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부타이

 


'''몽골 제국의 명장'''
'''ᠰᠦᠪᠦᠭᠠᠲᠠᠢ
速不台
수부타이'''

'''본관'''
우량카이족
'''작위'''
하남왕(河南王)
'''시호'''
충정(忠定)
'''이름'''
몽골어
ᠰᠦᠪᠦᠭᠠᠲᠠᠢ
Сүбээдэй
투바어
Сүбээдэй[1]
한자표기
速不台(속불태)
速不臺(속불대)
'''생몰년'''
1176년 ~ 1248년
'''출생지'''
몽골 부르칸 칼둔
'''사망지'''
몽골 톨 강(Tuul River)
[image]
중국화의 수부타이.
1. 개요
2. 생애
2.1. 종군 이전
2.2. 호라즘 침공
2.3. 금나라 정벌
2.4. 유럽 원정에서의 맹활약과 죽음
3. 건강 및 철수레에 대한 이견[2]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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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장군. 칭기즈 칸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사준사구의 사구 중 한 명이었다. 원조비사에서는 '용맹한 수부타이'라고 부른다.
상상을 초월하는 전적을 세운 명장이다. 그는 '''32개의 나라를 정복하거나 멸망'''시켰으며, 역사에 정확히 기록된 것만 '''61번의 회전에서 승리'''했다. 회전(會戰, pitched battle)이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모 아니면 도'식으로 벌이는 전투를 말한다. 수부타이는 평생 그가 만난 금나라, 송나라, 서하, 각 유목 부족, 중앙아시아중동이슬람의 십수 개 국가, 러시아,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군대들을 현지에서 줄줄이 격파했다. 일평생 1개 나라하고만 싸우고도 또는 홈그라운드에서 방어전만 펼치고도 명장으로 대우받는 인물이 세계사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수부타이의 전적이 얼마나 넘사벽인지 알 수 있다.
몽골군의 세계정복 중에서도 수부타이는 고려 전선보다는 중국과 서쪽 정벌에서 많이 활약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다른 장군보다 낮은 편이다. 한국 한정으로는 차라리 여몽전쟁에 참여한 살리타가 더 유명하다. 한국어로 구글에 검색했을 때 살리타가 훨씬 결과가 많고 뉴스에 언급되는 빈도 수도 훨씬 높다. 하지만 직접 침략을 당한 서양, 중동권에서는 칭기즈 칸과 거의 동급으로 악명(...)이 높다.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책 『What if』에서는 역사상 가장 무시 당한 명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2. 생애



2.1. 종군 이전


우량카이족 출신으로, 칭기즈 칸 초기 파티의 2인자였던 젤메의 아우다. 숲속부족 출신이라 하여 기마술을 장성하여 배웠다는 설이 있는데, 이 또한 비만설과 같은 낭설로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따르면,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 우량카이 두 부족으로 나뉘며 수부타이와 젤메는 명확히 후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삼림 부족 출신이 아니며, 우량카이족은 삼림 우량카이와 다르게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의 한 부족이라고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또한 삼림 우량카이족 또한 사는 영역이 삼림 지역일 뿐 명확히 유목 생활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 즉 삼림 우량카이이든 우량카이이든 모두 어린 시절부터 유목 생활, 즉 말타기를 하며, 수부타이가 장성한 후에야 말타는 법을 배웠다는 것 또한 근거 없는 낭설이다.[4]
어머니는 수부타이를 낳다가 사망. 아버지는 자르치우다이라는 이름의 대장장이.[5] 젤메에 이은 막내로 가업인 대장장이를 이어받아야 할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대략 14세 때 형인 젤메를 따라 또 다른 형제 차오르칸과 함께 칭기즈칸의 군에 입대한다. 그때부터 칭기즈칸의 막사에서 각종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스럽게 칭기즈칸 막하 장군들의 전략 및 전술회의에 배석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6] 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전략/작전 수준의 관점으로 전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 및 이해력이 길러졌을 것이라는 것. 이는 향후 제베라는 명장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정교한 전술적 능력을 흡수하여 압도적인 전공을 세운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1204년에 칭키즈 칸이 나이만족의 다얀 칸과 싸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철륜차로 산맥을 돌파하여 적진을 탈취하기도 하였으며 메르키트족의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몽골이 통일되자 천호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2.2. 호라즘 침공


