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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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一葉
1896 ~ 1971
비구니이자 여류문학가.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 출신#으로, 본명은 김원주(金源珠)#이며 법명은 김일엽(金一葉)[1] 이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신여성으로 유명했다.
아버지 김용겸(金用兼)이 개신교 목사였던 관계로, 20대까지는 교회에 다니며 성장하였다. 그녀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찍 개화하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세학교와 평안남도 진남포시 삼숭학교를 거쳐 서울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닛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렇듯 원래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후에 불교로 개종하게 되어[2] , 만공(滿空)이 있던 예산군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입적한 뒤 수덕사에서 다비하였으며 사리탑이 수덕사에 있다.
문학활동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같은 해에 창간된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한 바도 있다. 활동하였던 문학영역은 시, 소설, 수필 등 분야이며, 192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新女子)》를 간행하여 스스로 그 주간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을 하는 한편, 동아일보사 문예부기자, 《불교(佛敎)》지의 문화부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하며 지위향상운동을 폈다.
그녀의 문학적 특성은 예술성보다도 주제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그다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에 여성으로서 대담한 사회활동과 아울러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오랫동안 폐쇄된 규범 속에 묻혀 있어야 하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사회진출과 문학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작품으로는 소설에 〈계시(啓示)〉 · 〈자각(自覺)〉 · 〈순애의 죽음〉 · 〈사랑〉 등이 있고, 시에 〈추회(秋懷)〉 · 〈이별〉 · 〈동생의 죽음〉등과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文宣閣, 1962) ·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휘문출판사, 1965) 등이 있다.
출가 전에 혼인을 2번 했었다. 1918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사인 이노익과 결혼했으나 1921년 이혼했고, 1929년 대처승인 하윤실과 재혼했으나 1933년 다시 이혼하고 출가했다. 또한 이노익과 이혼한 뒤 일본인인 오타 세이죠와 연애해서 아들을 임신했으나, 세이죠의 집안[3] 에서 반발이 매우 심해서 김일엽이 먼저 포기하고 떠났다. 출산한 뒤 아들은 김일엽의 친구인 송기수의 양자로 들어갔고, '송영업'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후 일본에 유학을 가서 화가가 되었다. 송영업은 어머니를 찾아서 수덕사에 자주 찾아왔지만,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거라'라며 냉정하게 대했다고.
아들인 송영업의 삶도 제법 드라마틱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는데 다행히 전공을 살려서 군종화가로 복무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의붓아버지인 송기수를 찾으러 황해도 신천군으로 갔다가 그대로 북한에 억류되었으나 실력을 인정받아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며 지내게 되었다. 이후 해주시를 통해서 월남했고, 이전에 그림을 배운 이당 김은호 화백과 지내다가 사정상 일본에 다녀올 예정이었으나 하필 일본에 간 뒤 6.25 전쟁이 터지고 이후 한일 수교 문제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71년까지 일본에서 지내게 되었다. 게다가 앞서 말한 김일성 초상화 이력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서 꽤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이름을 김태신(金泰伸)으로 바꾸고 출가해서 일당(日堂)이란 법명을 받고 생활하고 있다. 월간조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