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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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국왕
익종 효명대왕 | 翼宗 孝明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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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宗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colbgcolor=#bf1400> 묘호
익종(翼宗)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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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대한제국 황실 1대조
文祖 翼皇帝 | 문조 익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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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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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文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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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image]}}}{{{-2 선원보감에 실린 문조 익황제의 모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809년 9월 18일 (음력 8월 9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830년 6월 25일 (음력 5월 6일)
(20년 9개월 7일, 7,586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희정당
능묘
수릉(綏陵)[1]
재위
조선 왕세자
1812년 8월 13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1812년 7월 7일 ~ 1830년 5월 6일)
(17년 10개월 12일 / 6,526일)

조선 국왕 대리청정
1827년 3월 6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1827년 2월 9일 ~ 1830년 5월 6일)
(3년 3개월 19일 / 1,2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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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전주(全州)

영(旲)[11]

덕인(德寅)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부모
부황 순조숙황제, 모후 순원숙왕후 김씨
부인
신정익황후 조씨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이른 나이의 죽음, 요절
3. 이모저모(여담)
5. 가계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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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翼宗 孝明大王 / 文祖 翼皇帝
조선의 왕세자.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 뿐인 아들(세자)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 1대조인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재추존됐다.
아들 헌종이 효명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면서 올린 묘호는 익종(翼宗)이었는데, 고종이 국왕으로 즉위할 때 '익성군(翼城君)'의 군호를 받고 익종(효명세자)과 조 대비의 법적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아들 자격으로 1899년 황제로 재추존하면서 문조(文祖)로 묘호를 바꿨다. '종(宗)'자를 쓴 기존 묘호 '익종'을 '조(祖)'자를 쓴 묘호로 격상하고자 하니 태조의 직계 조상 추존왕 중에 '익조(翼祖)'가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
다만 묘호에 있던 익(翼) 자는 묘호 대신 시호에 넣어 익황제(翼皇帝)라고 하였다. 황제로서 묘호를 문조로 격상하여 추존했음에도 보통은 이전에 받은 묘호인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서 유명하다.
능호는 수릉(綏陵)으로 동구릉 경내에 있으며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작중 효명세자 역을 맡아 유명해져 참배객들이 많다고 한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812년 왕세자에 정식 책봉되었다. 효명세자는 참으로 정말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중전) 소생 원자였다.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 경종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일단은 서자였고, 영조는 천하디 천한 궁중 무수리 소생이며, 효장세자, 사도세자는 모두 후궁 소생이다. 정조는 정실 소생이긴 하지만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고, 순조 역시 후궁 소생이다. 1819년 풍양조씨 세력이었던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헌종을 낳았다. 그의 아내가 후에 고종 때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는 신정왕후 조씨이다.
외모가 출중했고 대단히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한마디로 금수저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지내던 아버지 순조도 아들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참 많이 걸었다. 창덕궁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제작에 직접 관여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석한다.
순조의 건강이 날로 나빠지자,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을 정도로 엄청 기대받았다.[2][3]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4]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공직 기강을 잡았으며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은 활동을 크게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誕身陳延)' 등의 주요 연회들을 조선 왕실의 권위 드높이는 것과 더불어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조선의 태양왕(朝鮮 太陽王)으로 부르며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루이 14세와 견주기도 한다. 칼춤(劒武)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이 사람.