칭기즈 칸의 서정군에 제베[7]와 함께 참전하여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여 당시 7대 술탄이였던 알라 웃 딘 무함마드[8]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몰아넣어 죽게 하였으며, 몽골로 귀환하는 김에 전리품을 좀 더 챙겨서 가자고 해서 이란, 캅카스의 여러 도시와 러시아 남부의 공국들을 쓸어버리면서 공략하였다. 크림 반도에서 이탈리아제노바 공화국의 식민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며,[9] 러시아 공국들의 연합군 8만명을 격파하기도 했다(칼가강 전투). 이때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무너져, 나중에 있었던 본격적인 동유럽 원정 때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되었다. 수부타이가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그의 나이를 걱정해서 칭기즈 칸은 그로 하여금 후방에서 쉬게 하려고 했지만 수부타이는 칸이 전선에 나서는데 어떻게 자신이 뒤에서 쉬고 있겠냐며 거부했다.

2.3. 금나라 정벌


그러나 금나라를 정벌하던 도중에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 1231년 당시의 금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완안진화상이 이끌던 금나라 군대와 맞붙은 도화곡 전투에서 퇴각한 것. 완안진화상은 그의 뒤를 쫒아 추격전을 했다.[10] 그러나 실패도 잠시, 끝내 1233년 금나라의 도읍인 변경을 함락하여 금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2.4. 유럽 원정에서의 맹활약과 죽음


[image]
바투유럽 원정에도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는데 총사령관인 바투의 삽질까지 메꿔가며 큰 공을 세운 뒤에 귀환했다. 당시의 러시아 공국 지역을 거의 초토화 시켰고, 레그니차 전투사요 강 전투에서 각각 3-5만 명 가량의 폴란드/튜튼, 헝가리 기사단을 전멸시켰다. 특히 사요 강 전투는 패퇴하는 헝가리 군 수만명을 수일간 포위 기동으로 추적하며 학살. 유럽지역에 남아있는 몽골에 대한 공포는 이 전역들에 기반한 것이다.[11]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바투였으나, 실제로 해당 전역들을 주관한 것은 수부타이로 보이며, 이로 인해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던 도중 몽골 본토에서 우구데이 칸의 병사 소식이 알려져, 몽골 본토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회군하게 되었다. 이후 구유크 칸은 그를 중국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귀환 중 병사. 원정 당시 이미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져 말을 못 타게 되긴 했었다고. 몽골의 대칸 3대[12]를 섬긴 백전노장으로 수명도 72세로 중세 몽골인 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다.
사후 그의 일족은 몽골 제국 및 원나라의 4대 명문 중의 하나로 권세를 떨치게 된다. 나머지 3명은 무카리, 보오르추, 티라운의 일족. 특히 그의 아들인 우랑카다이와 손자인 아쥬도 몽골 제국의 명장으로 용명을 떨쳤다.
금나라 정벌 때 빼고는 패배한 적도 거의 없었고[13] 생애 20번의 원정 동안 65번의 회전에서 승리했고 갈아버린 나라만 32개. 또 싸워본 문화권만 해도 몽골계, 중국계, 중동계, 유럽계로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문화권의 군대를 쓰러뜨렸다.''' 사실상 움직일 때마다 나라 하나 갈아버리는 사람.(틀린 말은 아니다. 출정할 때마다 몇십개의 회전에서 승리하였으니.)

3. 건강 및 철수레에 대한 이견[14]


