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사네토모

 


[image]
'''源 實朝 (みなもと の さねとも)'''
1. 개요
2. 생애
4. 기타


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제3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들이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동생.
제2대 쇼군인 형 요리이에를 몰아낸 호조 가문에 의해서 어린 나이에 쇼군에 옹립되었기에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했다. 그는 문예에 관심을 돌려 일본 고유 형식의 시가인 와카를 짓는 일에 몰두했으며, 부모의 복수를 꿈꾼 조카 구교에게 살해당하면서 겐지 가문의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

2. 생애


미나모토 사네토모는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4남[1]으로 태어났다. 1199년 아버지 요리토모가 급사하면서 형 요리이에가 쇼군을 승계했지만 병약했기 때문에 사네토모가 요리이에 대신 간사이 38개국의 '지토'[2] 직에 임명되었다. 이에 요리이에의 외척이자 권세를 잡고 있던 히키 요시카즈가 반발하였다. 하지만 곧 외가인 호조 가문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 때문에 요리이에는 이즈 국으로 유폐되었다가 결국 독살당한다.[3]
실권 장악을 도모하던 호조 가문은 사네토모를 3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그 당시 사네토모는 12살의 나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어머니 호조 마사코가 주로 담당했다. 그러던 중 외할아버지 호조 도키마사가 사네토모를 폐위시키려고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네토모는 어머니 마사코와 함께 외삼촌 요시토키의 집으로 피해 화를 면했다. 이 사건으로 도키마사는 슈젠지(修禪寺)로 유배되었으며, 요시토키는 쇼군의 정무를 대리하는 싯켄(執権)이 되어 마사코와 함께 막부를 지배했다.
사네토모는 연중행사 참여 등과 같은 공적 역할만을 수행할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만요슈 계통의 와카(일본 전통 형식의 시)에 몰두하여 가집 <긴카이와카슈>(金槐和歌集)를 남기기도 했다.
1218년, 사네토모는 무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대신에 승진하여[4] 이듬해 쓰루가오카 하치만 궁에서 승진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형 요리이에의 차남이자 조카인 구교가 달려들었고, 그대로 피살되었다. 겐지 가문의 쇼군들이 없어져야 호조 가문이 본격적으로 실세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방조한 듯한 정황도 있다.
그의 나이 당시 28세였다. 자식이 없었고 암살범인 구교도 사형당했기 때문에 요리토모 직계 겐지 가문은 대가 끊겼다.

3. 백인일수



'''제93번 미나모토노 사네토모(鎌倉右大臣)'''

((なかは つねにもがもな なぎさこぐ あまの小舟(をぶね綱手(つなでかなしも

변치 않기를 바라는 이 세상 해변의 어부 배저어 가는 모습 무상함이 느껴지네[5]


4. 기타


다이쇼 시대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두고 '''정치가로써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예술가로써는 성공한 사람''' 이라고 평하며 예술가로써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어떤 분야에서 실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라고 했다.[6] 시인인 마사오카 시키도 사네토모의 와카에 대해 기존의 명시인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했다고 평가하고, 사람의 위에 선 사람들이 예술까지 잘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인간성이 바닥을 기기 마련인데 사네토모만은 예외였다며, 그가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훌륭한 작품을 더욱 많이 써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다자이 오사무1943년에 사네토모의 인생을 다룬 <우대신 사네토모(右大臣実朝)>라는 역사소설을 썼다. 패전 직전 일본은 각종 검열이 심했는데, 이를 피하고자 당대 작가들은 역사소설을 썼고 이것이 붐이 되었다. 다자이 또한 이 붐에 편승하여 가마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것인데, 한국에도 2014년 도서출판 b에서 펴낸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9권에 실려 있다. <우대신 사네토모> 속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에는 다자이 자신의 내면에서 이상화된 예수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image]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2의 일본의 군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현실에서 안습했던 것을 반영한 모양인지 옆나라 고려고종과 같은 정치 C 전투 C 지도 C 매력 B.

[1] 흔히 전임 쇼군인 요리이에가 장남, 사네토모는 차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요리토모에게는 일찍 죽은 장남 치즈루마루가 있었고, 요리이에와 사네토모 사이에 조교(貞暁)라는 이름의 3남이 있었으나 그는 측실 소생이었으며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다만 요리토모와 호조 마사코 사이의 자녀만 치면 요리이에가 장남(적장자)이었고 사네토모가 차남이었다.[2] 지역을 관리하고 조세를 징수하던 임무.[3] 목욕제계 하는 와중에 습격 당해 암살 당했다는 설도 있다.[4] 때문에 그를 가마쿠라 우다이진(鎌倉右大臣)이라 한다.[5] 물가에서 어부가 자신의 고깃배를 밧줄로 끄는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지금 저 풍경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는 뜻.[6] 출처: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