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
1. 개요
미국의 흑인 민권 활동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고 이를 성공시켜 미국 흑인의 인권 신장을 이뤄냈다.
2. 생애
2.1. 평범한 주부(?)
1913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당시 흑인을 차별하는 분위기가 강하여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와 함께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에 가입했다.
다른 미국 흑인들처럼 파크스 부부는 가난하여 몽고메리에서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사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파크스는 남편의 외조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1] NACCP 지부에서 간사와 서기를 맡을 정도로 나름 열성적인 흑인 민권 활동가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인해 '평범한 주부'라는 인상이 씌워져 있지만, 이는 이후의 버스 보이콧 운동과 민권 운동에서 대중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이다.
2.2.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55년 12월 1일에 로자 파크스는 일하던 백화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버스 안에서도 흑백 좌석 차별이 존재했다.
- 버스 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 버스 앞에서부터 네 줄은 반드시 백인들만이 앉아야 한다. 설렁 버스 안이 비어 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한다.
- 버스가 차면 흑인들은 백인들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야 한다.
-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경우 앞에서 뒤로 걸어가면 백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므로 앞문 쪽으로 가 요금을 내고 내린 뒤 뒷문으로 다시 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흑인이 내리면 버스 기사가 흑인을 무시하고 돈만 받고 버스를 출발시키는 경우도 상당했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은 이 사건으로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을 결의하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당국은 로자 파크스에게 불법 보이콧을 했다는 명목으로 14달러라는,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는 납부하기 어려울 정도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 결정은 오히려 버스 보이콧 운동에 불을 지피는 결과만 낳았다.
2.3. 흑백차별 철폐
결국 연방대법원이 버스 안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380여 일이 넘는 버스 보이콧 운동은 막을 내렸다. 또한 이 사건에서 자신감을 얻은 흑인들은 유색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더더욱 활발하게 벌였고 결국 1970년대 들어서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법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반면 당사자인 파크스는 이 사건 이후 계속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협박으로 몽고메리에서 살 수 없게 되면서 디트로이트로 이주했다.[2]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 존 콘이어의 비서로 1988년까지 19년간 일했다.
2.4. 세상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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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는 이 사건으로 20세기 중요한 인물 100인으로 뽑혔고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고 미 의회로부터도 메달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며 2005년 건강이 악화되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평생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3] 12명의 조카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국회의사당 로툰다에 이틀간(2005년 10월 30~31일) 관이 안치된 여성이자 첫 번째 민간인이 되었다.
3. 평가
파크스의 좌석 양보 거절사건은 현대 시민운동의 주요 유형 중 하나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보여준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미국과 전 세계의 차별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파크스는 시민단체 회원이기 이전에는 평범한 여성이였고, 그렇기에 미국 현대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전설이 될 수 있었다. 진지하게 미국사를 다루는 책 중에서 이 사건이나 로자 파크스의 이름이 없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인지 체 게바라처럼 상품화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족들은 고인모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생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힙합 듀오 아웃캐스트가 Rosa Parks라는 곡으로 로자 파크스 재단에게 소송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파크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했을 뿐, 노래 속에 이 분의 생애를 다룬 가사가 전혀 없고 저속한 언어들과 함께 공격적인 가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4] 결과적으로 파크스를 음해할 목적이 전혀 없다는 진술로 아웃캐스트 측이 승소했지만, 이름의 상업적 무단도용이란 사실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배상금을 물어줘야 했다.
로자 파크스가 촉발한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범한 주부의 저항활동에서부터 시작된 나비효과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이전의 여러 실패 사례들을 고려해 이루어진 체계적인 시민불복종운동이었다. 로자 파크스는 이전에 유사하게 체포된 사례인 클로뎃 콜빈 사건에서는 직접 변호비용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로자 파크스 이전의 사례들은 대다수가 사례 당사자의 도덕적 흠결로 인해 대중의 호응을 제대로 얻지 못하거나, 평범한 일반인이 주변의 압박을 받아 포기하면서 운동이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5] 로자 파크스는 이러한 실패 사례들을 고려해, 백인들이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요소들을 확실하게 배제하고, 철저하게 순수한 피해자의 위치를 점했을 뿐만 아니라 민권 운동가인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신념을 지켜서 버스 사건을 비롯해 그 후의 흑인민권운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사건에는 대중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물을 대표로 내세워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로자 파크스는 그런 부분에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로자 파크스가 완벽하게 준비된 조건의 인물이었다는 점이 이 운동의 의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당시 흑인이 받던 차별은 실존하던 문제였고, 로자 파크스의 사례는 이전의 흑인 민권운동이 약점 하나에 꼬투리잡혀 무너지는 걸 봐왔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닥터후 시즌 11 3화에서 등장한다. 해당 에피소드의 제목도 'Rosa'.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저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며, 힘들다 하더라도 그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느날보다 더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종종 나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든 사람도 아니었다. 난 마흔두 살이었다. '''내가 정말로 피곤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People always say that I didn't give up my seat because I was tired, but that isn't true. I was not tired physically, or no more tired than I usually was at the end of a working day. I was not old, although some people have an image of me as being old then. I was forty-two. No, '''the only tired I was, was tired of giving in'''.
''Parks, Rosa; James Haskins (1992). Rosa Parks: My Story. Dial Books. p. 116.''
4. 관련 문서
[1] 당시 흑인들 중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7%정도에 불과했다. 즉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당시의 흑인사회에서는 나름 식자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는데, 심지어 로자는 남성들보다 훨씬 더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여성이었다.[2] 이 때 그녀가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이클 일리치는 그녀에게 좋은 아파트를 소개시켜줬고 10년 이상 월세도 대신 내줬다고 한다.[3] 남편은 1977년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다.[4] 이런 가사는 빅 보이가 거의 주도했고, 안드레 3000의 가사는 그나마 진중한 편인데, 이것마저도 로자 파크스의 생애와는 아무 상관없고 저속한 단어가 딱 하나 있다.[5] 대표적으로 클로뎃 콜빈의 경우 15세에 백인 유부남과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중의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이전의 다른 피해자 중에는 직장의 백인 상사들이 해고한다는 협박을 해서 항소를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