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지치
文景之治
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일컫는 말로,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중국은 주나라 이래로 장장 550년간의 춘추전국시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받고 살았고,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제자백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강력한 억압과 법질서를 내세운 진나라 아래서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결국 곧이어 벌어진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으로 진나라도 박살이 난다.
하지만 항우가 가는 곳마다 전대미문의 학살을 벌인 데다가, 유방은 유방대로 항우를 이기기 위해 한계까지 한나라를 쥐어짜며 적국의 영토 또한 여력이 닿는대로 약탈하거나 파괴했다. 그리고 그 후엔 다시 흉노가 강성해져 한나라를 위협했고, 이런 전쟁고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들어선 한나라의 5~6대 황제 문제와 경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서, 전쟁 등 여러 대외사업을 자제하고 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과장은 좀 있겠지만 당시 대다수 백성들이 노새를 타고 다녔고, 땅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를 않았으며, 창고에는 쌀들이 썩어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문경지치는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말로 후대의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마냥 악녀로 평가받던 유방의 아내 여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여후가 이 문경지치의 기반을 어느정도 마련해줬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여후가 잔인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는 황실 내부 문제로, 통치 면에선 전후 복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게 이 주장의 요지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한문제 자체의 공이 엄청나기 때문에 반박도 많긴 하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여후가 아니라 유방이 먼저 다 해놓은 것이기도 하고.[1] 사실 한경제도 문제에 비하면 평가가 떨어지는 편인데, 한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혁신적인 생각으로 국가나 왕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개방하였으며, 산림과 하천을 개발하는 정책을 펼치고 공업과 상업을 발달시켜 결과적으로 '''공상잡세가 토지세를 능가'''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의 정책 결과 과거 중요했던 자원인 소금과 철의 생산이 크게 늘었으며 여러 직업이 생기고 상품의 생산과 유통도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지세와 인두세 등을 내릴 수 있게 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요역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도 생겨 농민들의 요역 부담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문제 본인이 매우 근검절약하는 성격으로 국고의 낭비도 꼼꼼하게 막았다. 한문제가 얼마나 국력을 불려놨는지 한경제 때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지방 호족들은 중앙이 너무 강해져서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경지치 외 중국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시절론 요순 시대, 성강지치나 광무중흥, 당의 정관지치, 개원지치, 불야성이란 말이 쓰이게 된 송의 '함평-경력 치세', 청의 강건성세 등이 거론된다. 다만 요순은 거의 전설상 인물이고, 당은 둘 다 말년으로 갈수록 삐딱 테크를 탔으며, 송은 경제와 문화 같은 다른 성과에 비해 군사력이 허약했고,[2] 청은 어찌됐든 만주족 국가라 피지배층이던 한족 입장에선[3] 취급이 묘한 편인데다가, 건륭제 역시 말년에 삐딱선을 탄 게 사실이다.
한편, 이 문경지치는 경제의 아들 한무제가 끝장냈는데, 무제가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업적을 남겼지만 다른 부분에선 비판을 받는 이유도 문제가 남긴 정책에 마음대로 손을 대다가 경제를 말아먹었기(...) 때문. 무제는 진시황 마냥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많은 백성을 혹사시켰다. 또 문제 이래 원만하게 지내던 흉노와 데스매치를 벌여 결국 승리는 했지만, 그 결과 문제와 경제가 쌓아논 국고는 대거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 수준 교과서에서 한나라 역사를 배울 땐 이렇게 자세하게 문경지치에 할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문제와 경제의 업적은 문경지치 시절이었다 정도로 짧게 넘어가고, 반면 무제는 흉노, 고조선, 남월 토벌, 실크로드 발견 같은 대외적으로 굵직굵직한 활동들이 많아 서술량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마치 무제가 한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황제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시피 여후를 차치하고서라도 오히려 한무제의 업적을 가능케 한 기반을 닦은 황제는 한문제와 경제였다.
