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 대부흥

 

1. 개요
2. 발생 이유
3. 프리퀄 : 1903년 원산 대부흥
4. 진행 과정
4.1. 서막
4.2. 절정
4.3. 결과
5. 특징
6. 어둠


1. 개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당시 장로였던 길선주의 고백으로 일어난 대부흥으로, 원산 대부흥과 같이 대한민국의 개신교의 발전을 가져온 대사건.

2. 발생 이유


당시 1907년의 국제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1894년의 청일전쟁의 참패를 계기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완전히 무너졌고, 러시아는 3국간섭 이후 연해주를 빼앗아서 서서히 남하하고,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서히 조선을 합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세도정치와 이로 인해 생긴 폐단으로 인해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독교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로 오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3. 프리퀄 : 1903년 원산 대부흥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원산의 조그만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강사는 하디였는데, 그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가운데 하디는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각성이 아니라 자신의 각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국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 신자들도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원산 대부흥) 동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프란손(F. Franson)이 원산을 방문하여 집회를 열었고, 하디에게 대중적인 부흥회를 인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 후 하디는 1903년 말부터 1904년 말까지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하디가 시작한 부흥운동이 보다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905년 9월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연합기관인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1]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단체들이 소속된 이 모임은 하디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이때가 을사조약으로 민심이 흉융할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신앙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 그리하여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제 초기에 남감리교(미국 남 감리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부흥운동이 전국에 있는 교회로 확산된 것이다.
이렇게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1906년 9월 부흥사인 존스톤(H. A. Johnston)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령운동을 설명하면서 이 같은 운동이 조선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런 존스톤의 언급에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감흥을 받았다.

4. 진행 과정



4.1. 서막


1907년 1월 2일 부터 1월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동계남성사경회'가 열렸다.
장소가 협소해 남성과 여성을 나누어, 여성들은 평양북교회, 산정현교회, 남문밖교회, 서문밖 지역의 사랑채에 모여 선교사의 아내들이 인도하여 집회가 열렸다.
사경회는 13일 간 새벽기도회, 오전 성경공부, 기도회, 오후 노방전도, 저녁집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진행 10일째가 되도록 성령충만이나 전도의 성과, 회개운동 등 사경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1월 14일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열어 열심히 기도했다.

4.2. 절정


1월 14일 저녁, 결정적인 저녁기도회가 열렸다. 이길함 목사의 인도 하에 성도들은 통성기도를 이어갔고 15일 오전 2시까지 600명이 남아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이 날 길선주 장로는 1906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임종 당시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달라고 맡긴 100달러[3]의 거금을 횡령하였던 죄를 600명이 넘는 회중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의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성, 불치병에 걸려 아파하는 아내에게 매일 술만 마시며 저주를 퍼부은 남성, 첩을 두 명이나 두고 가정을 외면했던 남성, 선교사의 돈을 14전이나 훔친 여성 등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당시 이 회개를 목격한 여선교사는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여는 것과 같았다. 살인, 강간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죄가 고백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 또는 손상을 입힌 사람은 집을 찾아다니며 사과했고, 타인의 재물을 절도한 사람은 직접 갚는 일도 있었다. 이 일로 평양시내가 발칵 뒤집혔고, 목사들은 각 지역의 교회에 내려가 이 열기를 전했다. 그 중 그레이엄 리 (이길함)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내려갔고, 그것을 계기로 선천군은 근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어 종교가 금지된 현재 북한 체제하에서도 "고개 숙인 선천"으로 통한다고 한다.
윌리엄 스왈론 (소안론)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윌리엄 헌트 (한위렴) 목사는 경상북도 대구부로, 길선주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부한성부로 내려가 삽시간에 이 열기가 확산되었다.
또한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더욱 각지로 전파되었고 충청남도 회덕군, 전라남도 무안부까지 확산되었다.

4.3. 결과


'''본문은 <개혁신앙>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
영향으로 조선 기독교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다. 사경회가 열리는 곳마다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이웃 국가인 청나라로 확산되었다. 청나라에서 온 신학자 호만성 (胡萬成), 장석정 (張賜禎)이 1907년 입국하여 평양에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했는데 그 결과 청나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당시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는데 여성의 지위향상, 신분타파, 교육의 열기,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 등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로 통했던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1907년 이기풍 선교사가 전라남도 제주목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가 되었으며, 191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선교사 3명이 북양정부 산동성에 파송되며 최초의 해외선교사가 되었다.

5. 특징


1.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가운데 일어났다.
2. 성령의 임재와 함께 철저한 회개가 뒤따랐다.
3. 처음에는 선교사가 주도했으나, 나중에는 조선인이 주도했다.
4. 이 부흥회의 결과로 한국 교회에 뜻 깊은 도덕적 갱신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내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돼서, 가톨릭과 신자 수가 역전하게 된다.
(1905, 가톨릭 64070: 개신교 37407 -> 1907, 63340:72968)

6. 어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평양 대부흥은 개신교의 교세를 급격히 확장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가 기복신앙화 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대사건으로 만든 길선주 목사는 본래는 관우신앙을 기반으로 한 무당이었던 것. 길선주 목사가 한국의 개신교에 무속신앙의 종교 기법을 도입하면서 개신교가 기복신앙화 하는 스타트를 끊게 된다.
평양 대부흥은 경술국치 직전에 비교적 깨인 편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딴 데에 신경쓰게 하는 독약 같은 것이었다. 비록 길선주가 3.1운동 33인에 포함되긴 했지만, 기독교는 대개 일제에 협조적이었고 이것은 결국 신사참배 논쟁에서 폭발하게 된다. 이후로도 기독교는 독재정권에 영합하는 등 철저히 주류에 편승하는 행보로 일관해 오고 있다.

[1] 여기가 NCCK의 전신이다![2] 1970년대에 한국의 개신교가 성장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3] 지금의 화폐로 환산해봐도 12만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액수인데, 1907년도 100달러의 가치는 250만원 정도의 엄청난 비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