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히 전투
[clearfix]
1. 개요
1241년 4월 1일 헝가리의 모히 평원에서 수부타이와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 군대와 헝가리 왕국의 왕 벨라 4세가 지휘하는 헝가리 군대가 맞붙어 몽골군이 승리한 전투로 레그니차 전투와 함께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일시 점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모히 평원과 그 근처 사요 강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사요 강 전투'''라고도 불린다.
2. 배경
칭기즈 칸 사후 1229년 몽골 제국의 카간에 즉위한 오고타이 칸은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호라즘 정벌 이후 중단되었던 서방 원정을 재개하고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지휘관에, 수부타이에게 보좌를 맡기고 나머지 황족들로 이루어진 약 20만 정도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몽골군은 러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곧바로 동유럽 쪽으로 진격했는데 수부타이는 군대를 나눠 일부는 폴란드를 침공해 배후의 위험을 차단하고, 본인은 바투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헝가리를 침공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몽골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벨라 4세가 주변 국가들에 지원을 청하고 군대를 모으려고 했으나 주변 국가들은 헝가리에 지원을 해줄 여력이 없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는 국왕과 귀족들간의 오랜 분열로 인하여 제대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벨라 4세는 자신이 직접 모은 군대와 성전 기사단의 일부 지원 병력 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3. 전개
당시 몽골군은 수부타이와 바투가 폴란드 방면 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그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 각각 지휘해 헝가리를 침공했다.
한편 벨라 4세는 충분한 준비를 거친 후 몽골군과 싸울려고 했지만 일부 귀족들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부대를 이끌고 몽골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몽골의 전위 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전과에 도취한 귀족들은 오만해져서 몽골군을 얕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는 영지로 철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벨라 4세는 군대를 이끌고 마주치는 소규모 몽골군을 격파하면서 모히 평원에 도착했고 곧바로 마차를 이용해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몽골군은 새벽에 헝가리 야영지를 공략하기 위해 양측 진영 사이에 있는 사요 강의 다리를 건너 기습을 감행했는데 때마침 역시 몽골 진영을 공략하려는 헝가리군과 다리 가운데서 마주치며 전투가 벌어졌고 몽골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패주했다.
헝가리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몽골군을 추격했으나 때마침 합류한 수부타이에 의해 저지당했다.
바투는 이에 본대를 도하하게 했고, 벨라 4세는 도하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도하에 성공한 몽골군과 헝가리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게 되었다.
중무장한 헝가리군에 의해 몽골군의 피해가 늘어났고, 바투의 부관 바카투가 전사하는 등 몽골군은 차츰 패배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을 바꾸는 상황이 벌어졌다.
'''때마침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부교를 건설해 사요 강을 도하, 헝가리군의 후위를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공격으로 헝가리군은 무너지기 시작해 야영지로 후퇴하려고 했는데 이때부터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추격전 끝에 헝가리군은 궤멸되었고 벨라 4세는 간신히 도주했다.
4. 결과
전투에서 승리한 몽골군은 헝가리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 본토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몽골의 대규모 유럽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귀환 도중에 바투는 점령한 러시아와 동유럽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킵차크 칸국의 토대를 닦았고 명장 수부타이는 병사했다.
보스니아는 당시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되어온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믿고 있어 헝가리로부터 십자군 원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운좋게 몽골이 쳐들어와 헝가리군을 격파해주면서 상당기간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벨라 4세는 몽골군이 철수한 이후 헝가리로 귀환해 중앙집권화를 단행하고, 부다페스트의 서쪽으로 천도하면서 성벽과 요새를 보강하고, 군제를 서유럽식으로 개혁하면서 몽골의 재침입에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