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례성

 



1. 개요
2. 건립에서 파괴까지
3. 어원에 대하여
4. 하남위례성 위치 문제
4.2. 가설 2 :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4.3. 가설 3 : 몽촌토성 - 풍납토성 이원설
4.4. 가설 4 : 천안시 성환읍
4.5. 가설 5 : 왕성 이동설
5. 그렇다면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6. 위례신도시와의 연관점?


1. 개요


백제 왕조의 도성. 이칭은 한성으로 이 시기의 백제를 '''한성백제'''(漢城百濟)라 한다.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이 있는 한강 유역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세부적인 위치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위례성은 하남, 하북 두 성이 있었다.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최초로 하북위례성에 성을 쌓았고, 이후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 하북위례성은 아직 명확하게 비정되지 않았고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몽촌토성 둘 중 하나로 추정되며, 이 밖에 하남시 이성산성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 475년 문주왕웅진성(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92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는 충남 직산 일대(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가 위례성으로 추측되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모두 지금의 직산의 옛 이름이 위례성(위례산이 있으면 위례산성지와 인접한 성거산에 성거산성지가 있다)이라 서술하고 있으며, 한강 이남의 백제가 수도로 두었던 곳은 별개로 한성으로 인식하였다.

2. 건립에서 파괴까지


졸본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이탈한 세력인 소서노비류, 온조 등이 남부로 내려와 한사군마한의 땅에 거점하게 된다. BC 18년,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에서 건국을 선포하고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세운다.
이 곳에서 말갈족과 전쟁을 벌이고, 성을 세워 낙랑군을 견제하는 등 국력을 불려나갔지만, 백제의 성장을 두려워한 말갈, 낙랑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수세에 밀리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 소서노도 죽자 온조왕은 결국 천도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BC 6년, 온조왕 재위 13년에 한강 이남으로 위례성을 옮기게 된다. 마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성곽을 세웠다. 이 때 새로 쌓은 위례를 하남위례성, 기존의 위례를 하북위례성이라고 구분한다.[1]
새로운 위례성은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붙잡혀 처형되는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로서 존재하였다. 백여 년 뒤 백제가 중흥하고 고구려가 약화된 성왕 시대 551년에 잠깐 고토회복에 성공했지만 곧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된다.

3. 어원에 대하여


위례성(慰禮)는 '위로할 위(慰)'와 '예절 례(禮)' 자로 이루어진 어휘로, 풀이하면 '예를(禮) 다하는(慰) 성(城)' 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본디 예(禮)의 고자(古字)가 '豊(풍성할 풍)'이었으므로 '풍요롭고 아늑함'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위(慰)의 본자는 '尉' 였는데, 본뜻은 '누르다', '지지다'는 의미로 달군 다리미로 옷감을 지지는 형상이었다.
위례성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제기된 상태다.
  • 한자 뜻을 그대로 풀어 '예를 다하는 성'이라는 설
온조 등 고구려에서 탈출한 난민[2]들의 정착을 도와준 마한 임금에 대한 성의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사서에는 마한 임금이 처음 백제 유민이 건너왔을 당시 정착할 땅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초창기에도 그들의 도성을 위례성으로 칭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견이지만, 이것이 '은총에 대한 감사'를 뜻한다면 어째서 백제가 국력이 더 커지고 끝내 마한을 정복전쟁으로 흡수한 이후에도 계속 '위례'라는 이름을 썼느냐는 문제가 있다.
  • 울(울타리)이라는 고유표현을 음차해 위례라고 썼다는 설
이것은 몽촌토성에서 목책 흔적이 나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힘을 얻은 의견이다. 정약용도 이 설을 지지했지만, 현대에 풍납토성이 등장한 후 이 의견도 상당히 모순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 한강을 뜻하는 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한강과 관련된 어휘인 '욱리(郁里; 욱리하)', '아리(阿利; 아리수)'가 변하여 '위례'가 되었다는 설, 또는 적어도 양자간에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 큰 성, 또는 왕성(王城)의 의미라는 설
백제 귀족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어라하라고 불렀는데(백성들은 건길지), 이 어라하의 음차를 위례로 파악하는 식이다. 다만 어떻게 어라하의 음차가 위례로 변했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4. 하남위례성 위치 문제


