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황실

 


皇室Imperial Family (of Japan)
일본 황실의 문장이자 관습상 일본 국장.
금빛 국화(菊花)를 본뜬 도안으로 사실상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근대(메이지유신과 개항)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소총부터 군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기 혹은 군사 장비에 국화문양을 새겨넣고 있고, 일본여권 표지 정중앙에도 대문짝만하게 새겨넣고 있다.
1. 개요
2. 용어
3. 구성원
3.2. 내정황족
3.2.1. 고쿄(皇居: 황거)
3.2.2. 센토고쇼(仙洞御所: 선동어소)
3.3. 미야케#s-3(宮家: 궁가)
3.3.1. 히타치노미야(常陸宮: 상륙궁)
3.3.2. 미카사노미야(三笠宮: 삼립궁)
3.3.3.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고원궁)
3.4. 단절된 궁가
3.4.1.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질부궁)
3.4.2. 다카마츠노미야(高松宮: 고송궁)
3.4.3. 가쓰라노미야(桂宮: 계궁)
4. 계승 순위
4.1.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4.1.1. 대책1: 여계 황족의 지위 유지
4.1.2. 대책2: 구(舊)황족의 복귀
4.1.2.1. 구황족의 갈래와 현재 상황
4.1.2.2. 구황가 목록 및 구황족 근황
4.1.3. 대책3: 후궁 제도(측실제도)의 재도입 및 이혼 인정
4.1.4. 대책4: 황별섭가 복귀
4.1.4.1. 황별섭가 후손
5. 여담
6. 한국인들의 일본 황실에 대한 시선
7.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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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황실'''(皇室)은 일본의 천황과 그 일족을 이른다.
일본천황들은 대대로 신의 후손(神様々の子孫)임을 자처해왔고, 이것은 근대 이전 일본인의 정신 세계를 구성하던 신토의 핵심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황실 외에 다른 사람이 황위를 노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었으며, '신을 참칭하는 불경한 짓'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막부#s-3쇼군들이 실권자가 되어 천황의 권한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그보다는 실권이 없는 덕에) 계속 황위가 유지되며 그 자손과 후손들에게 권력이 세습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입헌군주국과 달리 일본만은 현재까지 한번도, 적어도 역사기록이 시작된[1] 이후로는 역성혁명[2]없이 멀쩡히 혈통을 계승해 한 가계로 내려와서 이걸 '''만세일계(万世一系)'''라고도 한다. 일본 신화에서 초대 천황이라고 말하는 진무 덴노로부터 따진다면 2600년 이상, 역사적으로 실체를 인정받는 스진 덴노부터 따져도 2000년이 훨씬 넘는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가 아니라 6세기 초 케이타이 덴노부터 내려온 왕조가 현대의 일본 황실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1500년이 넘기 때문에 다른 왕조 국가들보다 가장 오래된 왕조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권력은 없는 상징적인 얼굴마담 [3]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라 시대까지는 제대로 권세를 휘둘렀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왕정복고/대정봉환) 전까지는 완전한 상징적 군주였다. 2009년 아키히토 천황(현 아키히토 상황) 또한 황실이 전통적으로 상징적 존재였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황실의 구성원들은 '''성씨가 따로 없다.''' 위에서 말했듯 일본 측의 논리로는 인간이 아니라 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든 국민이 성씨를 쓰는 현대 일본에서 성씨가 없는 사람들은 황실 일가 뿐이다.
일본 황실에서는 '탁음'이 들어간 이름을 꺼리는 풍조가 있어, 일반 일본인들 이름과 달리 이름을 지을 때 탁음을 넣지 않는다.
일본의 황실은 천황(天皇)과 황족(皇族)으로 구성된다. 황족은 내정황족(內廷皇族)과 미야케#s-3(宮家)로 구성된다.

2. 용어


들어가기 앞서 친왕(親王), 내친왕(內親王), (王), 여왕(女王) 등의 용어 설명이 필요한데, 친왕은 천황의 남성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친왕의 아내는 친왕비(親王妃)라고 한다. 내친왕(内親王)은 여성 자손을 가리키는 말이며, 평민과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평민으로 강등된다. 말하자면 '''신적강하(臣籍降下)''', 요즘 말로는 "황적이탈(皇籍離脫)"이라고 부른다.
1947년 이전에는 방계 황족들도 많고 화족(귀족) 제도도 있었기 때문에 귀천상혼 제도가 존재했으나, 1947년 미군정 통치시기 쇼와 덴노인간선언 이후 연합군(GHQ)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지침과 명령으로 신적강하를 하게 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화족은 모조리 평민이 되었다. 따라서 황족의 수가 줄어들어, 지금의 황족들은 평민과 결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신분이 황족이 아닐 뿐, 황족과 결혼하는 평민 배우자도 보통은 옛 황족/화족 가문의 자제이거나, 재력으로든 명성으로든 한 끗발 하는 명문가 집안 출신이다.
'''남자 황손은 평민 여자와 결혼해도 황족 신분이 그대로 유지되며 아내가 남편을 따라 황족이 되고[4]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황족이 되지만, 여자 황손은 평민 남자와 결혼하면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의 성씨를 따르며 평민이 된다.'''[5] 즉,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되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남자가 아내의 성씨를 따르고 처가를 계승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황실에서는 평민 남자와 황족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황족 신분을 계승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 그게 바로 역성혁명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게다가 1965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황실에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고 딸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기에,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하는 것도 사실상 어렵다.[6] 따라서 현대 일본 황실의 공주가 황족 신분을 유지하려면, 시집가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7]
천황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王/女王)이라고 부른다.[8] 현재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 외의 황족은 다 신적강하를 당했기 때문에 황실의 인적 풀이 줄어든 상태라 은 없고, 여왕은 워낙 장수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손녀들만 있다.
한마디로 친왕과 내친왕은 각각 천황의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이며, 왕과 여왕은 증손/증손녀 이하의 후손으로 생각하면 된다. 보통 친왕과 왕은 왕자로, 내친왕과 여왕은 공주로 통칭한다.
특이하게 황족 남자들은 모두 '히토(仁)'로 끝나는 이름을 짓는다.[9] 여자들은 '코(子)'로 끝나는 이름을 짓는다.[10] 그리고 성씨는 없지만 미야케#s-3(궁호)를 성씨처럼 쓰기도 한다. 황족 여자는 평민과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르고, 황족 신분이 박탈된다. 그러나 시집간 후로도 생활보조금인 500만엔을 매달 받고, 궁내청 대신 경시청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경호와 호위를 받게 된다.

3.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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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947년 '''신적강하''' 이후 남아있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직황족)이다. 출가한 경우 (출가)라고 표기하고 그 자녀들은 표기하지 않았다.
  • 다이쇼 덴노 (1879 ~ 1926) - 데이메이 황후 (1884 ~ 1951)
    • 쇼와 덴노 (1901 ~ 1989) - 고준 황후 (1903 ~ 2000)
      • 데루노미야 시게코출가 (1925 ~ 1961) - 히가시쿠니 모리히로 (1917 ~ 1969)[11]
      • 히사노미야 사치코내친왕 (1927 ~ 1928)
      • 다카노미야 가즈코출가 (1929 ~ 1989) - 다카쓰카사 도시미치 (1923 ~ 1966)[12]
      • 요리노미야 아츠코출가 (1931 ~ ) - 이케다 다카마사 (1926 ~ 2012)[13]
      • 아키히토 상황 (1933 ~ ) - 미치코 상황후 (1934 ~ )
        • 나루히토 덴노 (1960 ~ ) - 마사코 황후 (1963 ~ )
        • (1)황사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친왕 (1965 ~ ) - 키코 비 (1966 ~ )
        • 노리노미야 사야코출가 (1969 ~ ) - 구로다 요시키 (1965 ~ )[14]
      • (3)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친왕 (1935 ~ ) - 츠가루 하나코 (1940 ~ )
      • 스가노미야 타카코출가 (1939 ~ ) - 시마즈 히사나가 (1934 ~ )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친왕 (1902 ~ 1953) - 마츠다이라 세츠코 (1909 ~ 1995)[15]
    •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친왕 (1905 ~ 1987) - 도쿠가와 키쿠코 (1911 ~ 2004)[16]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친왕 (1915 ~ 2016) - 다카기 유리코 (1923 ~ )[23]
      • 야스코출가 (1944 ~ ) - 고노에 다다테루 (1939 ~ )[17]
      • 토모히토친왕 (1946 ~ 2012) - 아소 노부코 (1955 ~ )[18]
      •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친왕 (1948 ~ 2014)
      • 마사코출가 (1951 ~ ) - 센 소시츠 (1956 ~ )[19]
      •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친왕 (1954 ~ 2002) - 톳토리 히사코 (1953 ~ )[22]
        • 쓰구코여왕 (1986 ~ )
        • 노리코출가 (1988 ~ ) - 센게 구니마로 (1973 ~ )[20]
        • 아야코출가 (1990 ~ ) - 모리야 케이 (1985 ~ )[21]

3.1. 천황


'''현직'''
'''나루히토(徳仁)''' (2019.05.01.~)


3.2. 내정황족


내정황족은 천황의 가족 가운데서 천황의 아내(황후)와 천황의 할머니(태황태후), 천황의 어머니(황태후)와 천황의 아들(황태자)와 그의 가족, 천황의 미혼인 아들과 딸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현 천황의 직계 혈족이다.
황태자를 제외한 천황의 아들은 혼인하면 궁가(미야케#s-3)를 새로 창설하며, 딸은 혼인한 집안(궁가)의 성씨를 따른다.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에게는 혼인 이전 칭호라고 하는 일종의 '''아명(어칭호, 御稱號)'''이 있으며, 혼인 이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혼인이나 기타 여러 사유로 황족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과거에는 신적강하(臣籍降下)라고 했지만, 현대에는 황적이탈(皇籍離脫)이라고 한다.