몽골비사에 철수레에 관한 언급이 2회 등장하는데, 모두 수부타이에 관한 내용이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탔다는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비만 및 당뇨설을 제기하는데, 이는 논란이 있는 주장이다.
수부타이의 체격이 비대했다는 내용은 몽골비사에도 없고, 별도로 당시에 기록된 사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철수레 사용에 대한 해석으로 비만설이 최초로 제기된 저서는 Richard Percival Lister가 집필한 "The Secret History of Genghis Khan : London: Peter Davies, 1969." 이다. 하지만 해당 저서에는 비만에 대한 인용 출처가 없고, 별다른 근거 내용 또한 찾을 수 없다. 작가가 원래 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쓰던 사람으로,[15] 수부타이의 비만설은 작가적 상상 혹은 해석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이 책을 근거로 후대에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설과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낭설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만설로 본 글에도 육식 위주의 식습관 때문에 비만 및 당뇨에 걸렸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현대 의학계의 보편적 이론은 비만과 상당수 성인병의 주요 원인을 과도한 육식보다, 필요 이상의 정제 탄수화물과 지속적인 고당류 및 악성 콜레스테롤 섭취로 본다. 따라서 육식 위주의 식습관으로 인해 비만과 당뇨에 걸렸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본문의 글처럼 수부타이는 당시의 몽골인치고 장수한 편인데, 이것이 13세기 몽골의 의료 환경에서 당뇨환자였다면 과연 가능했을 것인지도 살펴볼 부분이다.[16][17]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된 몽골비사의 원문을 보면 수부타이만 철수레 혹은 철윤차를 타고 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몽골비사의 메르키트족 추적에 관한 부분을 보면 "소의 해에 테무진은 수부타이의 군대를 '테무르 테르겐'으로 무장시켜 톡토아베키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을 쫒게 했다."[18]라는 구절로, 수부타이만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내용이 아니다. 또한 이 테무르 테르겐의 해석이 애매하여, 철수레 혹은 철골 전차 등으로 내용이 다른 형태로 해석한 책들이 존재한다. 철골 전차로 해석한 르네 그루세는 험한 지역과 협곡에서 사용된 특수 전차의 의미로 번역했다. 이 경우 수부타이만 탄 것이다 하더라도, 숲속 부족 출신설을 차용하여 비교적 기마술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 수부타이를 위한 배려였다고 가정하여도, 비만과 당뇨로 철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9]
또 철수레로 해석한 쪽에서는, 물자 수송용 수레를 험지에서의 내구성 때문에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나무 수레는 나무를 구하기 힘든 초원에서 유지 보수에 난점이 많았으나, 대장장이의 아들인 수부타이가 철테를 두른 수레바퀴등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냐는 것. 그렇기 때문에 철수레와 수부타이가 같이 언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수부타이는 대장장이 아들 출신답게, 새로운 기술 도입 및 운용에 적극적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 예로 중국 및 중앙아시아, 러시아 지역의 대장장이와 기술자들을 휩쓸다시피 동원하여 모든 전역에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 위에 언급된 사요강 전투에서 헝가리 군 석궁병들의 거센 반격을 제압하기 위해 투석기를 활용하여 공격하였다.[20]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면 수부타이와 철수레에 대한 언급은 수부타이의 기술 수용에 대한 적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1]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는 철수레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소해, 즉 612[/1217]년에 쿠두 및 그의 형제들을 치기 위해 수베테이 바하두르를 군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그것을] 쇠못으로 단단하게 하여, 돌 위에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22][23] 위 철수레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 수레를 내구성을 위해 철제 부품으로 보강했다는 것과, 병사들을 위한 것으로 수부타이만 타고 다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만인 수부타이를 위해 철수레를 제작해 홀로 타고 다녔다는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부타이가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지휘한 전역들의 기동 거리가 1-2000 km에 육박하고, 1600 km에 달하는 거리를 칭기즈 칸의 소환으로 홀로 여행했다는 기록들을 봤을 때, 당시 기술로는 평소 승차감이 극도로 열악했을 철수레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철수레는 부대 차원에서 특수 목적 혹은 수송용으로 운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수부타이의 비만 및 당뇨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4. 기타


