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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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통 힙합이라 하면 음악의 한 장르를 뜻한다. 1970년대 후반 뉴욕 브롱스 남쪽 빈민가에 거주하는 미국 흑인과 남미 히스패닉계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문화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힙합을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문화'라고 평하기도 한다.[1][2]
힙합이란 말은 '엉덩이를 흔들다(hip hopping 혹은 hopping hip)'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Keef Cowboy라는 MC가 "Hip-Hop"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친구가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Keef Cowboy가 친구를 놀리면서 '그럼 훈련소에서 행군할 때 "힙-합"하면서 구령을 외치겠네?'라며 놀렸다. 한국으로 치면 "하나 둘"을 발음을 뭉개서 "핫-뚜" 라고 말하는 것. 일종의 군대식 발음과 엉덩이(hip)을 이용한 말장난인 셈. 그걸 본 옆 친구들이 폭소를 터뜨리니까 그걸 무대에서 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응용하고 샘플링하면서 랩과 브레이킹 문화를 힙합으로 부르게 되었다.출처
힙합을 이루는 요소로는 랩·디제잉·그래피티·비보잉이 거론되는데, 여기서는 힙합을 크게 나누어 음악, 춤, 미술의 영역에서 설명한다.
2. 음악
시간상으로 봤을 때 블락파티가 먼저였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힙합 음악은 클럽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Hip Hop(엉덩이를 흔들다)이라는 명칭이 시사하듯 힙합 음악의 기반은 디스코, 펑크(Funk), (댄서블한) 재즈 음악 등 과거 60, 70년대에 흑인들이 즐겨들었던 음악인데, DJ라는 일종의 선곡자가 노래를 틀고 사람들은 디제이가 틀어주는 펑키한 음악에 춤을 추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70년대 뉴욕의 브롱스 남부는 빈민가였다. 1973년 8월 11일 브롱스 남부에 거주하던 자메이카계 미국인 DJ Kool Herc는 자신의 집이 위치한 1520 SEDGWICK AVE의 지하에서 여동생의 생일파티 도중 두개의 턴테이블을 커팅 및 스크래치하여 빠르고 신나는 비트 "브레이크"를 처음 고안해 냈다. 펑크 음악에는 곡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노래를 멈추고 빠른 드럼 비트를 앞세운 연주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Kool Herc는 이 부분만을 따다가 계속해서 재생해 춤 추기 좋게 만든 것이다.
Kool Herc에 따르면 브레이킹(breaking)은 거리에서 쓰이는 속어로 '흥분되는', '활기찬'을 뜻한다고 한다. Kool Herc는 빈민가에서 이뤄진 수많은 음악 파티에서 브레이크 비트(Breakbeat)를 선보였으며,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복제하고 따라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3] DJ들은 음악을 틀다가 클럽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싶으면 자신의 기교를 선보이면서 브레이크 비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활용했는데, 이런 '브레이크 타임'에 추는 춤을 바로 브레이크 댄스라고 부른다.
DJ는 음악을 틈과 동시에 쇼 호스트로서 파티의 분위기를 이끌었는데, 사람들이 춤을 추면 DJ가 간간히 흥을 돋우기 위해 여러 미사여구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DJ는 음악 선곡에 집중하고 쇼 호스트로서의 역할은 'MC'라 불리는 사람이 맡게 되었는데, MC가 내뱉는 미사여구는 문학적으로 발전되어 Rap이라는 형태로 거듭나게 되었다. 원래의 MC의 뜻은 보통 한국에서 말하는 방송 MC처럼 'Master of Ceremonies'의 약자로, '쇼를 진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와 역사의 맥락 탓에 현재에 와서 'Microphone Checker'로써 쓰이게 되며 전혀 달라졌다. MC 참조.
이렇듯 MC 같이 쇼 호스트와 미사여구를 내뱉어 좌중을 웃게 만들고 파티의 흥을 돋우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브레이크 타임에 무대에 나와서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현재 힙합 댄스를 다루는 B-boy와 B-girl, Locker, Popper 등의 기원이다. 이렇듯 힙합의 처음은 매우 자유분방하고 흥겨운 파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으며, 때문에 이러한 힙합의 독특한 성향은 매우 포괄적이며 다른 요소들과 쉽게 섞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음악 장르로서의 힙합이 두드러지는 힙합의 요소는 뭐니뭐니해도 Rap이다. 랩은 강하고 빠른 느낌의 비트[4] 에 흥 돋구는 추임새나 가사를 빠르게 내뱉는 것이었으나, 1980년대 중후반 경부터 이것은 편견으로 여겨지게 되어 Rakim 등의 당시 뉴스쿨 래퍼들과 같이 이러한 랩의 한계를 깨뜨리는 래퍼들이 생겨났으며, DJ Premier와 같이 과거의 비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감이나 생략화, 혹은 단순화된 비트를 만드는 beat maker가 생겨났다.
그러나 랩에 과거와 오늘날에 걸쳐 유지되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이는 '''라임''', 우리말로 환원하자면 운율이다. 본래 서구권에서는 먼 중세 시대부터 시나 가사를 적을 때 어미 부분에 라임을 살려서 작사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으며, 이는 힙합 이외의 가요 장르에서도 보편적이다.[5][6]
다만 랩에 있어서 라임 작사가 더욱 중요해진 것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노래에 비해 태생적으로 매우 단조롭거나 아예 없다시피 한 멜로디 라인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말 끝에만 맞추던 라임 요소를 다양화시키고 변화시켜서 이를 통해 리듬감을 살리는 쪽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엔 시적 요소나 메시지, 펀치라인 등을 창의적인 라임과 함께 강조하는 바리에이션도 생겨나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가 되었다.
랩과 더불어 힙합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디제잉이다. 디제잉은 두 대의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같은 곡들을 반복해서 틀어 loop을 만들거나, 곡을 짜집거나 편집하여 전혀 다른 곡을 만들어낸다. 2대의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속도를 맞추어 두 곡을 한꺼번에 틀거나 한 곡 뒤에 바로 이어 다른 곡을 트는 개념도 힙합에서 제일 처음 정립되었다.[7] 클럽에 가 보면 알겠지만 파티나 공연장 등지에서 적절히 음악을 선곡해서 틀어주는 사람을 보고 DJ라 부르는데, 힙합 DJ는 단순히 음악을 트는 역할을 넘어, 두 대의 턴테이블에 얹어진 같은 LP판을 반복해서 트는 기술인 저글링이나, 곡 안에 담긴 노래의 드럼 라인만을 소리 조각마다 시간차로 긁으며 연주하는 고도의 기술인 드러밍을 하거나, 또는 턴테이블을 악기로서 다루어 스크래치를 한다. 여기서 기술적으로 심화된 이들과 원래의 DJ 개념인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1995년도에 DJ Babu가 '''턴테이블리스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된다.
또한 힙합 DJ의 저런 신묘한 기술을 가능케 하는 장비는 보통 두 대의 턴테이블 사이에 놓이게 되는 믹서인데, 믹서에는 Cross Fader라는 부품이 있다. 이 Cross Fader는 디제이가 탄생하기 전에도 존재하였으나, 힙합 문화가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랐듯, DJ들 역시 가난하였으므로 기존에 존재했던 비싼 장비를 구할 수 없거나 또는 그 존재조차 몰랐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Cross Fader을 개량한 사람이 오늘날에도 디제이로서 활동하는 전설적인 DJ인 Grandmaster Flash이다.[8][9][10] 이때쯤부터 힙합에서 말하는 DJ는 턴테이블리스트 DJ를 가리키게 되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에 더해서 비트박스도 4대 요소로 뽑지는 않아도 힙합의 음악적 하위 카테고리로 구분을 할 수 있다.
