라 빌렘
홍석구
니콜라오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14]
원형근
하드리아노
플로리앙 드망즈[15]
안세화
플로리아노
루이 델랑드
남대영
루도비코
피에르 생제르
성재덕
베드로
르네 뒤퐁[16]
두봉
레나토

3.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에 소재한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1914년 대구대교구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 천주교의 근간을 이루게 하였다. 신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 교육에도 참여하여 1922년 ‘남대문 상업학교’를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이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소신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동성 중학교·동성고등학교[17]로서 존속하고 있다.
한편 박해시대 때 회장과 공소(公所)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본 신심서적(信心書籍)들을 저술해냈다. 1864년대에는 《신명초행(神命初行)》, 《성찰기략(省察記略)》,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등의 목판본들을 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간행 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80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불자전(韓佛字典)》이,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각각 간행되었다. 이들 모두는 한국 최초의 것들로서 한국의 언문(言文)에 있어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를 서울 정동(貞洞)으로 이전함으로써 오늘날의 가톨릭출판사가 있게 되었다. 또 1906년 10월에는 《경향신문》과 부록인 《보감(寶鑑)》을 창간하여 구한 말 개화 운동을 추진하다가 1909년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로 제호를 바꾸어 종교잡지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고, 대구대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대구에서 《천주교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존속하고 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18]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致命史蹟)을 조사함으로써 1925년 7월 79위의 치명자들이 복자품(福者品)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각종 서신을 통하여 같은 회의 소속인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한국 문화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코스트(Coste, 高) 신부는 약현(藥峴) 성당(현 중림동 성당)과 종현(鐘峴) 성당(현 명동성당)을 설계 건축함으로써 서양식 고딕식 벽돌건 물을 한국에 소개시켰다. 이밖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포교 활동 뿐만 아니라 교육 활동 및 시약소(施藥所) 운영 등의 의료 활동 등도 전개하여 한국천주교회를 포함한 한국 전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한국 가톨릭이 파리외방전교회의 영향을 받으며 나타난 특성 중 하나는 교회가 교구사제 중심이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서구의 가톨릭교회에서는 각 분야의 지도급 인물들이 대부분 수도회 소속 사제들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수도회가 아닌 교구사제 중심이다. 이는 파리외방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전교 지역에서 회원을 받지 않고 현지인 교구사제 양성을 최우선시하기에 일어난 일이다.

4. 현황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천주교회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구를 한국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에게 인계하고, 1944년부터는 사목 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들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들이 희생당하였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이 1959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목구로 설정되었다가 1969년 안동지목구가 대구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안동교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23명의 회원들이 서울대교구 · 수원교구 · 대전교구 · 안동교구 · 인천교구 · 대구대교구 · 광주대교구(광주가톨릭대학교) 등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자체적인 주요 사업은 계획하고 있지 않고 한국 천주교의 중요 사업 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지부의 본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소재하고 있으며 지부장에 임경명 임마누엘(Rev. Emmanuel Kermoal) 신부가 임명되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와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운영하는 군포시에 위치한 성 요한의 집에서 트리엔트 미사가 거행되기도 한다.

5. 외부링크


파리외방전교회 공식 홈페이지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의 연락처
파리외방전교회 인스타그램 계정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설정[2] 파리외방전교회의 '전교회'와는 다른 개념.[3] 초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도 왕에게 상당한 원조를 받아 운영했지만, 1822년 리옹에 전교회(Pontifical Society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가[2] 설립되면서 이 회를 통해 선교 자금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물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순교가 병인양요의 구실 중 하나가 되는 등 제국주의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속 군주의 보호권과 엮인 기존 선교방식과는 확실히 달랐다.[4]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선종했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신부가 되었다.[5] 이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6] 천주교 서울대교구 초대 교구장[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3대 교구장[9]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1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1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1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1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1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9대 교구장 및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15]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16]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17]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혜화동 성당과 바로 이웃해 있다.[18] 다만 뮈텔 주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는 태도 때문에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