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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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봉은 미국 육군 항공대의[1] 에이스로, 보기 힘든 쌍발기 에이스였다. 40대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했으며 미국 최고의 격추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상세
스웨덴 이민자 가정에서 9명의 자녀중 한명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항공기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1938년에 민간에서 운영하는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1941년에 조종사 후보생 프로그램에서 교육을 받았다. 비행훈련을 받는 동안 조종능력을 인정받았다. 1942년 9월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윈에 전개한 49전투비행단 예하 제9전투비행대대에 배속되었다. 조종사들은 P-38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동안 뉴기니의 포트 모즈비에 주둔한 39 전투비행단 예하 39 전투비행대대와 훈련을 하였다. 1942년 12월 17일에 봉은 P-38을 조종하여 2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2] 이 공로로 봉은 은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1월 7일에 2대의 Ki-43을 격추하고 다음날 또 1대의 일본기를 격추해서 에이스가 되었다. 3월 3일에는 비스마르크해 해전 도중 1대의 A6M을 격추했으며 같은달 11일에는 2대의 A6M을 격추, 19일에는 1대의 중폭격기를 격추했다. 4월 14일에는 폭격기 1대를 격추시켜 메달을[3] 수여받았다. 6월 12일에는 A6M 1대를 격추시켰으며 26일에는 호위작전 도중 4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수훈 십자상[4] 을 수여받았다. 이후 11월 5일까지 6대의 일본기를 추가적으로 격추했고 1944년 1월까지 위스콘신으로 떠났다.
1944년 2월에 다시 전선으로 돌아와서 15일에 Ki-61 1대를 격추했다. 3월 3일에 Ki-21 폭격기 2대를 격추했으며 4월 3일에 1대 4월 12일에 3대를 격추시켜 이전에 미군 최고 격추기록인 26대를 깨뜨렸다. 이후 5월부터 7월까지 전선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했다. 10월 10일에 1대의 J1N과 Ki-43을 격추시켰으며 27일에 Ki-43 1대 다음날 2대를 격추시켰다. 11월 10일에 또 ki-43 대를 격추했으며 11월 11일에 2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명예 훈장을 추천받았다. 12월 7일에는 Ki-21, Ki-44를 1대씩 격추했으며 15일과 17일에 Ki-43을 1대씩 격추했다. 총 격추수는 40대로 미군 조종사중 가장 많은 격추수를 가지고 있다.
이후 봉은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서 P-80 슈팅스타의 테스트를 하던 도중인 1945년 8월 6일에 연료 펌프의 오작동으로 인한 추락사고를 겪었다. 봉은 탈출하였으나 고도가 너무 낮아서 추락, 사망했다.
기체가 뒤집어져서 탈출을 하지 못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