태동 이후, 힙합 음악으로 음반을 낼 시기부터 샘플링이 당연시 되어왔던 장르로 과거에는 샘플링이 완전히 새로운 음악 작법이었고, 관련 법규도 미미했지만, '''이 샘플링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힙합 뮤지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면서 저작권에 관련된 문제들이 생겨났고, 그 후부터 샘플링은 항상 힙합 관련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곡마다 일일이 샘플링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고 사용비를 지불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는 무단 샘플링이 만연해 있다.[11] G-DRAGON의 표절 사건 때문에 이 논란이 더 심해졌다. 샘플링이면 다 표절인 줄 알고 샘플클리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디시뉴스에 슈프림팀이 표절했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고, 리쌍의 곡 중 일부가 모 뮤지션의 곡들과 흡사해서 알아봤더니 본인들이 선배 뮤지션을 존경하는 뜻에서 재창조했는데, 이게 표절이냐 아니냐라는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2][13] 그러나 다른 음악장르나 예술이 어느 정도는 모두 그렇지만, 힙합은 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와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미 시간적으로 죽어버린[14] 것을 다시 가져와서 부활시키는 것에 비교적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풍조가 있다. 그래서 래퍼 아이스-티가 남긴 "힙합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을 재창조했을 뿐.'''"이라는 말은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자기 자랑, 돈, 명예, 파티, 섹스, 욕설 등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가사 내용 역시 단골 까임거리이다. 성차별적인 가사도 아주 많다. 물론 찾아보면 그렇지 않은 가사들도 많다지만(사회비판, 철학, 자전적인 가사 등.),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가사는 극히 한정돼 있기 때문에(...) 더욱 선입견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성차별적이고 범죄미화 등의 성향은 80년대 중후반 서부 힙합[15] 의 영향으로 이후 래퍼들의 문체나 어투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돈 자랑 같은 경우 짐 크로우 법을 마지막까지도 놓지 않았던, 그리고 아직도 미국 내 제일 유색인종 차별이 심하여 차별받는 흑인으로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상당히 크게 갖는 남부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반항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본토 힙합 뮤지션들은 심심하면 감옥에 들락날락거리는 걸로 유명하지만, 국내 힙합 뮤지션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바른 생활 사람들이 대부분. 갱스터 힙합의 실제적 경험에 의거한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가는 국내에서 탄압받기 딱 좋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면에서 조심하는 편.[16]
다른 장르에 비해 정체성 논란이 심한 편이다. 그냥 장르 이름일 뿐인데 "누구누구는 힙합이 아니다" 같은 논쟁에 명예를 거는 걸 보면, 리스너들에게 힙합은 단순한 장르를 뛰어넘은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패션 모드로 봐도 좋을 정도. 이렇듯 두터우면서 골수 매니아층을 탄탄하게 형성시킨 부분은 록 음악과 메탈 음악(메탈헤드)과 꽤 비슷하다. 그러나 현재는 포스트 말론 등으로 대표되는 록/힙합을 결합한 음악(EMO 힙합, 뉴메탈 등)이 많이 나오면서 이러한 시선은 많이 나아졌다.[17]
모든 대중음악이 그렇듯 힙합의 경우도 지역에 따라 음악적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발상지이자 본토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우 크게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트 코스트(East Coast)와 LA를 중심으로 하는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여기에 흑인 인구가 많은[18] 미 남부 전역에 산재한 여러 지방도시(애틀랜타, 마이애미, 뉴올리언스, 휴스턴, 멤피스...)를 거점으로 한 서던(Southern, Dirty South라고도 한다), 시카고와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중서부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미드웨스트(Midwest, 혹은 북부)까지도 구분할 수 있다. 보통은 딱 3대 지역인 동, 서, 남부 힙합으로 나눈다. 현재 2016년에는 남부의 애틀랜타와 캐나다의 실질적인 수도인 토론토가 제일 뜨겁다. 현재의 정서와도 제일 잘 맞는 음악을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성공한 아티스트를 최근에 제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인 듯하다.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는데, 웨스트 코스트는 비트 중심, 이스트 코스트는 가사 중심, 더티 사우스는 클럽 스타일이다. 참고.
큰 줄기라 할 수 있는 이스트/웨스트간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1996년 이후 지역 간의 구분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1998년경 이후로 점증한 서던 힙합 등 다양한 영향들이 힙합 전체에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힙합의 경우도 이에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도끼처럼 대놓고 사우스를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한국은 원체 땅덩어리가 좁기도 하고, 뮤지션들이 다 서울 올라와서 음악하는 탓에 지역으로 씬을 나누는 짓은 안 한다.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크루를 이루거나 자기 출신지를 부각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제이통의 부산. 그런데 제이통도 서울에 재능 있는 래퍼들이 더 많고, 빈약한 와중의 인프라도 그나마 서울이 부산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인지 제이통의 크루 벅와일즈도 초창기에나 부산 중심의 크루였지 나중에 가서는 서울 출신이 더 많아진다.
2.1. 한국에서의 힙합 음악
한국 힙합을 소위 '국힙'이라 하는데, '국힙'의 특징 중 하나는 록 음악과는 달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나름대로 견고한 입지를 다지는데 성공한 장르란 점이다.[19][20] 비록 1990년대 초에는 힙합 음악은 댄스곡에 들어가는 양념 요소에 불과했지만, 1997년부터 점차 이현도, 김진표, 지누션 등이 힙합 앨범을 내게 되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드렁큰 타이거의 정규 1집 <Year Of The Tiger>가 발매되고[21] 이 앨범이 엄청나게 히트를 치면서 천리안이나 신나라 레코드 등을 통해서 힙합 컴필까지 내는 등 성장세를 유지하다가,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 리쌍 등의 무브먼트 쪽의 힙합 뮤지션들과 조PD, 주석 등의 곡이 히트를 치면서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한국에서 힙합 음악이 처음으로 소개되고 현재까지 이른 역사를 살펴보면, 첫 시작은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최초의 랩 음악으로 알려진 홍서범의 '김삿갓'의 경우 다소 뜬금없는 노래 제목과 가사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한국 최초의 힙합 음악'이라 부를 수 있다. 홍서범의 '김삿갓'이라는 곡은 (훅에 한국적 뽕삘이 약간 있지만) 펑키한 디스코 사운드에 원시적인 미사여구에 가까운 랩을 올린 형태로 1970년대 후반 - 80년대 초중반기의 초창기 올드스쿨 힙합 음악의 작법을 그대로 유지했다.[22] 가사 또한 시대를 감안한다면[23] 운율을 통한 라임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다.[24]
다만 가사가 인물 김삿갓을 소개하는 내용이라 굉장히 뜬금 없었고, 홍서범 개인의 랩 스킬이 다소 부족한 데다 패션이나 춤 또한 힙합과 무관[25] 하게 정장 차림에 율동 정도였던지라... 더불어 홍서범은 본래 락커 출신에 힙합 음악도 '김삿갓' 일회성에 그치기에 희화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중적으로도 어필되지 못하고 실패했기에, 한국 최초의 랩 음악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한국 힙합씬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최초로 한국에 힙합을 선보인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많지만, 대중들에게 힙합적인 요소를 처음으로 각인시키고 인기를 끈 인물들은 '''서태지와 아이들[26] , 듀스, 현진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힙합적인 요소가 매우 생소하던 1990년대 초반,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힙합이란 장르를 본격적으로 대중가요에 불러와 큰 인기를 끌며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서태지의 대중적인 인기와 파급력은 현 시대 그 어떤 힙합 아티스트들과도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댄스, 랩 뮤직 장르 최초의 앨범 100만장 돌파, 수차례 지상파 가요대상 수상 같은 음악적인 업적은 물론이고 저작권법, 사전심의제도 철폐와 같은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일부 바꿔놓았으며,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1인자', '문화 대통령'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 듀스의 이현도는 당대 인기와 영향력은 서태지에 비해 약했지만 후에 록 음악으로 전향한 서태지와는 다르게 꾸준히 힙합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갔으며, 힙합 장르의 기여도에 있어선 서태지 이상의 비중을 자랑한다. 현진영 역시 힙합은 아니지만 알앤비 장르와 같은 흑인 음악으로 전성기 이후의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다만 이 셋은 뉴잭스윙적 요소도 다분했기에 댄스 뮤직을 기반으로 힙합 요소가 가미된 느낌이 강해서 완전한 정통 힙합으로 보기엔 꽤나 무리가 있었다[27] . 또한 이들은 한국 힙합 이외에도 현 시대 한국 아이돌, K-POP 댄스 뮤직 장르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이기도 하다.