1. 개요
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일컫는 말로,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2. 상세
중국은 주나라 이래로 장장 550년간의 춘추전국시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받고 살았고,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제자백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강력한 억압과 법질서를 내세운 진나라 아래서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결국 곧이어 벌어진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으로 진나라도 박살이 난다.
하지만 항우가 가는 곳마다 전대미문의 학살을 벌인 데다가, 유방은 유방대로 항우를 이기기 위해 한계까지 한나라를 쥐어짜며 적국의 영토 또한 여력이 닿는대로 약탈하거나 파괴했다. 그리고 그 후엔 다시 흉노가 강성해져 한나라를 위협했고, 이런 전쟁고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들어선 한나라의 5~6대 황제 문제와 경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서, 전쟁 등 여러 대외사업을 자제하고 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과장은 좀 있겠지만 당시 대다수 백성들이 노새를 타고 다녔고, 땅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를 않았으며, 창고에는 쌀들이 썩어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문경지치는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말로 후대의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3. 여담
세월이 흘러 마냥 악녀로 평가받던 유방의 아내 여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여후가 이 문경지치의 기반을 어느정도 마련해줬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여후가 잔인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는 황실 내부 문제로, 통치 면에선 전후 복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게 이 주장의 요지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한문제 자체의 공이 엄청나기 때문에 반박도 많긴 하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여후가 아니라 유방이 먼저 다 해놓은 것이기도 하고.[1] 사실 한경제도 문제에 비하면 평가가 떨어지는 편인데, 한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혁신적인 생각으로 국가나 왕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개방하였으며, 산림과 하천을 개발하는 정책을 펼치고 공업과 상업을 발달시켜 결과적으로 '''공상잡세가 토지세를 능가'''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의 정책 결과 과거 중요했던 자원인 소금과 철의 생산이 크게 늘었으며 여러 직업이 생기고 상품의 생산과 유통도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지세와 인두세 등을 내릴 수 있게 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요역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도 생겨 농민들의 요역 부담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문제 본인이 매우 근검절약하는 성격으로 국고의 낭비도 꼼꼼하게 막았다. 한문제가 얼마나 국력을 불려놨는지 한경제 때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지방 호족들은 중앙이 너무 강해져서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경지치 외 중국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시절론 요순 시대, 성강지치나 광무중흥, 당의 정관지치, 개원지치, 불야성이란 말이 쓰이게 된 송의 '함평-경력 치세', 청의 강건성세 등이 거론된다. 다만 요순은 거의 전설상 인물이고, 당은 둘 다 말년으로 갈수록 삐딱 테크를 탔으며, 송은 경제와 문화 같은 다른 성과에 비해 군사력이 허약했고,[2] 청은 어찌됐든 만주족 국가라 피지배층이던 한족 입장에선[3] 취급이 묘한 편인데다가, 건륭제 역시 말년에 삐딱선을 탄 게 사실이다.
한편, 이 문경지치는 경제의 아들 한무제가 끝장냈는데, 무제가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업적을 남겼지만 다른 부분에선 비판을 받는 이유도 문제가 남긴 정책에 마음대로 손을 대다가 경제를 말아먹었기(...) 때문. 무제는 진시황 마냥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많은 백성을 혹사시켰다. 또 문제 이래 원만하게 지내던 흉노와 데스매치를 벌여 결국 승리는 했지만, 그 결과 문제와 경제가 쌓아논 국고는 대거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 수준 교과서에서 한나라 역사를 배울 땐 이렇게 자세하게 문경지치에 할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문제와 경제의 업적은 문경지치 시절이었다 정도로 짧게 넘어가고, 반면 무제는 흉노, 고조선, 남월 토벌, 실크로드 발견 같은 대외적으로 굵직굵직한 활동들이 많아 서술량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마치 무제가 한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황제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시피 여후를 차치하고서라도 오히려 한무제의 업적을 가능케 한 기반을 닦은 황제는 한문제와 경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