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온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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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적장녀. 효명세자의 동복 동생이자 복온공주, 덕온공주의 언니가 된다.
2. 생애
2.1. 사랑받는 공주
1810년(순조 10) 왕실에 명온공주가 태어났다.[2] 태어날 당시 성별을 가리지 않고 왕실의 후사가 귀한 시절이었고, 오랜만에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공주였으므로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것이다.[3]
오빠 효명세자는 동기 간의 우애가 깊었는데, 특히 나이가 비슷한 명온공주와 정이 도타웠다.[4] 효명세자는 삼매연림(三妹連林)[5] 이라는 글에서 '''"명온이는 성품이 영명하고, 기골이 청수하며 시문에도 능통하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청수(淸秀)하다는 말은 빼어난 미인에게 쓰는 말인데, 명온공주는 미모가 출중했을 것이다. 효명세자는 그래서 명온공주를 소식의 누이에 비교하여 매란여사(梅蘭女史)라는 호를 붙여 주었다.[6]
또한, 효명세자는 사흘만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리워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시를 보낼 때는 한시에 한글 음을 병기하고 번역과 주석을 달았다. 주로 한글로 문자를 쓰는 여동생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7]
2.2. 예정된 혼인
1817년(순조 17) 8세의 나이로 명온(明溫)이라는 작호를 받고,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823년(순조 23년)[8] 순조는 부마를 간택하고자 12세에서 15세까지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렸다. 5월 22일 초간택, 5월 27일 재간택, 6월 2일 삼간택을 행하였고, 세 번에 걸친 간택은 모두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었다.
최종적으로 낙점된 사람은 진사 김한순[9] 의 아들 김현근이었다. 김현근은 선원 김상용의 8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9대 외손인 명온공주와는 이성 친족이다.[10]
사실 간택은 형식적인 것으로, 이미 김현근으로 내정되어 있었다.[11] 동생 복온공주의 부마는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였고, 덕온공주의 부마는 윤의선이었는데, 그는 안동김씨 김이위의 외손이었다. 뒷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까지 생각한다면, 철저히 준비된 혼인으로 보인다.
2.3. 죽동궁 생활
1824년(순조 24) 9월, 공주는 궁궐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 이때 효명세자가 직접 공주의 집에 다녀갔고, 1826(순조 26)에는 순조와 효명세자가 함께 공주의 집에 찾아오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12][13]
2.4. 죽음
1832년(순조 32) 명온공주는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혼인한지 9년 만이었다. 장례 절차를 주관할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여서 진행하였다.
명온 공주(明溫公主)가 졸서하였다.
하교하기를,
"병이 비록 짙고 오래 끌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만에 하나 다행하기를 바랐는데, 지금 길이 갔다는 기별을 듣게 되니, 서럽고 서럽도다. 상위(喪威)가 이토록 겹쳐 참으로 인정으로는 감내하지 못하겠으니, 서럽고 서럽도다. 졸서한 명온 공주의 상(喪)에 온갖 상수(喪需)를 한결같이 복온 공주(福溫公主) 상사(喪事)의 예대로 거행하고 동원 부판(東園副板) 1부(部)를 실어보내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 6월 13일
3. 여담
- 동녕위 김현근에게는 정신 질환이 있었다. 의원들이 치료하지 못하여 무당들을 불렀는데, 밤낮으로 무당들이 대나무 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도궁(竹刀宮)이라고 부르다가 죽동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태가 쓴 《이규태의 600년 서울》 이라는 글에 실려있는 이야기로 출처가 명확하지 않고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신빙성은 떨어진다.
[1] 본관은 안동, 자는 성희(聖希)이다. [2] # [3] 현종 대 이후로 정실 왕비가 자식을 낳는 일이 없었다. 순조도 효의왕후가 아닌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4]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7월 15일 경오 3번째기사. # [5] 세 명의 여동생들이 숲처럼 연달아 있다는 뜻이다. [6] 소식에게 소소매(蘇小妹)라고 하는 시문을 잘 짓고 재주가 많은 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7] 한시를 쓸 때 한글 음으로 표기하고 번역과 주석을 다는 것은 당시 여성들이 한시를 짓던 방법이었다[8] 공주로 책봉된 1817년 이후 효의왕후의 장례가 있었다. 그래서 14세가 된 1823년에야 간택을 시작한다. [9] 김한순의 아버지가 연천 김이양인데, 당대에 삼호정시사로 유명한 여성 시인 운초가 그의 첩이었다. [10] 조선시대에 이성친족 간의 혼인은 아주 흔했기 때문에 문제 삼을 수는 없다. [11] 동생 복온공주, 덕온공주의 부마 간택도 내정자가 있었다. [12] 순조실록 27권, 순조 24년 9월 8일 정유 1번째기사. # [13] 순조실록 28권, 순조 26년 3월 28일 기유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