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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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bi
ソンビ
书生/書生[1]
سونب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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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조원역을 맡은 배용준
1. 개요
2. 역사
3. 소양
3.1. 토론
3.2. 활 쏘기
4. 현대의 인식
4.1. 모화사상
4.2. 무능함과 한계
4.3. 반론
4.4. 결론
5. 여담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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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禮, 올바른 삶의 길)가 아닌 것에는 눈길도 보내지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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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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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파소

사전상 의미는 예전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나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 영어로는 한국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화하여 Seonbi라고 부른다.
항간에서는 선비라고 하면 조선조의 지식인들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인데 고려시대 말기에 신진사대부조선을 세우면서 유학을 나라에 널리 장려하려고 하자 선비를 '유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이라 해석하게 되었다.[2] 따라서 선비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과,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당시 유학을 공부하던 사람은 대부분 양반들이었기에 점차 양반 계급(사족)을 의미하게 되었다. 때문에 유교적 선비는 고려시대때 다소 생소한 것이었지만 명나라의 제도를 많이 들여온 조선시대로 한반도에서도 보편적인 계층과 전통이 되었고 조선 선비만의 이미지(?)도 형성하게 된다.
선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벼슬 없이 유학 연구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조선시대 사회지도층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대개 양반과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공부 안 하고 놀고 먹는 놈들은 그 당시에도 선비라고 불러주지도 않았다.
어원은 고대 한국어인 '션븨'라고 한다.[3] 용비어천가계림유사에서도 확인되는 어휘이다. 제주어에서는 옛 어형에 조금 더 가까운 '선베'라는 어휘가 있다.

2. 역사


한자로 선비 사() 자는 춘추전국시대군주귀족에게 고용된 관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4] 때문에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士를 우리말로 해석할 때 선비라 하지 않고 '됴사(朝士)' 즉,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하는 선비라고 칭했다. 한편 같이 선비를 뜻하는 한자인 유()[5]는 조선 전기부터 선비라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도덕을 지키고 학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한편 예부터 士는 공, 후, 백, 자, 남과 같은 제후나, 대부(大夫)와는 달리 영지를 받지 않고 봉급으로만 먹고 사는 계층이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공자가 가르친 인재들이 모두 나중에 士가 되었는데, 공자가 가르치던 자들이 누군지 생각하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사람들도 얼마든지 학문을 통하여 士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그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야합(野合)을 통하여 공자를 낳았으므로 士란 혈통에 의한 것도 있으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6]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士는 전시에는 장수가 되어 싸웠다. 과거에는 문무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선비는 춘추전국의 사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학자형 인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싸움이 잦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안정적인 통일국가가 자리잡아 가며 지금과 같은 문무의 구분이 생긴 것. 한자인 士자 자체가 도끼의 모양에서 따온 상형문자라는 주장도 있다. 춘추시대의 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에 수레(전차) 1승(乘) 이상을 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순신 같이 학식이 높지만 직업이 군인인 사람도 얼마든지 선비의 범주에 포함된다.[7] 이들의 경우 말 그대로 무사(武士)라고 할 수 있다.[8] 추가로, 일상적으로는 거의 안 쓰이긴 하지만 '선비인 장수'를 뜻하는 유장(儒將)이라는 단어도 있다.
조선시대 때는 사족(士族) 혹은 사대부(士大夫)로 칭해지기도 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양천제(良賤制)라 하여 천민이 아니면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나 이들 사족(士族)들은 과전 등의 토지를 국가에서 지급받아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농공상민과는 다르게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을 통과해 사회 지도층을 거의 다 독점하였고 차츰 우리가 잘 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으로 분화되게 된다. 조선 시대에 비양반 계층의 과거 합격 및 관직 진출 비율이 타 문화권에 비해 매우 높았던 것은 맞으나, 이들 상민층 합격자들도 대부분 자식을 공부에 매진시킬 수 있는 부농이나 대상 집안 출신이었다.

