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1. 개요
'''월북'''(越北)이란 남한 사람이 자발적 의지로 북한에 영주를 목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월북과 구별되는 개념들로는 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입북(入北), 자유 의지가 아닌 납북(拉北), 북한에 잠깐 갔다 오는 방북(訪北) 등이 있다. 한국에선 당연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지만, 북한에서는 '의거입북'이라는 말로 미화된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이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정치탄압으로부터의 도피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월북하는 사람이 조금 있었지만, 북한이 주체사상을 내건 전제군주제 국가가 된 1990년대부터는 정치적 탄압을 이유로 월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북한이 경제가 매우 나빠진 1990년대 이후로는 월북하러 가도 그냥 남한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다. 간혹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받기 싫어서 월북하는 등 북한에서 받아봐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가면 특히 그렇다.
2. 상세
월북은 북한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이가 현저하게 벌어진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단독정부 수립 이전과 6.25 전쟁 도중 월북한 좌익세력의 경우에는 대개 납득이 가는 행위였다.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었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한 미군정의 탄압, 분단 체제가 고착화된 후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으로부터 살아남은 좌익은 월북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북한은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 여러 파벌이 존재한 연립정부의 형태로 그럭저럭 권력의 균형이 잡혀 있었기에 반공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이승만 정부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북한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6.25 전쟁 초기에 북한에게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이나 기타 지역에 고립된 인사들이 '이제 대한민국은 끝났구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월북하거나 이를 이용해서 북한이 '어차피 전쟁은 우리가 이길 텐데 이참에 우리한테 협력하시오'라는 식으로 회유한 경우도 많다. 이 시기에 월북한 사람들로는 문예봉, 이극로, 홍명희 등이 있다.
월북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월북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로 1948년 남북협상 때로 대표적인 인물로 이극로와 홍명희가 있다. 이들은 원래 민족주의자들이었지만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흑역사다.
월북자들 중 정치인은 상당수가 뒤끝이 좋지 못했다. 박헌영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월북한 남조선로동당 출신들을 정적으로 취급했다.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열심히 해보면 알겠지만 북한 정치판은 창립 이후에 숙청을 거듭하여 김일성파(갑산파 중 강경파와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파 두 계파 모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비단 한국사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 전반을 공부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지만, 스탈린부터 마오쩌둥까지 소위 현실사회주의권의 지도자들은 '''막상 필요하면 트루먼, 닉슨 같은 양반들이랑 악수하고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 따위 서방에 대한 립서비스는 잘만 하면서도 자기들 손이 닿는 '''비 코민테른, 트로츠키 주의자, 비 마오쩌둥 계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같은 '''자기 말 안 들을 것 같은 다른 좌파들'''을 숙청하는데 훨씬 더 열을 올렸다.
북한 정권에서 남로당파와 갑산파 숙청 같은 좌익 내 팀킬 작업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무엇을 했으며, 얼마나 열성적인 좌익이었는지에 상관없이 김원봉 같이 노선이 조금이라도 달랐거나 조금이라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려고 했던 사상적 월북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경우가 대다수다. 다만, 이러한 경우와 별 상관이 없는 학술인, 예술인은 양극으로 갈리는데, 본업에 종사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거나 노동 지역으로 배정받아 활동이 완전히 끊긴 채 심한 경우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일부 월북한 민족주의계열 인사들 가운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홍명희가 있다. 해방 직후 좌익으로 널리 알려진 문인들이 월북 이후 대부분 숙청당한 데 반해, 홍명희는 종신토록 고위직을 지내며 북한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명망을 누렸다.
또한, 몇몇 납북자들이 월북자로 오해받아서 문제가 되었다. 특히 북한 쪽에서 납치해 놓고 "공화국을 동경하여 '''자진 월북하였다'''"라고 대외 선전을 하고, 여기에 한국 정부도 동조 내지는 착각을 해서 빨갱이 취급을 받은 경우가 있다. 실제로 60~80년대에는 몇몇 납북 당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간첩으로 몰리거나 심지어 공안 사건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문단계의 정지용 시인은 6.25 전쟁 중 실종되어[5] 월북인지 납북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월북 작가로 낙인찍혀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6] 이전까지는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불온 시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7]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엄항섭,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등도 '''납북(납치되어 북한에 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 시대 때 자발적으로 월북했으며 북한 간첩으로 대대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버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거주하던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피해를 봤다. 안재홍의 아들인 안정용은 혁신계열 정치 활동을 했으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생활하는데 있어서 매우 곤궁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 전쟁 후 반공 성향이 강해진 국민들의 심적 안정과 정권의 정통성 홍보를 위해 자진 월북으로 결론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진 월북하려던 사람을 납북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윤태식이 그 예이다.
지금은 종북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선전해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고생해서 북한으로 넘어가도 '''적대계층''' 취급을 받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굳이 지옥이 뭔지 남은 생을 살면서 절실하게 체험하고 싶다면 또 모를까. 현재 시점의 상황으로 봐선 거의 자살과 비슷한 선택이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재수 없으면 고통스럽게 아주 천천히 죽게 되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탈북보다는 월북이 훨씬 쉽다.
공산주의가 좋고 대한민국의 체제가 싫은 사람도 차라리 대놓고 이적질만 안 하면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하고 공안 탄압도 적어도 법적인 절차가 필요한 한국에서 소수이지만 분명히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활동의 자유가 있는 좌파 정당이나 시민 단체에서 하는게 훨씬 더 의미가 있다. 삼대세습에 1960년전 자기 증조부 세대가 한 일로 핵심 계층이다 적성 계층이다 하며 완전한 새로운 봉건적 신정국가가 되어 자기 입으로도 이제 공산주의를 포기한 북한에 들어가는 건 골통에 나사가 여러개 풀린 사람이 아니고는 생각 할 의미도 없는 짓이다.
3. 실제 사례
6.25 전쟁 종결 전까지야 이래저래 사정이 복잡하니 차치하고 6.25 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남아있는 가족과 친척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 되었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체제가 싫었다', '북한이 더 잘 산다' 같은 핑계마저 늦게 잡아도 1970년대의 경제발전과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이후 완전히 설득력을 잃었다. 특히 역사를 거꾸로 걷는 주체사상과 더불어 와장창 무너지는 사회주의 경제 때문에 더더욱.