3.2.1. 고쿄(皇居: 황거)


천황과 황후가 거주, 공무 수행하는 장소.

3.2.2. 센토고쇼(仙洞御所: 선동어소)


상황 부처가 거주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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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태자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継宮明仁親王) → 아키히토천황(天皇明仁) → 아키히토 상황(上皇明仁)

3.2.3. 황사(皇嗣)


황실전범에는 황태제(皇太弟)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황위를 잇는다는 뜻을 가진 '''황사(皇嗣)'''라는 호칭을 이례적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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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야케#s-3(宮家: 궁가)



미야케#s-3일본 황실전범에서 천황의 아들에서 손자의 작위인 친왕(親王)이 혼인한 이후 창설하는 가문을 말한다. 궁가에서 태어난 여인은 혼인하면 출가외인(出家外人)이 되어 궁가(황족 궁가 신분을 박탈)를 나가며, 궁가를 따로 창설할 수 없다.
각 궁가마다 궁호가 있는데, 본래는 친왕만 사용하지만 성씨가 없는 일본 황실의 특성상 궁호를 성씨 대신으로도 사용한다.
해당 항목은 현존하는 궁가만을 기술한다.

3.3.1. 히타치노미야(常陸宮: 상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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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陸宮
아키히토의 남동생인 마사히토(正仁, 1935-) 친왕이 1964년 9월 30일 츠가루 하나코(津軽華子, 1940-)와 결혼하여 새로 창설한 궁가. 두 부부 사이에서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24], 죽으면 곧 단절될 궁가 중 하나.

3.3.2. 미카사노미야(三笠宮: 삼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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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笠宮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다카히토(崇仁, 1915-2016) 친왕이 1941년 10월 22일 다카기 유리코(高木百合子, 1923-)와 혼인하여 창설한 집안으로 현존하는 궁가 중 유일하게 구 황실전범 시절 생긴 궁가다.
본래 미카사노미야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토모히토다카히토보다 일찍 사망하고, 토모히토의 미카사노와카미야는 사실상 별개로 존재했다. 그러나 토모히토의 아내 노부코 비는 시어머니이자 현 궁주인 유리코 비와 사이가 좋지 않을 뿐더러 토모히토 생전에 사실상 이혼 상태여서, 미카사노미야 집안의 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차기 궁주는 토모히토의 장녀 아키코 여왕이 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현행 황실전범 상 아키코 공주는 시집가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데[25], 아키코 공주는 이 점에 대해서 "각오가 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 다카기 유리코(高木百合子)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친왕비 유리코(三笠宮 崇仁親王妃 合子) - 현 궁주
  • 미카사노미야 야스코 내친왕(三笠宮甯子内親王) → 황적이탈 고노에 야스코(近衞甯子)
  • 아소 노부코(麻生信子) → 미카사와카노미야 토모히토친왕비 노부코(三笠若宮寛仁親王妃 信子)
  • 미카사노미야 마사코 내친왕(三笠宮容子内親王) → 황적이탈 센 마사코(千容子)

3.3.3.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고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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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円宮
노리히토 친왕이 1984년 12월 6일 톳토리 히사코(鳥取久子, 1953-)와 혼인하여 창설된 궁가. 사촌언니 아키코 공주와 달리 쓰구코 공주는 결혼을 희망하기 때문에, 히사코 비가 운명하면 궁가도 역시 단절될 예정이다.
  • 톳토리 히사코(鳥取久子) →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친왕비 히사코(高円宮憲仁親王妃 久子) - 현 궁주

3.4. 단절된 궁가


해당 궁가들은 아래에 나오는 세습친왕가가 아니라 직궁가의 궁가들을 말한다. 현행 황실전범 기준.

3.4.1.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질부궁)


1928년 9월 28일 야스히토 친왕이 마쓰다이라 세츠코(松平節子)와 혼인하면서 창설한 궁가로, 자손이 없었기에 궁주 부부의 사후 단절되었다.

3.4.2. 다카마츠노미야(高松宮: 고송궁)


1930년 노부히토 친왕이 도쿠가와 키쿠코(德川喜久子)와 혼인하면서 창설된 궁가다. 다카마쓰노미야는 방계 황족 가문인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유서천궁)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명칭으로, 다이쇼 덴노가 단절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대신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궁주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부부의 사후 단절되었다.

3.4.3. 가쓰라노미야(桂宮: 계궁)


1988년 1월 1일 쇼와 덴노가 만 40세가 되기 직전의 요시히토 친왕에게 궁호를 내려주면서 창설된 궁가. 궁주가 평생 독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가와 달리 궁주만 존재했다.

4. 계승 순위


'''순위'''
'''이름'''
'''천황과의 관계'''
'''생년월일'''
1
황사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동생
1965년 11월 30일, 58세
2
아키시노와카노미야 히사히토 친왕
조카
2006년 9월 6일, 17세
3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숙부
1935년 11월 28일, 88세
다만, 마사히토는 고령이고, 황사(皇嗣)인 후미히토도 조만간 고령이 되기 때문에, 거의 실질적인 1순위는 히사히토 친왕이다.

4.1.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현재 일본 황실에는 어린 남자 계승자가 현 나루히토 천황의 하나뿐인 남자 조카인 17살짜리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 하나밖에 없어서 수천 년 동안 내려왔다고 그들 스스로는 주장하는 황실의 혈통이 자동 단절될 위기에 놓였는데, 그 때문에 수많은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4.1.1. 대책1: 여계 황족의 지위 유지


