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colbgcolor=#000000><colcolor=#eeeeee> '''芥川 龍之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출생'''
1892년 3월 1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사망'''
1927년 7월 24일
일본 제국 도쿄부 키타 구
'''국적'''
일본 [image]
'''학력'''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
'''직업'''
소설가
'''대표작'''
'''라쇼몽'''
1. 개요
2. 생애
3. 작품 성향
4. 매체에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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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인 소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 나쓰메 소세키모리 오가이메이지 정신의 화신이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다이쇼 정신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의 활동 기간도 다이쇼 시대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10년이 조금 넘는 짧은 활동 기간동안 많은 명작을 써내었다.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였고, 자살로 인해 문단에 큰 충격을 안긴 작가이다.

2. 생애


일본 도쿄 출생. 본래 성은 니하라(新原)이나, 12세에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누나의 요절로 인한 어머니의 발광때문에 제대로 된 양육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양아버지인 외삼촌이 에도 시대 문예에 관심이 있어, 그에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 1914년 고등학교 동창이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기쿠치 간(菊池寬)[1] 등과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여 첫작품 〈노년〉(老年)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5년 '데이코쿠분가쿠(帝国文学)'에 대표작 〈라쇼몽〉을 발표하고 그 해에 나쓰메 소세키의 '목요회'[2]에 참석하게 된다.1916년 제 4차 신사조에 〈〉(鼻)를, 신소설에 〈참마죽〉(芋粥)을 발표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기관학교에 들어가 영어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영어강의를 하면서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반전(反戰)소설만 잔뜩 소개하다가 1년 뒤, 교직에서 물러났고,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3]에 사우(社友)[4]로 들어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며, 해외 특파원도 겸 하는 등, 이 시기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늑막염, 위장병 등으로 병약했던 체질과, 어머니의 발광에 따른 신경쇠약의 악화[5]로 인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 집안사정[6],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의와 초조, 불안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동료 문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사이토 모키치에 진료를 받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사이토 모키치는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걱정하며 수면제바르비탈을 처방해줬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모키치의 진료에도 결국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몇몇 지인들에게 편지와 원고, 그리고 〈나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僕の将来についた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 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음독 자살하였다. 죽기 전, 친구였던 구메 마사오에게 〈어떤 바보의 일생〉(或阿呆の一生)이란 작품을 건네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면 냉소적인 자세와 삶에 대한 열망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톱니바퀴〉는, 그가 만년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떠한 것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수면제를 처방했던 모키치는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 작품 성향


널리 알려진 소설의 대부분이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단편과 장편의 기준이 모호했으므로 무조건 단편만 썼다고 할 수는 없으며 장편소설도 일부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사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단편보다도 더 짧은 엽편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흔히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뽑는 〈라쇼몽〉, 〈귤〉 모두 일반적인 단편소설 분량인 원고지 100매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엽편소설들이다.
순수 창작도 했지만, 많은 유명한 작품들 대부분이 고전 설화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근대적으로 해석한 후, 각색한 소설이 많다. 대표적으로 〈라쇼몽〉과 〈코〉, 〈지옥변〉 등이 있다. 지금은 모두 아쿠타가와의 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말년에는 '가짜 꽃'이니 '인조물'이니 하는 식으로 비판받았던 듯. 마침 그 시기가 하필 작가가 작가 개인의 실제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사소설(私小說)이 차츰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어둡고, 암울하며, 인간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작가가 인간 내면의 이기심이나 모순된 심리 등을 염세주의적 관점으로 묘사해내었기 때문. 많은 연구자들은 아쿠타가와가 이런 경향을 가지게 된 이유를 첫사랑이었던 '요시다 야요이'와의 일화가 계기라고 지적한다.[7] 〈라쇼몽〉에서의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행동에 선악이 있는가', 〈코〉에서의 '코가 커도 수군대고 작아져도 수군대는 세속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했다. "비상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 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들이 작품에 부여해야 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적 감격이어야 한다. 만약 인도적 감격만 추구한다면, 단순히 설교를 듣는 걸로도 얻을 수 있다."라고 본인의 저서에서 밝혔듯,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8] 그리고, "예술은 무조건 의식의 안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로 합리주의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만년에 들어서는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 심경 등을 소설로서 써내는 장르인 '사소설'의 경향이 짙은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지독한 신경쇠약이 이유로 말해지며, 만년의 작품들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대강 짐작 할 수 있다.

4. 매체에서


[image]
  • 괴짜가족에도 도서실 담당 교사 아쿠타가와 쇼로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도서관에서 정숙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책쌓기나 책을 날리는 등 장난을 치는 코테츠에게 책은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놓으라고 쪽지를 써서 날리거나 날린 책을 본인이 책을 날려서 부메랑처럼 바닥에 안 떨어지게 다시 자기 쪽으로 가져오게 하는 등 한 마디 대사도 않은 채 표정으로만 감정을 보여주는 심각한 캐릭터로 끝나...는가 싶더니 코테츠 일당이 도서실에서 나온 순간 아쿠타가와 킥을 날려 코테츠를 응징한다. 나미다에게는 복도에서 뛰지 말라며 라쇼몽 북 파이어를 날렸다. "도서관에서 한 발짝이나 나와서 말하는 데 뭐 어때서!"라는 대사를 보면 원래는 과묵한데 한 번 터지면 말이 술술 나오는 컨셉인 모양.

