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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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정치체제. 사두정치, 테트라키아[1] 라고도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인 284~305년 중 293~305년까지 12년간 계속된 제1차 사두정치와, 305~307년 이어진 제2차 사두정치 308~311년까지 이어진 제3차 사두정치로 나뉜다.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와 비슷한 부분도 있으나 다른 부분도 있다.
2. 시기
2.1. 제1차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286년 서방의 공동황제로 올리면서 분할통치를 시작했으며 293년부터 동시에 부장들이었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 동방과 서방의 부제로 삼으면서 사두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 동방 정제[S] : 디오클레티아누스 (본부: 니코메디아)
- 아나톨리아, 오리엔스, 폰투스, 이집트
-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 (본부: 시르미움)
-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본부: 메디올라눔)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따라서 제1차 사두정치는 이름만 '사두'정치이지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의 단독으로 통치하고 다른 황제들을 지도했다. 스스로를 선임황제라는 뜻의 세니오르(SENIOR)[2] 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역사상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대탄압(Diocletianic Persecution)'도 제1차 사두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다. 제1차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 역사상 최초로 자의에 따라 퇴위하여 305년 끝나고, 각각 서방 부제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동방 부제인 갈레리우스가 서방 정제와 동방 정제로 즉위하면서 제2차 사두정치 시기로 접어들었다.
2.2. 제2차, 제3차 사두정치
제2차, 제3차 사두정치는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가 주도했다. 서방의 부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갈레리우스의 부장 출신이었고, 동방의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의 외조카[3] 였던 것이다.
-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 (본부: 시르미움 → 니코메디아)
-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아나톨리아, 폰투스
-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본부: 타르수스)
- 오리엔스, 이집트
- 서방 정제[S] :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히스파니아
- 서방 부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본부: 메디올라눔)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 동방 정제[S] : 갈레리우스 (본부: 시르미움 → 니코메디아)
- 모이시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폰투스
-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본부: 타르수스)
- 오리엔스, 이집트
-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본부: 메디올라눔)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판노니아, 일리리아, 히스파니아
-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 찬탈 황제: 막센티우스, 막시미아누스 (본부: 로마)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 동방 정제[S] : 갈레리우스 (본부: 니코메디아)
- 모이시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폰투스
-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본부: 타르수스)
- 오리엔스, 이집트
-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 (본부: 시르미움)
- 판노니아, 일리리아
- 서방 부제[12] : 콘스탄티누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히스파니아
- 찬탈 황제: 막센티우스 (본부: 로마)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 동방 정제1[13] : 리키니우스 (본부: 시르미움)
- 판노니아, 일리리아, 모이시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 동방 정제2[14] : 막시미누스 다이아 (본부: 타르수스)
- 아나톨리아, 폰투스, 오리엔스, 이집트
-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히스파니아
- 찬탈 황제: 막센티우스 (본부: 로마)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 서방 정제[15] : 콘스탄티누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메디올라눔 → 니코메디아)
- 서방 부제: 크리스푸스[16] , 콘스탄티누스 2세
-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 발레리우스 발렌스[17] (본부: 시르미움 → 니코메디아)
- 동방 부제: 리키니우스 2세[18]
3. 구조
사두정치는 다음과 같은 구조이다.
- 황제는 정제와 부제로 나뉜다. 정제는 부제보다 높고, 부제를 원칙적으로 지휘통솔할 수 있다.
- 전체 구성은 정제 2명, 부제 2명이다. 제국 전체를 4분해서 서방 정제-서방 부제, 동방 정제-동방 부제로 나눈다. 다만 제국을 정식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담당구역을 지정하는 것이다.[19][20]
- 정제는 일정기간 통치한 다음 은퇴하고, 부제가 정제로 승격하여 새로운 부제를 임명한다. 단, 여기서 일정 기간은 딱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정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적절한... 기간[21] 이다.
- 각 황제들은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서 군사적 지휘권을 보유하고 해당 방면의 방어를 책임진다. 대규모 전면전 같은 사태가 나면 황제들끼리 회의하는 등 과정을 거쳐 다른 황제로부터 군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 1차 사두정치에 한해서, 동방 정제가 가장 우월하고, 군사적 측면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 대해 전체 권리를 가진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대규모 전면전을 위해 다른 황제와 군대를 동원하고 황제를 임명할 권한 등을 보유한다.
4. 장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를 만든 이유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방어의 효율성 증가. 황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 내란의 조기진압. 황제 4명이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조기에 진압한다. 종합하자면 내란을 단순한 소란으로 끝냄으로써, 내란이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되어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다.