위에 언급된 가수들이 초석을 깔아놓은 후인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솔리드, 지누션, DJ DOC, 드렁큰 타이거, 원타임, 김진표, 업타운 등이 출현하여 본격적으로 정통 힙합 사운드와 랩만으로 이뤄진 작업물들을 선보였으며, 음악 방송 같은 매체에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당한 대중적 인기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드렁큰 타이거나 지누션 그리고 원타임의 테디는 미국 본토에서 힙합을 가까이 접하면서 자라왔던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나라 힙합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000년대에도 이들의 뒤를 이어 리쌍, 다이나믹 듀오, 에픽하이 같은 아티스트들이 상업적, 예술적 성공의 최정점을 찍으며 더욱 더 파이를 키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오버그라운드 힙합이라는 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있다.
오버그라운드 한국 힙합씬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던 1990년대에 힙합은 20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유행하였다.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 중반즈음에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았는데, PC통신 동호회가 유행하였고 여러 가지의 동호회 모임 중 힙합 동아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Black Louder Exploders(Blex)와 Show N Prove(이하 SNP)가 있었다. 오늘날 한국 힙합 1~1.5세대들은 1990년대 말 즈음에 PC통신을 통하여 만난 사람들과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힙합을 즐기고 또는 직접했던 사람들이다.
버벌진트, P-Type, 데프콘은 나우누리 SNP 출신이고, 가리온의 MC메타는 하이텔 동호회 였던 Blex에서 시삽을 맡아 활동하였다. 메타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는 미국의 힙합 음반을 구하기가 여러 모로 굉장히 어려웠는데[28] 누군가 음반을 구하거나 TV음악전문 프로그램에서 간간히 틀어주던 힙합을 녹음하면, 모두가 모여 그것을 함께 감청하고 들은 음악에 대해 이야기도 하며 힙합을 즐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러 힙합 아티스트들이 예전에 썼던 가사에는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들었다는 표현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TV를 통해 알려지던 힙합과 미국 본토에서 어렵게 수입되던 힙합에는 언어적 차이점을 무시하고라도 상당한 모순이 있었다. 그것은 이 때까지 알려졌던 랩이라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대중의 인식이 그저 '배경음악 깔고 빨리 말하면 되는 것'에 머물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을 비롯한 1990년대 초반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스타일을 큰 발전 없이 그대로 본뜬 1세대 아이돌들을 비롯한 당대 댄스 그룹들의 비중이 컸는데, 1990년대 중반 댄스 그룹들이 했던 랩은 여전히 운율을 무시한 채 그저 말을 빨리 내뱉거나 또는 "내가 했었지, 나도 했었지"와 같은 반복적이면서 매우 초보적인 라임을 계속 사용했었다. 즉, 사람들이 힙합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긴 했는데, 랩 메이킹을 비롯한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원시적이고 심하게 무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느꼈던 PC통신 힙합동아리 회원들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논의하였고, 이들 중 어느 사람들은 힙합을 듣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힙합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한국식 랩에 대한 방법론의 필요가 대두되었다. 마스터 플랜 같은 힙합 공연 클럽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PC통신 동호회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작업물을 만들거나 공연하기 시작한 바로 이 시기이다.
이러한 모순점과 한국어로 내뱉는 랩에 대한 방법론은 당시 동호회들 사이에서 굉장한 논의거리였다. SNP와 Blex는 서로를 비판하며 충돌하고는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경쟁과 논쟁은 한국어로 뱉는 한국식 랩의 자양분이 되었다. Blex는 두 자리 라임을 주로 사용하고 반복되는 어휘를 최대한 피해 랩을 함에 있어서 운율이 주는 리드미컬함과 운율 자체의 다양성을 꾀했던 반면, SNP 멤버들의 방법론은 보다 다양해서 피타입은 랩을 드럼처럼 사용하여 비트에 맞게 억양과 발음의 강약을 조절하고 반복함으로서 리드미컬한 랩을 꾀했고, 반면 버벌진트는 다음절 라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여 말 그대로 다양하고 많은 음절로 이루어진 복잡한 운율로써 리드미컬한 랩을 꾀했다.
이러한 방법론은 2000년대 힙합플레이야와 리드머라는 힙합 전문 웹사이트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때에도 사람들의 논의의 요점은 크게 나뉘어져서 모음과 자음을 이용한 운율에 대한 의견들과 더불어, 다음절 라임에 대한 실용성과 효과와 두세 음절 라임에 대한 효과와 실용성에 대한 비교와 토의가 논의의 주제였다. 그 중에서도 버벌진트의 다음절 라임이 사운드적으로 가장 세련되고 본토 힙합의 그루비한 리듬을 가장 잘 살려줬기에, 점차 다음절 라임을 활용하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다음절 라임으로만 랩을 만들어내기가 까다로워 사람들은 이를 기반으로 단음절 ~ 두세음절 라임을 적절하게 혼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완성된 한국어 랩은 2000년대 힙합씬을 대표하는 레이블인 감성 힙합의 소울컴퍼니와 하드코어 힙합의 빅딜, 그리고 2000년대 중후반경에 믹스테이프 문화를 퍼뜨리며 혜성 같이 등장한 이센스, 사이먼 도미닉, 스윙스, 도끼, 빈지노, 산이와 같은 당시 신세대 래퍼들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보편화되었다.[29]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시작이자 연대기이며, 또한 한국 힙합의 보편적인 랩 메이킹 토대가 완성된 중요한 시기이다. 현재 한국어 랩 형태의 기반은 전부 이때 나온 거라 봐도 무방할 정도.