2.2. 이른 나이의 죽음, 요절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덕일은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이 제기한 수많은 독살이 그렇듯 근거는 전혀 없다. 이덕일이 퍼뜨린 인식과 달리 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卒)이 아직 살아있었으며, 각혈(刻血)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쓰다가 재야(齋野)에 있던 정약용까지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다음은 순조가 친히 직접 쓴 제문(諸文)이다.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德)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胤嗣)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哭)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먼저 목이 메니,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燒有, 즉위)하고서 나의 정경(情景)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음성(音聖, 목소리)을 듣지 못한 지 이미 60일이 지나고 두 절서(節序, 계절)가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명명(冥冥)하고 막막(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련하여 참으면서 먹고 호흡(呼吸)하기를 태연히 하며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여겨서인가. 네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내가 과연 바야흐로 꿈을 꾸면서 깨지 않고 있는가. 네가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네가 장차 벌떡 일어나 돌아올 것인가. (父母)·(妻子)의 은혜가 여기에 있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의 중대함이 여기에 있으며 성궐(城闕)과 궁전(宮殿)의 거처가 여기에 있는데, 가기는 어디로 가며 가서는 누구와 친할 것인가. 해와 달은 그 운행(運行)이 변함이 없고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그 까닭도 변함이 없으며, 하늘은 높고 땅이 두터운 그 지극함도 변함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기약은 언제이며 기약은 누구와 같이 알겠는가. 천하의 슬픔 가운데 어버이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네가 성효(誠孝)하면서 3년 동안 어버이 품에서 사랑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어찌 이와 같이 근심(謹心)이 없을 수 있겠으며, 천하의 슬픔 가운데 자식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나의 기구하고 험한 운명으로 갑자기 네 가지 곤궁(困躬)한 것에서 첫번째 입장이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독(毒)하게 하는가. 슬프고 더 슬프다.
옛날 내가 10살 겨우 넘어서 황고(皇考)를 여의었는데 어렵고 큰 기업(基業)이 산처럼 자신을 누르는 듯하였으며 자신의 외로움과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지만, 1년, 2년 지나면서 많은 백성들 위에서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무엇이 있어서이겠는가. 특별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힘뿐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마음에 즐거움은 남의 아비가 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져 황고(皇考)와 열성(列聖)의 유업(遺業)을 의뢰하여 펼칠 수 있어서였다. 네가 또 이미 관례(冠禮)를 치루고 이미 장가를 들어 또한 이미 자식을 두었는데,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취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내가 하던 정치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더니, 팔방(八方)에서 〈백성들이〉 목을 빼어 ‘은(殷)나라 때의 치도(治道)를 다시 창성하게 할 수 있으며, 주(周)나라 때의 천명(天命)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니, 어찌 나 한 마음의 즐거움이며 한 몸의 경사(慶事)라고 말하겠는가. 자못 천하 국가에서 드물게 있고 드물게 보는 일이었기에 내가 망령(妄靈)되이 근심(謹心)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었었는데, 하루아침에 재앙(災殃)을 내려 만사(萬事)가 기왓장처럼 깨어질 줄을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종팽(宗祊)에 대한 우려와 나 자신에 대한 슬픔이 도리어 황고(皇考)를 여의고 네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심함이 있다고나 할까. 슬프고 슬프다.
너의 청명(淸明)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에서 태어나게 한 바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꺾어버리는 데 이르러서는 갑자기 위급한 병(病)에 걸린데다 또 괴잡(乖雜)한 증세가 겹쳐 물이 흘러간 구덩이 같고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으니, 이치의 믿기 어려움이 어찌 더 갑작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가. 어떻게 이른바 비자(丕子)의 책임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구를 좇아서 바로잡겠으며,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누가 이를 주장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고고(呱呱)하게 우는 세손(世孫)이 장차 할아버지를 아비같이 여길 터이며, 근심스러운 나의 여생은 장차 나라를 운명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네가 혹시라도 앎이 있다면 나의 이 말을 듣고서 틀림없이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고 억울(抑鬱)해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나의 어질지 못하고 덕(德)스럽지 못하여 죄를 자신에게 쌓아 나의 훌륭한 자식을 잘 보전(保傳)하지 못하여 4백 년의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롭기가 하나의 털끝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애통하도다."
위 제문을 보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한(恨)이 절절히 느껴진다. 안 그래도 이미 순원왕후 소생의 대군[5]과 후궁 소생의 영온옹주[6]가 죽었던터라 순조의 병은 깊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2년 후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자신보다 먼저 요절하자,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두 해 뒤인 1834년에 세상을 뜨게 된다.
훗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정조로부터 이어진 왕통(혈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자손인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입승대통)하여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이다.
추존(追尊) 문조, 즉 효명세자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懿陵) 왼쪽 언덕 언저리에 장사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에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1890년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合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구릉(東九陵)을 방문하면 팸플릿(지도 약도)을 하나 주는데, 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 관람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능이 바로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 코스대로 수릉부터 걸어가서 관람하는 게 편하다.