초창기 십여년 잠깐 자리해 흔적을 찾기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하북 위례성은 둘째치고, 오랫동안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조차 그 위치가 불명확해 이를 알아내기는 백제 멸망 이후 한국 고대사의 큰 이슈였다. 현대는 물론이고 고려나 조선시대 때도 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후보지도 여러 군데가 꼽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남 위례성은 북으로는 강, 동쪽으로는 높은 산,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있다. 근데 문제는 한국 서해안에 이같은 입지가 수두룩하다는 것.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위례성을 수록했다.

4.1. 가설 1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전통적으로 충남 직산은 위례성이 있었던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 지리지는 물론이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승려 일연은 위례성의 위치를 충남 직산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기록했다. 물론 몽촌토성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후보지에서 제외되었지만 충청지역에서는 꾸준히 미는 주장이다.
2011년 12월에 천안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오랜만에 '''천안-직산 백제 초도설'''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기원전 6)에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고, 24년조(기원후 6)에 웅천에 목책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음을 근거로 들어, 웅천이 현대의 공주이므로 천안 직산이 백제 초기도읍이라는 예전 정설을 다시 들고 나온 것. 정약용 이전의 고문헌들을 참고해야 마땅하고, 정약용의 오판 때문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잘못 해석되었다는 주장이다. 참고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직산에 온조왕 사당이 있었고, 직산에서 성곽 흔적 따위가 출토되기는 한다.# 이로 보아 직산은 '위례성'은 아니라도 백제와 어느 정도 연고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존 주장의 되풀이인 데다가 향토색이 강한 주장이라 얼마나 받아들여야 될지는 미지수. 아직은 학문적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향토 차원의 주장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게다가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은 온조왕 때가 아니라 백제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는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영역을 온조왕 때로 소급한 것'이란 해석이 있기 때문에, 천안-직산 초도설은 무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백제가 그렇게 빨리 남쪽으로는 공주 일대, 동쪽으로는 춘천까지 영역을 확장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히려 직산이 백제 위례성이 아니라 백제가 부상하기 이전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이라는 주장도 있다. 충남에서 위례성 찾으려고 발굴조사하다가 '목지국 유적'을 캐내면 그것도 나름대로 대박.(…)