그 이후 201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씨잼, 키드밀리, 영비, 디보, 루피, 쿠기, 식케이, 오케이션 등의 음악처럼 가사의 어법이 완벽하지 않아도, 라임과 플로우를 위해 발음을 많이 흘려도, 한영혼용이 많아도 대중들은 이를 굳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힙합을 깊이 받아들이는데 자연스러워지고 더 다양한 장르를 대중들이 어느정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30]
불과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방송과 메이저 공연을 중심으로 한 오버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과 홍대를 비롯한 소규모 클럽의 인디 래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거나 경계하는 경향이 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메이저 무대로 진출한 아티스트들[31] 도 있었고, 오버 뮤지션들을 통해 활동하기 시작한 언더 뮤지션들[32] 이 존재하여 적잖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계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허나 2010년대 이후 방송 매체와 언론이 힙합에 포커싱을 맞추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각광받으면서, 이런 오버와 언더 힙합씬의 경계가 과거와 다르게 매우 흐릿해졌다. 더 이상 아이돌 출신 혹은 메이져 무대를 통해 데뷔한 힙합 뮤지션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많이 사라졌으며[33] , 언더 뮤지션이라고 해서 방송 출연을 무조건 터부시하거나 배척하는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또한 이들 사이에서 음악적인 콜라보가 이전보다 더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힙합 장르가 한국에 20년 이상 길게 자리잡으면서 더 이상 언더, 오버로 나누는 것이 아닌 힙합 장르에 기여하고 있는 대등한 뮤지션 동료로서 존중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최근 폭발적으로 성장한 인기와 인지도와는 별개로 아이돌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네티즌들에게 까이고 까이는 가요계 장르 중 하나다. 일반인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율의 힙합 뮤지션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군 면제 또는 의가사 전역을 할 정도의 심각한 유리멘탈 정신질환 혹은 허약한 몸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힙합 뮤지션들을 봤을 때, 일반인과 비교하면 굉장한 비율의 면제, 공익 비율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는 온갖 허세와 자신들은 개의치 않는다는거나, 까려면 까든가 투의 뻔한 레퍼토리. 여기에다 마약 문제까지 추가하면 첩첩산중(...)이다. 유명 힙합 가수들이든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든 멋있긴 커녕, 소위 '''힙찔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현상은 분명 힙합씬 내부의 원인이 없지 않으며, 특히 마약 문제와 같은 범법적인 부분들은 필히 개선해야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지누션, 타블로 또는 박재범 등 애초에 병역의 의무가 없는 외국인들은 물론 논외다. 국내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논란은 본 문서와는 벗어난다. 물론 이 문제는 꼭 힙합이란 분야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예계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힙합이라는 단어만 들려도 싸잡아 힙찔이라고 낮게 보는 표현이나, 좀 과격할 정도로 힙합 장르 자체를 쓰레기로 치부하는 경향은 여전히 음악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들어본 적 없고 편견으로만 접근하는 몇몇 무지한 대중들의 원인도 존재한다. 타 장르들과 비교했을때, 아직까진 한국에서 절대적인 역사가 다소 짧은 장르이기에, 당장의 인기와는 별개로 넓은 세대에 걸쳐서 깊게 스며들지 못한 점이 크다. 한국 힙합을 개척한, 소위 1세대라고 불리는 아티스트들의 연령대가 적게는 30대 후반, 많아봐야 40대에서 50대 초반인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계층이 폭 넓지 못하고, 시기상으로 전 세대에 걸쳐 크게 자리잡았다고 보기 힘들다. 발라드, 트로트, 록 음악, 포크 등등 타 장르의 중견급 뮤지션들이 30, 40대가 넘쳐나고 50, 60대, 심지어 70대 이상의 원로 뮤지션들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에 심히 대비될 정도로, 한국 힙합은 이들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어리고 젊은 장르이다. 이는 힙합을 소비하고 아끼는 계층이 더욱 더 두터워질 때까지 힙합 뮤지션들이 오랫동안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며 어필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해결될 문제이다. 대중들 역시 사건사고들과는 별개로 하나의 예술로서 힙합 음악 자체를 존중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의 음악계, 더 나아가서 한국 예체능계의 역사를 쭉 돌이켜보면 힙합 장르의 뮤지션들이 유독 사고를 치고 다닌게 아니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사건사고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한국 록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신중현도 마약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으며 한국에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970~90년대에 여러 뮤지션들이 마약이나 음주운전을 비롯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게 수두룩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중견 뮤지션들인 전인권, 김현식, 김태원, 이승철, 신해철, 이현우, 심지어 가왕 조용필마저도 이런 논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연예계 전체로 돌이켜보면 국민엠씨 중 한명인 신동엽도 마약 물의를 일으킨적이 있었으며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원로 연예인인 송해와 이순재도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오히려 윤리적으로 매우 깐깐해진 지금과 비교하면 '저때 저런 일이 있었어?'라고 놀랄 정도로 그 경우가 심하게 과한 적도 종종 있었다.
이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당시 사건들이 희석되거나 묻힌 게 가장 큰 원인이며 당장 힙합에 익숙치않거나 경계하는 기성세대와 일부 안티세력이 '힙합 뮤지션만이 유독 사고를 치고 다닌다'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퍼뜨리고 힙합 음악 특유의 거친 이미지가 맞물리면서 일어나게 된 오해라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힙합 뮤지션들도 다른 연예인들처럼 물의를 일으킨 부류가 있는 건 맞지만 '힙합 뮤지션들만이 유독 말썽꾸러기다'라는 말은 상기된 내용처럼 오해라는 것이다.''' 당장 요 근래만 보더라도 코미디계와 체육계에서 꾸준히 자행된 똥군기와 부조리 및 폭행 논란, 아이돌계에서 심각하게 화두가 된 여러 집단따돌림 사건들만 보더라도 '힙합하는 애들이 유독 문제아다'라는 인식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당장 정치권과 검/경찰까지 뒤흔든 연예계 초유의 사태가 힙합씬에서 비롯됐는가?'''란 화두만 던져도 답이 나온다.
'''또한, 힙합을 사회 비판을 하는 장르 또는 사회 비판이 뿌리인 장르라고 보는것은 엄연한 '착각'이다.'''[34] 말 그대로 래퍼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랩으로 할 뿐이라 주제는 자기 자랑일 수도 있고, 디스가 될 수도 있고, 감성일 수도, 스토리텔링일 수도 있다. 그저 래퍼 본인이 사회를 비판하고 싶을 때 그런 가사를 쓰는 것이다. 다른 장르들과 하등의 차이점이 없다. 보통 자기가 살아왔던 삶과 사회를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사회비판까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UMC/UW나 제리케이 같이 사회 비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래퍼들도 많다.
이 사회 비판이 한국에서 '힙합의 핵심적인 요소'로 잘못 받아들여지게 된 계기는 힙합이 한국에 첫 도입되던 당시 시대 상황이었다. 미국에서는 힙합이 나름대로 1970년대부터 클럽 음악으로 시작해서 꾸준히 성장해온 뿌리가 있는 장르지만, 한국에 들어올 때는 한국과 가깝고 교포들이 많은 1990년대 서부 힙합 위주로 갑작스레 훅 들어왔었다. 당시 NWA 등 첨예한 사회 비판적 경향은 미국에서도 커다란 화제였기에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인식했고, 당대 미국에서 화제가 되는 음악임과 동시에 한국적인 정서에도 상당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상당히 많았다. 1990년대 한국은 대중음악에도 상당히 높은 사회적 가치와 성취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로 성취하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민중가요 등 1970, 80년대부터 쭉 이어진 젊은이들의 사회비판적 경향과 더불어 공익적 가치에 대한 존중은 2000년대, 2010년대보다 훨씬 강렬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힙합은 사회 비판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알릴 수 있었다.