사실 여계(女系) 천황은 고사하고, 천년 동안 일본의 황가는 살리카법처럼 여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에 여성 천황이 있었는데 여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니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여계 천황과 여성 천황은 전혀 다르다.''' '''여성''' 천황은 여자의 몸으로 천황이 되는 것이니 이 자체는 문제가 없다. 여성 천황의 다음 황위는 방계의 남성이나 같은 황가의 남성과 근친혼해서 낳은 자손에게 넘어갔기에, 과거 일본에선 여성 황족을 인정할지 말지 논란이 될 이유가 없었다.[26]
근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은 여성의 황위 계승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사실 1889년 제정된 황실전범의 초안에서는, 한때 여계 계승이 고려되기도 했다. 궁내성이 입안한 <황실제규> 1조는 "황족 중 남계(男系)가 끊어졌을 때 황족 중 여계로 계승한다." 하였고, 7조는 "황녀 또는 황통의 여계가 황위를 계승할 때는 그 황자에게 물려주며, 만약 황자가 없을 때에는 그 황녀에게 물려준다."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여러 논란이 되자 그냥 지워버린 것.
과거에 여성 천황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황실의 남자 씨가 마른다면 '만세일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전범을 고쳐서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 나루히토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것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문제는 황실에 남자아이라고는 아이코 공주의 사촌동생(5살 아래)인 히사히토밖에 없다. 때문에 아이코 공주와 혼인하게 될 사람은 평민밖에 없고, 황실전범의 신적강하 특성상 이렇게 태어나는 자손은 천황의 자식임에도 황족이 아니라는 기괴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고대처럼 친사촌 남동생인 히사히토혼인해서 자손을 가진다면 해당 문제는 없지만[27], 1990년 이후부터 30년의 걸친 나루히토후미히토간 권력다툼으로 두 집안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 이쪽도 고려할 수 없다. 더하여 법적으로는 사촌간 결혼은 허용되지만 일본 사회에선 터부시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서도 아니고 후계를 위함의 사촌간 결혼이라면 인식이 더 좋지 않을 것이다.
여계 황족 인정이란 이러한 황가의 모계 자손들에게도 황가의 지위를 주고, 필요할 때는(예를 들면 지금) 여계 자손이 천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 모계 자손이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논점과 무관하다.
  • 유럽 왕실에서는 이미 모계 왕위가 과거부터 있었고(프랑스는 제외[28]), 성평등이 과거에 비해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고려해 일본도 여성 황족들이게 천황 승계권을 주는 것과 여성 황족이 황족 이외의 사람과 결혼할 경우 황적이탈되는 것을 폐지해야 한다. 이것은 황족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 만혼이 대세인 현 상황에서 많은 아이를 얻기란 힘들고, 남아의 탄생도 기대하기 힘든 현실에 따라, 여성 황족들의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 방계 남성보다는 직계 여성이 잇는 것이 국민의 감정상에도 더 부응한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2018년 이후에는 특히 그런 반응이 강해졌다.
이에 대한 반론은,
  • 만세일계의 일본 황계에서 전통을 무시하고 여성 황족에게 황위를 줄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무시하고 그 전범(典範)[29]을 제정한 메이지 덴노를 능욕하는 처사이기에 안 된다.
  • 여성 황족에 대한 황위 계승을 허용할 경우, 여성 천황과 성이 이미 있는 남성의 혈통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황위를 계승할 수도 있는데, 이는 천황제의 정통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여왕이나 여계 상속이 흔했던 서양에서라면 별 문제가 없는 문제지만,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서는 흔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
  • 부마와 외손의 지위 문제[30]가 있다.
  • 구로다 사야코,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처럼 평민에게 시집가서 황적을 이탈한 여성 황족들의 신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가 문제다. 게다가 여계까지 인정해버리면 황족 인구가 다시 늘어나면서 들어가는 세금이 늘어날 것이라는 걱정도 덤이다.
현재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이쪽을 검토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논란이다. 여계 천황 및 황족 문제는 200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는데, 일본 황실은 남성 황족의 비율이 낮았기 때문. 히사히토 탄생 이전(2006년)에는 나루히토 천황 이후 항렬에 남자가 아예 없어서 여자 천황 허용 의견이 커졌는데, 히사히토 친왕 탄생으로 여자 천황 찬성 여론은 쏙 들어갔지만 그 뒤로도 나루히토 천황 이후의 항렬에서는 남자가 히사히토밖에 없다.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2019년 공무 재분배 당시 황적을 이탈한 황녀들도 일부의 공무는 맡길 방침이 있다는 걸 볼 때, 공무 문제는 일반인이 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시킬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동안 여자 천황에 부정적이었던 자민당에서도 여자 황위 계승권을 검토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나 # 정부는 남자 황족만 천황을 승계하는 기존 전범을 고수할 방침이다.#
한편으로는 여계 천황의 즉위를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 황실 내의 고질적인 고된 시집살이 문제의 일부도 상당히 해소될 것이다. 고준 황후마사코 황후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시집살이를 고되게 당해야 했다. 고준 황후는 어떻게든 그래도 아들을 낳았지만 마사코 황후는 그렇지도 않아서 시부모는 물론이요 황실 전체와 궁내청에게까지 고된 시집살이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고준 황후는 아키히토를 낳기 전에 딸이 4명 있었고, 마사코 황후에게는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있다. 자식이 없는 건 아닌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되게 당해야 했다는 것, 즉 여계 계승도 인정하면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즉위가 가능해 그냥 자식을 낳느냐 낳지 못하느냐만이 문제일 뿐 아들인지 딸인지는 문제가 안 된다.[31]
그리고 시집가서 왕실에서 이탈하는 공주를 특별직 공무원으로 대우하는 '코죠(皇女)'라는 직책이 신설될 전망이다.#

4.1.2. 대책2: 구(舊)황족의 복귀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947년 신적강하일본 정부일본인들의 동의 없이, 미군정이 강압적으로 한 조치이자 행정처분이다. 세습친왕가 제도는 1947년 미군정이 폐기하기 전까지 540년 가량 일본 황실의 전통이었다.[32]
  • 구황족들은 여전히 국영친목회(国營親穆会) 등의 활동 및 인척관계로 직황족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 법친왕(法親王)[33]이나 신적강하했던 황족이 황족의 부족 문제로 복권한 일은 이미 전례가 있다.[34]
  • 일본/출산율을 고려하면 히사히토 친왕 단일 직황족 유지보다는 4궁가 이상의 친왕가를 지킬 때 지금과 같은 남계 단절의 걱정을 덜 수 있다. 또한 황족의 단절에 이미 신적강하한 구황가가 복권해 대를 잇는 것은 이미 과거부터 있던 일이다. 즉, 주로 전통적으로 이미 있어왔던 일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국영친목회(国營親穆会)에서도 내는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역시 반론은 있다.[35]
  • 직계 여성을 제치고 방계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제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며, 현대 일본국 헌법과 국민 감정상 부합하지 않는다.

  • 구황족이 복권한 전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당시 황실전범과 같은 법률이 없던 먼 옛날의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 구황족들이 신적강하하기 직전인 1947년부터 적용된 현행 황실전범 15조에는 "여자가 황족과 결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존 황족 이외의 자를 새로 황족으로 할 수 없다."는 제한규정을 담았다. 따라서 황실전범을 뜯어고쳐야만 이들의 복권이 가능하다.[36][37]
  • 황실이 비대화만 하다면 의미 없이 세금을 낭비한다. 또한 갑자기 황족이 된 이들이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확보할지도 불투명하다[38]. 물론 이에 대해서는 화족 신분의 부활로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
  • 민간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황족의 품위를 지킬지 의문이다.[39]
  • 과거 황적에서 이탈했다가 복권한 뒤 즉위한 천황들은 최고 먼 항렬이 천황의 5세손이었던 반면, 현 구황족은 모두 20세손을 넘어가는 궁가들이다.[40]
  •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이상, 세습친왕가도 단절될 위험이 있다. 구황족 가문 중 아들이 없어 단절된 가문이 절반 가까이 된다. 안정적인 황위 계승자 확보를 위해서 좋은 방법이 아니다.[41]
구 황족 본인들은 여성 천황제 자체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구 황족 복귀에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다케다 가문의 발언들은 사실상 현 구 황족들 의견의 대변이었다고 한다. 특히 논란이 불거지던 2000년대 초반, 구 황족들이 당시 여성 천황 허락을 주장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만세일계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암살당해 마땅한 정치가!!"라고 날린 비난도 이들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보여준다. 즉 구 황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황족으로 여기고, 언제든지 황족의 위치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 구 황족들은 강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현 황족과의 다방면에서 교류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일본 황실조차도 이들을 여전히 황족에 준하는 집단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이들의 사고 방식을 보면 "현 황실조차도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황족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뭔데 우리가 다시 황족 지위로 올라가는 걸 반대하냐"라는 식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 적었듯 일본 내부에서도 구 황족들의 황족 복귀에 대해서 찬성과 반론이 너무나도 팽팽한 상황[42]이라 현실은 뭐라고 쉽게 말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해 여성 천황을 승인하든 구 황족을 정식으로 황족으로 복귀시키든 대책이 있어야 한다. 양쪽 중 하나는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히사히토가 자라서 단 혼자서 노력을 해서 남성 자손을 포함한 적어도 2명 이상의 자녀들을 반드시 낳기를 기원해야 하지만, 그건 일본 전문가 등도 주장하듯이 상당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마코 공주/결혼소동 이후 일본에서는 "구 황족 가문의 아들이 공주와 결혼하게 하는 방식으로 제한적인 숫자의 구 황족들이 현 황족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부마 후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게 구 황족 집안들 중에서 현 황족과 가까운 히가시쿠니 가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대대적인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구 황족들의 전면 등장보다는 현 여성 황족과의 결혼을 통한 우회적인 방식으로의 구 황족들의 황족 복귀가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구 황족 대변인 역할을 하는 다케다 가문의 극우 활동가조차도, 여성 덴노 및 여성 미야케 창설에는 반대하지만, 현 여성 황족과 구 황족 남성간의 결혼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구 황족들도 자신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황족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4.1.2.1. 구황족의 갈래와 현재 상황

이른바 요즘 논란인 구황족들은 1947년 미국에 의한 신적강하로 떨어져 나간 '''11궁가'''를 가리킨다. 본디 일본의 현 황족은 13세기 남북조시대 북조계열로 현 후시미계 직통이 기반인 3대 세습친왕가에 있었다. 각각 후시미노미야, 가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의 3가로 이 가운데 후시미 궁가가 적통으로 천황을 계속 내고 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는 15세기에 생긴 후시미계 방계 세습친왕가였다.
이렇게 500년 가까이 3가문의 세습친왕가를 유지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가츠라노미야가 200년의 시간 사이 이미 너무나도 황통과 먼 가문으로 바뀌고 후시미노미야 하나만으로는 후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17세기의 히가시야마 천황이 황통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만들었는데, 이 때 현 직황족의 혈통인 간인노미야가 탄생했다. 이것이 메이지 덴노 이전의 4대 세습친왕가이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로, 히가시야마 천황이 죽은 지 4대 70년 만에 후시미계 직계 황통은 고모모조노 덴노를 마지막으로 단절한다. 이때 간인계에서 고카쿠 덴노를 내면서, 황통은 간인계로 넘어갔다. 후시미노미야에서 간인노미야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 후시미노미야에서는 수많은 분가들이 나오는데, 이 가문들이 이른바 지금 구황족으로 부르는 가문 가운데 후시미계의 방계 9궁가이다. 이들은 모두 후시미 궁가의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伏見宮貞敬親王)'''의 아들과 손자들이 개창한 가문이었다.
1945년 패전 이전에 이미 세습친왕가 가운데 아리스가와노미야가츠라노미야 궁가는 단절했다. 1947년 미군정이 황실의 예산감축을 이유로 황실을 축소시킬 때 세습친왕가인 후시미 직계와 간인 직계 및 후시미 방계 9궁가를 모두 강등시키고, 끝내 다이쇼 덴노의 후손들인 직황족만 남았다.