남한에서 사고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이나 군인들도 상당히 많이 월북했다.
- 1977년 10월 육군 20사단 대대장이었던 유운학 중령이 자신의 무전병까지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데리고 월북한 사건
- 1978년 6월 육군 12사단 정보장교였던 이준광 소령[8] 의 월북
- 1981년 8월 육군 1사단 GP 담당 중대장이었던 석정현 대위(단기사관 12기)의 월북
- 1984년 6월에 육군 22사단 소속이었던 조준희 일병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같이 군 복무하던 동료 병사 15명을 죽이고 월북한 사건
- 1996년 어느 부사관이 남한 쪽에서 강력범죄를 일으켜서 군사재판을 받게 되자 월북한 사건.[9]
- 1980년대 후반에는 사업 실패로 빚 독촉에 시달리던 자동차 운수회사 사장이 26살 어린 경리 여직원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통해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딱히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남한에 비해 빈곤한 북한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
- 1991년에 LG카드에서 대금 추심 때문에 통일원에 방북 신청을 하기도 했는데, 당연히 방북을 불허했다. #
- 어떤 빚쟁이는 카드 빚 때문에 월북했다.# 결국 이 사람은 북한에서 추방당했는데, 그 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듯하다. #
- 2005년 4월 13일, 57세의 황홍련이 만취 상태에서 황만호라는 소형 어선을 이끌고 월북했다가 18일에 남한으로 송환되었다.
- 2009년에는 양돈장에서 일하던 30대 남성 강동림이 철책을 자르고 월북하는 바람에 육군 제22보병사단이 한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 2010년에는 현직 의사를 포함한 4명이 스웨덴을 경유하여 월북을 기도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웃긴 것은 그들이 망명신청서에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문구를 적었지만 북한 쪽 인사로부터 사회적 기여도가 낮아서 곤란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남한에서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에서의 의사의 지위는 굉장히 낮다. 김씨왕조 주치의 급이 아니면 보건소 하급 공무원 정도의 취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치(몸값)가 정해지므로 의료 서비스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적이니까 의사의 가치가 상류층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오직 김씨왕조 정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순으로 가치가 정해지다 보니 군부의 권력이 절대적이고 의사의 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다.[10]
- 2014년 9월 5일, 경기도 안성에 사는 한 50대 남성이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제3국을 통해 월북했지만, 북한이 송환하였고 관련기사 결국 구속되었다.
- 2014년 9월 16일, 아랍계 미국인 남성 한 명이 한강을 헤엄쳐서 월북하려다가 해병대에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을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가려 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 2014년 11월 말 월북했던 50대가 12월 26일 판문점으로 귀환했다. # 또 2015년 1월 두번이나 월북을 시도했지만 두번 모두 실패하여 구속됐다.
- 2015년 6월 22일, 30대 남성이 생활고를 이유로 페트병으로 월북을 시도하다 당국에 붙잡혔다. #
- 2018년 8월 7일, 7월 22일에 월북했던 30대 남성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연도별로는 2012년 7명, 2013년 7명, 2014년 3명, 2015년 3명, 2016년 4명, 2017년 4명, 2019년 1명이었다. 북한이탈주민의 재입북 사유로는 남한 정착 과정의 어려움, 재북가족에 대한 그리움, 기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통일부는 밝혔다.
3.1. 1984년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 1984년 6월 26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조준희 육군 보병 일병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해 12명을 살해하고 11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월북한 사건.
3.2. 2013년 월북자 사살 논란
2013년 9월 16일 낮, 일본에서 강제추방된 뒤 월북하려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에서 거주했던 40대 남성이 임진강에서 부표를 매달고 월북하려다 '''대한민국 육군 초병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 추정은 시신에서 발견된 여권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9월 16일 현재 이 사람이 무슨 이유로 대낮에 대놓고 월북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내용 때문인지 초병의 대응에 대해 인터넷에선 몇몇 잡음이 일어나고 있는데 보도자료가 정확하다면 초병이 저 사람을 쏴 죽인 건 절차상 '''매우 정상적이고 당연한 절차에 따른 행동'''이다. 애초에 월북 문제를 떠나서 백주대낮이고 뭐고 불상자가 군사지역에 무단 침투해서 초병의 반복되는 지시와 대인수하에 불응[11] 했는데 이미 강을 건너는지라 생포하기도 힘든 상태이니 소대 입장에선 그냥 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박왕자 씨 피살사건과 비교하며 초병을 비난하고 있는데, 해당 사건은 의도적으로 침입한 것이 아닌 관광객이 북한군에게 사살[12] 된 것이고, 본 사건은 의도적으로 무단 침입한 자가 '수 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살당한 것이므로 이 둘은 절대 같은 기준으로로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다. 군 초병 수칙 자체가 3번의 경고/수하에도 상대가 불응한다면 경고사격→여기에도 불응하면 발포, 사살이다.[13]
게다가 저 침입자가 과연 일반인이었나도 의심스러운 게 저 위치까지 가려면 그 전에 수많은 검문소에서 검문을 제대로 받아야 정상인데 그곳을 무사히 다 통과한다는 것이 일반인이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검문소의 위치를 '''미리 알고''' 우회하든가 아니면 가짜 신분증으로 넘어가든가 아니면 검문소 초병들이 일을 제대로 안했든가. 아니면 진짜 간첩일 가능성도 있다. 만일 진짜로 시도할 경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오히려 수하불응자를 사살한 초병들의 결단을 칭찬해야 한다.'''
3.3. 2020년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3.4. 2020년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건
- 2020년 9월 22일 소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어업 지도 활동을 하던 공무원이 실종되어 북방한계선 이북 해역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된 사건. 문서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월북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많다. #
4. 기준에 대한 논쟁
일단 월북자를 해방 후 38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 그리고 휴전 후에는 휴전선 이남에 살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이들로 분류한다는 기준은 명확하다. 하지만 고향이나 활동 지역이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북부 지방이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간 이들을 월북자로 분류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으로 '가버린' 인물들이라 월북자로 분류할 수 있지만 '월북한'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다고도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인 백석이나 작곡가 이면상 같은 경우에는 각각 평안북도 정주와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지만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월북자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월북이라는 단어의 기준을 재정립하거나 북한 지방이 고향이었던 인물들에 대한 재분류용 단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귀북이라든가...
