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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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承嗣
(649 ~ 698)
1. 개요
당나라, 무주의 인물. 무원사의 아들, 무사확의 손자, 측천무후의 조카.
2. 행적
병주 문수 사람으로 674년에 영남에 있다가 부름을 받아 주공에 봉해졌고 상의봉어에 임명되었으며, 여름 5월 12일에 종정경으로 승진했다. 684년에는 상서감으로 있다가 2월 8일에 유인궤가 지서경유수사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자 옥새로 찍힌 문서를 보내 강제로 임명하게 했다.
12일에는 대신들이 존호를 올리면서 15일에 예부상서를 지내던 무승사는 측천무후가 황제를 이어받도록 책봉했으며, 5월에 태상경,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다가 27일에 파직되어 예부상서가 되면서 측천무후에게 조상들을 왕으로 추봉하면서 무씨칠묘를 요청해 측천무후가 그 의견을 따랐다.
또한 무삼사[1] 와 함께 황족 중에서 지위가 높은 이원가, 이령기 등을 사건을 만들어서 죽이라고 권했으며, 685년에 2월 29일에 춘관상서를 지내다가 동봉각난대삼품이 되었고 3월 16일에 파직되었다. 686년에는 이효일이 명망이 높아지자 그를 미워해 참소하면서 시주자사로 좌천시켰는데, 이효일이 자신의 이름 중에 토(兎)가 있어 토끼는 달 속에 있는 보물이라 자신에게 하늘이라는 명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무고해 끝내 담주로 유배되어 죽게 만들었다.
686년에는 측천무후의 명으로 흰 돌을 깎아 "황제의 모친이 세상을 다스리고 황제의 업적은 영원히 번창한다"는 문장을 새겨놓았다가 자주색 돌을 분말로 만들고 약물에 섞어서 그 곳에 채워 낙수에 던졌으며, 689년에는 천관상서를 지내다가 납언에 임명되고 690년 1월 10일에는 문창좌상이 되고 무승사는 무삼사와 함께 권력을 잡으면서 병이 든 위방질을 문병하러 갔다가 침상에 의지해 예의를 갖추지 않자 위방질을 모함해 유배를 보냈다가 적몰되게 했다.
690년에는 이상금, 이소절 등을 모반했다고 무고했고 9월 13일에 무씨칠묘가 완성되자 위왕이 되었으며, 691년에는 사람을 시켜 표문을 올려 자신을 황태자로 삼게 했다가 이를 반대하는 격보원을 참소했다. 자신을 책립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심한데다가 자신이 시킨 자를 때려죽이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책림되지 못했다.
692년에는 특진이 되었고 694년에는 사이의 추장들을 거느리고 철로 된 건조물을 주조해 낙양성 남쪽 문 바깥에 세우면서 공덕을 새겨 당을 쫓아내면서 주를 칭송하자고 청했으며, 697년에 교지지에게 벽옥이라는 첩이 있어 벽옥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했다가 돌려보내지 않았다. 교지지가 녹주원이라는 글을 지어보냈고 벽옥이 우물에 던져 자살하면서 무승사는 치마의 띠에서 시를 보고 크게 화가 나서 교지지를 고발해 죽게 만들었다.
6월 24일에 무삼사와 함께 동봉각난대 삼품이 되었다가 정치하는 일을 그만뒀고 무삼사와 함께 스스로 무씨임을 의지하여 서로 태자를 되기를 원해 사람을 보내 측천무후에게 유세하도록 했지만 적인걸이 이를 반대하고 이철, 이단 중 한 명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측천무후는 자식이 3명이나 있었기에 이단이나 태평공주에게 물려주려고 생각되고 있다. 태자태보 위선왕을 지내던 무승사는 태자가 될 수 없는 것이 한이 되어 우울하게 지내다가 698년 8월 1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3. 매체
KBS 대조영(드라마)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전현.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큰 활약을 한다. 결말부에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 무후의 서찰을 전하는 과정에서 서찰에 고구려가 아닌 '말갈발해'라 적힌 죄목으로 다른 중신들과 함께 하옥크리를 먹는데, 대조영은 이들에게 나흘 동안 식량이며 물이며 아무것도 주지않는다. 다행히 숙영이 대조영에게 살려주자고 건의를 하여 쫄쭐 굶었지만 목숨은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