3. 소양



3.1. 토론


선비들은 토론을 주요한 의사결정 방식으로 꾸준하게 사용했다. 논어(論語)의 헌문(憲問) 편에 있는 “비심이 초창(初創)하고, 세숙이 토론(討論)하며, 자우가 수식(修飾)하고, 자산이 윤색(潤色)한다”는 구절은 선비들 글쓰기의 금과옥조였다. 토론은 선비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논리와 이치를 바루는 데 썼던 진리 탐구의 대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토론이 글을 짓는 데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토론은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최선의 해법을 찾는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왕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두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견해를 개진하고 상대방 주장의 잘못을 논파했다. 『세종실록』에 그 좋은 예가 있다.
세종 14년, 세종은 원묘를 새롭게 만들 것을 논의하게 한다. 원묘란 공식적 종묘 외에 따로 세운 실묘를 말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조상을 산 것처럼 모시려는 효성의 상징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세종은 그때까지 문소전과 광효전으로 나뉘어 있던 원묘를 한 군데로 모으고자 했다. 이 자리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놓고 조정에서 토론을 벌인다. 고중안과 최양선은 도성 북쪽 자리가 불가하다고 하고, 안숭선과 이양달은 가하다고 주장한다. 토론이 끝나자 왕은 이튿날 아침에 하교하겠노라고 말한다(1월 15일).[9]
이러한 방식으로 토론은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문화가 제도화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경연이다. 이 경연이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나 정조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활발했고,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 시기에는 폐지되었던 것을 보면 토론이 선비들의 소양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 활 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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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쏘기가 교양과목이었기 때문에 활쏘기를 익힌 선비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공자 이래로 士의 교육과목은 6예(예, 악, 사, 어, 서, 수)였는데, 구체적으로 예는 단순 매너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의례(儀禮)절차를 배우는 것이고, 악도 그냥 음악만 말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의례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포함하는 것이다. 대충 매너 좋고 시 좀 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사와 어는 전차를 타고 활을 쏘는 춘추시대의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서와 수도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10]
그러니까 선비, 즉 라는 건 관료가 되기 위해 특화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를 놀고 먹는 한량과 혼동하지 말자. 또한 실제로 조선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의병들은 거의 모두가 선비들이 일으킨 것이다. 평범한 마을에서도 선비들은 지역의 지도자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을 제대로 결속시킬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선비밖에 없었다. 이는 선비들 중 전투 및 지휘에도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곽재우고경명, 조헌 등의 인물들이 있으며 안중근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다 알고 보면 선비적 소양을 닦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11]

4. 현대의 인식


상기했듯이 선비 자체는 나쁜 뜻이나 직업이 아니다. 자기 향상에 힘쓰고, 면학을 지향하는, 일견 학자와 비슷한 꼴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 선비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권도나 융통성을 발휘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을 씹선비라고 속칭하기도 하는 것이 일례.
비록 효도와 같은 파편이 민간에 남아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명칭과 관계 없이 부모에 대한 감정 등이 일방적이거나 과하지만 않다면 상식 수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효도, 효자라는 개념을 말하거나 강변하는 이들도 아직 한학이 고급 지식으로 취급될 적에 성장한 중장년배들이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우리나라 지폐에 조선조 거유로 대접받는 학자들의 초상이 들어가 있지만, 사실상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한국인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시큰둥한 경우가 많다. 군사적 인물들, 이를테면 이순신이나 그외 이름을 날린 과거 군인들이 꽤 대접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군사 분야에 관련된 인물들은 인기를 끄는 건 마찬가지지만...

4.1. 모화사상


조선조 선비 대부분은 극심한 모화사상 견지자들이었다.
그나마 초창기[12]에는 그래도 나았다. 이때는 명분에만 따르는게 아니라 실리를 추구했기에 이 시기는 좀 많이 모화사상에 취한 이들 아니면 사대교린을 실리적인 측면으로 해석해 심지어 세조 때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대접이 시원찮았던 적도 있었다. 진짜 문제는 초반기만 해도 실용적이었던 이것이 갈수록 교조화되다 보니 우리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모습으로 변질된것 광해군 시기에 대북파 신하'들'이 "나라가 망하더라도 중국을 따르겠다!" 라는 식으로 주장했으니 말 다했다.
[14] 이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에서 나오는 영향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트남이고 일본에서 조차 소중화사상과 더불어 중국학이 대대적으로 들어왔다. 당시 에도 바쿠후에 물 밀듯이 들어온 관학(퇴계학 부류)와 중국학과 불교로부터 일본 고유의 문화를 지키자고 나온게 고쿠가쿠(국학)이다. 그니까 이게 딱히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는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건데 이는 조선이 마냥 청나라의 종속적인 형태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도 작용된다.[15]
더 큰 문제는 이게 진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관복을 바꾸려고 했는데 신하들의 반대 주장 중에서 "명나라가 준 것인데 어찌 바꿉니까?" 라는게 있었는데 명나라는 200년 전 멸망했고 관복은 근 500년전부터 입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나라가 멸망하고도 200년 조선이 건국하고도 50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거에 매여 있던것 심지어 만력제 등을 제사지내던 만동묘에 제사지내는건 1931년에도 있었다.

