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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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
(Ga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생몰년도'''
263년 ~ 325년
'''재위기간'''
308년 11월 11일 ~ 324년 9월 18일
'''가족'''
콘스탄티아(아내)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아들)

1. 소개


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기간 중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공동 발표하며,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BC.475년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1차 삼두정치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등장한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의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와 달리,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오래된 로마 명문귀족 리키니우스 가문 태생이 아니며, 이 가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로마군 입대 전까지의 삶이나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고향은 다뉴브 강 남쪽의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출신이며, 263년경 모이시아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대부분의 발칸 반도 출신 로마인처럼 젊은 시절 로마군에 입대해 군인으로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2.2.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의 오랜 '''친구'''였으며, 조카보다도 소중한 술친구였고 이러한 '술'친구라는 표현은 비잔티움 연대기에 나오는 표현이다.
군인 출신이지만, 다른 전현직 정부제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인사라고 봤던 것으로 봐서, 그다지 높은 출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로마군은 내전과 대외전쟁 모두에 대비한 조직이었기에 실력 외의 거품이 낄 여지가 거의 없어, 실력은 없는데 정치질 등으로 높게 올라간 자는 없다고 봐도 된다. 즉 263년 생으로 나이도 적지 않았는데 높게 못 올라갔다는 것은 그만큼의 실력이 되지 못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었다. 따라서 그런 점을 감안하면 콘스탄티누스에게 상당히 오래 버틴 것이다.
서기 307년 9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 부자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처형당하자, 갈레리우스는 우선 이탈리아로 4두정치의 질서를 깨부순 죄로 토벌하러 갔다가 실패했다.[1] 그러자 그는 308년 전현직 황제들을 소집해서, 비게 된 서방정제 자리에 리키니우스를 앉히고[2] 일리리쿰 속주의 통치를 맡겼다. 이후 311년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인지[3]그는 슬금슬금 동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적의 적은 나의 친구[4]의 원리로 콘스탄티누스와 동맹을 맺게 되면서, 그의 이복동생[5] 콘스탄티아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 동맹은 일단 성공하여 312년 10월,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사시켰고, 313년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4월 30일[6] 트라키아치랄룸에서 승리를 거두고[7] 동방의 통치권을 확립하게 된다. 또한 그 사이였던 313년 2월 3일, 콘스탄티누스의 주도로 그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제정하고, 6월 13일 앞의 막시미누스와의 내전으로 다소 늦게 니코메디아에서 반포했다.
그리고 나서 리키니우스는 전후처리를 했는데, 상당히 엉망이었다. 특히 내전의 전후처리는 여러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상당한 정치적 능력이 요구되는데, 콘스탄티누스라는 거대한 적이 있는 상황에서,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 휘하의 주요 대신이나 가족들을 전부 숙청했다. 문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가 갈레리우스였고, 갈레리우스의 조카가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였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갈레리우스의 일가족이 얽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레리우스의 아내와 장모, 즉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와 딸도 테살로니카의 자택에서 죽었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같은 시대에 공존해서 직접 경쟁했던 사이는 아니었고 확실히 전 시대 사람이었다. 또한 갈레리우스는 듣보잡인 자신을 황제로 발굴해줬는데 이렇게 그들의 여자 가족들을 죽인 것은 분명 배은망덕한 행위였고, 그래서 신망을 크게 잃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뒤의 콘스탄티누스의 리키니우스에 대한 전후처리는 관대했던 편이다.
어쨌든 이 제국 양분과 평화도 크게 오래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그 암살자를 잡아서 문초해보니까, 그 배후는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그에게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8]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그러나 314년 10월 8일 키발라이[9] 부근에서 벌어진 콘스탄티누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316~317년[10]마르디아[11]에서의 전투에서도 패배하고 만다. 이후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됐다. 그 조건은
  • 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발칸 반도) 전역의 할양[12],
  • 얼마 전 316년 말에 세웠던 리키니우스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폐위 후 죽이고, 각자의 아들을 동서 양쪽의 부제로 세울 것[14],
  • 같은 정제끼리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그 중 선임황제임을 인정할 것.
즉, 살려주는 대신 그의 팔다리를 뽑는거나 마찬가지인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그 사이, 320년에, 리키니우스는 주교들의 종교회의를 전부 금지했고 주교와 사제를 다수 유배보냈으며, 자신의 부하들 중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다고 하는데, 이는 앞에 나와있던 숙청과도 맞물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측으로 대거 이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측은 317년 조약으로 획득한 테살로니카에서, 항구의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공사까지 하면서 함선을 많이 건조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평화였고, 양측 모두 때와 명분을 기다리던 중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 본인과 예하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했다. 이게 확대되어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항했으나[15] 패배하여 비잔티움으로 퇴각한다. 자신은 근처의 비잔티움에서 웅거하면서, 우세했던 해군력을 이용해 소아시아로 넘어오지 못하게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해전을 벌였지만[16]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의 분전으로 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소아시아로 넘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17] 다시 한 번 대패하고 나서 근처의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항복한다. 본래 리키니우스가 원래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항복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을 다시 한번 통일한다. 항복할 때는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인척이기도 해서 정에 호소해서 신변보장을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에서 유폐생활 중 325년에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명목으로 처형당한다. 이때 그의 9살짜리 아들 소 리키니우스 역시 아버지와 같이 처형당했다.
리키니우스가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10년 이상 여동생과 결혼한 상태로 있었고 그 사이에 아들(소 리키니우스)도 낳았기 때문에, 콘스탄티아가 구명 간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남편과 아들이 다 죽게 되자 오빠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가 인생이 꼬인 여동생을 동정하여 궁정에 데려와 같이 살았고, 또한 'Constantia Soror Constantini AVG[18](콘스탄티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라는 글귀를 새긴 '''주화를 새겨 줌으로써'''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고 그냥 생판 남남이었다면, 10년에 걸쳐서, 이름붙어 역사에 남은 전투만 최소 5번인데 1년 후도 아니고 바로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평가