이런 모호한 면은 냉전 시절에 위의 납북자를 자진 월북자로 왜곡한 것처럼 악용되기도 했다. 본인은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상관없이 그냥 고향에 있고 싶었거나 혹은 다른 여러가지 사정으로 미처 떠나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공산주의자라서 북한에 협력하기 위해 남은 것으로 왜곡한 사례가 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 대한'으로 월남했어야 마땅한데[14] 북한에 남았으니 '빨갱이'라는 식. 위에 언급한 백석과 그의 작품들도 이런 식으로 다른 월북 작가와 함께 금지했었다. 리면상이 작곡한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작곡자 생략하고 '민요'로 언급해서 남한에서 잘만 불렸다. 대표적으로 이 노래.
5. 결말
흔히 넘어가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귀빈 대접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꼭 모두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장 선전용으로는 이만큼 이용가치가 높은 존재들은 없다. 그들의 주장, 즉 '대한민국에서 살기 싫어서 북으로 건너왔다' 을 명분으로 인민들에게 '보아라, 우리가 더 우월하니까 못 사는 저들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겠느냐!' 며 잠깐동안 선전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북한 당국의 모든 행동은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다. 남한 출신, 대한민국에서 장기간 살다 온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북한 정권 유지에 유해하다. 좋은 건강 상태 등으로 의도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부유함을 드러내며, 자유로운 사고 방식의 사례가 되고, 대한민국의 국력, 종교[15] 와 같은 정권 유지에 유해한 지식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수경 방북 사건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선전 시나리오를 짜야 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와 차단시키려 할 수밖에 없으며, 이 경우에도 그들이 문제시 하는 지식은 북한 내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애를 쓰려고 할 것이다.
이용가치가 있거나 문제 삼을 점이 전혀 없는 자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비참한 삶''' 뿐이다. 설령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이라도 평생을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며 게다가 가족은 두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들을 어떻게든 처분하려 하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결혼을 시키고 그 다음 아내나 자식들이 엉뚱한 소리 하나 늘어놓으면 그걸 명분삼아 죽여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의 최신 사정에 능통하다는 이점 때문에 대남공작 관련 훈련 기관의 교관 내지는 대남방송 관련 업무에 배치하는 경우가 월북한 사람들 중 일부이다.[16] 대외 선전 값어치가 높은 사람의 경우는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또한 소수이다. 그러나 그들 소수 역시 자유의 삶은 커녕 북한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가 된다. 조선일보 NK 리포트에 따르면, 고위직의 월북자를 제외한 그냥 월북자들 중에 적어도 2~3명 정도는 선전 잡지에 고정 출연한다고 한다.
이미 역사 속에서도 삼국지의 여포처럼 배신을 상습적으로 하다 최후를 맞은 사례가 있고, 불륜 커플이 기존 배우자와 이혼하고 제2의 결혼생활을 꾸린다고 행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자. '''제3의 파트너를 찾아 떠나게 된다.''' 산업 스파이도 마찬가지다. 정상적 기업은 그 동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회사에 남의 회사 기밀을 갖다준 사람을 뽑지 않는다. '''우리 회사 기밀 또 딴데다 팔아넘길 놈''' 취급하기 때문. 북한 김씨왕조에는 이런 예외도 없다. 월북한 사람은 '''쟤네들 우리(조선로동당 및 김정은) 맘에 안 들면 또 딴 나라로 튈 것같다'''고 취급해 버린다. 그래서 월북해봤자 그들을 기다리는 곳은 정치범수용소 내지는 아오지 탄광. 북한 정권 입장에선 월북한 사람들은 정말로 별로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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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번째 있는 김세연의 경우, 부대명이 안 나오고 머슴이라고 나왔는데, 1975년 대성동에서 납치된 농민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필우의 소속부대라는 88사는 88여단의 오기로 보이고, 윤치기의 소속부대인 동경사는 동해경비사령부를 뜻한다. 또한 김종운의 소속부대가 미 2사인데, 김종운은 카투사 출신이다.
1980년대까지는 이런 것에 출연했었다. ''' 저 삐라에 출연한 저 사람들의 생사여부는 본인들 밖에 모른다.''' 여담으로, 윤치기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사람이 댓글을 남긴바 있는데, 70년대 후반에 눈길을 뚫고 플라스틱 통을 이용해 월북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른 곳에서는 윤치기라는 사람은 1970~1980년대쯤 탈북했다는 말도 있다.#
6.25 전쟁 직후부터 70년대까지는 대한민국 내 사정에 정통하거나 친척과 같은 연고자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남파 간첩으로 훈련시켜 역침투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재가 주연한 고영남 감독의 영화 '탈출' 이 바로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 모 국군 하사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정 하사가 북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지만 적어도 그 영화에서는 이순재가 연기한 정 하사는 자진 월북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에서 납치되어서 자진 월북으로 위장되었었다. 그가 간첩훈련소에서 만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진 월북자이다. 결국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척 연기를 하여 북한의 신뢰를 받고 남파 간첩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오자마자 동료들을 모두 쏴죽이고 국군 부대에 투항한다. 남과 북 모두 연좌제라는 것을 했던 이유가 사실 이런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 첩보 활동을 방지하고자 실행했던 방침이었다.
2010년대에 월북했다간, '''평양 땅을 밟을 가능성 따위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평양은 북한의 성골 금수저만 갈 수 있는(거주할 수 있는이 아니다) 곳이다. 게다가 현재 북한 당국의 월북자들에 대한 대처는 주로 일단 잡아서 조사를 해보고, 쓸 만한 정보력이 있거나 선전가치가 있다 싶은 인물만 받아주고 아니면 '''그냥 다 돌려보내는''' 식이다. 예를 들어 2013년 10월에는 월북자 6명과 시신 1구를 돌려보냈는데, 이 때 송환된 사람들은 월북한 이후 2~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남쪽으로 송환되었고, 여기에 한 명은 부부불화로 살해한 사실까지 확인되어 모두 남한에서 처벌받았다.[17] 이것은 대한민국 당국에 '우리도 월북자 돌려보낼 테니까 탈북자 문제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 는 의미도 담겨있다.