4.1.2.2. 구황가 목록 및 구황족 근황

1947년 신적강하로 강등당한 구황가 중 후손이 남은 구황족을 보기 쉽게 '''이 색상'''으로 강조했다.
북조 3대 스코 덴노의 적장남 요시히토(栄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의 하나였다. 이후 쇼코 덴노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자 3대 당주 사다후사(貞成)의 아들 중 적장자인 히코히토(彦仁)는 고하나조노 덴노가 되었고, 차남인 사다츠네(貞常)는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다. 후시미계 궁가 10가문 가운데 종가(宗家)로 신적강하 당시 당주 히로아키(博明)와 그의 모친[43], 누이 2명이 강하했다. 현재는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만 3명이나 두어 장기적으로 남계(男系)로서는 단절될 예정이다.
113대 히가시야마(東山) 덴노의 차남, 나오히토(直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후시미계 마지막 직계 황통인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가 붕어하자, 2대 당주 스케히토(典仁)는 장남 하루히토(美仁)에게 친왕가를 잇게 하고, 6남 토모히토(兼仁)에게 황통을 계승시켰다. 이 토모히토(兼仁)가 바로 119대 고카쿠 덴노로 현 직황족의 직계 조상이다. 신적강하 당시에는 직황족을 뺀 간인가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당주 하루히토(春仁) 부부가 강하했다.[44] 전후 하루히토는 이혼했으며, 이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8년 단절되었다.
  •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후시미노미야 19대 당주 사다유키(貞敬)의 9남 모리오사(守脩)가 개창한 궁가. 이방자 비의 친정이다. 이미 개창 시기부터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2대 당주는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에서, 3대 당주는 구니노미야 가문에서 양자로 데려왔고[45], 4대는 구니노미야에서 신적강하한 구 화족[47], 5대는 혈연 관계가 없는 가문에서 한 종교단체 교주를 양자로 들였다.[48] 그러니까 2019년 시점에서 가문은 있지만 4대 당주 이후로는 황족이 아니다.[49][50]
  •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장남[51], 아키라(晃)가 개창한 가문. 일본판 양녕대군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장자였음에도 개차반짓을 하다가 황족에서 제명당했다. 그 뒤 고메이 덴노에게 빌어 황족으로 복귀하고, 야마시나의 궁호를 얻어 궁가를 개창했다. 신적강하 당시에는 3대 당주인 다케히코(武彦) 혼자 강등되었다. 다케히코는 가야노미야 구니노리의 막내딸인 사키코 여왕과 결혼했지만,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임신한 사키코가 별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깔려 죽으면서 정신병에 걸린 이후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7년 단절되었다.[52][53][54]
  • 구니노미야(久邇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4남 아사히코(朝彦)가 개창한 궁가로, 아키히토 상황의 친모인 고준 황후의 친정이기도 하다.[55] 가문이 매우 번창한 관계로 신적강하 당시 3대 당주 아사아키라 왕(朝融王) 본인[56]과, 어머니 치카코(俔子), 숙모 시즈코(静子)[57], 3명의 아들들, 5명의 딸들 중 장녀 마사코(正子)를 제외한 딸들[58]이 함께 강등했다. 가문을 유지하며 적장자가 있다. 현 4대 당주는 구니아키(邦昭, 1929-, 95세) 인데 문제는 이 사람의 큰아들(1959년생, 65세)과 작은아들(1961년생, 63세) 모두 남자 자손(자녀)[59]이 없다.[61]
  • 가야노미야(賀陽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장남 구니노리(邦憲)가 개창한 궁가. 2대 당주였던 츠네노리(恒憲)는 쿠죠 도시코(九條梅子)[62]와 결혼하여 무려 6명의 적자와 1명의 적녀[63]를 낳아, 후세가 번창했다. 그러나 적장남이 자식 없이 4대 당주를 이어받기 전에 자손이 없이 죽고, 차남인 하루노리(治憲)가 당주를 물려 받았으나 4대 당주 하루노리[64]는 후계자 없이 죽었다. 이후 당주 자리는 조카인 가야 마사노리(賀陽正憲, 1959-, 65세)에게 넘어갔다.[65] 5대 당주인 마사노리에게는 2명의 적자가 있다.[66]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당주 승계에는 문제가 없지만, 적장남이 대를 잇는 아사카·히가시구니에 비하면 좀 꿀린다고 한다.[67] 촌수로 보면 20촌 내외라 잘 언급이 되지 않지만, 1947년에 제정된 황실전범에 근거하여 계승순위로 보면 현재 남아있는 궁가 중 천황가하고 가장 가깝다.
  • 아사카노미야(朝香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8남으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개창한 궁가. 야스히코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 (富美宮允子) 내친왕과 혼인했다. 신적강하 때는 적자인 다케히코(孚彦)와 적손인 도모히코(誠彦)[68]가 살아 있었다. 대가 번창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로 여전히 이어가는데 현재 적장자가 있다. 현재 적장손인 아사카 아키히코(朝香明彦)도 또 독자다. 무려 4대 독자!! 정말 근근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69] 그런데 아키히코는 1972년생으로 현재 51세인데도 독신이라, 여기도 단절될 가능성이 높다.
  •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차남 요시코토(嘉言)[70]가 개창한 쇼고인노미야(聖護院宮)에서 출발했지만, 궁가를 물려받은 구니이에의 13남이자 요시코토의 동생인 사토나리(智成)가 이름을 기타시라카와노미야로 바꾸고 초대 당주가 되었다. 2대 당주는 구니이에의 9남이자 사토나리의 형인 요시히사(能久)가 당주 자리를 받았다. 3대 당주 나루히사(成久)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과 결혼했다.[71] 5대 당주 미치히사(道久)[72]가 살아 있었으나, 상술된 히로아키와 더불어 딸만 셋을 둔 관계로 미치히사가 죽은 2018년에 남계(男系)로서는 단절되었다.[73]
  •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9남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개창한 궁가. 현 구황족 가운데 가장 번영하고 있다.[74]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아들이 4명[75], 손자가 8명[76]이라서 후손이 많은 집안이기도 하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메이지 덴노와 후궁 소노 사치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내친왕과 혼인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모리히로(盛厚)가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과 혼인해서 3남 2녀를 두었고, 시게코의 사후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와의 사이에서 2남이 더 있었다. 즉 현재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은 시게코의 후손으로 따지면 쇼와 덴노의 후손이고, 시조 나루히코로 따지면 메이지 덴노로 올라가는 촌수로[77] 보면 가장 가까운 궁가에 속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구 황족을 죄다 신적강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본인이었다.
  • 다케다노미야(竹田宮)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의 서장자인 츠네히사(恒久)가 개창한 궁가. 현재 3대 당주는 다케다 츠네타다(竹田恒正)이다.[78] 구황가와 관련해 매스컴에 가장 자주 의견을 내는 궁가. 적장자가 있으며, 방계인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79]가 국영친목회의 대변인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있다.[80]
  •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17남 요리히토(依仁)가 개창한 궁가. 궁가의 당주였던 요리히토가 1922년, 당주비이던 가네코(周子)마저 1955년에 죽어 단절되었다.[81]
현재 '''가야·구니·아사카·히가시쿠니·다케다'''에게 후계자가 있지만, 이들도 히가시쿠니를 빼면 대부분 간신히 혈통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대 독자인 아사카는 물론이고, 구니도 젊은 구황족이 1명. 가야에 후계자가 2명. 다케다에 3명. 히가시쿠니에 후손들이 많지만 성을 바꿨거나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떠나거나, 신적강하 후에 태어나서 실제로는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82]의 자제들만 가문을 이을 만하다. 만약 구황족 복귀가 본격화한다면 이들에게 세습친왕가의 지위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 사실 덴노 집안이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결정적 이유는 신적강하를 한 이나 그런 이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부정해서다. 일본대한민국 민법에 규정된 성씨불변의 원칙이 없고 세습친왕가가 아니면 자동 신적강하라서 조선처럼 선제의 칠종질(七從姪 - 17촌 조카)이 뒤를 잇는 일은 없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본 황실의 황족 남성 부족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다. 직황족만 따지면 이미 메이지 덴노의 조부인 닌코 덴노 이래로 매우 아슬아슬한 계승을 이어 왔다. 가장 가까운 간인노미야는 1842년에 나루히토(美仁)대로 적통이 끊기고 후시미노미야에서 양자를 들였고[83], 메이지 시대에 메이지 덴노 다음으로 혈통적으로 가까웠던 레이겐 덴노 혈통의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메이지 덴노의 12촌)가 계승순위 1위였던 시기(1867년 2월 13일~1879년 8월 30일)가 있었을 정도로 황족 부족 문제는 고질적이었다.[84] 다만 당시에는 후시미노미야 계통 구황족들이 건재했고, 이후 다이쇼 덴노가 4명의 아들을 남기고 쇼와 덴노가 2명,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3명의 아들을 남기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아키히토의 즉위 당시만 해도 아래 세대의 남성 황족은 5명이나 남아있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황족 부족 문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어떻게든 남성 혈통을 찾으려해도 가까운 남계 혈통은 '''레이겐 덴노 이후'''의 후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어떻게 어떻게 발굴해도 현재 황족과 가장 가까운 남계 혈통이 '''직황족의 20촌 안팎이다.''' 게다가 히가시야마 덴노의 후손으로 한정하면 그 20촌 안팎이라는 혈통은 타카츠카사 가문으로 입양 간 자들의 후손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생각보다 방계를 포함해도 남성 황손 부족은 심각하다.[85]
2018년 여름 이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하여 현 상황의 타계책들 중 하나로 현 여성 황족이 구 황족의 자손과 결혼하는 방안이 그나마 현 황실전범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방안이 아니냐는 주장에 근거, 구 황족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일본 언론들이 이들 집안들을 추적해본 결과 카야, 히가시쿠니, 타케다에 50대 미만 미혼 남성이 합쳐서 9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고 이 중 히가시쿠니 집안이 5명, 카야 및 타케다가 각각 2명씩 총 4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히가시쿠니 집안의 미혼 남성들은 히사히토와 비슷한 나이대이며 가야노미야는 20대 초중반, 타케다노미야는 30~40대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각 집안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다. 우선 히가시쿠니 집안은 자손들이 너무 어린 나머지 현 여성 황족들과의 곧바로 결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나마 2018년 기준으로 성인 이상의 나이대라 현 여성 황족과 결혼이 가능한 카야와 타케다의 경우, 카야는 20대 초중반이라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 타케다는 상술했듯이 신적강하 이후의 행보가 여러 가지로 말이 많은 집안이라, 타케다와 같은 집단을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일본 국민이나, 현직 덴노인 나루히토마사코 황후가 이들을 복권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사실상 이들 구 황족이 현 여성 황족과 결혼할 가능성이 구 화족과 결혼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47년 당시 미야케#s-3들의 계승순위는 직궁가(현 천황가)>후시미> >가야>구니> >아사카>히가시쿠니> >다케다> 이었다. 1947년에 제정된 현행 황실전범은 1947년 이후 출생한 서자는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4.1.3. 대책3: 후궁 제도(측실제도)의 재도입 및 이혼 인정