4.2. 무능함과 한계


유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 뿐만이 아니라, 선비 혹은 선비를 지향했던 자들 자체에 대한 혐오도 있다. 일단 유교 경서는 현대에도 대학교나 여타 기관 등에서 추천 도서에 넣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명저 취급을 받는 편이다. 문제는 오로지 이것만을 전적인 교양으로 삼았을 때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다.[16]
국가의 정치인, 혹은 일반인이라도 살아가고자 하면 당연히 익혀야 할 다른 상식, 교양이 있기 마련이다. 나라의 정치인이 가장 기본적으로 신경써야 할것은 도시 정비하는 법, 호적을 정리하는 법, 경제를 끌어올려서 세수 올리는 법, 군사력을 올려서 이웃 국가를 경계하거나 잡아먹는 법(현대에는 잘못된 사상이지만) 등 얄팍하게라도 머리를 굴려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있는데, 정치인이라는 작자가 오로지 유교라고 하는 하나의 학문의 경서만 공부하고 행동 지침으로 삼으면 저것조차도 할 수가 없다.[17]
경제적 지식을 쌓지 못했으니 경제가 바닥이고, 경제가 바닥이니 민생과 군사력도 바닥이고[18], 민생이 바닥이니 유의미한 개혁을 할 수가 없으며, 군사력이 바닥이니 외침으로 인해 국가가 초토화된다. 그럴 때마다 상대를 오랑캐라고 모욕하지만 변변한 저항조차 못한 채 매도만 일삼으면 그걸 현대의 속된 말로 '입만 살았다'라고 하는 그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개화기 이후 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각축으로 조선이 몰락하는 과정에서도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 대다수도 시대적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의 질서 복고와 기득권 사수 등 개혁을 반대하고 피지배층 수탈을 강화하는 반동적인 행동으로 항일 의병이나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시키는 행동으로 기득권만 지키려는 사람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종국에는 저런 부작용들이 식민지화 및 19~20세기 동안의 극빈이라는 최악의 결과물로 나타난 바가 있어서 근대 지식인들에게 성리학과 함께 많은 비판을 받았다.

4.3. 반론


사실 이건 대중적인 인식에 가깝고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일단 선비들이 유교 경전에 빠저서 국가의 경제력도 망치고 군사력도 망치고 유교에 빠진 광신도들로 묘사하는 말이 많은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당시 조선에서 정권을 많이 잡고있던 서인들은 이이의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회 개혁적인 정책을 많이 주장했다. 실제로 이게 실현되기도 했다.
서인들의 후신인 노론들의 개혁 정책도 마찬가지다. 신분제 완화, 여성교육 중시, 여군 창설, 내수사 약화, 조선의 금납화 주장[19] 등 과연 선비들이 유교에 빠진 광신도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스런 모습이 많다.
신문물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선비들이고, 한국에 선교사 없이 당대 사람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된 것도 천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문을 배우던 선비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이 영향으로 최초의 한국 가톨릭 성직자들도 과거 선비였던 사람들이고, 조선인 최초로 라틴어, 프랑스어 등 서양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조선의 근대화를 시작한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그리고 실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당장 실학자 중에 중상학파는 청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본받아 한다고 주장하고 정약용처럼 중농학파 경우 기존의 제도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개혁하려는 경세유표 경전을 만드는 여러가지 신경을 썼다.