그리고 이미 체제 대결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끝난지도 어언 20년도 더 지났기 때문에, 사실상 선전가치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북한 입장에서도 대한민국에 공갈을 부려서 뭘 뜯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다. 위에서 월북 시도를 하다가 거절당한 이야기처럼 본인이 '''북한의 기준'''[18] 으로 대한민국에서 거물이라든가 소수의 특기를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북한에서도 월북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 돌려보낸다. '''그리고 국정원에서 인수해 간다.'''
물론 서울 땅을 자유의 몸으로 다시 밟을 가능성도 매우 낮다. 월북했다가 남한으로 돌아오게 되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안보지원사, 검찰청 공공수사부 조사실, 국정원'''일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와도 몇 년 정도 교도소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사안에 따라 국가보안법상으로는 무죄가 될지는 몰라도[19] 최소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 되면 아주 운이 좋아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는데, 바꿔서 말하면 빨간 줄 그이는 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기타
대한민국 육군 최고 전력의 부대 중 하나였던 '''20사단'''[20] 은 사실 월북 사건의 피해자였다. 1977년 이 사단의 대대장들 중 한 명인 육군중령 유운학이 월북해버린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군에서는 난리가 났고 결국 그때까지 최전방 DMZ를 맡고 있던 20사단은 당시 경기도 양평군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과 강제로 임무가 교대되어 후방으로 쫓겨나버렸다.
유운학이 월북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당시 군 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의 증언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사건 직전 빚에 쫓기던 어떤 대한민국 군무원이 L-19 '''정찰기를 타고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비행기가 이 대대 위로 넘어가는 바람에 받게 된 심한 문책이 원인이라고 한다. 신동아 기사. 진실은 저 너머에.
후방으로 떨어진 덕분에 지금은 육군 최강의 부대가 되었으니 인생사 뿐 아니라 부대사(部隊史) 또한 새옹지마일지도 모를 일. 정확히는 후방으로 배치되어 12.12 군사반란에 동원되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군으로 참여한 보상에 가깝다. 최전방 부대를 빼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기에 보통 쿠데타는 수도에서 가까운 비 전방부대를 동원한다.
한국의 여러 민족종교 중 해방 이후에도 그나마 상당한 교세를 유지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의 지원도 받았던 천도교가 지금처럼 크게 몰락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월북이다. 천도교의 지도자인 교령이, 그것도 2명이나 월북하면서 대차게 타격을 입었다.
태영호가 해외 주재 북한 외교관에 재임 중이던 시절에 간혹 한국인들 중에 월북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하는데 면담 결과 대부분 상태가 좋지않아 돌려보냈다고 한다.
7. 해외 사례
7.1. 베트남
베트남은 1954년 북위 17도선이 굳어지면서 대규모의 월남자가 나왔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막장 이미지와 호찌민 정권의 민족주의 이미지 때문에 월남자가 거의 없었으리라 지레짐작하기 쉬운데, 북베트남은 엄연히 종교와 야당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리고 선술한 월남자들은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기도 전인 바오다이 집권 시절에 발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북베트남을 탈출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 교도들이었다. 대표적으로 1954~55년 사이 미 해군이 수행한 자유의 길 작전에서 31만 명의 북베트남 민간인과 군인들 그리고 프랑스 군인들을 남으로 실어 날랐다.[21] 마지막 주한 베트남 공화국 대사였던 팜 수안 치우도 북베트남에서 1946년에 넘어온 사람이다.#
한편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은 민간인 14,000 ~ 45,000명, 베트민 소속 10만 명으로 추정된다.[22]
7.2. 예멘
예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시절은 월북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를 입증할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예멘이 비록 한국과 반대로 남예멘이 공산주의였고 북예멘이 자본주의였긴 하지만, 북예멘은 친서방 자본주의가 아니라 아랍 사회주의 국가였고[23] 남예멘은 공산주의인 주제에 유일하게 국교를 지정해놓은 나라였기 때문에 서로의 이념적 차이가 크지만은 않았으며, 국민소득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후 2015년에 예멘 내전이 발생했고, 국내에도 2018년 제주 난민 사태가 불거졌다.
7.3. 독일
독일의 경우 분단이 남북이 아닌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월북자가 되는 경우는 독일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월동자로 해당된다. 다만, 당시의 동독은 서방 국가들도 인정할만큼,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함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잘 사는 선진국이라서, 동서독 간에 삶의 질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24] , 때문에 동독인이 서독으로 넘어간다면 이는 자유를 얻으려는 목적이 대부분이지[25] , 경제적인 이유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서독인이 월동하는 경우도 극렬 공산주의자들의 사례가 절대다수고, 그나마도 동서독끼리는 지금의 남북한 관계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돈독하고 상호교류도 상당했기 때문에[26] 서로의 현실에 대해 잘 알았던 만큼, 구태여 월동을 하려는 사람도 드물었다[27] . 자세한 사항은 동독 및 베를린 장벽 문서로.
7.4. 중화권
7.5. 키프로스
8. 월북한 인물들
8.1. 국내
※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은 ★ 표시를 한다.
※ 재탈북한 경우나 단순한 방북인 경우[28] 는 ☆ 표시를 한다.
- 강동림 (2009년 10월 26일)#제22보병사단/사건사고#s-5
- 강태무, 표무원 소령 - 한국 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국방경비대 소속 8연대[29] 의 이 두 대대장[30] 은 길어야 하루 차이로 훈련 및 대북 시위 명분으로 자기 대대원들을 이끌고 나란히 월북[31] 했고, 이로 인해 군은 물론 나라 전체도 충격에 빠졌다. 그들이 왜 이러한 일을 벌였는지는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여순사건 직후 진행된 군 내부의 숙군 작업을 고려하면 아마 남로당 소속인 자신들도 이 대상에 오르리라 불안에 떨어 이 같은 일을 벌인 듯 싶다.
