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기자)

 

'''주필'''
김대중

'''류근일'''

강천석
柳根一
1938년 1월 30일 (86세)
1. 개요
2. 생애
2.1. 언론인 경력 초기의 진보 성향
2.2. 보수 언론인으로의 전향 및 조선일보 우경화의 주역
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조선일보의 전 주필이다. 우익성향의 인물. 정년퇴직하고 주필 자리를 내려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요새도 간간히 칼럼을 쓴다.

2. 생애



2.1. 언론인 경력 초기의 진보 성향


1938년 1월 30일 일제 치하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류응호(柳應浩)는 도쿄대학을 나온 인텔리 출신으로, 당시 경성제대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어학연구회라는 이름의 한글학회에 참여하여 학술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해방 후에는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제2대 총선에 좌파계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치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로당 소속이라고 하여 체포되었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서울대자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가 이후 전선이 밀리는 와중에 재교육을 이유로 월북했다. 이 후에 모를 이유로 숙청되었다.
남에 남겨진 류근일은 1956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 신진회라는 이름의 독서회를 조직했다가 일을 하나 터뜨리는데, 교내 동인지에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자"든가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만들자"를 운운하였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월북자였으니 사건이 크다. 무죄판결이 나면서 처벌은 면했으나, 이 일로 이름을 크게 떨친 (?) 류근일은 이후 공군에 입대하였다가 4.19 혁명과 함께 민통학련 대의원총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였는데, 5.16 군사정변과 함께 이 죄로 혁명재판소에 넘겨져 징역형 15년을 받았다가 1968년 출소, 이후 중앙일보 기자로 취직하여 언론계에 발을 내딛고 곧 논설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 류근일은 유신체제와 척을 지면서도 과거의 급진적인 모습을 많이 버렸는데, 감옥 생활 도중에 딱히 회심이나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은 없고, 류근일 본인은 오히려 "나는 원래 극좌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 것" 정도로 얘기하고 있다. 여하여튼 박정희와 척을 진 류근일은 이후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전두환 정권과도 썩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더이상 필화에 엮이는 일은 없었다. 1981년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갔다.

2.2. 보수 언론인으로의 전향 및 조선일보 우경화의 주역


민주화 이후로도 노태우 정부때까지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는 일이 폭로되기도 했지만, 노태우 정부 시기 이후로는 이전의 진보적이었던 시절과는 다르게 논조가 확연히 우경화되어갔다.
조선일보에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논설위원실장을 맡았고, 승진해서 1996년부터 2002년까지는 논설주간을 맡았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주필을 맡고 정년퇴직했다. 후임 주필인 강천석이 논설주간에서 승진하기 전까지 주필은 공석이었다.
이후 뉴라이트 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뉴데일리의 고문도 맡는 등 완전히 극우화 되었다. 이후로도 조선일보에 사설을 연재하면서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등 논조면에서도 극우적인 색체를 띄고있다. 그나마 경향신문에서 논조의 다양화를 꾀한다고 류근일을 섭외했던 일은 아이러니할까나.

3. 여담


  • 동시대에 조선일보의 우경화를 이끈 김대중과는 사이가 나빴다. 류근일은 김대중을 "그 놈은 못 된 놈이다."라고 혹평했다.
  • 전임주필인 김대중이 순수 조선일보 출신이었지만 이 사람은 외부인사 출신으로 주필을 맡은 케이스이다.
  • 탈모인인데, 엄청나게 어색하고 티가 많이 나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