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기자)

 

'''주필'''
이규태

'''김대중'''

류근일
<colbgcolor=#d7171f> '''이름'''
김대중 (金大中)
'''본관'''
광산 김씨[1]
'''출생'''
1939년 9월 1일 (85세)
경기도 경성부 장교정[2]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현직'''
칼럼니스트
'''경력'''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주필
조선일보 부사장대우 이사
조선일보 고문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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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자.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주필, 고문을 역임하였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오랫동안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단한 영항력을 보유했던 언론인이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조사부터는 손석희 앵커에게 1위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는데, 당시 이 일은 언론계에서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당시까지 조선일보와 김대중 전 주필의 권력과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는 방증인 셈. 201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종이신문 업계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조선일보의 매체 영향력 또한 과거에 비해 상당히 축소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김대중 전 주필의 존재감 또한 급격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의 순위 및 지목률이 크게 낮아졌으며, 급기야 2020년 조사에서는 김대중 전 주필의 이름이 아예 순위권 리스트에서도 사라졌다.[3]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름이 한자까지(金大中) 똑같아서''' 언론에 다루어질 때 항상 '''조선일보 김대중''', 혹은 '''김대중 주필'''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나온다. 그러나 정치 성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정반대인, 강경한 보수 우익 반공주의.

2. 생애


1939년 9월 1일에 경성부 장교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꽤나 잘 나가던 일본 유학파 출신의 사업가였다. 그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 별 어려움 없이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몇 년 뒤에 그의 집안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10대 중반부터는 생활고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10회)에 진학했으니 공부는 상당히 잘 했던 셈.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딱히 사법고시에 응시할 맘이 없었고, 미술, 음악 등 예체능 쪽에 관심이 더 많아, 고시 공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서울법대생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ROTC에 1기생으로 지원하여 장교로 임관하였고[4], 제2군단 사령부 비서실에서 영어 통역장교로 군 생활을 하였다.
1965년, 조선일보가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에 응시해 제8기 공채 기자로 발탁되었다. 당시 리영희 외신부장이 지휘하던 외신부에 배치되었고, 리영희 아래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5] 당시 그를 지도했던 리영희는, "김대중이 가끔 토론을 할 때 뜻을 굽히지 않아 곤란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편협하고[6] 반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의 평에 따르면 '유신이 왜 잘못된 것인지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눈에는 이 젊은이가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1967년 8월, 충남 청양군에 위치한 구봉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던 양창선 씨 매몰사건 보도로 유명기자로 떠올랐다. 이후, 정치부 기자로 발탁되었고, 조선일보 공채 8기 라인의 선두로 쑥쑥 커갔다. 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1980년에는, 공채 7기였던 허문도를 밀어내고 사회부장 자리에 올라 앉았다. 이 일 때문에 허문도는 김대중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광주시를 ''''폭도가 점령한 무정부 도시''''로 보도하며사진 참조 전두환 신군부의 편을 드는 기사를 쓰는 등 신군부에 노골적으로 영합하면서, 나약하면서도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던 데 힘입어, 5공 시절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을 거쳐 조선일보의 야전사령관직인 편집국장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였다.[7] 하지만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 딱히 큰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결국 그를 아끼던 조선일보 가문영국 유학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건너가 1년 동안 연수를 마치고 왔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대선후보 토론회 패널로 참여하였다. 이때 용감하게 총대 메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미 정계은퇴를 약속하지 않았느냐. 말바꾸기하지 마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정계은퇴를 거듭 다짐한 편지가 다 있지 않느냐. 거짓말하지 마라."는 핵펀치를 날린 것.[8] 이 한방으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은 단박에 '거짓말쟁이'로 이미지메이킹이 돼버렸고, 반면에 언론인 김대중은 보수진영에서 '용자', '사이다' 언론인으로 떠올랐다. 이때 두 명의 김대중이 벌인 공방은 TV 화면에 계속적으로 방영되었으며, 이로써 지지율이 상승하던 정치인 김대중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9] 여하튼 그 덕택에 김대중이 1988년에 논설주간으로 승진했으며, 다시 1년만에 다시 편집국장으로 승진했고, 1년이 지난 1990년, 드디어 조선일보 주필 직에 취임하게 된다.
김대중은 주필이 되고서 조선일보의 전권을 장악, 조선일보 기사 전체의 논조를 설정할 권한을 가졌는데, 이것만 봐도 조선일보 가문에게 얼마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일보 주필로 있던 시절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200만부를 돌파했고, 90년대 종이신문 시장의 최전성기를 영위하면서 '''조선일보는 매체 영향력으로나 매출액으로나 황금기를 누렸다'''. 비록 당시에 동아일보중앙일보가 조선일보에 버금가는 영향을 보였기 때문에 대놓고 독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면에서 중앙일보와 결을 같이하고, 2000년대부터는 동아일보도 이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업계 선두주자인 조선일보 주필로서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가구별 신문 구독률 70%의 시대에, 그 신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힘이 센 조선일보 논조의 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김대중 주필이라는 언론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당연히 엄청났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89년부터 무려 13년 동안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직을 담당하다가, 2002년에 드디어 주필직에서 물러났다. 2004년 3월에는 조선일보 부사장대우 이사로 복귀하였고, 11월에는 정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그 후로는 고문 직함을 달고 꾸준히 지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현재 조선일보의 주식 0.5%를 소유하고 있다.
2020년 3월 31일부로 조선일보 고문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로도 김대중 칼럼은 계속 지면에 연재하고 있다.