힙합이 너무나도 생소했던 시절 부족한 랩 스킬과 비트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가사로 써냈다면 기성세대를 비롯한 기존의 대중들이 보기에는 무슨 거지 같은 놈들이 희한한 옷과 머리로 몰려나와서 어중떠중 떠드는 타령과 다를 바가 없겠지만, 미국에서 최신 유행하고 있는 사회비판 장르의 한국화라는 위치를 획득하면 훨씬 모양이 좋아보였다. 1990년대 말은 인디 락씬(특히 조선 펑크.)도 그렇듯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사회 비판에 대한 전통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화려한 댄스와 발라드 음악의 지분도 엄청났지만, 민중가요와 포크 등으로 대변할 수 있는 감성에 대한 수요도 분명히 존재했고, 그 틈새를 새로운 사운드와 문화적 아비투스로 무장한 인디 락과 힙합이 잠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한국에서 이 장르는 힙합이라기보다는 주로 갱스터 랩으로 불렸으며, 비단 드렁큰 타이거나 업타운 등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들뿐만 아니라 반짝 나타났다 사라진 많은 그룹과 가수들이 갱스터 랩을 시도했었다. 물론 이는 H.O.T.로 대변할 수 있는 세기말 반항아적인 감성도 큰 비중을 차지한 원인도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부분은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힙합이 한국에 도입된 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넘다못해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고, 그 사이에 '''너무도 많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사회 비판과 풍자만을 유독 강조했던 한국식 갱스터 랩의 모습은 2000년대 초중반 이후 소울컴퍼니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 감성 힙합과 무브먼트로 대표되는 오버그라운드 래퍼들의 대중적인 힙합곡들에 의해 일찌감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그 이후에도 2010년대 초반 일리네어로 대표되는 본토 힙합의 머니 스웩과 본인의 생각과 가치관, 음악적 취향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들, 쇼미더머니 같은 힙합 관련 예능 매체들의 등장, 2010년대 후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처럼 철저히 계산된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한 기믹 설정으로 인기를 얻는 래퍼들의 부상등 2010년대부터 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젠 사회비판이나 풍자성이 짙은 힙합은 컨셔스 랩의 일부로 분류되어 한국 힙합계에서 하위 장르에만 머물 뿐, 더 이상 주류라고 보기는 힘들어졌다. 상기된 내용처럼 한국 힙합이 사회 비판이라는 주제와 그 주제의 이점을 확실하게 이용해서 한국에서의 정착과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사회 비판이 아직까지도 한국 힙합의 핵심적인 코어라기엔 말 그대로 세월과 시대 변화에 의해 너무도 바뀐 지 오래다.''' 이와 같은 토픽은 한국 힙합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의 본질과 존재 의의가 '어떤 특정 메시지만을 강조,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듣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라는 선후관계를 간과했기에 나온 말이며, 1990년대 한국 힙합 도입 시기엔 그런 사회 풍자가 주요 소재이자 트렌드였다면 지금은 시간이 흐르면서 소재들이 더욱 더 다양해졌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정답이다.
위에 언급된 사회 비판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서 주류씬 한정으로 공격적이거나 퇴폐적이라는 이미지가 희석되어가고 있다. 언더에서 할 말, 안할 말 다 하고 살던 MC들이 오버로 나오면서 발라드곡에 피쳐링으로 나와 부드러운 남자들이 되고 있는 것을 보고, 한국 힙합 팬덤들은 복잡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지금 힙합을 컨셉으로 하고 있지만, 데뷔 당시에는 댄스 그룹으로 시작했던 DJ DOC가 갱스터 힙합을 하는 유일한 그룹이라고 했을까... 다만 본토에서도 보다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1980, 90년대 힙합 특유의 지나친 공격 요소나 갱스터 랩 요소는 도태되어가고 있는 추세라(싱잉 랩, 멈블랩, 클라우드 랩 등), 이와 같은 모습이 한국 힙합만의 특징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것도 세계적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 옳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온라인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려는 아마추어들이 엄청 많아졌다. 타 장르에 비해 배경음악이 되는 비트를 구하기 쉬우며, 가사 쓰고 랩을 하면 돼서 비교적 접근성이 높기 때문이다. 웬만한 힙합 커뮤니티에는 자작곡 올리는 게시판이 거의 다 있다. 제대로 된 사람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프로로 전향한 사람은 정말 손에 꼽힌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산이, 빈지노, 블랙넛, 테이크원 정도가 있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본토인 미국에서도 유튜브, 사운드 클라우드와 같은 온라인 매체를 통해 녹음물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 역시나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봐야 함이 옳다.
아이돌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가요계답게 힙합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아이돌 그룹이[35] 상당수 있다. 애초에 한국에서 힙합 장르가 뿌리 내리게끔 활약한 1세대 아티스트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현진영 등이 있고, 동시에 이들은 아이돌 댄스 뮤직 장르를 개척한 아티스트들이기에 적어도 한국 힙합과 아이돌 뮤직은 태생적으로 많이 엮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20년 이상의 세월을 거치며 아이돌 뮤직과 한국 힙합이 엄청 갈라져 나간 현재에도 보이그룹, 걸그룹 상관없이 꼭 한두 명씩 껴있는 랩 담당 멤버이나, 지금은 힙합씬에서 많이 사장되었지만 발라드 랩, 랩 댄스 뮤직 장르의 존재 등등 그 흔적이 몇몇 남아있는 편이다.
현재 한국 힙합계에서는 자체적으로 음악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부족하고 기획사의 기획에 의해 많은부분이 계획되는 아이돌 그룹이 힙합을 내세운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있고, 넷상에선 아이돌과 힙합의 부정적 인식을 동시에 받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 이르러서는 힙합에 비중을 크게 두는 아이돌 그룹은 한손으로 다 꼽을 수 있을정도로 정체 내지는 도태되고 있는 장르가 됐다. 걸그룹 중에선 소나무가 비주얼, 가창력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36] 로 커리어를 시작한 탓에 가요계에서 아직 힘이 부족한 상태다. 그래도 간간히 BLACKPINK, (여자)아이들, ITZY 같이 꽤나 성공을 거두는 그룹들이 소수 나오고 있긴하다. 물론 여전히 그룹마다 래퍼 포지션 한두 명 정도는 항상 있는데, 그 중에서는 정말 랩 실력이 좋은 사람들도 어느정도 있지만, 가창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맡게 되는 사람들도 꽤 많다.
2.2. 래퍼 및 힙합 뮤지션 & 그룹
2.3. 디스전에 관해
2.3.1. 옹호
분명 디스 문화에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위의 비판론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서술했다. 우선 음악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아티스트 본인의 선택일 뿐이다. 음악에 대하여 그러한 인식이 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반드시 사회여야 할 이유는 없다. 재기발랄한 풍자나 논거가 충분한 비판을 내포한 디스전 역시 충분히 사례가 많다.
실제로 래퍼들간의 비프의 대다수는 음악적인 비판이 시발점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최근 미국 힙합씬에 일어난 비프인 드레이크 vs 믹 밀의 대결에서, 믹 밀은 드레이크가 고스트라이터를 기용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음악이 가짜 음악이라고 공격했다. 힙합 문화에서 래퍼는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존재기에, 자신이 직접 가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크는 이 고스트라이터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으나, 대신에 두 번의 대응곡을 통해 믹 밀과 자신 사이에 어마어마한 클래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력으로 증명해낸다. [37] 또한 켄드릭 라마의 'Control' 디스는 씬 전체의 음악적인 레벨을 한 단계 올려보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나온 디스였으며, 실제로 자신을 '뉴욕의 왕'이라고 칭한 켄드릭 라마의 가사에 분개한 뉴욕 출신 래퍼들과, 자신은 나름 핫하다고 생각하는데 언급되지 않은 래퍼들이 반박하는 맞디스곡을 냄으로써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작 언급되지 않은 래퍼들이 맞디스곡을 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켄드릭 라마의 디스는 언급된 래퍼들의 실력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레벨이 그것보다 훨씬 더 높다는 식의, 오히려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만한 디스였다.