매우 구시대적이고 정신 나간 발상이지만[86], 일본에는 이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로는 후계자 걱정이 없을 만큼의 자녀 출산을 기대하기 힘드니, 후궁 제도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부일처제를 오래 전부터 고수한 유럽 왕가가 후계자 부족으로 단절한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사실도 이런 주장의 근거로 든다.[87] 실제로 아들 때문에 후궁을 들인 사례도 있고.[88]
물론 현대 일본에서도 이런 주장은 대책없는(…) 것으로 여기기에 심각하게 논의하지는 않으나, 황족으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이 이런 주장을 대놓고 했으니 문제다. 심지어 잡지에도 이런 내용의 주장을 기고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 언론은 측실제도 재도입 주장은 빼놓고 다른 부분만 발췌하여 보도했으나, 외국에서는 '''"일본 황족이 후궁 제도 부활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내 황실전범 개정과 관련된 인사들도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며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빼고 진지하게 검토하더라도 측실제도가 다시 생기면 '''과연 어떤 여성이 후궁을 자원할 것이고, 후궁을 둘 것이라 예상되는 황족 남성에게 누가 시집 오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모든 국민은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하는데 황실만 예외로 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고, 결과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89] 그러나 이런 어이없는 주장이 나올 만큼, 후계자 부족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0]
이혼[91]을 인정하여 후계자가 없을 경우, 이혼하고 새로운 아내를 얻어서 자녀를 출산하자는 것이 골자이다. 후궁 제도보다는 덜 구시대적이나, 자녀를 못 얻는다는 까닭에 아내를 내치고 또 아내를 얻으면 부부 당사자에게 심각한 인권침해니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다. 게다가 '''아들 못 낳았다는 이유로 소박당하는 여자가 21세기에, 그것도 일본 정도의 선진국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나왔다간, 자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여성 인권 침해국가'라는 개망신을 당할 것이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여자가 불임이 아닌 이상에야 아들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남녀공동의 문제이다.[92] 구시대적 문제를 떠나서 논할 문제가 되어버린다.

4.1.4. 대책4: 황별섭가 복귀


'''황별섭가(皇別摂家)'''란 고셋케 문서에 나와있듯이 고셋케 가문들 중에서 황족을 양자로 받아들인 부계 혈통 상으로 황족이 당주로 있는 섭가를 뜻한다. 이 주장은 일부 호사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이치조(一条) 가문이 황실에서 양자를 들였다. 다만 이들 가문들도 나중에 혈통이 단절되면서 고노에 가는 무가이면서도 구마모토 번주 가문인 호소카와 가(細川家)[93]에서 양자를 들였고, 이치조 가는 황족을 양자로 받아들이기 전의 타카츠카사 가문에서, 타카츠카사 가는 데이메이 황후의 친정인 쿠죠 가[94]에서 양자를 들여서 현재 혈통상 황족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섭가 당주는 없다.
이들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부계 혈통 상 구 황족들보다 더 가까운 존재들이다.[95]
  • 태어났을 때는 신적강하한 황족의 후손이었다가 황족 반열에 올라 덴노로 즉위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구 황족의 복귀 반박과 비슷한 반박이 있다.
  • 이미 70여년 전에 황실을 떠난 구 황족의 복귀도 국민들의 반발과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심한데, 몇백년 전에 황실을 떠난 이들이 복귀한다고 하면 구 황족 복귀보다 더 강하게 국민들이 반발할 수 있고, 심하면 황실 폐지로 이어질 수 있다.
  • 신적강하했던 자의 후손이 덴노로 즉위한 사례는 분명히 있지만, 이마저도 황실전범 같은 법률이 없던 먼 옛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앞서 구 황실전범이나 현행 황실전범에서도 신적강하했던 자와 그 후손들의 복귀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 정치권이 아닌 독자연구인 관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4.1.4.1. 황별섭가 후손

  • 고노에 가 - 고노에 노부히로(近衞信尋, 고요제이 덴노의 제4황자)가 신적강하하여 고노에 가로 입적되었고, 후에 덴노의 12대손인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대신으로 오르는 등 가문의 위세가 올라갔다. 1956년 고노에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文隆)가 자녀없이 소련에서 죽고 후미마로의 차녀 호소카와 요시코(細川温子)의 시댁인 호소카와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후미마로의 차남 미치타카(通隆)가 2012년 향년 89세의 나이로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직계는 단절되었다.[96]
    • 도키와이(常磐井) 가 - 정토진종 진종고전(真宗高田)파 본산인 센슈지(専修寺) 법주 집안으로 옛 남작가이다. 후미마로의 숙부인 도키와이 교유(常磐井尭猷、1872-1951)를 양자로 들이면서 황별섭가의 방계로 편입되었다. 현 당주는 교유의 막내아들이자 24세 법주인 도키와이 란유(常磐井鸞猷, 1932-, 91세)로, 그에게는 장남이자 25세 법주인 도키와이 지슈(常磐井慈祥, 1959-, 64세)가 있으며, 그 외 법주 계승을 거부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교유의 장손 후손들도 남아있다.
    • 고노에가 분가(近衛家 分家) - 후미마로의 동생인 히데마로(秀麿, 1898-1973)가 1919년 자작위를 받으며 분가하여 개창한 집안으로, 현 당주는 히데마로의 손자이자 바순 연주자인 고노에 하지메(近衛一, 1962-, 62세)이다. 그 외 하지메의 동생인 히로시(近衛大, 1967-, 57세)는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 미야가와(水谷川) 가 - 후미마로의 종조부인 미야가와 타다오키(水谷川忠起)가 개창한 가문으로, 나라 화족(자세한것은 화족 문서 참고) 가문이다. 남작가로, 아들과 딸을 비롯한 자녀가 없어서 대대로 양자를 들이면서 대를 이었다. 2대는 후미마로와 히데마로의 동생인 타다마로(忠麿)가, 3대는 히데마로의 차남이자 서자인 타다토시(忠俊, 1935- 88세)가 이었다. 그러나 타다토시는 아들을 두지 못하였기에 장차 그가 죽으면 가문과 함께 단절 될 예정.
(작성 중)