4.4. 결론


이미 유교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공자왈 맹자왈 이나 하는 쓸데없는 학문' '멍청한 학문' '한국을 망친 학문' 이렇게 부정적으로 박혀있고, 일본인들에게 인식이 좋은 사무라이와 대비되는데, 물론 일본에도 수구적이고 (현대인 기준) 무능한 사무라이도 많았지만 막말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도 사쓰마나 조슈, 도사의 사무라이 계층이었다. 결과적으로 완벽히 몰락한 선비계층과는 다르게 사무라이와 그들의 소위 무사도에 대한 인식은 근현대 일본에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녹아들게 된다. 정작 그 무사도는 유교적 개념(본분을 다한다던지, 충의를 지킨다던지)을 진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싫어하는 것은 유교 그 자체보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시작된 유교랍시고 그 사상을 곡해하거나 왜곡하여 유교로부터 상당수 내려받기는 했지만 원래의 유교로부터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일본사무라이가 있듯이 한국에는 선비가 있다는 식으로 한국의 브랜드화 홍보를 하자는 의견도 있다. 선비하면 붓과 유교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선비들은 필수 교육 과목인 6예(六藝)의 하나인 궁술을 갈고 닦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선봉장들 다수가 선비와 양반 출신이었던 것처럼 직접 몸으로 행동하고 나라를 위해 국가를 발전시키고 지킨 훌륭한 선비도 분명히 있다. 일부 선비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근대화를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벼슬이 없었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마냥 "좋은 선비는 죽은 선비"급의 선비의 존재 자체를 악질로 규정하고 까내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하필 그런 선비와 유교가 지배한 조선의 결말 때문에 한국에서 선비는 구시대의 부패한 지배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매우 많고, 선비의 본질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 사상'이 현대인에게 와닿지 않는 것을 넘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며, 아래의 은어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선비같다는 말이나 선비라는 말 자체가 비하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무리하게 선비를 브랜드화하려고 시도하면 국뽕이라며 역효과만 날 가능성이 높다. 가령 사무라이나 닌자 등과 같은 일본 문화가 내수적, 혹은 세계적 인기를 끄는 것도 일반인이 좋아할 만한 군사 분야, 전쟁 분야와 관련됐기 때문이며 사실이었든 그렇지 않든 사무라이는 본질이 군인이기에 무언가를 지킨다는 인상이 남아있어 어느 정도의 인기는 구가할 수 있었다. 선비는 일반인에게 있어 대체적으로 인식이 무언가를 지키는 것이라기보다 통치하고 군림하는 정치인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한국에서 브랜드화할만한 컨텐츠가 선비'밖에' 없는 것도 아니라 굳이 선비의 브랜드화를 무리하게 진행할 필요도 없다.

5. 여담


  •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는 흔히 위의 예시사진의 배용준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대표외출차림 모습으로 묘사되며 학처럼 단아하고도 수수한 멋으로 조선시대배경 게임들에서도 플레이어들에게 인기가 많다. 아래 예시사진의 캐릭터들은 천하제일상 거상의 플레이어 캐릭터들. 왼쪽의 플레이어 캐릭터가 도포의 겉에 걸친 민소매 겉옷을 '답호'라고 부르는데 사대부들이 갓쓰고 도포를 입을 때 도포 위에 덧입는 조끼 용도의 겉옷이었다.
~~말티엘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성역에 선비가 등장합니다 "이리오너라, 이 미천한 악마 놈들아!"
  •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는 가끔 용왕에게 붙들려가서 축문을 써준다거나[20], 염라대왕의 후계자가 된다거나[21] 하는 등 선계에도 관여하는 듯 하다. 이런 식으로 도교불교의 신화와 얽히는 선비들은 퇴계율곡 이전의 고려시대의 느낌이 남아있는 지식인들이다. 원래 고려시대 때는 불교사찰이 학문의 중심지였고, 조선전기에도 공부를 하러 사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라고 다 같은 선비는 아닌 것이다.

