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

 

1. 개요
2. 상세
3. 명칭
4. 역사
5. 주변 시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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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에서 바라본 연수, 송도 일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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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정상'''
文鶴山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연수구의 경계가 되는 높이 해발 217m의 산.

2. 상세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의 연경산과 노적봉, 동쪽의 수리봉과 선유봉(길마산) 등을 포함한 산줄기를 가리킨다.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를 이으면 길이가 5km 정도로 등산 코스가 다양하고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천시민들이 사랑하고 자주 오르는 산이다. 북서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학익동, 문학동, 선학동, 연수동, 청학동, 옥련동에 접해 있다.
진입로가 많지만 선학역에서 시작하여 법주사 옆길로 길마산을 향해 오르는 방법, 학익동 백학초등학교에서부터 연경산 쪽으로 오르는 방법, 옥련국제사격장이나 송도역에서 시작하여 노적봉 방향으로 오르는 방법 등이 많이 이용된다. 선학역에서 송도역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은 연수둘레길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군사시설이 위치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2013년에 병력이 철수하였고, 2015년 10월 15일부터 주간에 한해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3. 명칭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남산(南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 때까지는 앞산이라는 의미에서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1] 또, 민간에서는 정상의 봉수대가 드러누운 사람의 배꼽처럼 보인다고 하여 배꼽산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남산, 배꼽산 모두 쓰이지 않고 문학산이라고만 불린다.
문학산은 원래 '학산(鶴山)'이라고 하던 것을 근처 문묘(文廟)[2]에서 '문(文)'자를 따와 문학산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학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에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거나 산세가 날개를 펼친 학의 모양을 닮아서라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3]
숙종이 인천서원에 편액을 내리면서 학산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유래라는 설도 널리 퍼져 있었으나,[4] 학산서원 건립 이전의 한시에서도 학산이라고 칭한 것이 발견되면서 이 설은 현재 폐기되었다.
그 외에 '학산'이 언어학적으로 '두룸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두룸은 '두르다'의 옛말인 '두루다'의 명사형이므로 두룸산은 '(마을을) 둘러싼 산'이라는 뜻이며, 이와 비슷한 지명으로 두륜산, 대둔산 등이 있다.[5] 두룸을 한자로 옮기면서 '두루미 학(鶴)' 자를 취하여 훈차하였을 뿐 조류인 두루미와는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다.
비교적 덜 알려졌으나 또 다른 언어학적 설명으로 이 부근에서 이뤄졌던 조개잡이와 관련짓는 설이 있다. 19세기 말 이후 간척이 진행되기 전까지 학익동 일대는 바다에서 가까웠고, 조개가 많이 잡혀 합골[蛤谷]이라고 불렸는데 합골이 햇골, 핵굴 등으로 변형되어 학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옥련동에 지금도 남아있는 조개고개라는 지명을 그 근거로 들기도 한다.
유래가 어찌 되었든 '문학'이라는 이름은 문학동, 학익동, 선학동, 청학동 등 주변 지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천의 시조는(市鳥)는 두루미이고, 2017년까지 시의 마스코트도 두루미 캐릭터였다. 또한, 프로야구단 SK와이번스의 홈 구장인 인천문학경기장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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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문학산과 오늘날의 문학산에서 내려다 본 전경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주몽의 아들 비류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동생 온조는 위례성에 터전을 잡고 형 비류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는데, 문학산이 바로 비류가 도읍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6] 비류가 이 곳의 물이 짜고 땅이 습한 것에 낙담하여 세상을 떠난 후 온조가 형의 백성까지 거두면서 국호를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문학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석축산성인 문학산성이 남아있으며,[7] 동사강목,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등의 옛 문헌에는 이 성이 비류의 옛 성이고,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4년 발굴 조사에서는 정상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큰 바위 위에 돌을 쌓아 만든 가로 3.6m, 세로 3.5m 크기의 제단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돌화살촉부터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고려시대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어 문학산이 지역민들에게 고대부터 꾸준히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학산은 조선시대에도 북쪽 기슭에 인천도호부관아, 인천향교 등이 위치하여 인천의 주산(主山) 노릇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 1542~1593)이 민병을 모으고 옛 성을 수축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김민선은 임진왜란 중 병사하여 도승지로 추증되고 안관(安官)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병자호란 후 마을 노인들이 호통을 치는 김민선의 꿈을 꾼 것을 계기로 문학산 정상 봉수대 옆에 김민선을 모시는 사당인 안관당이 설립되었다. 김민선에 대한 존경은 산신신앙과 결합되어 안관당에는 김민선의 영정과 함께 남녀 목조상이 세워졌고, 각각 안관 할아버지와 안관 할머니로 불렸다. 안관당에서는 매년 두 차례 안관제라고 하는 제례가 행해졌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안관당이 사라진 이유로는 천주교가 확산되면서 1910년대 신도들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이야기와 6·25 전쟁 무렵까지도 남아있었는데 이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봉수대, 우물 등과 함께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혼재한다.
1708년(숙종 34년) 인천 부사를 역임한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을 기리기 위해 문학산 북쪽 기슭에 인천서원이 건립되었고, 같은 해 숙종으로부터 ‘학산(鶴山)’이라는 액호(額號)를 받으면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학산서원은 이후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나 1871년(고종 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정리 정책으로 사라져 터만 남아있다가 문학터널 공사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문학터널 북쪽 입구에 있는 학산서원 터 비석은 2004년에 세운 것이며, 2009년부터 뜻 있는 사람들이 서원 터에 꽃과 나무를 가꾸고 이 곳에서 나온 돌을 모아 돌담을 쌓는 사업을 하였다.
6·25 전쟁 이후 문학산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미군 작전의 주요 지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65년 정상에 정식으로 미군 부대가 들어섰다. 이 때 문학산성의 북쪽, 서쪽 성벽과 성문이 훼손되었으며 봉수대도 사라졌다. 1979년 미군이 떠나고 대한한국 공군이 인수하여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5. 주변 시설