월북 이후 이 두 대대장은 부하들을 제물로 삼아 북한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그 후 벌어진 한국전쟁에서도 북한군 지휘관으로 참전, 둘 다 전후까지 살아남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를 역임하다 표무원은 2006년, 강태무는 2007년에 사망했다.
- 김광호☆ - 탈북과 월북, 재탈북을 거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 김기호: 군인으로 주한미군 6병기대대 538중대 검사과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 10월 철원지역 철책을 뚫고 월북했다.##
- 김남천★
- 김석형
- 김순남
- 김원봉
- 김하기☆ - 부림 사건 관련자이자, <완전한 만남>을 지은 소설가. 1996년 7월에 중국에 갔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두만강에 뜬 달을 보고 혹해서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월북했다. 술에 취한 김하기는 북한 주민들에게 "나는 남에서 온 소설가"라고 떠들다가 체포되었는데, 김하기를 체포한 북한 군인들의 첫 마디는 "동무는 남조선의 수영 선수인가?"였다고. 북한은 김하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에 "북한에서 새 장가도 들고 글도 쓰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했지만, 김하기는 거부했다. 1996년 8월 16일에 그는 귀국했으나 북한으로 갈 적에 남한의 장기수 명단과 사상투쟁 등을 북한에 보고한 혐의로 구속되어 1997년에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듬해에 김대중 정부 출범 뒤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 노수희☆
- 도상록★
- 류미영 - 최덕신의 아내, 최인국의 어머니.
- 박인숙★ - 이 사람은 북한이탈주민 출신이다. 탈북했다가 다시 북한으로 간 케이스.
- 문선명★☆, 박보희☆ - 사실 상 방북이었음에도 법적으로는 월북이므로 기재한다[33] . 참고로 박보희는 세계일보 회장.
- 문예봉★
- 박세영
- 박순용 (2003년 1월)##
- 박정숙★ - 2006년 북한을 탈출한 북한이탈주민 출신이나, 2012년 다시 월북하여 남한의 체제를 부정하는 데 앞장 섰다. 일각에선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 다시 월북하였으며 체제선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 박태원
- 박헌영
- 백남운
- 백석★
- 백흥룡☆ - 일명 배인오. 1993년 김삼석 남매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안기부의 프락치. 원래는 영화로 노동사회운동을 하는 영화감독이자 연출가, 작가였다. 그러나 안기부에 포섭되어 당시 반핵평화운동을 하던 김삼석과 그의 여동생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은 후 김삼석에게 물건을 배달을 부탁하여 간첩으로 몰았다. 그 후 독일로 망명하여 베를린의 범청학련 사무실에 나타나서 양심선언을 했다. 이후 북한으로 망명했다. # 현재는 북한을 탈북하여 동남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소재 파악은 안 되고 있다고 한다.
- 성혜림, 성혜랑 가족 - 성혜림이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남한에서 살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온 가족이 월북했다. 이 중 성혜림은 이미 북한에서 결혼했으나 김정일과 불륜을 통해 교제하는 사이가 되었고 결국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다. 후에 성혜랑은 탈북한다.
- 신불출★
- 심영 -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출생이라 월북 당시에는 고향이 북한이었는데 6.25전쟁의 결과 남한이 철원을 수복하면서 고향이 남한땅이 되었다.
- 안기영 - 당대 저명한 성악가(테너)이자 작곡가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지냈다. 1950년 아내 김현순[34] , 딸 안남식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음악계에서 활약했으며, 아내 김현순도 성악가(소프라노)이며, 딸 안남식도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북한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다.
- 안성희 - 최승희의 딸로 부모를 따라 월북
- - 육군 하사. 베트남 전쟁시 월북했다고 알려져서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등 곤욕을 치렀으나, 이런저런 정황과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가 되어 북송된 후 탈북하다가 1975년에 처형되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2009년 국방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월북자가 아닌 납북자로 인정했고, 2010년 주간조선에서 공개한 베트남 전쟁 관련 문서에 의하면 당시 주월사령부에서도 안학수 하사가 공무 중 납치 실종, 납북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문서 위조까지 하면서 술과 여자 문제 때문에 탈영해서 북으로 도망쳤다고 우겼다. 이일로 유족들은 국가배상소송을 청구했다.
- 윤노빈★ -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월북의 주인공. 헤겔 철학의 전문가이자 신생철학이라는 철학 사상으로 유명했던 윤노빈은 현실에 비판적이지도 않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1983년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 뒤 가족과 함께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가버렸다. 오길남의 증언에 의하면 나름대로 글을 쓰면서 사는 것 같지만 북한이 대대적으로 내세우는 선전업무에 종사하는 것 같지는 않은 듯.
- 윤이상☆[35] - 김일성과 접촉해서 북한의 5.18 왜곡 선동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다고 이전 버전에 서술되어 있는데, 황석영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5.18과 관련된 이러한 서술의 출처가 5.18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이라 교차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북한의 악단을 직접 지휘한 것만큼은 사실인 듯 하다.
- 유운학 - 제20기계화보병사단 예하의 대대장이었다. 이 인간은 하필 보병학교 전술교관 출신이라 당시 한국군의 비문, 군사교범, 부대명 등이 싸그리 물갈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의 피해를 환산해보면 무려 1조원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 이후 20사단은 주둔지였던 연천에서 춘천을 거쳐 양평으로 주둔지가 변경되었고 5사단은 졸지에 양평에서 연천으로 부대가 이동되어 버렸다. 게다가 혼자서 월북한 것도 아니고 월북 제안을 거절하는 운전병은 총으로 다리를 쏴서 놔두고 무전병은 위협해서 억지로 함께 월북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억지로 끌려간 그 무전병은 아직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 임선규 : 신파극 극작가, 문예봉의 남편
- 임수경☆ - 역시 방북이지만 국가보안법 상 월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재했다.