3. 논란


  •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광주시'폭도가 점령한 무정부 도시'로 보도하며사진 참조 신군부의 편을 드는 기사를 썼다.[10] 광주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을 '폭도'로 평가한 것이야 자기 개인적 견해라든가 아니면 신군부의 압박에 순응한 결과물이라고 쳐도, 당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기사를 쓴 것은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한 마디로 광주를 무법천지로 묘사하며 계엄군의 신속한 진압을 간절히 요청한 것. 당연히 이는 그의 언론인 생활에 치명적인 오점 중 하나로 남았다. 참고로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던 김대중 기자가 군부에 의해 철저히 봉쇄된 광주에 가서 취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두환 신군부가 각 신문사 사회부장들에게 100만 원촌지를 쥐어 주고 5월 24일에 직접 광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신문사 사회부장 월급이 45만 원 정도였던 때다. 물론 신군부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라는 주문이었다.[11] 훗날, 그는 이 일에 대해서 1997년에 <5.18 특파원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해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였지만, 이런 사실은 대중에게 그닥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그 사과라는 것이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검열 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기사)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승강이 끝에 나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표현으로 고쳐줬다" 정도였지만 말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긴 시간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17년이 지나서야 겨우 꺼낸 허술한 변명들이 진짜 진심어린 사과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김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다룬 월스트리트 저널 영문 기사를 조작하여 번역한 가짜 뉴스를 써서 조선일보 지면에 발행한 전적도 있다. 이는 당시 한창 물오르던 딴지일보에 의해 발각되었고, 온라인 기사로 발행되어 엄청난 히트를 쳤다. 이 딴지일보 기사는 초창기 인터넷 세상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심지어 현재까지도 언론 비평 관련 저작물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12] 대부분의 고유명사를 비틀었던 초창기 딴지일보답게 이 인물의 이름도 비틀었는데 김대중과 구분하기 위해서 이쪽은 김대충으로 비틀어썼다.
  • 그는 조선일보 주필이 되기 전부터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혹은 가장 악명이 높은 언론인이였고, 또한 동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권력을 자기가 지목한 타겟의 '살인'에 꺼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인물들은 족족 파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료 류근일은 김대중 주필에 대해 "그 놈? 못 됐지. 아주 나쁜 놈이야."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조선일보 주필 시절 얼마나 편향되게 펜대를 휘둘렀는지는 간단한 통계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2000년에 기고한 26건의 ‘김대중 칼럼’ 가운데 15건이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 새천년민주당을 비난한 것이었는데, 반면에 야당 총재인 이회창을 비판한 칼럼은 단 1건도 없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약간의 친분은 있었다고 한다.
  • 2001년에는 조선일보가 차명계좌를 통해 탈세를 했다는 혐의에 연루되어 검찰에 소환되었으나, 여기에 불응하였다.
  • 2019년 1월 1일, 본인의 조선일보 칼럼에서 '대한민국은 '평화'를 좇다가 '통일연방'(북한 철도상의 발언) 쳐다보는 꼴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관계 자체에 오류가 있는 칼럼이었다. 칼럼이 게재되기 며칠 전인 2018년 12월 26일, 남북 철도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 참가한 북한의 김윤혁 철도상이 기념사에서 "남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려서는 어느 때 가서도 민족의 뜨거운 통일열망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발언했던 것을 당시 공동 취재단의 담당 기자가 잘못 알아듣고, 통일연방으로 받아쓰기 한 것이 그대로 기사로 나갔다가, 기념사 영상이 공개된 뒤 해당 발언이 확인되면서 잘못 나갔던 기사들이 죄다 정정되었던 헤프닝이 있었는데,[13] 김대중 전 주필은 정정보도가 나간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해당 사실에 대해 최소한의 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채, 사실 관계에 심대한 오류가 있는 글을 그대로 기고했던 것. 이 때문에 김 전 주필의 기자로서의 기초적 취재 능력 자체의 문제가 오랜만에 드러났다거나,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김대중 칼럼'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뽀록났다(...)는 등의 뒷말이 언론계에 돌기도 했다.
  • 2020년 5월 26일자 칼럼에서는 통계상의 오류와 사전투표지 발견 등의 주장을 인용하며 극우 유튜브와 극우층 일각에서 제기된 부정선거 음모론에 힘을 싣었다. 그러나 이 항목이 항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김대중 주필이 칼럼에서 제기한 의혹 중 대다수는 이미 반박된 부분이다. 게다가 김 주필은 실질적인 재검표 절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거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대법원에 재검표를 요청하면 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민경욱 의원은 대법원이 아닌 인천지방법원에 증거보전신청만 했을 뿐, 이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4. 여담