5. 여담


일제강점기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로 이름을 고치고 일본 황실의 일원에 준하는 조선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창설하여 대우하였다. 일제 패망 후에도 이 지위는 남아 있었지만, 직후 1947년에 상술된 미국 GHQ의 신적강하 조치에 포함되어 폐지되었다.
현재 일본 황족들의 몸에는 어찌보면 정치적 대립측이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실제로도 고미즈노오 덴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5녀 도쿠가와 마사코[97]와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는 바람에 고미즈노오 덴노 이후의 덴노들은 메이쇼 덴노부터 시작해서 얄짤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계 후손이 되었다.
신적강하 이전까지 일본 황족들은 일본육군사관학교일본해군병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군 육군이나 일본군 해군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엔 진급도 굉장히 빠른 편으로 왕공족이었던 영친왕이나 이우, 이건 등도 일본군에서 근무했다. 일제 패망 당시에 영친왕은 만 47세로 중장이었고 이우는 만 32세에 중좌[98]이었고 이건(전쟁 패망 이후 모모야마 켄이치로 개명 및 일본인으로 완전 귀화) 역시 36세에 중좌였다.
자위대가 생긴 뒤에 일본 황족이 방위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다른 과정 등을 통해 자위대에 입대하여 근무하는 일은 없다. 영국윈저 왕조와는 비교되는 점인데, 전전 당시 천황들이 일본군 대원수로 복무했다는 점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황실의 전통 예법과 문화, 어법이 강하게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어머니를 '오모'라 부르고(일반인은 '오카상') 숟가락을 사용하며[99] 앉은자세도 흔히들 말하는 양반다리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백제랑 교류하였던 고대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서 기인된 습관이라고 하기도 한다.
현재의 황실은 이상할 정도로 여성의 비율이 높다. 나루히토와 후미히토, 그리고 그들의 친척들 세대에서 계속 딸들만 태어나고 아들은 히사히토 하나 뿐이라 황실의 전망이 굉장히 어둡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재 차세대 황족들이[100] '가짜'라거나 '대역'이라는 떡밥이 종종 올라오기도 한다. 그들이 성인이 되고나서 혹은 성장하는 중에 조금이라도 다른 느낌의 얼굴로 사진이 찍히면 이런 떡밥이 돈다. 물론 진지하게 나오는 말이라기보단 그냥 음모론충들의 드립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될 것이다.

6. 한국인들의 일본 황실에 대한 시선


일본 황실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중적 인식은 대부분 무관심이다. 일본에 황실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서의 인식은 이런저런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대체로 '''악의 축'''.
고대 이집트파라오와 같이 신격화 호칭을 현재까지도 고수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있다. 전자의 경우 오래 전에 사라지기도 했고 세계 어디서나 지도자에게 이런저런 신성성을 부여하려는 고대이니 별 반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공화국인 한국에서는 전근대의 군주 칭호에 대해서 의문도 붙는다.[101] 이런 점 때문에 덴노의 칭호로 매번 발끈하는 일본의 반응에 의문과 반발이 더욱 생기기도 한다.