4.2. 가설 2 :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풍납토성 다음으로 과거부터 가장 주목받아온 학설이다. 조선시대부터 광주 춘궁리[3]를 백제 위례성으로 보고 있었다. 고을의 중심지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데 광주 춘궁리는 당시 광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이래 정설시되었으며, 근현대 사학계의 대부 이병도도 춘궁리를 위례성으로 밀었다. 특히 춘궁리의 이성산성이 위례성으로 유력시되었다. 일단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인근 미사리에는 백제시대 마을 유적도 있기 때문에 이성산성 역시 백제 성곽으로 추정했었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백제 유물보다는 신라 유물들이 수두록하게 발견되어 이성산성 위례성설은 점차 힘을 잃었다. 물론 백제 다음에 신라가 진흥왕 때 이 땅을 차지하므로 신라 유물이 나온다는 것 자체는 여기가 위례성이라도 가능한 일이지만, '''30년을 넘게 발굴했는데도 신라 계통 유물만 계속 나오고''' 백제 계통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성산성의 양식도 흙으로 쌓은 토성 위주의 초기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신라식 석성이다. 수직으로 쌓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는 보축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은 신라 산성임을 보여주는 근거다. 즉 신라 진흥왕 때 있었던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직후에 신라가 처음 새로 쌓은 성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명확히 백제의 것임이 분명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은근슬쩍 '삼국전기 토기'라고 묻어간다." 하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곡면을 이룬 이성산성의 성문지와 옥수수알처럼 다듬은 성벽이 백제성곽의 특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설 6을 주장하는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도 이성산성을 백제 것으로 본다.
참고로 8차 발굴조사 때 고구려 관직 '욕살'이 적힌 목간이 발견되어 고구려가 처음 쌓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만 근거가 이것 뿐이고 신라계 유물이 훨씬 많아서 크게 우세한 설은 아니다.
또한 몇몇 역사학자는 광주 춘궁리 지역에 대형사찰 유적 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춘궁리가 위례성이고 풍납토성은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풍납토성 보존 때문에 부동산 재산권 행사에 많은 제약을 받는 풍납동 주민 단체이 열렬히 지지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 것이 풍납토성이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풍납토성이 보존할 가치가 부족한 유적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을 당시 서울특별시 중랑천 근처, 오늘날의 중랑구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개발되기 전 중랑천 일대에 무덤과 성곽 일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외에 세검정 근방 혹은 북한산 기슭이 아니냐는 추측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여기도 문제가 되는게 3기 신도시 중 한곳인 교산신도시 한복판이다.
2020년 1월 하남 이성산성의 초축(初築)은 백제 시대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성곽고고학 전문가이면서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장을 역임했던 심정보 교수(한밭대학교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성산성은 '''한성백제 시기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양천고성, 설봉산성, 설성산성 등의 산성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으며, 앞서 2017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한 이성산성 서문지에 대한 발굴결과를 분석한 결과 '''이성산성 서문지 개구부 1차 문지와 2차 성벽의 평면 형태가 고구려의 환도산성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남문 저수지에서 한성백제시기 토기편이 출토'''되고 그 상부에서 고구려 유물과 신라(통일신라 포함)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음을 들어, 하남 이성산성은 백제가 초축한 '백제산성'이자 근초고왕이 일시 천도했던 한성이며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 부자가 남침해 점령한 뒤에 고구려식으로 2차 성벽을 개축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552년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점령돼 신라식으로 개축했다는 것.[4]##

4.3. 가설 3 : 몽촌토성 - 풍납토성 이원설


1980년대에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유력한 다크 호스로 떠올랐다. 《삼국사기》의 기술과도 맞는 데다, 발굴 결과 2~3세기 백제 유물품이 나왔기 때문. 그 이후 몽촌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가설이 거의 정설로 굳혀지나 했다. 국사책에서도 몽촌토성을 위례성이라 했으니..
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을 발굴하면서 무게추가 확 뒤바뀌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부합하는 데다 몽촌토성에서 나온 양보다 훨씬 많은 유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한국 고고학계는 이 결과에 턱이 툭 하고 빠졌고, 고대사학계는 부랴부랴 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바꾸는 논문을 발표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풍납토성 참고.
그렇다고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 성과가 나오긴 했지만, 몽촌토성의 전례에 따라 고고학계가 신중하게 접근하는 중. 더구나 풍납토성이 한강 바로 옆에 위치했기 때문에, 유사시 과연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현재 고고학계의 대세는 평상시에는 풍납토성, 위기시에는 몽촌토성에 머물렀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위례성은 이 모두를 통칭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고구려에서도 대성산성 - 장안성이나, 국내성 - 환도산성 등을 이처럼 평시 성과 위기시 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학교의 역사 수업시간에도 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이라고 배우는 편이다.
현대에 서울의 시역이 넓어지다보니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위례성 지역까지 '서울'로 들어왔고, 훗날 조선의 수도 한양과 위례성이 둘 다 지금의 서울이라고 하니까 위례성과 한양이 역사가 이어지는 같은 도시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위례성'과 '한양'은 한강을 끼었다는 점만 빼고는 완전히 다른 도시로 봐야 한다. 전근대시대에는 한강 같은 큰 강 건너편이면 생판 딴 동네나 마찬가지였고,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강남 지역 대부분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군의 변두리였다. 이 부분은 서울특별시/역사 문서를 참고할 것.
이희진, 강찬석 공저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풍납토성 발굴 유물의 고고학적 절대연대가 기원전후까지 올라가는 것과 관련해 저자들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망명해 왔을 때 '마한이 동북쪽 1백리의 땅을 할양해주어서 그 토대 위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한 기록을 풍납토성이 실제 사실로서 증명해줄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5]
온조왕이 사냥하는 척 하면서 합병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마한의 세력 거점이 풍납토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따를 경우 처음 마한의 소국으로 시작했던 백제가 이후 거꾸로 마한을 합병하고 세력을 넓혔다고 기술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고학적인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최근 풍납토성의 건축 연도가 기존 추정치보다 100년 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이 가설도 고려해 볼 점이 많다.