-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5. 문제점
그러나 사두정치가 존속력이 강하지 못하고 대규모 내전으로 끝난 이유는 아래와 같다.
- 황제가 여러 명이다. 즉 국가에 최고 지도자가 여러 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곧 단일황제로 통합되기까지 내전이 발생하거나, 각자 국가를 찢어서 나누어 가지는 분할상태가 돼버린다.
- 1차 사두정치의 성격 자체가 다르다. 원래부터 단독황제고 모든 권력을 가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직접 유능한 장수와 동료를 골라서 황제로 임명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군사력만 대여 형식으로 배분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유지가 가능하다. 즉 1차 사두정치는 말만 사두일 뿐, 실제로는 황제 한 명과 부하 3명이다. 페르시아에서도 첫 사두정치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방부제였던 갈레리우스 측을 군주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이런 포인트를 확실히 알고 있었고, 로마 측도 처음에 그렇게 '부제는 군주 비슷한 무언가지만 실제 군주는 아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공포했거나, 내지는 페르시아의 그런 시각을 묵인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건 1차 사두정치 때만 가능한 이야기므로 2차 때에 이르면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 실력 위주로 황제를 선발하다보니, 사람들이 보통 인정하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중요한 왕위계승권이 있는 황제의 아들을 제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장 내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제위에 오르지 못한 황제의 아들이라는 점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온다. 사실 오현제 시대에서도 다들 아들이나 손자가 없었기에 양자로 다른 유능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으며,[22] 최후의 오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부자상속이 이루어져서 최악의 암군인 콤모두스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6. 영향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이후의 황제들도 공동황제제도를 활용하긴 했으나, 그 대상을 황제의 자식이나 황제의 형제 등 '''친족으로 한정'''했으며, 일시적인 제도로 유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서로 내전이 발생하거나 기타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서 항구적인 제도로 존속하지는 못했다.[23] 하지만 사두정치는 향후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동서 분열의 시초가 되었으며, 제국의 중심지가 본래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에게 해 주변의 동방[24] 으로 완전히 옮겨지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 테트라(tetra-)는 그리스어로 4를 뜻하는 접두사이다.[S] A B C D 선임 황제[2] 영단어의 그 시니어 맞다.[3] 누나의 아들이었다고 한다.[4] 정략결혼을 위해 본처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를 버렸으므로.[5] 브리타니아 원정 중이었으므로 전시였기에, 실력이 있다면 그걸 드러내기는 평시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다. 더구나 내전이라면 정치적 부담이 있지만, 대외전쟁이면 부담이 전혀 없다.[6]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1년간[5] , 휘하 군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천천히 군심을 모으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 타계가 가시권에 보이자, 여차하면 추대해달라고 미리 뒷공작을 했을 확률이 높다. 콘스탄티누스가 무슨 억울한 조선 왕족 A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추대를 한다는 것이 혈통적 요소가 약하고 군사적 실력주의 문화가 강한 로마에서는 어려웠으니까.[7]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에 비해 콘스탄티우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다. 그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였다. 그의 서자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하다. 사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8]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9]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10]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죽였다는 팩트가 확고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11] 저 회동 자체가, 물론 사두정치를 지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사두정치를 파괴했다고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12] 막시미아누스에게 정제로 추대받으나 진짜 정제는 312년부터 시작[13] 서방 정제에서 동방 정제로 이동[14] 동방 부제에서 동방 정제로 계승[15] 선임 황제(317~324) → 단독 황제(324~)[16] 콘스탄티누스를 단독황제로 만든 1등 공신이나 326년 처형당함[17] 317년 처형[18] 리키니우스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326년 크리스푸스와 같이 처형당함[19] 몇십 년 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타계하고 나서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행한 소위 '동서로마 분할'도 이것과 같다. 하지만 이후 다시 합쳐지지 못한 채 서방이 망했기에, 이 '마지막' '구역 지정'을 그냥 '분할'이라고 후대인들이 부를 뿐이다.[20] 영어로는 영어 위키백과 등 여러 자료에서 just an administrative division, 즉 행정구역 분할이라고 칭한다.[21] 정확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제외하고는 죽은 다음[22]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5촌 조카이긴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의 외사촌이 트라야누스다. 반대로 말하면 트라야누스의 고종사촌의 아들이 하드리아누스다. 부자상속이 아니라고 해서, 5현제끼리 전부 혈연이 서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23] 특히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이게 심하다 : 부자 간, 심하면 '''조손 간'''까지(...) 할아버지뻘(종조부 등)과 손자뻘이 아니라 진짜 친할아버지와 친손자다![24] 발칸 반도(그중에서도 그리스와 트라키아)-소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