  • 중국 드라마 <칭기즈 칸>에선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발라버리고 돌아갈 때 부하들이 "수부타이는 어쩌고요?"라고 묻자 별 걱정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물론 수부타이의 행적을 보면 걱정 안 해도 되긴 했지만 말이다.
  • 칭기즈 칸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는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인물로 천지를 먹다 2의 외국내수판에서는 조운이 수부타이가 되었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도 영웅 유닛(기마 궁사)으로 나온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는 "수바다이"라고 나온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몽골 제국의 가신으로 등장하며, 1241년 시나리오에서는 킵차크 칸국의 카안인 바투 휘하의 칸이다. 형인 젤메도 몽골제국 가신으로 등장한다.
  • 코에이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하는데, 칭기즈 칸 본인 다음으로 전투력이 강하게 묘사된다.
    • 징기스칸 3 원조비사에서는 전투력이 A인 반면 지휘력이 C인 애매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몽골기병 지휘시에 지휘력이 A나 B이면 기동력 15를 모두 쓸 수 있는 반면 C는 기동력이 14가 되기에 이동거리도 짧아지고 한 턴에 쓸 수 있는 명령 수도 줄어든다. 통상 공격과 궁시 공격은 기동력 3 소모에 돌격은 5 소모이기에 모두 15의 약수로 떨어지기에 기동력 14는 공격 4번하면 기동력이 2가 남아 뭘 해볼 명령이 없어 굉장히 애매해진다. 때문에 전투력은 낮아도 지휘력은 높은 젤메보다도 활용하기 애매한 면모가 있다.
    • 징기스칸 4에서는 전투력이 우수하지만 다른 능력치가 암울.[24] 하지만 수명이 긴 메리트가 있어서 장기간 사용 가능하다. 그런데 연사 특기가 없어서 몽골 기병을 쓰기 약간 애매하니 전투 경험을 쌓아서[25] 연사 특기를 얻게 해 주는 것이 좋다. 정치력이 바닥을 기는데 어쩐 일인지 등용 특기가 있어서 재수 좋으면 재야의 우수한 장수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사람의 열전에서 촐몰년도가 ???? 년 ~ ???? 년으로 되어있고, 출생년도는 에디터로 뜯어보면 1173라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 오류. 웃긴 점은 유저들이 만든 시나리오에서도 수부타이의 생몰년도가 전혀 수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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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1] 발음은 '수베데'이다. 몽골어는 모음 조화가 지켜지는 언어이기에 단어 앞의 모음에 따라 뒤의 모음이 결정되기에 본래 수부 다음에는 타이가 아닌 데이가 나와야 한다. 데이가 타이로 잘못 표기되는 원인은 중국어에 테이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 무조건 타이로 표기해서 생긴 오류이다. 물론 현대 몽골어에서는 수부테이 조차도 아닌 수베데가 정식 발음이다.[2] 리처드 A. 가브리엘의 저서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Genghis Khan's Greatest General Subotai the valiant)"의 일부 본문 인용 및 내용 참조.[3] 최근까지의 우량카이족 후손들은 반유목 반정착 생활을 하였는데, 봄부터 늦가을까지 유목과 식량을 비축해 두는 생활 양식을 보이며, 겨울철에만 정주지에 거주하며 지낸다.[4] 당대에 이미 우량카이, 삼림 우량카이는 모두 칭기스칸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젤메와 수부타이의 부족으로 나름 중용되었다. 만일 수부타이가 삼림 우량카이라도 숲속 부족이라 기마술이 약했다면 같은 논거로 젤메와 다른 삼림 우량카이족 남자들 모두 기마술이 떨어졌겠는가? 그랬다면 기병 위주의 몽골군에서 작전 수행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며, 부족 대부분이 칭기스칸 휘하에서 복무하지 못했거나 중용되지 못했을 것이다.[5] 자르치우다이가 테무진이 고생하던 시절 식량을 제공해주고 여러 도움을 줬다는 설도 존재한다.[6] 원래 젤메는 테무진과 같은 달에 태어나, 아버지 자르치우다이가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테무진의 노예로 바쳤다. 그러나 갓 태어난 테무진 키우기에도 벅찬 예수게이가 장성하면 보내라고 돌려보냈고, 예수게이 독살 이후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테무진이 장성하자,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약속 이행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젤메를 테무진에게 보낸다. 그로 인해 젤메는 테무진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그와 유사한 행적을 보인 동생 수부타이도 어릴 때부터 각별한 신임 속에 각종 군사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는 추정이다.[7] 수부타이가 뛰어난 군사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제베의 부관으로 일하면서부터 이다. 타이치우트 족에서 항복하여 칭기즈 칸 측에 새로 합류한 제베의 뛰어난 실력을 파악한 칭기즈 칸은 그로 하여금 사실상 그보다 고참인 수부타이를 지도하게 하여 그의 포텐을 만개시키도록 이끈다. 인재를 파악하고 그들의 사회상 지위에 상관없이 기용하는 칭기즈 칸의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8] 그의 아들이 몽골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명장 잘랄 웃 딘이다.