  • 90년대 말, 적극적인 언론 비평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에 김대중 당시 주필에 대한 강력한 실명 비판을 앞장서서 수행했던 사람이 바로 강준만 교수이다. 강준만이 김대중을 평가하던 시각은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난다.
> 유감스럽게도 김 주필님은 그간 자신의 위상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그에 따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겠죠. 이해합니다. 당신이 세상을 우습게 볼만 합니다. 저는 정말 이해합니다. 그간 아무도 당신을, 조선일보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좌파 이론이나 갖고 떠들 뿐 조선일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선일보와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통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 지경이니 김 주필님의 간이 크게 부어 있다고 해도 전 놀라지 않을 겁니다. - 강준만, 월간 <인물과 사상>, 1998년 12월 호
  •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직접 김대중을 가르쳤던 리영희는 김대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다.
> "그들(수습기자 6명)은 머리가 좋았던 만큼, 외신부에 들어와서 접하게 되는 세계정세와 인류사적인 변혁과 사건들에 대응해 이해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어요. 그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고 세뇌했던 병적인 반공주의 사상도 나의 시각교정·의식수정 노력에 의해서 놀랄 만큼 교정되어 곧 정상적 가치판단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그 가운데 김대중 군은 사사건건 반공주의만 고집하는 거예요. 베트남 전쟁, 중국 혁명[14], 제3세계 인민들의 진보적 운동에서 도도한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김대중 군만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그 낡은 비이성적인 극우반공주의자라는 의식의 틀을 깨질 못하더라고. 나는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어. 그런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것으로 믿었던 기자들은 1974년에 일어난 언론자유투쟁 때 앞장섰다가 다 쫓겨났어. 반대로 도저히 구제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그 김대중 기자만은 그대로 남아서 논설주간이 되고, 주필이 되고, 한국 여론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조선일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더군." - 리영희, 임헌영, <대화>, 2005
  •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90년대부터 2004년까지 오랫동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5년 조사에서부터 손석희에게 1위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는데, 앞서 서술된 대로 당시 이 일은 언론계에서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후로도 약 10여년 간은 2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2017년 조사에서는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에게 2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또한 2018년 조사에서는 유시민 작가에게도 밀려 4위로 내려 앉았고, 지목률도 2.0%에 불과한 수치가 나와서, 1위인 손석희 사장의 72.1%와는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고, 2위인 김어준 총수의 6.4%, 3위인 유시민 작가의 3.4%와도 차이가 많이 나는 수준이 되었다. 심지어 2019년 조사에서는 한해 전보다 더 낮아진 1.7%의 지목도가 나와서 5위로 내려 앉았고, 급기야 2020년 조사에서는 해당 조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아예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여러모로 종이신문 몰락의 한 단면이라는 언론계의 평가가 많다.
  • 그의 극단적인 정치적 성향 및 지향과는 별개로, 박근혜 탄핵 사건 이후에는 친박 극우 진영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이다. 김대중 전 주필과 조선일보가 당시 탄핵에 상당히 동조했다는 것이 그 이유(...) 한편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 김대중 전 주필이 정작 자신을 그렇게 욕하던 그 친박 극우 진영에서 열심히 주장하던 부정선거 음모론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오자, 또 반대로 해당 음모론을 비판하는 보수 인사들이 김 전 주필을 비토하는 일이 많아졌다. 여러모로 과거 잘 나가던 시절에 비해 보수 진영 내에서의 비토가 이리저리 많아진 분위기.