- 전혜성(임지현)★ - 다만 TV조선 프로그램 모란봉클럽의 다른 탈북민 출연자가 말하길, 전혜성은 애초에 간첩도 아니고 자진월북자도 아니며, 그녀의 중국인 남편에게 속아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에게 기획 납치를 당하여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해당 영상
- 최인규★ - 일설에는 납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주인규★
- 조준희 - 제22보병사단 출신의 월북 군인. 그 중에서도 특히 악질인데 GP에서 내무반에 지뢰를 던져 중상을 입고 기어나오는 전우들까지 총으로 하나하나 다 살해한 뒤 소초에서 나오던 군인들과 근무 서던 군인들을 사살하고 월북. 이를 추적하던 다른 군인 2명까지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 최계순
- 최승희 -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무용가로, 해방될 당시 이미 유부녀였는데 남편을 따라 월북했다.
- 최덕신 - 대한민국 육군의 중장 및 육군사관학교 교장까지 지낸 사람이지만 1972년 박정희와 갈등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이후 1986년 북으로 망명하였다. 결국 북에서 천도교 청우당 당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육군사관학교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사망했을 때는 김일성이 직접 문상까지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제11기계화보병사단의 엄청난 흑역사가 되는 거창 양민학살사건 지시를 내린 인물이라서 이걸로 인해 대한민국이 종북 방관혐의를 씌워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 최인국 - 위의 최덕신의 아들이다. 2019년 7월에 뒤늦게 월북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 한설야★
- 허헌★
- 홍명희
- 오익제★
- 오장환
- 이용악★
- 이태준
- 임화
- 하태경☆: 지린대학교 유학 시절 월경하여 북한 병사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방북이지만 법리적으로 월북이다.
- 한상렬☆: 방북이지만 법리적으로 월북이다.
- 김금혁★: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한국이 민주화되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90년대 이후에도 정말 곤란한 처지가 되어서 월북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2005년경 방송된 조선중앙방송의 방송 내용에 따르면 길게는 90년대 초반 JSA에서 근무를 하던 도중 월북한 경우도 있는 반면 짧게는 2000년대 중반 평범한 연구직이나 사무직에 근무하다 월북한 사례도 있다.
사실 남북 체제 대결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기 때문에 종북주의자들의 월북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경제적 혹은 범죄 관련으로 곤경을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 근래 월북자들의 주된 동기로 보인다. 즉 2000년대 이후의 월북 사유를 살펴보면 2004년에 막대한 사채빚을 진 군 간부가 월북한 사건이 있고 2009년에 폭행죄로 지명수배된 강동림이 월북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안으로 북한을 고르는 것은 정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이다. [36]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남한에서 사형을 받거나 징역을 사는 것이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현재 남한은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있는데다가, 북한의 수용소처럼 고문이나 수형자 착취를 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남한이 설령 사형을 재개한다하더라도, 최소한 사형수에게 집행 당일날까지 최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하기 때문에[37] , 북한같은 데서 사람 취급도 못받고 혹사당하다가 인사불성인 채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또 북한 입장에서도 이미 체제 대결이 끝나 선전용 월북자가 굳이 필요 없고, 더군다나 자신들 사회에 사실상 적응이 불가능한 범죄자의 월북은 오히려 골칫덩이만 떠안는 셈이라 전혀 반기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무엇보다 월북자들은 이미 남한 땅에서 살아왔으므로 누구보다도 남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인민에게 대고 남한의 실상을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하면 그간 남한을 엄청 비참하다고 허위선전해온 북한 정부 입장에서는 골치깨나 썩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월북자들이 자신이 생각한 북한의 모습과 실상이 너무 다르다면 더더욱 그 위험성은 커진다. 사실 월북자들 중 대부분은 북한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남한이 싫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자유를 잃기 싫어 도망나온 사람이 꽉 막힌 북한 스타일을 더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남한 출신 월북자들을 받는 것은 꺼리지만,[38] 탈북했다 되돌아온 재월북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으로 북한인들에게 "탈북해봤자 별 볼 일 없구나"는 식의 인식을 심어주어 체제 단속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북한은 갖은 수를 동원해 이들을 다시 유인하고 있다.
탈북했다가 재입북해서 한동안 북한의 이런 선전에 동원된 뒤 2013년 재탈북한 김광호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김광호는 남북한을 오가며 각종 정보를 양측에 누설했다는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광호처럼 탈북과 월북을 반복한 파란만장한 행적을 보인 자도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재월북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의 몰지각한 편견과 행위 때문에 남한에서 탈북자들이 여러모로 불이익을 받고 사는 것은 사실이나 탈북할 때의 초심과 현재 북한이 어느 정도로 미쳐 돌아가는 국가인지 생각하면 남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에 비해 재월북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특히 이미 남한의 문물을 체험해봤던 사람들을 북한이 미쳤다고 마음대로 풀어줘서 살게 놔두겠냐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김광호 씨도 재입북한 뒤 그곳에서 무심코 내뱉은 '남한이 더 잘 산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재탈북했다고 한다.
목적이 방북이었어도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국가보안법 상 월북으로 간주한다.
8.2. 국외
8.2.1. 미국인
- 아르투로 피에레 마르티네스 - 29세. 텍사스 주 엘파소 출신으로, 다른 다섯 사람과 달리 일반인이며, 히스페닉 계이다. 스스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가 2번이나 걸렸었다. 잡힌 이후 캘리포니아 주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자마자 돈을 빌려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들어온 날짜는 강제로 잡혀들어갔다가 풀려난 캐네스 배와 매튜 토드 밀러 석방일로부터 이틀 후라고 한다. 북한 정부는 그를 방송에 출연시켜 미국의 외교정책 비난공작에 사용하고 있다.
한편 놀랍게도 미국이라면 죽도록 이를 가는 북한에서는 월북한 미군들을 매우 소중히 대우했는데 그 이유는 체제 선전용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중시하는 미제의 앞잡이였다가 자진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시하는 우리 수령님의 품으로 다가오길 택한 영웅"이라는 선전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그 대가로 이들에게 평양에 최고급 주택을 지어서 그곳에 살게 해주고, 해외에서 납치해온 외국인과 결혼도 시켜준 데다가, 적지 않은 액수의 연금도 지급했다. 이들은 그 후에 "이름 없는 영웅들" 류의 북한의 체제선전 영화에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미 정보국 책임자급" 등의 악역 배우를 주로 담당했다.