4.4. 가설 4 : 천안시 성환읍


천안시 성환읍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근거로 성환읍에 위례산이 있고 백제 고성 터가 있음을 든다. 이 주장이 맞다면, 한수는 한강이 아니라 안성천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한마디로 가장 가능성이 떨어지는 설이다.
물론 이 설이 맞다고 쳐도 천안까지 백제의 수도가 내려온거면 삼국이 미치도록 차지하려고 하였던 한강은 위치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논쟁이 될것이다.

4.5. 가설 5 : 왕성 이동설


최몽룡 서울대학교 석좌교수의 학설이다. 온조왕이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이남으로 천도한 뒤 풍납토성(하남위례성, 1∼2세기) → 몽촌토성(3∼4세기) → 이성산성(한산성, 4∼5세기) → 춘궁동(한성) 순으로 옮겨가며 왕성 등으로 사용했다는 획기적인 주장.
현재 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질 경우 도성의 존재여부는 물론 백제왕궁의 개수가 한성백제에서만 무려 5개[....]나 된다.

5. 그렇다면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하남위례성 위치만큼 관심사항은 아니지만, 하북위례성의 위치 문제도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다. 정약용은 북한산, 삼양동 일대, 이병도는 세검정 일대로 보았다. 한 역사학자는 광진구 일대로 비정하여, 건국대 일감호가 궁남지 같은 궁지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파주 육계토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나마 의견이 모아지는 하남위례성과는 달리, 이쪽은 그저 의견만이 분분하여 백가쟁명이다. 여러 설들이 있지만 아무튼 서울 강북지역 어딘가일 가능성이 높은 편인데, 일단 온조왕 시기부터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유의미한 유물이 있을 가능성은 낮을데다가 하북은 개발이 될 대로 됐고 이미 땅 속은 콘크리트로 유린당할 대로 당한 상태라서 하북위례 유적이 있다고 해도 훼손되어 영영 못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6. 위례신도시와의 연관점?


위례신도시의 위치는 하남시 춘궁동과도, 송파구 몽촌토성, 풍납토성과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다. 송파구, 성남시 수정구, 하남시가 만나는 지점에 세 지자체가 모두 걸쳐 있으며 비범하게도 세 지자체에서 모두 위례동이란 이름을 제각기 붙였다. 하남시 춘궁동은 위례신도시와는 산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같은 송파구라도 위례신도시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다. 뭐, 서울대공원도 서울에 있는 거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자. ~

[1] 하북위례성에선 약 12년 동안 지낸 셈.[2] 백제 건국자 온조, 그리고 그와 힘을 합친 고구려계 지배층들.[3] 현재는 하남시 춘궁동.[4] 심정보 교수의 논문은 하남역사박물관이 펴낸 '하남 역사 총서'에 실렸흠, '하남 역사 총서'에는 심 교수의 논문 이외에도 2018년에 한국성곽학회에서 실시한 이성산성에 대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전문학자들의 논문 7편이 같이 수록돼 있다.[5] 이병도가 처음 위례성이라고 지적했던 하남은 풍납토성이 있는 서울에서 보면 동북쪽 방향이었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온조 사당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