가장 유명한 디스전 중 하나인 제이지와 나스의 디스전은 인신 공격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그 디스전의 과정 중에 씬의 음악적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제이지와 나스 둘 다 이득을 보게 되면서 윈윈 게임으로 평가받게 된다. 국내에서는 최근 테이크원이 '잊지 마'라는 곡으로 유명세를 탄 키스에이프를 디스한 사건이 좋은 예다. 테이크원은 키스에이프가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 중 '코홀트 외에 내가 한국에서 들어가고 싶은 크루는 없었다. 왜냐면, 한국 랩은 구리거든.'이라고 발언하자 'Come back home'이라는 곡으로 키스에이프의 발언과 동시에 음악적인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한국 래퍼들의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디스전이 일방적인 비난으로 점철된 문화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반례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수많은 반례들은 무시한 채, 그저 힙합이란 문화는 이유 없이 상대를 욕하고 비난하는 최하급 문화라는 주장은 편견으로 점철된 매도에 가깝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디스전의 부정적인 예시들이 힙합씬에서 아무런 자정 작용 없이 긍정되지 않는다. 힙합 씬이 성숙하지 못했던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현재 리미에 대한 저질스러운 디스에 대한 힙합씬의 여론은 '노지노의 랩은 디스라고도 부를 수 없는 저열한 것이었다'라는 의견이 거의 대부분이며, 리미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의견이 대다수다. 또한, 비프가 정당성을 띄기 위해서는 합당한 논거와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그러한 논거 없이 쌍욕으로만 이루어지고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디스는 씬 내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한다. 실제 최근 엘범을 발매한 래퍼 제이통은 도끼, 더 콰이엇, 산이, 버벌진트 등을 싸잡아 디스했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래핑과 논거의 빈약함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3.2. 비판
힙합 및 Rap의 디스 문화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디스 기준의 모호함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는데, 리미 고소 사건이 그렇다. 어떤 방구석 MC인 노진호가[38] 리미 디스곡을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랩 실력도 좋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는데, 그것보다 가사가 심각하게 저질이었다. 7 리미의 cool bitch 컨셉을 악용한 '붕가 너무 좋다, 아무나 하고 한다, 성상납해서 앨범 만든다, 고소할 테면 해봐라' 따위의 내용.
결국 리미는 고소했는데, 이를 두고 힙합 커뮤니티에서는 '실력이 어쨌든 랩으로 한 디스다. 힙합 문화인데 고소라니 너무하다.' vs '디스라고 할 수준이 아니다. 이건 단순한 욕설과 다를 게 뭐가 있냐.'라는 식으로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전자를 받아들이면 디스의 탈을 쓴 인격모독을 수용해야만 하고, 후자를 받아들이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기준이 나오기 힘든지라 결국 디스의 씨가 마를 수도 있다. 적절한 합의점은 '깔 만한 것만 까자' 정도. '''피타입의 '힙합은 폭력적인 잡종 문화'라는 언급'''에 한 몫 했다.
키디비도 위와 비슷한 피해를 당했는데, 블랙넛이 지나치게 노골적인 성희롱이 담긴 디스곡을 여러차례 써서 보내는 등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행동을 하였다. 그런데 대중의 반응이 상기한것처럼 “수용 안했으니 블랙넛이 한 말이 맞다고 인정한 것 아니냐?”라고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블랙넛은 고소하겠다는 키디비의 경고에도 꾸준히 디스곡을 쓰다가 고소당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데프콘이 아프리카 TV BJ 윰댕을 겨낭하여 낙태를 비판하는 노래를 쓴 적이 있는데[39][40] , 윰댕의 낙태설은 사실 한 코갤러가 만든 주작이다. 결국 데프콘은 확인되지도 않은 허위사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간혹 '디스를 해야 힙합이지, 외국 힙합은 디스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함'이라는 몰상식한 발언이 힙합 커뮤니티에서 자주 올라오는데, 본인의 적절한 가치판단이 필요하다. 외국 힙합(다른 문화)에서 아무렇지 않으면 아무거나 수용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적절히 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디스가 둘만의 갈등에서 그게 격화되어 지역간의 디스전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힙합을 즐겨 듣는다면 누구나 알 2Pac, 노토리어스 B.I.G.가 그렇게 됐는데, 이렇게 지역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나온 결과는 투팍과 비기의 죽음이었다.
이에 대해서 'UFC에서 시합을 한다고 그걸 폭력이라고 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반론이 존재하지만, UFC는 최소한 안전에 대한 룰과 쌍방의 동의와 심판이 존재한다. 하지만 힙합과 랩의 디스 문화는 쌍방의 동의한다기 보단 그냥 한쪽이 다른 대상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거기다 이러한 힙합, 랩 문화에서의 디스가 그나마 어느 정도 디스당하는 사람이 까일 만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나 이유라는 게 없는, 그냥 일방적인 이유 없는 비난에 가깝다. 물론 힙합 중에서는 현대 사회가 가진 문제점(부패, 조리, 범죄 등)을 풍자,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특정인에 대한 디스에 대해선 아무런 규제도 자정 작용도 없다는 것. UFC에 규칙이 없다면 누가 그것을 스포츠라고 볼까? 그건 길거리 싸움과 다를 바 없다. 현재 디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도 없이 막 나가는 디스와 거기에 대한 자정 작용이 없는 힙한씬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연유들로 인해 일부에서는 힙합과 랩을 '음악 문화 중에서도 가장 미개한 최하층 장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으며 '힙찔이', '랩충'이라는 멸칭도 탄생하였다.
2010년 중후반부터, Lil Uzi Vert, Travis Scott, Post Malone 등을 비롯한 힙합 아티스트들이 알앤비, 락, 팝 등을 힙합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들을 선보이며 힙합 아티스트들이 빌보드 차트를 차지하는 광경이 흔하게 되었다.
2.4. 관련 사이트
2.5. 관련 문헌
- 더 랩: 힙합의 시대 - 시어 세라노 저, 아이스-T 서문, 아트로 토레스 그림, 김봉현 역. 윌북. 2016.
- 아메리칸 힙합: 닥터드레에서 드레이크까지(전 2권) - 힙합엘이 저. 휴먼카인드북스. 2015.
2.6. 관련 문서
3.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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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한 갈래로서의 힙합은 '스트릿댄스(Street Dance, 길거리 문화를 받은 춤)'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그 하위 장르로는 팝핑, 비보잉, [42] , 크럼프, 왁킹, 락킹, 뉴스타일 힙합, 하우스, 걸스힙합 등등이 있다. 허나 보통은 그렇게 쓰이지는 않고 대부분 춤에서 '힙합'이라고 말하면 '''비보잉'''이나 '''팝핀'''으로 이해한다. 그만큼 제일 잘 알려져 있으니까. 다른 하위 장르들이 마이너해서 그렇기도 하고. 힙합 문서 참조.
이 외에도 전에는 C Walk, Dab Dance 같은 것들이 간간히 유행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틱톡이나 유튜브를 중심으로 Woo Walk 라던지(15초부터) below the knee dance 등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4. 미술
미술 분야에서의 힙합은 그래피티를 가리킨다. 그래피티는 각종 건물의 벽이나 다리의 기둥 등지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를 말한다. 이걸 주로 그리는 사람을 태거라 한다.