3. 이모저모(여담)


여섯살 때 외숙부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인즉슨 '지난번에 보내주신 과자가 너무 맛있으니 좀 더 사주세요'(...)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를 적극 기용했다는 말이 있으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다시 말해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問喪)하는 등 최고의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 부임지에 첩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7]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 보내 버렸다.[8] 물론 왕권 강화를 꿈꿨던 효명세자였기에 안동 김씨를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수 있으며 오히려 방심하게 했다가 동시에 제거할 타이밍만 잡으려 했을 수는 있긴 하다. 어쨌든 안동 김씨를 견제할 맘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진 않았다. 그리고 집권 기간 동안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30년 5월 6일에 죽는데 그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을 다 해먹었다.
고종은 그의 양자로서 즉위했기 때문에(입승대통/立承大統) 여러 차례 시호와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효명세자의 최종적인 정식 시호는 아래와 같다.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9]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4.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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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익종(효명세자)의 어진들
현재 남아 있는 어진들은 모두 면복본(冕服本)으로, 왕세자의 면류관곤복인 8류면 7장복 차림으로 되어 있다. 위 어진들 중 오른쪽 어진의 경우 1826년에 모사된 것으로 표제 안쪽에 추가된 붉은색 제첨은 1899년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로 추존된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왼쪽 어진은 오른쪽부터 타버리기 시작하여 오른쪽에 있던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누구의 어진인지 불분명하지만 크기와 표현의 방식 등이 오른쪽의 어진과 거의 동일하며 특히 바닥에 깔린 화문석과 발받침의 형태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이 어진을 1900년에 오른쪽 어진을 모사한 익종의 면복본 어진으로 보고 있다.
왼쪽 어진은 오른쪽 어진보다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위 어진들은 복식 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지만 하늘은 그의 초상화까지 불운하게 만들었는지,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12월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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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 없는 건 아버지와 판박이라서, 순조의 초상화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것이라 이 또한 효명세자의 초상화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그림도 얼굴 부분이 불타는 통에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위 그림인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보다시피 아들 헌종처럼 사망한 연령에 비해 상당히 노안인 얼굴이라는 것. 아무튼 그래서인지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얼굴을 배경으로 저 탄 초상화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실은 이미 복원한 초상화가 있다!!!
[image]
복원된 문조(효명세자)의 모사(慕寫)한 어진
권오창 화백이 불에 탄 부분에 얼굴 부분을 그려넣었는데, 얼굴을 상상한 상상화인 관계로 문화재나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진 않았고, 권 화백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5. 가계


순조순원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복 여동생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이복 여동생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있다. 동복 남동생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6. 대중매체에서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가상의 여자주인공 홍라온과 궁중 로맨스를 이루는 왕세자 이영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판에서는 박보검이 캐스팅됐다. 다만 드라마판에서는 효명세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며 한자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여기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 헌종 대신 순조 다음 왕이 된다. [10]
2018년 영화 명당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안동 김씨 김좌근의 음모로 영화 시작과 함께 독살된다.
대통령경호처 YouTube에서 청와대에 있는 한옥 '침류각'(枕留閣)이 효명세자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1]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위치해 있는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해 있는 합장릉의 형식을 띄며, 동구릉 관리사무소 안내에 따라 순서대로 가면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가 합장되어 묻혀 있는 수릉을 직접 만나 볼 수가 있다.[2] 과거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는 달랐다. 세종대왕 때는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라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오히려)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이야 좋아했지만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었다. 영조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했다. 근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왕의 서무 명령 비망기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3] 순조실록 권28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4번째 기사.[4] 이때 아직 20살도 채 안 되었다.[5] 효명세자의 친동생으로, 작위를 받기 전에 요절했다.[6] 순조의 유일한 서녀로,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하여 말을 잘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굉장히 아낀 여동생이었다.[7] 웬 아전이 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와 종 2명 그리고 주모를 베어버렸다.[8] 순조실록 권29 순조 2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 기사.[9]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즉위년), 1868년(요순우탕), 1875년과 1876년, 1878년, 1883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 /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 11월, 그리고 황제로 재추존한 뒤엔 1890년 10월, 1892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고종 즉위 40주년)로,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를 추가했다.[10] 다만 헌종도 지지기반이 없는데도 재위 말년을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 안동 김씨 세도를 흔들리게 만들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겠지만 지지기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