유세비우스로 대표되는 기독교인 역사가들에게 리키니우스는 진짜 형편없고 무능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악평은 4세기 이후의 이교도 라틴사가들에게도 비슷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 라틴사가들에게는 더 평가가 박하고, 이교도 라틴사가들에게는 약간은 덜 까인다는 정도.
양쪽 사가 모두에게 평가가 크게 좋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리키니우스가 '''진짜''' 황제로서 무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이교도 사가들도 그를 평할 때 '''특별한 미덕도 없고, 그나마 장점이라면 그저 검소함인데 그저 촌스러운 성격일 뿐'''이라고 평했다.

[1] defected to Maxentius, 즉 전향했다고 한다. 갈레리우스는 당시 로마 전체의 최강자였으므로 막센티우스는 전투 대신에 회유나 선전술을 쓴 것이었고 이는 효과적인 선택이었다.[2] 저 회동 자체가, 4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4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리키니우스는 이 당시 진짜 듣보잡이었다) 자기 친구라고 해서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3] 더구나 있었던 위치도 일리리아로 동방과 가까웠던 데다가, 원래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는 막센티우스가 꽉 쥐고 있었다.[4]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서방을 두고 싸워야 했고, 리키니우스도 위에서 나온 것처럼 이탈리아를 막센티우스가 가져갔다.[5] 테오도라의 딸.[6] 이후 그는 니코메디아를 거쳐 소아시아의 남동쪽 타르수스에서 그해 8월 독으로 죽게 된다.(독살 or 독을 이용한 자살)[7]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 근교라, 이 전투가 역사상 여러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전투 목록의 처음을 장식한다.[8]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뒤에 전투 후 제거하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추정된다.[9]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라고 하니 발칸 반도의 거의 북서부 끝이다.[10] 불확실하다[11] 트라키아 소속, 오늘은 불가리아 땅이라고 하니 북트라키아. 발칸 반도의 북동부[12]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로마 분할 시점의 동로마의 판도에서, 트라키아만 빼고, 그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유럽 전체가 빠져서 서쪽의 땅이라고 보면 된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콘스탄티우스 2세도 마찬가지의 구도가 되었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쿠데타로 이내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좀 더 오래 살다가 자연사했다.[13] 제1처 소생의 크리스푸스, 제2처 파우스타 소생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 자세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문서 참조.[14] 그런데 여기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은 2명[13], 리키니우스의 아들은 1명으로 불평등했고, 리키니우스의 아들도 콘스탄티아의 소생이라 사실은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다. 능력있을지 모르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아예 자기 혈육이기도 한 미성년자로 대체한 것. 하지만 리키니우스를 평정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 불쌍한 조카는 나중에 크리스푸스를 죽일 때 엮여서 같이 죽는다.[15] 대규모의 물량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군이 13만 명과 리키니우스 군이 16만 5천명, 양측 합쳐 거의 '''30만명'''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16] 콘스탄티누스 군은 갤리선 200척+수송선 '''2000척'''이었고, 리키니우스 군은 갤리선 350척. 그러나 전장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17] 칼케돈의 바로 옆,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의 바로 건너.[18] Augustus, AVG는 그 약자, 당시에는 라틴어에 U가 없었고 그 자리에 전부 V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