[1] 엄연히 따지자면 그렇지는 않다. 당장 대중음악의 역사를 대표하는 수 많은 장르들인 블루스, 재즈, 록 음악 등등이 백인과 흑인 문화가 크로스오버하면서 미국에서 새롭게 발생한 문화들이다. 당장 20세기 극초반만 보더라도 미국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여전히 클래식 오페라나 각 지역의 민요를 즐겨듣고 있었다. 오히려 미국의 블루스와 재즈가 성공하면서 역으로 수입되어 유럽 대중음악의 토대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의 장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록 음악도 이후 영국이 가세하여 부흥시킨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엄연히 독자적인 시초는 미국임이 분명하다. 클래식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되어 미국으로 퍼진 대중음악 장르는 전자음악이 유일하다.[2] 그나마 인정할 부분은 힙합의 경우, 미국이 시초임과 동시에 여전히 미국이 타 국가들을 모조리 압도할 정도로 해당 문화를 완전히 리드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록의 경우 시초는 미국이지만 재차 부흥시키고 원조인 미국보다 더 긴 세월동안 리드하며 장르들을 세분화시킨 건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의 역할이 컸다.[3] 1977년 뉴욕 일대에 정전이 일어났는데, 혼란을 틈타 빈민가의 가난한 음악가들이 악기상에 침입해 장비를 절도하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이때 풀린 DJ 박스와 턴테이블을 비롯한 장비들 덕분에 힙합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도 존재한다.[4] 엄밀히 따지면 곡 자체가 빠른 게 아니라 곡의 속도감이 빠른 것이다. BPM이 먹통 힙합이라고 칭해지는 붐뱁 같은 경우 90~80이 보통이고, 트랩 같은 경우는 50 ~ 80 이나 실제론 100~160으로 제작한다. 'No flex zone' 같은 노래는 60 정도이다! (지펑크는 붐뱁과 동일한 bpm) EDM 댄스 장르는 100이 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초창기 브레이크비트는 100 정도 된다.[5] 이를 역사적, 언어학적으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중세 시대를 기점으로 유럽권의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은 강조하고 싶은 목적어가 나중에 오는 SVO 체계(주어, 동사, 목적어 순서)의 문법으로 바뀌어 갔으며, 이를 통해 시나 가사를 작사할 때 비슷하게 들리는 목적어 부분의 여러 단어들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교체해 가면서 어미 부분에 운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영어 라임이 두드러지게 발달한 이유는 변칙적인 품사가 셀 수 없이 많은 굴절어가 대부분인 다른 유럽 계통 언어들과는 달리 단순화 과정을 거치면서 고립어가 되었고, 이러한 고립어 특유의 단순화된 품사 체계, 즉 문장에 따라 단어들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특성을 바탕으로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를 어미에 자유롭게 집어넣음으로서 이러한 운율 체계를 더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실례로 누구나 다 아는 비틀즈의 'Yesterday' 역시 가사를 살펴보면(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어미 부분에 전부 라임을 살려서 작사한 것을 알 수 있다.[6] 이렇기에 한국어를 통한 라임 작사법이 어렵다는 것이다. 유럽권의 언어와는 달리 문법 체계가 SOV(주어, 목적어, 동사)라서 유럽식 가사의 단어 교체를 통한 어미 부분 운율을 살리는 방법이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국어 랩의 라임을 작사할 경우 단순한 단어 교체만으로는 무리가 있기에 서로 다른 문장 자체의 모음을 비슷하게 들리게끔 전부 끼워맞추거나(버벌진트의 다음절 라임), 도치법처럼 문법을 뒤바꿔서 목적어 단어가 문장의 뒤로 오게끔 하는 방법도 있으며(스윙스가 데뷔 초에 펀치라인을 강조하면서 해당 작사법을 널리 퍼뜨렸다), 그것도 안 된다면 영문을 중간에 집어넣는 식으로 해야만 라임 운율이 형성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음절 하나하나를 발음하는 언어이다 보니 물 흐르듯 리듬감 있게 낭독(플로우)하는 것이 선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실로 한국 래퍼들이 십수년 넘게 랩 작사법과 가사를 뱉는 방식에 대해서 머리 싸매고 서로 신경전까지 벌여가며 고민한 것이 다 이러한 이유 때문.[7] 힙합 디제잉 개념의 원류가 되는 자메이카 Dub 계열 디제이(셀렉타)도 한 번에 한 레코드를 틀 뿐이었다.[8] 80년대에는 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라는 그룹을 이끌면서 직접 래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발매한 싱글이 '''힙합 역사상 최고의 곡으로 꼽히는 'The Message''''. 이 곡은 롤링 스톤 선정 50대 힙합 명곡 '''1위''', 500대 명곡 '''51위'''에 선정된 곡으로써 이후 퍼블릭 에너미를 필두로 한 사회비판적 힙합이 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9] 2016년 HOT 97에서 DJ의 길과 힙합의 기원 등에 대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 [10] 턴테이블리즘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턴테이블리즘이라는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링크.[11] 외국의 경우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무단 샘플링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지만, 메이저 무대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경우는 샘플링에 대한 클리어런스를 확실히 하고 있다.[12] 근데 아무리 존경의 차원에서 했다 하더라도 뮤지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쓰는 것은 표절 아닌가에 대해 한 번쯤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재창작도 완전한 오리지널 창작품을 만들면 변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남이 쓴 곡을 일반 대중이 못 알아차릴 정도로 조금만 편곡해서 곡을 만들어 자신의 곡이라고 떠들고 돈 버는 뮤지션의 태도가 과연 올바른 창작 태도인지 생각해 봐야 할 듯. 애초에 창작은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 유명한 비틀즈의 존 레논도 척 베리를 존경해서 비틀즈 앨범에 수록된 지기 노래('Come Together')에서 허락 안 받고 척 베리 노래 가사 '''한 줄''' 넣었다가 소송 걸려서 돈 물어줬다.[13] 하지만 비틀즈의 예는 잘못된 것이다. 60년대의 기준과 지금은 전혀 다르다. 힙합이 팝(대중음악)의 중심이 된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샘플링 문화는 저런 경직된 태도로는 보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샘플링 발명 이전 시장에서의 기준을 지금 들이미는 건 의미가 없다. 지금은 신인의 무단 샘플링은 뜰 때까지는 묵인해주는 분위기고, 대형 스타는 샘플 클리어만 하는 전문인을 고용한다.[14] 유행이 지났다거나, 실제 원곡의 아티스트가 정말로 고인이 되었다거나.[15] 이 시대에는 힙합이 아닌 갱스터 랩으로 따로 분류되어 있었고, 이 이유 때문에 뉴욕 쪽의 힙합 선구자들, 추종자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힙합은 지옥 같은 빈민가의 삶 속에서 희망을 찾자는 일종의 자생적 운동이기도 했기 때문에.[16] 사실 이건 조심해야 되는 것이 맞다. 외국 것이 아무거나 좋다고 다 받아들이다간 보편적 가치를 무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17] 시상식에서 포스트 말론이 힙합 부문에서 수상하자 포스트 말론이 왜 힙합이냐며 논란이 되긴 했다. 아직까지 정체성 논란이 약해졌을 뿐. 완전히 사그라들진 않았다.[18] 전체 미국 흑인의 50% 정도가 미국 남부에 거주하고 있다.[19] 물론 록 음악도 1970~80년대 대학가요제와 그룹사운드로 대표되는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1990년대까지는 한국 가요계에서 비중이 제법 있었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인디 록 뮤지션들이 지상파에도 출연하는 등 입지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카우치 사건으로 인한 여파와 대중적인 트렌드에 밀리면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이 공백을 힙합이 채웠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한국이 유독 록 음악이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일찌감치 사그라들긴 했지만, 현재 세계적으로도(심지어 록의 중심지였던 미국과 영국마저도) 대중음악계에서 록 음악의 비중이 흑인음악에 밀려 많이 낮아지긴 했다.