  • 교통: 문학경기장역, 선학역, 송도역, 제2경인고속도로 문학IC, 문학터널
  • 문화재: 문학산성, 인천향교, 인천도호부관아, 학산서원 터
  • 체육시설: 인천문학경기장, 옥련국제사격장, 문학공원 및 연경산 배드민턴장, 청학풀장[8]

6. 기타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의 좁은 길목은 사모지고개 혹은 삼호현(三呼峴)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백제 때 붙여진 지명이다. 근초고왕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과의 육로가 차단되고 해로로 교류해야 했으며,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중국으로 가는 배는 능허대(연수구 옥련동 소재)가 있는 한나루[漢津]에서 출항하였다. 사신의 가족들은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배웅하다가 비루고개 혹은 별리현(別離峴; 남동구 만수동 소재)에서 헤어졌고, 사신은 사모지고개를 넘기 전에 가족을 두고 가는 것이 아쉬워 마지막으로 세 번 돌아보며 잘 있으라고 외쳤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사모지고개가 삼해주현(三亥酒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해주는 정월 해일(亥日)에 빚어 마시는 술을 말하며, 이 고개에는 움푹 파인 바위가 있어 늘 삼해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는 나그네는 누구나 이 술을 마실 수 있지만 한 잔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는데 어떤 나그네가 욕심을 부려 여러 잔을 마시는 바람에 술이 말라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사모지고개를 넘어 청학동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중바위 혹은 효자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양손을 짚은 듯한 자국과 머리가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청학동에 사는 한 스님(혹은 효자)이 이 곳을 지나다 목이 말라 물을 찾았더니 바위 뒤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술을 석 잔 주었고, 이 일은 이후로 매일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스님이 술을 탐내어 한 잔을 더 달라고 하니 여인은 바위 뒤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바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빌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중바위까지는 길이 잘 닦여있지 않고 안내판이 없어 등산객이 찾아가기 쉽지 않다.
사모지고개 근처에는 갑옷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가로로 길게 홈이 나 있어 마치 뚜껑을 덮어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옛날 어떤 장수가 돌함을 만들어 자신의 갑옷을 넣은 뒤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도록 뚜껑을 덮었으며, 이 바위를 건드린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SBS 있다! 없다? 107회(2008년 1월 18일 방영)에 돌 먹는 나무가 소개되었다. 이 나무는 키 12m, 수령 40~50년(2020년 기준) 정도의 아카시아 나무로 밑동에 큰 돌이 박혀 있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나무가 자라면서 부피팽창을 하여 돌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명 삼신할매 나무로도 불린다고 하나 나무가 돌을 낳는 듯한 모습에서 비롯된 별명일 뿐 실제로 여인이 출산을 기원하며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하기에는 수령이 낮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볼 수 있으며 눈에 띄는 안내 표지판도 설치되어 있다.
[1] 남산은 방위상 남쪽에 있다는 뜻도 되나 남향을 기준으로 마을의 앞에 있다는 뜻이 더 정확하다. 서울 남산의 여러 이름 중 '목멱산'은 앞산이라는 의미의 '마뫼'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데, '산'이 두 번 들어간 잘못된 명칭이다.[2] 공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성균관이나 향교의 대성전이 이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문학산 북쪽 기슭의 인천향교를 가리킨다.[3] 현재는 시가지와 제2경인고속도로로 끊겨 있지만, 동서로 펼쳐진 문학산을 북동쪽의 승학산, 남서쪽의 청량산과 이으면 대략 열십자(十) 모양이 되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학의 모습으로 비유된다.[4] 이 설에 따르자면 숙종이 왜 하필 '학산'이라는 액호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선비의 학자적 풍모가 학의 고고한 자태에 비유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었다.[5] '두룸'의 축약형이 '둠'인데 두메산골의 '두메', 도마뱀(산뱀)의 '도마' 등이 여기서 변형되었다고도 한다.[6] 그래서 미추홀구의 마스코트인 미추는 조우관을 쓴 비류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다.[7] 1997년 인하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본래 토성으로 지어졌다가 삼국시대 말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8] 민간 사업자에 의해 운영되다 수익성 악화로 2019년 폐장 후 공원 조성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