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덴노 대역설
1. 개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메이지 덴노가 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일본사의 음모론 중 하나.
2. 상세
이야기는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인 고메이 덴노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메이 덴노는 1867년 1월 30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는 온갖 의혹이 뒤따랐다. 고메이 덴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막부 측의 독살설과 이와쿠라 토모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고 본다. 심지어는 고메이 덴노를 '''변소에서 창으로 아래에서 찔러 죽였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1]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고메이 덴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무츠히토 황태자가 즉위한 것이 메이지 덴노이지만, 음모론자들은 고메이 덴노와 유약하고 퇴폐향락적인 무츠히토 황태자를 이와쿠라 토모미를 주축으로 한 유신 지사들이 암살해버리고 다른 이를 즉위시킨 것이 메이지 덴노라고 주장한다.
음모론자들이 메이지 덴노 대역설의 근거로 제기하는 주장들은
- 무츠히토 황태자는 예방접종을 받아서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고, 당연히 얼굴에 곰보 자국도 없었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입 주위에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메이지 덴노는 사진 찍기를 꺼렸으며, 곰보를 숨기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 겐지 원년, 즉 1864년에 일어난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무츠히토 황태자는 포성과 궁녀들의 비명소리에 놀라 실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대단히 위풍당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말을 타고 근위병을 사열했으며, 큰 목소리를 내지를 정도였다.
- 무츠히토 황태자는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고 매년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궁녀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즉위 후 메이지 덴노는 90kg의 거구로서, 측근들과 스모를 해서 냅다 던져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 무츠히토 황태자의 서예는 서투름 그 자체였고 정무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달필의 서예를 선보였고, 학문을 좋아해서 교양수준이 무척 높았다고 한다.
- 무츠히토 황태자는 황태자 시절에 말을 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즉, 승마를 못했던 걸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직접 말을 타고 싸울 정도로 승마에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를 100% 믿을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낸 루머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메이지 덴노가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했다는 점.(자세한 내용은 천황 항목 참고) 그렇다면 메이지 덴노 대역설이 사실일까?
3. 이야깃거리
당대 조선에서는 메이지 덴노 대역설 보다는 고메이 덴노 독살설이 더 널리 알려졌는데, 묘하게 고메이 덴노를 독살하고 메이지 덴노를 바꿔치기한 인물이 이와쿠라 토모미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로 알려졌다.[2] 또한, 몸이 약해졌다는 메이지 덴노가 진행해야 할 의무를 대신하였던 카게무샤(影武者)로 불리우는 오무로 토라노스케(내정), 미쓰쿠리 게이고(외교)로 대용하였다는 추측이 있다. 안중근이 공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5가지'로 언급하는 것 중에도 고메이 덴노 독살설이 들어 있고, 최익현의 격문에서도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 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다.' 라며 독살설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