[20] 이는 시대적 환경의 영향도 적잖게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록 음악의 최전성기나 다름없었던 1960년대~1980년대까지 당시 한국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이었으며, 지속적인 정부의 탄압과 규제(두발 및 복장 규제, 활동명 규제, 노래 가사 검열, 금지곡과 방송출연정지 등의 징계, 건전가요 강제 수록 등), 그로 인해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경직되었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 더해서 경제적으로도 매우 열악했기에 알맞은 시기에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그라든 점이 크다. 전 세계적으로 힙합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한국에 힙합이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고 경제적으로도 나름 윤택해진 상황이어서, 대중들에게 큰 리스크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게 된 차이점도 있다.[21] 이미 리더 타이거JK가 1995년 미국에서 앨범을 제작해 한국에 소개했지만 빨리 묻혀졌다.[22] 슈거힐갱의 래퍼스 딜라잇이나 기타 Run-D.M.C. 이전 올드스쿨 힙합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본토 힙합조차도 다양한 형태의 라임이 그닥 많지 않던 시절이다. 라임의 적극적인 활용도를 높이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 라킴 같은 뮤지션들의 등장 이후이다.[23] 한국어 라임이 가능해진 건 2000년대 초중반 피타입과 버벌진트 이후이다.[24] 그 전에 김수철(1988년 칠수와 만수 OST)이 1989년 홍서범 1집보다 먼저 랩이 짧게 들어간 음악을 발표한 적은 있다. # 또한, 한국 메이저 음악계에서 최초로 랩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앨범을 낸 것은 김진표다.[25] 다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패션, 문화, 제스쳐 등등의 문화의 상당수는 미국 힙합계의 레전드 Run-D.M.C.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 전엔 디스코나 훵크 밴드 음악 베이스에 패션도 디스코 음악에 춤추던 복장 그대로였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티아라의 '롤리폴리' 복장이 80년대 초반 힙합 뮤지션들의 패션이었던 것이다.[26] 다만, 서태지의 음악 성향은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한다.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2집 활동부터 록적인 요소를 사운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해체 이후 솔로 활동부터는 록 음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서태지는 2010년대 중후반이 돼서야 한국힙합에서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록 힙합을 '''199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27] 물론 이들이 정통 힙합을 완전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Come Back Home', 현진영은 '너는 왜 (현진영 Go 진영 Go)', 듀스는 '이제' 등 이들 역시 정통 힙합을 기반으로 한 노래를 하곤 했다.[28] 생각해보라. 그들은 음반 사장이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음악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1997년 미국에 'mp3.com'이란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가 생겼고 와레즈 사이트들도 애용했으나, 1999년 이전까진 인터넷이 ADSL 방식이 아니라 전화접속 네트워킹이라 음악 하나 다운받는 데 거액의 전화세를 감당해야 했다.[29] 특히 이 중에서도 이센스가 2008년에 발매한 'New blood, Rapper Vol.1'은 본격적으로 믹스테잎 문화를 힙합계에 보편화시켰을 정도로 씬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당장 타 아티스트들의 수준급 정규 앨범들을 퀄리티로 압도할 정도의 음악성을 자랑하며, 발매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힙합계 역사상 최고의 믹스테잎으로 인정받는다.[30] 다만 이에 대해선 맞춤법과 국문법에 대한 관심의 저하 때문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20세기에는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어느정도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졌다면, 21세기 들어 다원주의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 또한 문화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이들이 주도하는 문화가 인기를 누리고 급격하게 재생산되며 문화를 소비하는 풀 자체가 저변으로 확대되면서 일종의 반지성주의적인 문화가 기류를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쉽게 말해 리스너들이 관용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새로 성장해 다수를 차지하는 래퍼나 리스너가 단순히 문법을 모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고, 거기에 대해 지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31] 대표적으로 2000년대 오버 힙합씬을 대표하던 리쌍,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가 있다. 리쌍의 길, 개리는 마스터플랜에서 언더 생활을 경험한 허니패밀리 출신이며, 다듀의 개코와 최자, 에픽하이의 타블로, 미쓰라 진도 언더 출신 래퍼로 먼저 데뷔했다.[32] 대표적으로 Dok2, 팔로알토가 있다. 도끼는 다듀 피처링을 통해 데뷔했으며, 팔로알토는 데뷔는 아니지만 타이거JK 소속사에서 활동하며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애초에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이 형성된 것도 90년대에 서태지, 듀스와 같은 메이저 스타들의 음악을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들으며 영향받은 젊은이들이 인터넷이나 클럽 등지에 모여 음악을 시작하면서 생긴 것이다. 언더 힙합씬의 1세대이자 거물인 버벌진트의 노래를 보면 선구자인 서태지와 듀스 이현도를 존경하는 의미의 가사들도 상당수가 존재한다.[33] 물론 여전히 스스로 음악 컨텐츠를 창작하지 못하고 개인의 역량자체가 부족하거나 실력을 발휘하는것이 제한돼있는 일반적인 랩 파트 담당 아이돌에 대해선 무관심, 냉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힙합을 떠나서 전 장르를 통틀어서도 주체적인 뮤지션으로서의 행보와 업적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존중하는 지극히 당연한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인 랩 파트 담당 아이돌처럼 음악성이 부족한 경우, 평가가 떨어지는 것도 어느정도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34] 이 글이 바로 그 근거다. 그렇게 길지도 않고, 글의 아랫부분에 요약도 있으니 힙합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읽어보자.[35] 빅뱅, 블락비, 방탄소년단, iKON 등. 이들은 이미 큰 성공을 거둔 입장이고, 이들을 롤모델 삼아 힙합을 차용한 케이팝 그룹이 셀 수 없이 많다.[36] 엄밀히 말하자면 걸스힙합.[37] 니키 미나즈와 드레이크는 같은 영 머니 레코즈 소속이다. 웃긴 건 믹 밀은 공식 인정만 안 했다 뿐이지 니키 미나즈의 애인으로 기정사실화 된 상태라... 안습.[38] 블랙넛과 함께 곡을 낸 적도 있는 MC이다.[39] 대놓고 가사 내에서 윰댕이라고 직접적으로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인기 많은 유명 아프리카 TV 여BJ, 낙태 등 누가 봐도 윰댕을 겨냥한 듯한 가사였다. 거기다 그 노래가 나온 시기도 딱 윰댕 낙태설로 논란이 되던 시기라 누가 봐도 빼박.[40] 다만 데프콘 본인은 그 가사가 특정 BJ를 겨냥한 가사라는 의견에는 부정했다. 단순한 스토리텔링 랩이라는 것. 아마 본인은 그냥 그런 루머들에서 영감을 받아 가상인물을 만들었을 뿐인데 대중들이 특정인물로 받아들인 듯. 사실 곡 첫머리에서도 "이것은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스토리텔링임을 암시하는 대사를 넣었다. 나중에 데프콘은 <중2병(화가난 빵셔틀)>이라는 곡에서 코갤러들과 해당 곡이 여성혐오적 의도가 있다고 지적하는 기자들을 함께 씹었다.[41] 남부 힙합에서 출발했으나 EDM, RnB씬에서 많이 수용한 장르.[42] 해외에서는 콜라보를 자주 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이며, 몇몇 비보이들이 힙합의 한 종류가 아니겠냐는 사람이 많긴 한데, 대부분의 파쿠르 트레이서들은 차라리 트릭킹을 힙합의 한 종류로 연결하라고 얘기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