한때 이들을 두고 조선일보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귀환 미군 포로였다고 기사를 낸 적이 있었는데 미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월북 미군으로 확인했다. <어떤 국가>, <천리마 축구단> 등 북한을 소재로 다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영국의 대니얼 고든이 이들을 주제로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으니 참고할 것. 한국에서는 2007년 8월 23일에 개봉했다.
- 찰스 로버트 젱킨스
-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 조지프 T. 화이트 - 1982년 월북했는데 1985년에 청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북한의 통보로 진짜로 익사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불명. 어쩌면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6.25 전쟁 당시 미군 장교가 사실 이 사람일 수도 있다.
- 래리 앨런 앱셔 - 드레스녹보다도 먼저 월북한 미군. 드레스녹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그나마 친척들이 잘 키워줬다. 무분별한 성생활로 성병에 걸렸고 마리화나에 빠져 5~6번이나 징계를 당했는데 또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걸려 1962년 5월 재판에 넘겨지기 전에 월북했다. 역시 납북된 태국 여성인 '아노챠'와 결혼해서 살다가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앱셔의 나이는 겨우 마흔이었다.
- 제리 웨인 패리시[39] - 켄터키 주 핸더슨 출신으로 미군 특수 요원이었다. 계부가 알코올중독으로 가족을 자주 팼으며 설상가상으로 계부는 패리시가 의붓여동생과 성관계를 하는 사이라고 마구 몰아세워서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패리시를 내쫓았다. 그 후 앱셔와 드레스녹의 이야기를 듣고 1963년 12월 국경순찰 중에 월북한다. 레바논 출신 여자와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패리시의 아내는 납북되었다는 말이 많았는데 본인은 방송에 나와서 내 가족들도 레바논 정부도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안다면서 납북설에 극구 부인했다. 자초지종은 이 여자가 북한으로 관광을 왔다가 우연히 패리시와 만나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레바논에 돌아와서 알게 되었고 레바논의 가족들은 당장 애아빠에게 돌아가라고 그녀를 추방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 패리시와 결혼한 것이다. 간질병으로 인하여 1998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부인과 자식들은 여전히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말에 의하면 영화배우로 동원됐을 당시 연기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했으며 실제로도 패리시는 각종 선전영화에서 연기력 덕분인지 중요한 배역을 많이 맡았다.
8.2.2. 일본인
1970년에 일어난 요도호 사건의 범죄 그룹 '적군파' 멤버인 타미야 타카마로 외 8명은 민항기를 납치한 뒤 북한으로의 망명을 하였다. 그들은 평양에서 살고 있고 그곳에서 가정도 꾸렸다고 한다.[40] 그들 중 3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였으며, 또는 일본인들을 납치하여 북한으로 데려오는 등의 공작원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일본으로 송환된 이도 있다. 이들은 모두 국제 지명수배되어있으며, 자녀들은 일본에 귀국하여 일본인으로서 살고 있다.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월북이라기보다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세한 설명은 납북 일본인 문서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의문의 실종 사고로 오랜 기간 모습을 볼 수 없는 실종자들은 납북당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돌고 있다.
9. 관련 문서
[1] 법에는 이렇게 썼는데 한반도의 반국가단체라고 해도 엄청 큰 것 하나 빼고 조직되는 순간 사망할 것이다. 참고로 1990년대 이전에는 공산국가 역시 반국가단체로 간주되었기에 이들 국가에 입국하는 것 역시 이 법으로 처벌했다. 여행금지국가 목록의 구 공산권 문서로.[2] 따라서 거짓 탈북도 이 죄로 처벌받는다.[3] 살인죄와 형량이 같다.[4] 북한을 거쳐 육로로 중국, 러시아, 유럽 등으로 가는 등의 단순 월북 등으로 대공용의점이 없을 경우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정확하게는 무단 방북으로 처벌된다.[5] 현대의 정설은 납북당해서 북한으로 가던 도중에 폭격을 맞아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 1988년 3월 31일에 납북인지 자진 월북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정지용·김기림이 해금된 이후 7.19 해금조치를 통해 백석을 비롯한 120여명의 납·월북 작가들이 전면적으로 해금되었으며, 89년에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조영출, 백인준이 최종적으로 해금되었다.[7] 대만의 경우는 이게 워낙에 애매하긴 하다. 중국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연고지가 대만인 예술가들이 드물고 대개 대륙에서 활동했고, 대만으로 넘어왔냐 안(못) 넘어왔냐만 따지기도 애매해서. 대체로 대륙에서 잘 나간 사람들은 잘 언급하지 않고 대륙에서 영 좋지 않은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금은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1960년대 음악 교과서에서 양안 분단 전 만들어진 유명한 동요의 작사자를 표시 안 하고 작곡자만 표시한 사례도 있다.(작사자가 양안 분단 후 대륙에서 잘 나간 편이라 작곡자는 분단 전에 사망했다.)[8] 1994년 국제 앰네스티 발표에 의하면 과거 북한의 최악의 정치범수용소였던 26호 관리소(일명 승호리교화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준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 즉 제 발로 지상 최대의 지옥으로 걸어들어간 셈이다.[9] 이 사람은 북한에서 돌려보내려고 하자 결국 거기서 자살했다고 한다.[10] 물론 북한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시절에는 정해진 월급만 받았기에 의사라는게 어렵기만 한 직업 취급 받았지만, 북한의 계획경제가 붕괴하면서 돈 벌 방법이 무궁무진한 현재는 의사의 몸값이 많이 뛰었다고 한다. 운이 좋아서 해외파견이라도 한번 갔다오면 10만달러 이상 벌어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공부가 어렵기만 하고 승진하기 힘든 의대를 기피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인기학과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대단한 명의도 아닌 북한으로 도망치려는 쩌리 의사는 필요없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11] 그냥 단순 불응한 것도 아니고 적성 지역으로 접근을 시도했다.[12] 경고 없이 북한군에게 사살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다.[13] 현행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에는 '국방부 장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수하'로 바뀌었다. 따라서 국방부장관이 정한다면 '1회 수하에 불응시'에도 발포가 가능할 수 있는데다, 수하의 방법을 형식적 수하까지 인정한다면 사실상 수하없이 무단접근자에게 발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14] 실제로 월남자 출신 인사들 중에는 이 부분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투철한 반공 우익 인사로 선전한 사례가 존재한다.