7.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8. 같이보기



[1] 여러 사실에 일본 측의 입장을 첨가해 정리한 고사기일본서기를 편찬한 8세기 초반경[2] 일본은 영국처럼 왕실(황실)이 다른 가문으로 바뀐 게 아닌 한 가문/가계로 내려왔다.[3] 상징적으로 존재했고, 당시 쇼군(정이대장군)과 같은 막부 집단에 권력이 이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4] ex: 미치코 상황후, 마사코 황후, 키코 비 등.[5] ex: 구로다 사야코,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등.[6] 일본에서는 사촌부터 결혼이 가능하다. 다만 흔하지는 않다고.[7] 아키코 공주독신을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과 여동생 요코 공주가 시집가고 어머니 노부코 비가 사망하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이 절손되기 때문에, 시집가지 않고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겠다는 것이다.[8] 비슷한 사례로 러시아 제국에서는 황제의 손자와 그 비, 손녀까지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남자)/여대공(Великая Княжна, 여자), 그 이외에는 공(Князь)이라고 했다.[9] 천황의 경우 제101대 천황부터 사실상 고정되었으며, 그 이전엔 '히토' 외의 다른 이름도 사용했다.[10] 황실에서 태어난 공주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연의 일치인지 황족 남성과 결혼한 비(妃)들도 모두 '코'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래의 구성원 목록 참조.[11] 東久邇盛厚. 아버지는 전 친왕이자 일본 총리를 지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어머니는 메이지 덴노와 후궁 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이다. 나루히코와 도시코의 장남이며, 쇼와 덴노의 고종사촌이며, 시게코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 처음 혼인했을 당시까지는 황족이었지만, 신적강하 이후 평민 히가시쿠니가 되면서 시게코도 평민이 된다. 쇼와 덴노의 딸들 중 유일하게 결혼 이후 신적강하된 경우.[12] 鷹司平通. 다카쓰카사 노부스케 메이지신궁 신관의 아들.[13] 池田隆政.[14] 黑田慶樹.[15] 松平節子.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 본래 세츠코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도 같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하면서 勢津子로 바꾸었다. 勢는 이세 신궁이 있는 이세(伊勢)에서, 津는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따왔다.[16] 德川喜久子.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외손녀.[17] 近衛忠煇.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18] 麻生信子. 아소 다로의 여동생.[19] 千宗室.[20] 千家国麿.[21] 守谷慧.[22] 鳥取久子.[23] 高木百合子[24] 아들뿐 아니라 딸도 없다. 마사히토의 문제로 자녀가 없다고 한다.[25] 부부동성을 채택한 일본 민법에 따르면 아내는 남편의 성을 쫓아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르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한국의 호주제 논쟁처럼 일본에서도 위헌 논란이 있었지만, 최고재판소는 합헌이라고 판결했다.[26] 일본의 현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하자면, 만약 아이코 공주가 천황의 자리에 등극하더라도 히사히토와 결혼을 시켜서, 둘 사이에 출생한 아이가 그 다음 천황이 되게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히사히토도 황족은 황족이니 부계로 이은 셈이 된다는 논리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는 또 다시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 매우 노력해야 할 것이다(...).[27] 일본은 사촌 간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리고 혈통적으로 문제가 없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다면 전세계적으로 그다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할 일이기는 하다. 차라리 촌수가 워낙 멀어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신적강하된 방계 황족 후손들과 결혼시키는 게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28] 프랑스의 경우 살리카법에 의해 카페 왕조-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의 부계 남성 계승만 인정해왔다. 물론 현재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는 왕국이 아니게 됐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부르봉 가문의 당주는 부계 남성으로만 계승된다.[29] 그 중에서도 황위는 천황의 직계 남성 또는 황족 남성으로만 잇는다는 규칙[30] 과거 여성 천황이 탄생한 전례는 있지만, 모두 (1947년 신적강하 이전에 있던) 구 황가의 아들과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죽었다. 하지만 결혼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할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하가한 내친왕이 황적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례가 있다.[31] 구 황족이 복귀한다면 부담은 덜할 것이다. 하지만 구 황족 중 가까운 이들도 20세손은 넘어간다. 말이 좋아 구 황족이지 촌수를 따지면 40촌 수준으로 까마득히 먼 남이다. 사람 심리상 아무래도 까마득한 친척보다는 자기 핏줄이 계속 줄줄이 계승하기를 원할 테니, 며느리에게 빨리 아들 낳으라고 닦달할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32] 즉 '강압'에 의한 것과 '비교적' 현대까지는 황실 일원이었던 만큼 명분이 있다.[33] 태자 이외의 황자들 가운데 불교에 귀의한 이에게 주는 칭호.[34] 각각 59대 우다 덴노의 예와 88대 고사가 덴노의 예. 첨언하자면 이는 바쿠후쇼군에서도 사례가 있었다.[35] 여기에는 넣지 않았지만 여계계승 인정과 마찬가지도 돈 먹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황족이라고 돈이 안 들어가고, 여계라고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36] 물론 여계 계승도 피장파장이긴 하다.[37] 구 황실전범 증보 6조에도 "황족에서 신적(臣籍)으로 편입된 자는 다시 황족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담겨있어서 이것도 황실전범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논리도 생긴다.[38] 전술한 다케다 일가는 신적강하 이후 일부 후예들이 캬바레나 매춘 시설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비판을 받은 적이 있으며, 2015년에는 그 후예의 하나인 다케다 츠네아키(竹田恒昭)가 대마초 소지 및 투약 혐의로 체포된 일이나 현 3대 당주에 있어서 막내동생인 다케다 츠네카즈(竹田恒和)는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2019년 사임하였으며 그의 장남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는 극우 혐한으로서 구 황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증폭시킨 집안이다. 생각해보자. 만약에 다케다 츠네야스가 황족으로 복귀한다면 한국에서 일본 황실에 어그로가 안 끌릴까?[39] 일본 황실은 그 어떤 황실보다도 빡빡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40] 이는 아키히토 천황이 간인 방계인 반면 구황족들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계라서 그렇다. 조선은 왕실의 대가 끊기자 인조의 10세손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있었다. 프랑스앙리 4세루이 9세의 10세손이었다. 살리카법을 채택한 왕가에서는 이렇게 대가 끊겨서 먼 친척이 계승할 때가 종종 있다.[41] 하지만 이건 여계 계승도 마찬가지다.[42] 민간인이 된 지도 벌써 76년이나 지났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구 황족들은 '황족'이 아니라 그저 '조금 특이한 집안내력을 가진 사람' 정도로나 취급된다. 이러한 구 황족들이 갑자기 자기네 혈통 운운하면서 "우리도 현 황족들과 동급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구 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이 투입된다면 어느 누구가 동의하겠는가? 이것이 대체적인 반대론자의 주장이다.[43]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 간택 당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함께 탈락한 후지와라 고셋케의 이치조 도키코(一条朝子). 후에 히로아키의 부친 히로요시(博義)의 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살 차이라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히로아키와 이구는 전후 동반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치조 도키코와 이방자 여사, 영친왕은 항구에서 함께 배웅했다.[44] 적손은 아니며 원래는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의 16남이었으나, 간인 궁가가 단절하자 하루히토의 아버지 고토히토(載仁)가 봉사손으로 입적했다. 하루히토는 신적강하한 뒤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했다.[45] 3대 당주가 다름아닌 이방자 여사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 왕이었다. 모리마사 왕은 딸만 2명을 낳았는데, 큰딸은 이방자 여사이며 작은딸은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이다. 모리마사 왕의 아내 이츠코(伊都子) 비는 노리코의 막내아들(3남) 요시미츠(儀光)를 양자로 들였지만, 요시미츠와 관계가 악화되어 파양했다(일본어 위키백과 등 참고).[46] 마사코는 고준 황후의 큰오빠인 아사아키라(朝融)의 첫째이자 큰딸로, 97세의 나이로 생존하고 있다.[47] 타츠타 노리히코(龍田徳彦, 1922~2007) 백작이다. 원래는 모리마사 왕의 이복동생인 다카(多嘉)의 막내아들로, 1943년에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타츠타(龍田) 백작가문을 창시하였다. 그는 아키히토 상황의 외사촌 누나이자, 5촌 조카인 구니노미야 마사코(久邇宮正子)와 결혼하였다.[46] 노리히코가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에 들어간건 백부인 모리마사가 죽고 난 이후인 1966년으로 당시 백모이자 궁주였던 이츠코(伊都子)가 선택하였다. 이후 이츠코가 1976년에 사망하면서 2007년 사망할 때까지 나시모토노미야 당주를 지냈다. 다만 애초 신적강하를 했기에 복권대상이 아니었다. 마사코 공주와의 사이에서 외아들인 노리히사(徳久, 1946-2011)를 포함하여 1남 2녀를 두었지만 부부가 1980년에 이혼한 이후부터는 자녀들과 관계가 소원해져서 노리히사를 후계자에서 제외해 버렸다. 이후 마사코는 본성이었던 구니로 돌아가고, 노리히사를 포함하여 자녀들은 본래 성씨였던 타츠타로 돌아가 버렸다.[48] 4대 당주였던 노리히코가 2002년에 선택. 노리히사는 "어떤 경위로 양자를 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49] 5대 당주는 야마가타 현 출신의 1938년생(86세) 카미바야시 다카오(神林隆夫)라는 인물로, 원래 종교인이다. 2002년 64세의 나이로 노리히코의 양자가 되었으며, 보다시피 구황족 출신이 아니다. 현재 이 인물은 각종 주간지나 인터넷 등에서 사기꾼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로, 일부에서는 "노쇠한 노리히코를 노리고 나시모토노미야의 호적을 갈취한 인물"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현 당주는 황실과 혈연 관계가 없으므로, 가문은 있을지언정 황가로 복권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지만, 애초 4대 당주인 노리히코 본인부터가 전쟁 중에 신적강하해서 복권 대상이 아니었으며 나시모토노미야는 모리마사 왕비인 이츠코가 죽은 1976년에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50] 2019년 현재 노리히코의 손자이자, 노리히사의 아들인 요시미츠(吉光, 1980-)가 생존해 있으나 독신이고, 할아버지가 전쟁중에 신적강하했기에 복권대상이 아니다. 요시미츠가 노리히코와 노리히사의 뒤를 이어 6대 당주가 되었더라도 신적강하한 화족가문의 손자이기에 구 황실전범에 근거해도 복권대상이 되었을지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51] 서자였다. 적자는 6남 사다노리(貞教)와 14남 사다나루(貞愛). 사다노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둘 다 나중에 본가인 후시미 궁가를 계승하게 된다.[52] 패전 이전에 이미 후작의 지위를 받고 신적강하한 차남 쪽으로 후사가 있지만(여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함) 복권 대상이 아니다.[53] 이외 3남, 4남, 5남도 신적강하를 신청해서 3남은 츠쿠바(筑波), 4남은 카시마(鹿島), 5남은 카츠라기(葛城)로 바꾸면서 황족에서 이탈했다. 4남은 요절했고, 3남, 5남은 아들을 각각 3명, 2명씩 두었다. 현재 5남의 차남인 카츠라기 시게유키(葛城茂敬)와 그 아들인 카츠라기 히로히코(葛城宏彦)가 생존해 있지만, 여기도 복권 대상이 아니다. 히로히코가 1971년생으로 53세인데도 독신인지라 야마시나 적통 자체가 끊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54] 한때 이방자 비의 여동생인 나시모토노미야 노리코 여왕(梨本宮規子女王)과 1925년에 재혼하려 했지만, 다케히코가 정신병을 앓아 파혼되었다. 이후 노리코는 5촌 당숙인 히로하시 타다미츠(廣橋眞光) 백작과 결혼하여 슬하 3남 2녀를 두었다.[55] 고준 황후의 아버지인 구니노미야의 2대 당주 구니요시(邦彦) 왕은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총독부 시찰 도중 조선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가 휘두른 칼에 찔린 부상이 악화돼 다음 해 죽었다. 조선 독립운동가의 손에 죽은 일본인 가운데 최고위 인물.