6. 같이 보기


[1] Shūshēng, 슈셩, 서생.[2] 이러한 해석은 용비어천가에 실려있다.[3] 여기서 '븨' 부분은 조금 더 오래된 어형에서 아래아 + l로 등장한다.[4] 원래 의미는 전쟁에 수래 1승(乘)을 낼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함. 천승지후, 만승(천자를 의미)라는 말이 있었듯 지방의 잘사는 집안을 의미했음.[5] 원래 문자 자체는 제사를 지낼때 옆에서 절차를 말해주는 사람을 의미함[6] 서양Knight도 혈통에 의한 신분 계승과 자기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된 경우도 많으므로(나이트 베츌러) Knight의 동아시아 번역어가 騎士인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士는 그야말로 '문무겸전 관리'라는 이미지가 크고 knight는 '무인이자 영지의 관리자'라는 이미지가 크다.[7] 이순신이 직접 기술한 난중일기에서 사용된 어휘를 보면 이순신의 학식이 보통 이상의 성취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문체들이 군인답게 무미건조하고 행정, 사무에 관련된 용어들이 다수이기는 하나 스스로와 나라가 위급한 순간이었던 명량 해전이나 어머니와 아들의 사망에 대한 기록 등을 보면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공문서를 다루는 관리로서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들 역시도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열두 척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등의 기록에서 보다시피 명문장이 많다.[8] 보통 바다 건너편 애니메이션이나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자객이나 사무라이(侍)만 무사인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사(武士)의 뜻은 글자 그대로 무예에 종사하는 선비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크게 되려면 어느 정도는 유학적 소양이나 행정 실무 능력은 갖춰야 했고, 막부 중후반기로 갈수록 이들에게 요구되는 학식과 교양, 행정 실무 능력이 늘고 무예의 비중이 줄며 아예 은 장식으로만 차고 다니면서 정작 쓸 줄은 모르는, 사실상 문관인 사무라이들이 수두룩해졌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과거에는 사족(士族)이라는 칭호로 불린 적이 있었다. 애초에 '사무라이' 의 한자는 '모실 시' 자를 쓴다. 시종, 시비 할 때의 그 시. 원래 귀족들을 모시다가, 가마쿠라 막부 붕괴 후부터 실권자가 되었기에 그 뿌리가 '모시는 자(servant)'인 것이다.[9] 결론적으로 영정을 두던 문소전과 신위를 두던 광효전을 합쳐 원묘를 만들고, 원묘의 명칭에 대한 논의 끝에 문소전으로 정한다.[10] 이 중 한국은 문무 중 문에 특화된 유교적 선비가 를 대표하게 되었고, 일본은 무에 특화된 사무라이(侍)가 士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11]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인 '도마' 라는 세례명이 있으나 남겨진 유묵의 내용이나 유년 시절 받았을 한학교육을 고려하면 천주교 신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교적인 선비에 가깝다.[12] 개국~조선 초반[13] 이건 당시 실학자들도 조선의 문제점을 과도하게 과장하여 비판할때 쓰기도 한다. 즉 조선 선비들은 과장하여 말하는 말이 많다.[14] 근데 이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게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엄청난 도움을 준게 명나라 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하들이 과장하여 말하는[13]것이 많은데. 이를 보면 임진왜란당시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를 버리겠습니까? 라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다.[15] 간단하게 생각하면 저기 야만족(청나라)이 천자국(명나라)를 멸망시켰어도 우리는 저런 야만족(청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이는 훗날 영조때에도 그렇고 대중화사상이라는 형태로도 나온다.[16] 이를 잘 보여주는게 조광조.[17] 이전까지만 해도 훈구파의 평가가 나빴다가 그래도 현재는 훈구파의 평가가 좀 더 올라간것도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부패했다든가 하는 식의 안좋은 모습도 있긴 했지만(사실이긴 하다.) 문제는 그럼 사림파는 얼마나 대단하냐면 별로 훌륭한 점이 없었다. 훈구파가 부패한 현실정치가라 가정한다면 사림파는 현실적 능력이 아닌 유교의 경전과 교리에 빠진 근본주의자로 현실 정치에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부류였다. 심지어 개념까지 없었다.[18] 경제력이 높아도 무조건 민생과 군사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로, 북송은 경제력은 엄청났지만 군사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청나라 역시 경제력으로는 서구열강들을 압도했으나 열강들에 비해 여러 기술들이 모자랐으며 정예병인 팔기군마저 약화되어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일전쟁 등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19] 심지어 송시열이 주장한 것도 많다[20]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21]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