5. 기타


동시대 한국 작가중에 김동인이 이 사람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지옥변과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광화사를 비교하는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다. 작가로서의 김동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 아쿠타가와의 영향력을 들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시절 만나 짧지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문단선배 나쓰메 소세키와 똑같이 위장병을 앓았다. 술을 멀리하고 단음식을 좋아한 식성도 같다.[9] 다만 소세키는 위가 안좋은데도 음식, 특히 군것질 거리 절제가 안되서 병이 악화된 면이 없잖아 있다면 류노스케는 가난에 시달리며 제대로 챙겨먹질 못해 병이 도졌다.
일본에서는 문학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상당한 유명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있다고 할 수 없다.[10] 그가 활발히 창작했던 다이쇼 시대[11]에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인지, 이 시기의 일본 작가들은 일본 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만한 작가는 그 나쓰메 소세키 정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이고, 수많은 문호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에 그의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이 퍼져나간 나라에서는 천재, 수재 등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활발히 연구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6위 마츠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2016년에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쿠타가와 본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대한 번역 서적이 얼마 없는 걸 감안하면 정말 보물 같은 책이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는 같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면서 자살을 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각자 자살방법은 다 달랐다.[12]
다자이 오사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아쿠타가와를 보면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결국 받지 못하였다. 여담으로 다자이 오사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아쿠타가와상의 첫회 심사위원이자 다자이가 떨어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의 추리소설의 제왕으로 꼽히는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어려서 여러 소설을 탐독하는 와중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제일 좋아했었다고 밝히고 있다.[13]
위에도 살짝 나와있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고등학교 동문이었던 기쿠치 칸[14]에 의해 1935년에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었으며, 지금도 나오키상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두 개의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죽기 전 도플갱어를 보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말 그대로 문학계 혹은 일본에 구전되는 설 중 하나일 뿐 별로 신빙성은 없다.[15]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꽃병을 깬 일이 있는데, 이 일에 대해 평소 아쿠타가와가 남들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걱정하던 기쿠치 칸은 평소에 꽃병을 좀 더 깼었더라면('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면'이라는 의미)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공식적 및 비공식적으로 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으로 참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쿠타가와 본인은 첫날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자경단의 잔인한 민낯을 마주하고 질색해 바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집에 들어가 칩거 생활을 했고 평생 자신이 자경단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지냈다고 한다.
아들 중 3남인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1925-1989)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유명하며,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황국 사관을 부정하고 좌파 음악 운동에 관여하는 등 사회파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소련에 불법으로 입국해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 등과 친구로 지내며 작곡활동을 했다.
1916년(다이쇼 5)부터 1919년(다이쇼 8)까지 햇수로는 4년간 요코스카에 있던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근무하던 중인 1917년 8월 순양전함 콩고에 승선한 뒤 '군함 공고 항해기'라는 제목으로 체험기를 쓴 적이 있다.

[1] 이 사람은 나중에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한다.[2] 매주 목요일에 나쓰메 소세키의 자택에서 열린 모임. 당대의 소설가나 학자가 참가하였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3] 후에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 지부가 된다. 도쿄에 있던 니치니치 신문(日日新聞)이 마이니치 신문 도쿄 지부가 된다.[4] 정식 사원은 아니지만 사원으로서의 특정한 대우를 받는 직책. 명예사원과는 조금 다르다.[5] 자신도 언젠가 발광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가장 심할 때는 흡연량이 무려 '''하루 9갑 반'''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6] 매형이 방화, 보험금 사기에 연루되어 빚을 안고 도망다니다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매형의 빚은 고스란히 아쿠타가와 부부가 떠맡게 되었다고. 이는 만년의 소설 〈톱니바퀴〉에서도 서술되어 있다.[7] 요시다 야요이는 재색을 겸비한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아쿠타가와는 그녀를 절실하게 사랑했고, 곧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허락을 받으러 가게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가 아쿠타가와의 양부모 (외삼촌과 외숙모)가 극심한 반대를 하며 그녀가 집에 방문하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양어머니이자 외숙모가 유별나게 반대했다고) 이 사건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 특히 양어머니가 자신의 행복을 본인의 이기심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해 처절하게 체험했다고 한다.[8] 그의 대표작인 〈지옥변〉으로 확인할 수 있다.[9] 류노스케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중에 자살 한달전에 쓴 팥죽(일본식 단팥죽인 시루코)이라는 수필도 있다. 도쿄의 팥죽맛을 칭찬하며 서양인들도 팥죽 맛에 감탄해 카페에서 커필를 홀짝이듯 팥죽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는 내용이다.[10] 그의 작품을 번역한 전집이 2010년에 제이앤씨에서 나왔기는 한데(전8권) 권당 19,800원부터 33,250원까지 나간다. 번역을 여러 사람이 작품별로 나누어 맡은 탓에 그 질이나 수준이 상당히 들쑥날쑥하므로(표기법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일본식 고유 명사가 한국식으로 현지화되어있는가 하면 일본식으로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고를 때 신중을 요한다.[11] 1912.07.30 ~ 1926.12.25[12] 다자이 오사무는 투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가스,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 [13]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느 고쿠라 일기 전(傳)」으로 제28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데, 소설 속에서 주요 주제가 되는 것은 모리 오가이의 일기. 실제로 세이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인 고쿠라도 모리 오가이와 인연이 있는 곳이며, 세이초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모리 오가이를 자주 등장시켰다. 어느 고쿠라 일기 뿐 아니라 세이초 본인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유작 「양상(兩像)」도 모리 오가이가 등장한다. 아쿠타가와 본인도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높게 평가했었다.[14] 당시 문예춘추사 사주[15] 그의 자전적소설 톱니바퀴에서 자신의 도플갱어를 봤다는 사람들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