  • 지금도 조선일보에 '김대중 칼럼'을 고정적으로 기고하는데, 그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댓글로 하도 욕을 해서[15] 조선일보 사이트에서 유일하게 이 사람의 칼럼란에만 댓글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1] 광산 김씨 '중(中)'자 항렬이다.[2]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3] 지명도가 1% 미만이 나왔는지 10위권 리스트에도 들지 못했다.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 결과 리스트에서 김대중 전 주필의 이름이 없어진 것.[4] 서울대 학군단은 국내에 최초로 창설된 학군단이며 한 때 준장이 학군단장을 맡았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5] 훗날 리영희는 김대중 논설위원에 대하여 "그는 내가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이자 최악의 상처다."라고 평하였다.[6] 중국의 대하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고려인 천건남의 이미지와 흡사하기도 하다. 물론 의천도룡기의 집필 시기인 1961년과 김대중의 조선일보 입사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에, 선배 언론인으로 실력이 쟁쟁했던 선우휘리영희 쪽이 어느 정도 캐릭터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김대중 주필이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기 때문에 인상은 이쪽이 더 깊게 박히는 것이다.[7]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상당수의 기자들이 이런 식으로 영합하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반면 이에 굴하지 않고 싸운 언론인들도 소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언론통폐합, 보도지침땡전뉴스 참조.[8] 김대중이 사형선고 사건 당시 자기를 죽이려 한 전두환에게서 빠져 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썼던 거짓 편지를 갖고서 전후 맥락 다 삭제한 채 계속 '약속해놓고 안 지켰다' '다시는 정치 안 한다 해놓고 거짓말한다'고 몰아세웠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훗날 1986년 11월에, 직선제 개헌이 된다면 '''대통령 불출마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얘기를 뒤집고 '''1년 뒤 대선에 출마'''했다. 한참 지난 10년전 일도 아니고 바로 작년에 불출마를 선언한 사람이 대선 토론회에 나와있으니 충분히 토론회에서 할수 있는 질문이었다.[9] 단, 지지율이 상승 추세였다 하더라도 당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보다는 김영삼 대통령이 더 지지율도 높았고, 여론조사에서도 김대중, 노태우 후보를 서울에서 여유있게 이기고 있음이 CIA보고서에 나와 있다.[10] 반면 현재 김대중과 함께 대표적인 극우파 언론인으로 분류되는 조갑제는 당시 반쯤 목숨 걸고 직접 광주에 현장취재를 다녀왔고, 제대로 된 르포기사를 썼다. 이전 서술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조선일보맨이라 할 만하다'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조갑제는 적어도 1980년대 당시까지는 반정부 성향국제신문 기자였다.[11] 출처 : 윤덕한,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12] 출처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13] 이 때문에 그 다음날인 27일까지 여러 언론에서 해당 기사를 정정하는 관련 보도를 냈으며, 또한 JTBC 뉴스룸도 팩트체크 코너에서 해당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14] 단, 이는 리영희의 오류였다. 문화대혁명을 옹호한 그의 전력은 평생의 흑역사로 남았고, 그 스스로도 한정된 정보로 인한 오류였다고 시인하고 사과한 적이 있다.[15]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입 후 오랫동안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유저들은 당연히 보수 정당과의 일체감이 강력한 충성도 높은 강성 보수 지지층인데, 이 유저들이 김대중 전 주필이 가끔 보수 정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쓸 때마다 그를 비난하는 댓글을 꽤나 달곤 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