[56] 왕비 도모코(知子)는 신적강하되기 4개월 전에 40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녀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의 제3왕녀였다.[57] 구니요시 왕의 이복동생인 다카(多嘉)왕의 부인, 다카 왕과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으나, 무사히 성인까지 자란 사람은 2남 1녀였다. 차남과 삼남의 이름이 이에히코(家彦), 노리히코(徳彦)인데 각각 1942년, 1943년에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우지(宇治), 타츠타(龍田) 백작가를 창시하여 구니노미야에서 이탈했다. 물론 아들들도 황족들이 신적강하 당할 때 평민으로 강등을 당했다. 노리히코는 후에 1966년 나시모토노미야에 양자로 들어가 2007년에 죽을 때 까지 나시모토노미야 당주를 지냈다.[58] 마사코는 1945년에 5촌 당숙인 타츠타 노리히코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탈하여 이미 타츠타 백작가로 출가한 상태였다. 물론 이 당시 화족제도도 폐지되면서 마사코도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다만 마사코는 남편과 이혼한 이후부터는 본성이었던 구니로 돌아왔다.[59] 작은아들은 독신이고, 큰아들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다.[60]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15년생(현재 9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61] 아사아키라의 3남이자, 구니아키의 작은 남동생인 아사히로(朝宏, 1944-, 79세) 에게도 남자 자손이 없지만, 2018년에 인터뷰에서 한 증언에 의하면 해당년도 기준으로 부계로 가문을 이어줄 구니아키 형제의 손자세대의 남자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남자아이 1명뿐이라고 밝혔다.[60] 그 아이가 아사아키라의 차남이자, 구니아키의 큰 남동생인 아사다케(朝建, 1940-, 83세) 의 아들인 아사토시(朝俊, 1971-, 53세)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 존재가 자세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62]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인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의 5녀. 미치자네는 덕혜옹주의 전남편 소 다케유키의 후견인이기도 하다(다케유키가 일찍 부모를 잃었기 때문).[63] 미치코(美智子) 여왕. 아키히토 덴노의 아내 미치코 상황후와 한자까지 같다. 도쿠다이지(德大寺) 가문에 시집갔다가 이혼했다.[64] 그는 도쿄제국대학을 나와서 외교관이 되었다. 이때 직속후배이자 마사코 황후의 부친인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와 가까이 지냈다.[65] 마사노리는 현 천황인 나루히토가쿠슈인 학우이기도 하며, 그 역시 백부인 하루노리를 따라서 외교관이 되었는데, 후배인 오와다 마사코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66] 장남은 1996년생(28세), 차남은 1998년생(26세).[67] 그래서 그런지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츠네노리의 장남 가야 구니나가(邦寿)가 죽은 1986년에 단절되었다"고 적어놨다. 흠...[68] 1943년생(81세). 무령왕릉을 참배했다는 일본 '황족'이 이 사람. 당시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아키히토의 당숙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는 친/외가 6촌이다.[69] 근데 문제는 이 집안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70] 1821년생으로 1831년에 법친왕으로 출가했다. 이후 고카쿠 덴노의 양자가 되었다가 1868년에 환속했지만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71] 나루히사와 후사코의 손녀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 밀려 탈락하고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72] 부친인 4대 당주 나가히사(永久)가 요절하는 바람에,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었다. 따라서 패전 당시 존재하던 14개 궁가의 당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군인이 아니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황실에다 전범재판의 칼날을 들이댈 것을 우려한 인사들이 그를 숨겨뒀다가 유사시 '미치히사 덴노'로 옹립하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미국쇼와 덴노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그냥 얘깃거리로만 남았다.[73] 2018년 10월 20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74] 다만 실제로는 당주 일가를 제외하고는 신적강하 후에 태어나서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당주 일가뿐이다.[75] 단, 차남은 관동 대지진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후사를 남기는 데 성공한 아들들은 장남, 3남, 막내아들 뿐이다. 그나마도 3남은 패전 이전에 미리 신적강하하는 바람에 복권 대상이 아니고, 막내아들의 경우에는 신적강하 당시까지도 황족으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신적강하 이후 브라질로 이민을 간 뒤 국적까지 브라질로 바꾸는 바람에 복권 가능성이 불투명하다.[76] 1명은 브라질 국적.[77] 1947년 제정된 황실전범에 근거하여 현재 남아있는 궁가 중 계승순위가 다케다 다음으로 계승순위가 낮은 궁가이다. 오히려 촌수가 20촌 내외인 가야노미야가 계승순위로 직황족과 가장 가까운 가문이다.[78] 이 분은 1940년생(83세)으로, 신적강하 직전에 태어난 덕분에 왕 직위를 받은 바 있다. 참고로 2대 당주가 츠네요시(恒德)다. 731 부대 생체실험의 관여자로 이에 대해서 '그 정도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낀다.'라고 망언한 천하의 개쌍놈.[79]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2013년까지 강사를 지냈던 헌법학자이지만, 지금은 일본의 예능 등 방송계에서 극우 논객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각종 극우 서적을 집필하고 있다. 일본이 한 적도 없는 일로 모함하는 한국은 폭력단 같은 나라라느니, 한국은 표면만 법치국가인 인치국가라느니, 재일교포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면 범죄 이력을 세탁하고 새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의 각종 혐한 발언을 책이나 방송에서 쏟아 내고 있으며, 재특회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최근 유튜브 계정을 차단당했다. 혐한 발언 이외에도 부친이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트위터에 '메달을 깨무는 건 품위가 없고 메달에 대한 모욕이다.'라느니 '메달을 못 땄으면서 즐거웠다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선수 개인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국비로 선수를 키운 게 아니다.'라는, 올림픽 정신의 기본을 모르는 망언을 하기도 했고 2018년에는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닛산 전 회장인 카를로스 곤 회장의 보복'이라는 등 망언을 대놓고 하고, 이 외에도 연예인과의 스캔들이 여러 번 있기도 했으며, 언행이나 사생활에서 물의를 자주 빚어 일본에서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자신의 혈연을 악용한다는 비난이 많다.[80] 웃기게도 이 츠네야스라는 인간은, 부친이라는 사람이 신적강하 뒤에 태어난 3남(참고로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적강하 후(정확히는 신적강하한지 18일 후)에 출생했다. 여담으로 츠네야스는 이 3남의 장남)이라서, 정확하게는 구 황족이 아니라 굳이 따지면 구 화족에 가까운 존재라서, 만일 구 황족 복권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복권 대상이 아닐 뿐더러 계승권 따위도 없다. 게다가 이 입만 산 가문은 신적강하 뒤의 행적 탓에 일본인들에게도 인식이 나쁜 편이다.[81] 다만 요리히토의 종손자이자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3남인 구니히데가 1931년 신적강하를 신청하면서 히가시후시미라는 성씨를 하사받아 화족으로 편입되어 제사를 계승하였고, 지금도 가문은 명목상으로나마 남아있는 상태이다.[82]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첫째).[83] 이 때문에 신적강하 당시 계승 서열에서도 최하위였다.[84] 이 때문에 아리스가와노미야는 원래 신적강하 대상이었던 이복동생 타케히토가 당주를 계승하는 것을 메이지 덴노가 허락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후계자이던 타네히토의 요절로 단절되었다.[85] 이쪽에서 일부 우익들이나 주장하는게 황별섭가의 부활이다. 일본의 고셋케(오섭가) 중 일부는 도중에 단절되고 황족들이 양자로 들어가 이를 이은 가문들이 있는데, 이중 타카츠카사 스케히라의 혈통은 '''700년전 분가한''' 후시미노미야 계통보다 가까운 '''300년전 분가한''' 혈통이다. (고카쿠 덴노의 숙부.) 다만 이쪽도 적통은 단절되고 쿠죠가에서 양자가 들어간지 오래고, 토쿠다이지, 야마모토, 스미토모, 무로마치 등 분가 혈통만 남아있는 데다가, 그 외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혈통인지라 히사히토 탄생 이후 이 떡밥은 거의 죽은 떡밥이다.[86] 당장에 현행 황실전범도 구시대적이란 얘기가 나오는 마당에, 이것은 그보다도 더 구시대적이다. 다만 태국 왕실의 경우 아직 존재한다.[87] 실제로 유럽살리카법을 도입하지 않은 이상은 여자(혹은 여계)의 계승은 인정했으나, 서자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동아시아는 대체적으로 서자의 계승도 인정한 대신 여자(혹은 여계)의 계승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확실히 후자가 전자보다 단절된 사례가 적기는 하다. 동양쪽은 어떻게든 남자만이 계승했기에 성이 교체된 건 대부분 역성혁명이 벌어졌을 때 뿐이었다. 일본 황실로 돌아와서 보면 현재 후계자는 남자 한정으로 보면 1명이다. 하지만 여자까지 합치면 4명이다. 즉 후계자 걱정으로 후궁 제도 재도입 운운을 한다면 "그럼 여계 계승을 인정하는 게 더 현실적인 거 아니야?" 라고 하면 된다. 여계가 즉위해서는 안 된다는 건 영구불변의 법칙은 아니므로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88] 단, 이들의 주장을 따라 후궁 제도를 다시 허용한다면 아들이 없거나 외동아들, 독자인 경우만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89] 무엇보다도 결혼할 자신은 '애 낳는 기계'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들어가야 한다(…). 또한 아들을 낳으면 본처인 황태자비 혹은 황후와 갈등도 빚어질 것이고.[90] 다만, 황실전범상 인정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비적출자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회피해 갈 가능성은 있다. "적자와 서자에 차별을 두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주장"도 가능해지기 때문.(…)[91] 현행 황실전범 14조 3항에서는 (본래 황족 출신이 아닌) 친왕비나 왕비가 이혼한 경우 황족 신분을 이탈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혼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건 아니라는 말.[92] 흔히들 남자 문제로 치부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성염색체 중에서 성별을 결정짓는 유전자는 분명히 남성이 물려주는 건 맞다. 문제는 그렇다고 남자 쪽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물려줄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순전히 복불복이다. 때문에 양쪽 중 하나라도 불임이 아닌 이상에야 남자가 여자에게 아들이 안 태어난다며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93] 나루히토의 5촌 당고모인 고노에 야스코의 남편인 고노에 타다테루(近衛忠輝)가 이 집안 출신으로 타다테루의 형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당주로 있다. 작위는 후작. 두 형제의 외조부가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로, 후미마로는 고요제이 덴노의 12대손으로 아키히토 상황의 24촌 황형이다.[94] 이 가문도 현재 쿠죠 가에서 들인 혈통이 단절되어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인 오규 마츠다이라(大給松平)가에서 양자를 들여서 당주를 맡고 있다. 다만 이 사람도 혈통상으로 이방자의 외가인 나베시마가의 방계 혈통인데, 나베시마 가도 후지와라 가문 후손이다.[95] 구 황족들이 최소 700여년전에 현 황실과 갈라졌다면, 황별섭가는 400여년(고노에, 이치조) 내지 300여년전(타카츠카사)에 분가했기 때문이다.[96] 여담으로 후미타카에게는 게이샤 출신 첩인 아즈마 미요코(東美代子)에게서 얻은 서자인 각본가 아즈마 류메이(東隆明)가 있었지만, 서자에 어머니가 천한 신분의 여자였기 때문에 애시당초 후계 대상이 아니었고, 아버지 집안과 일체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가문에서는 친자식으로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며, 조부와 부친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9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98] 사후 대좌로 추서.[99] 일본에서는 국그릇을 들어서 국을 소리나지 않게 마시고, 밥그릇을 들고 밥을 젓가락으로 먹는다.[100] 아이코 공주, 마코 공주, 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 등.[101] 외국에서는 한국과 비슷하게 일본에 피해를 입었던 국가가 아니라면 별다른 의문 없이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 겸 emperor라고 써주는 걸 보면, 일제강점기로 인한 반일 감정 때문에 더욱 호칭에 반감이 생기는 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