[15] 특히 기독교가 문제가 된다. 임마누엘이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바뀐다든가, 십계명이 10대 원칙으로 바뀌어 선전에 이용되는 사례 등 종교를 탄압하는 자신의 행동의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6] 오히려 월북자보다는 납북자를 많이 쓴다고 한다.[17] 참고로 이때 피살자의 시신을 인계하면서 북한 측이 직접 '''월북자 이모 씨가 자기 아내를 살해하였다'''고 통보했고, 검찰의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되어 집유를 받은 다른 월북자와 달리 유일하게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18] 예를 들면 의사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는 각광받는 직업이지만 북한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직업군이다. 북한의 의료 수준이 아주 처참한데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낙후된 교통 환경때문에 병원에 올 처지가 안되어 병원 운영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에서도 의대에 가려면 전국구 수준으로 공부를 잘해야 하지만, 그런 것에 비해 김씨 일가의 주치의가 되는 게 아닌 이상, 미래가 보장되지 못해서 인기가 없는 것이다. 북한의 기준으로 한국의 거물급 인사를 꼽아보자면 국회의원 이상급의 정치인, 장성급 장교, 재벌급 경제인 정도가 될 텐데 이들은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뭔가 큰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수감됐다고 해도 오래 지나지 않아서 풀려날 확률이 높으므로 월북을 할 동기가 전혀 없다. 아니, 설령 자신이 지닌 돈이나 권력이 씨알도 안먹혀서 일평생 교도소에서 썩을 처지가 되도, 조희팔처럼 해외로 도망치거나 박근혜처럼 그냥 체념하고 형을 살려고 하지, 북한으로 가겠다는 이는 한 명도 없다.[19] 육로로 중국, 유럽 등으로 가기 위해 단순 통과를 목적으로 방북했다던지 등.[20] 2019년 12월 부대 해체[21] Frankum, Ronald (2007). Operation Passage to Freedom: The United States Navy in Vietnam, 1954–55. Lubbock, Texas: Texas Tech University Press., Prados, John (January 2005). "The Numbers Game: How Many Vietnamese Fled South In 1954?". The Veteran.[22] Ruane, Kevin (1998). War and Revolution in Vietnam. London: Routledge., Tran, Thi Lien (November 2005). "The Catholic Question in North Vietnam". Cold War History. London: Routledge[23] 심지어 북한보다 남한과 더 늦게 수교(1985년)했다.[24] 물론 경제 규모는 차이가 났다. 동독의 경제 규모는 서독의 3분의 1 정도였고, 이는 독일의 통일 이후에 고스란히 짐으로 남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서독을 상대로 꽤나 선방한 수준이긴 했다. [25] 그렇다고 북한과는 비교할 바는 아니였다.[26] 이는 당시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가 서독 출신이었던 것 때문이었다. 그도 서독에 있는 고향 노인키르헨에 분단으로 인해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여동생이 살고 있었고, 실제로 서독 방문 중에 고향으로 가서 여동생과 재회하기도 했기에 이산가족들의 슬픔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네커부터가 공산권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나,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가장 상식적인 인물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27] 남북한 간의 교류가 전무하다시피해서, 북한 측의 어줍잖은 선전에 낚여서 월북한 경우가 많았던 70년대의 남한과는 다른 부분이다.[28] 정확히는 방북 과정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어서, 법리적으로 월북이 된 경우를 말한다.[29] 현재 해당 연대는 제7보병사단 예하 연대로 편입되었고 해당 연대 역시 이 사건을 두고두고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30] 당시 이들도 창군 초창기 다른 부대들이 그러하듯 소령 계급으로 대대장 직급을 맡았었다.[31] 다만 이는 같은 고향 출신인 두 대대장 간 밀약이었는지, 북한군에게 투항하기 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 챈 중대장을 포함한 몇몇이 저항하거나 3개 중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한 사례는 있었다. 이때 부대에 잔류해 월북당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 12.12 군사반란의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도 있었다. 블로그.[32] 연출이 아니라면 정황상 현리 전투 와중 군단 전체가 와해된 상황에서 별 수 없이 월북한 듯 싶다.[33] 단순한 방북이 목적이라도 통일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 땅을 밟으면, 금방 다시 나왔더라도 공식적으로 월북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정부 허가도 없이 북한에 멋대로 들어갔다 나온 문선명 부부, 임수경이나, 술에 취해서(...) 멋모르고 북한 땅에 들어가버린 김하기 등의 본의아닌 월북자들도 종종 나오는 것이다. 사실 법적으로는 북한군과 교전 중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거나 기타 상황이 벌어지던 중 우발적으로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월북이다. 그걸 월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34]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출신으로, 안기영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처음 만났다. 안기영은 아내와 아이들도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제자 김현순과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가정을 버리고 김현순과 재혼했다.[35] 재탈북한게 아니라, 자기 맘대로 북한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다. 국적상 독일인이라서 법적으로는 방북이 자유로운 편이긴 하다.[36] '''월북은 매우 멍청한 선택이나 연좌제는 악습'''이다.[37] 사실 웬만한 나라는 사형제가 유지되었건 말건, 죄수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편이다. 심지어 인권 수준이 바닥인 중국조차도 사형수에게 집행 직전에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먹이고 형장으로 보낼 만큼, 죄인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한다. 북한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38] 감시하느라 쌩돈과 인력만 낭비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평분자이기 때문에 북에서도 적응 못하고 시한폭탄이 될 확률이 높다.[39] 이 두 사람 모두 북한 영화에 단골 악역 미군으로 잘 나왔다. 패리시는 주로 행동대장 따까리 역으로 출연했다.[40] 예전에 해외 방송에서 취재했었는데, 평양 모처에 이들 일본인들만 격리 비스무리한 상태로 살고 있다고 한다. 식량이나 생필품 등은 넉넉하게 지급해주며. 집에는 인터넷 접속 환경도 갖추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