[9] 이후 제노바 공화국에서 군대가 오자 수부타이는 이미 전리품은 다 챙겼으므로 퇴각한다. 그런데 이때 한 설에 의하면 시체를 성 안에 던져놓고 갔다고 한다.[10] 이 기록은 《금사》 이랄포아(移刺蒲阿) 열전에 나와 있다. '''1231년 1월, 수부타이가 동관을 공격했으나, 완안진화상의 충효군 1천여명이 (이랄포아에게) 지원을 오자 몽골군이 퇴각했고, 금나라 군이 골짜기 입구(谷口)까지 추격하였다.''' 다만, 기록상 전투 과정과 피해 수치가 전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수부타이가 패배했는진 알 수 없다.[11] 사요 강 전투 역시 바투의 실책으로 전세가 몽골군에게 불리했을때 수부타이의 전술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12]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구유크 칸.[13] 패배로 꾸중을 들은 적이 한 차례, 패배한 기록이 한 차례 정도.[14] 리처드 A. 가브리엘의 저서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Genghis Khan's Greatest General Subotai the valiant)"의 일부 본문 인용 및 내용 참조.[15] 링크 참조.[16] 중세 몽골의 의술은 13세기 이전에는 샤머니즘과 유목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은 뜸요법, 정골요법, 외상에 대한 치료법, 사혈요법, 말젖을 이용한 마유주 요법 수준이었으나, 칭기즈칸 시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도, 티벳, 중국 등과의 문화적 교류 및 풍부해진 임상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요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발전 시켰고, 약물학이나 방제학 지식이 보다 심화 발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행정으로는 1204년 의사에 대한 세금 면제, 1260년 국가적 보건행정기구 설립, 1272년 약품 유통에 관한 법률 정비, 1292년 중동지역의 약물 전문 연구 기관 회회약물원의 설치 등을 통해 의료 발전을 도모했다. - "몽골 전통의료의 현황 및 역사적 발달과정:유왕근" 참조 및 요약 인용.[17] 몽골의 의료 수준이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되고 체계적으로 발전된 것은 위 주석에서 나타나 듯 인도와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또 중국, 티벳, 중동 등이 정복되고 어느정도 안정이 된 뒤에서야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략 1240-60년 사이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1248년에 사망한 수부타이가 당뇨환자였다면, 해당 제도와 약물학등의 혜택을 그리 많이 받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18] 국내 번역된 사계절 출판사/유역수 역주의 몽골 비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그 소해(1205)에 칭기스 카한이 철제 전차를 가진 수베에테이를 톡토아의 아들들인 코도, 칼, 칠라온을 추격하도록 보내면서 수베에테이에게 명령을 받들게 하기를...", "...하고 명령을 내리고 추격하여 끝장을 낼 수 있도록 철제 전차를 만들어 소해(1205)에 출정하게 했다."[19] 고대에 사용된 전차(채리엇)는 열악한 주행 성능과 승차감으로 주로 평지에서 운용되었고, 기병의 발전과 더불어 전장에서 도태된 물건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차량 완충 장치들의 초기 모델은 17세기에서나 조금씩 발명되었고,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자동차의 발전과 더불어 19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즉 수부타이와 그 부대가 사용한 테무르 테르겐에는 승차감과 주행성능을 개선시킬 완충장치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따라서 당시 최고 수준의 기병을 보유한 몽골군에서 이미 도태된 전차를, 더욱이 사용하기 힘든 험지에서 운용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지 깊이 살펴볼 부분이다.[20] 이는 유럽 사서의 기록상 최초 혹은 초기에 기록된 야전에서의 공성병기 운용술에 해당한다고 한다.[21] 칭기스칸의 패배와 비극적 일화들조차도 사실 그대로 서술한 몽골비사의 성격상, 수부타이에게 비만등의 문제가 있었다면 있는 그대로 명시했을 것이다. 즉, 철수레를 굳이 비만에 대한 은유나 암시로써 언급한 것인지 의문이다.[22] 칭기스칸기(라시드 앗 딘의 집사2) 김호동 역주 / 293페이지[23] '집사'는 당대보다 조금 후대에 중동에서 쓰여진 특성상 몽골 혹은 중국쪽 사서와 일부 차이가 있지만, 가잔 칸의 요청으로 현재에는 구할 수 없는 자료와 학자들을 중국 및 몽골등에서 지원받아 편찬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하여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뛰어난 역사서이다.[24] 정치는 몰라도 지모가 심하게 낮다는 말도 나온다.[25] 정확하게는, 해당 전투 특기를 가진 장수를 포로로 잡으면 일정 확률로 특기를 배운다. 여기서 포로를 잡는다는 것은 해당 장수와 전투를 벌어서 잡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지만, 일하고 있는 장수를 잡아도 일정 확률로 배운다. 단, 도시에 있는 장수는 수성전을 치른 장수를 제외하면 해당사항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