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반 데어 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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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1886년생 근대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의 거두로서 20세기 마천루의 형태를 제시한 인물이다.
미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시골의 작업장에서 어릴 때부터 돌을 만졌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재능을 인정받고 곧 독립적인 건축가로 나서게 된다.
이때, 촌놈이었다가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적 엘리트로 변모하면서 본명인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에서 좀더 귀족적인 어머니의 성인 '반데어로에'를 붙여 '미스 반데어로에'로 개명한다. 즉 아버지의 성+어머니의 성.
초기의 건축은 전통적인 독일식 양식으로 설계한 고급 주택이 주를 이루었다.
미스는 고전적인 양식들을 버리면서 단순히 새로운 이론과 형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강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재료, 공법을 폭넓게 연구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국제 건축계에 신의 한 수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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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이런 비주얼을 목격한 당시 건축계는 충공깽. 삼각형 대지 위에 철골구조와......아니 철골구조'만'이 서 있는 듯한 투명함, 그러면서도 주변을 반사하며 새로운 물질감을 나타내는 유리면. 기존의 육중한 건물과 비교하면 무게가 없는 듯한 이 계획안은 지어지지 못했지만 미스의 이름은 순식간에 유명해지게 된다.
이러한 무게가 없고 투명한 공간은 당시의 새로운 사상과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문화적 진화라는 것은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로부터 무의미한 장식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순수한 공간 자체를 창조하려 했다. 그리고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에서 지어진 임시 건물인 독일관에서 미스가 제시한 새로운 공간이 실체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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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계는 또 한번 충공깽. 물 흐르는 듯 어디로도 뚫려 있는 공간[3] 에, 벽은 너무나 얇아 보여 '물질'이 아닌 '방향성을 가진 면'으로만 인식되고, 빛나는 크롬 재질의 기둥은 지붕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벼워서 둥둥 떠 있는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반쯤 사실이었다.''' 기둥은 지붕을 받치기도 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양력이 생기는 경우에 지붕을 붙잡고 있는 것이 더 큰 역할이었다.
이 건물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자 사진으로만 남은 시기에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메커니즘을 통해 거의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후 바르셀로나에 다시 복원했을 땐 너무 커졌던 신화를 만족시키진 못했을 정도(...). 미스는 이 건물로 건축이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것을 선언했다.
1929년 이후 세계 대공황으로 일감이 줄어들었고, 친구이자 경쟁자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잠시 맡았으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싫어했던 나치정권의 압력으로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미스의 건축양식이 '독일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4]
1937년 마지못해 조국을 떠난 그를 받아준 것은 미국이었다. 사실상 받아준 게 아니라 엄청난 환대를 받았는데, 국제주의 양식의 열렬한 후원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데이비드 베컴의 LA 갤럭시 진출을 보듯이 찬양 분위기였다. 따라서 시카고의 아머 공과 대학(IIT의 전신)의 건축학부장을 맡으면서 '''캠퍼스의 새 건물들을 자기가 짓는 것을 조건으로 건 것은 무리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1944년 미스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독일 국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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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그는 형이상학적 건축의 완결판이며, 건물로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칭송받는 주택, 판스워스 하우스를 짓는다. 그는 이 건물에서 철과 유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재료가 이루는 미학을 완성했으며, 건물의 구석구석을 근성으로 다듬어 완벽하게 탈물질화된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공간 자체도 순수하게 공간만 남고, 투명한 벽은 이곳으로 주변의 자연이 들어오게 한다.
.....라고 건축계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스는 한때 연인사이로 알려지기도 했던 건축주와 소송까지 가게 된다. 일단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서 볼트 너트와 같은 철물을 쓰지 않고 용접했는데, 용접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하다보니 시간과 돈이 몇배로 들었다. 그리고 깔끔한 모양을 위해 벽난로의 굴뚝을 놓지 않아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안으로 퍼진다(...). 게다가 보통 창문으로 쓰이는 유리가 옆에서 보면 평면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재질의 유리를 썼더니 바람이 불면 미친듯이 흔들리고 방열도 전혀 되지 않아 엄청 춥다. 그리고 보일러를 눈에 안띄게 창문 앞쪽 천장에서 나오도록 설치 해놨는데 이 때문에 우풍이 불어 이 집에만 오면 아이들이 병이 났었고(...)
또한 원래 모든 천장은 평평해보여도 어느 정도는 기울어져서 물이 빠져 나가도록 해놓는데 판스워스 하우스는 천장이 '''너무 완벽하게 평평해서''' 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집 안으로 다 샌다. 그리고 집 자체도 낮아서 비가 많이오면 잠긴다...무엇보다 '''집 안이 다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 건물은 모더니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5]
다른 의견도 있다. 애초에 건축주와 건축가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건축주가 건축가의 작품에 매료되어 쫒아다닌 것이 원인. 그의 작품성에만 매료되어 설계당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건축주의 잘못도 크다.[6] 실제 건축개론에서 '''건축주가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점'''으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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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주택에서 완성한 철과 유리의 미학은 이후의 미스의 건축, 나아가 앞으로의 세계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게 된다. 1958년 완공된 뉴욕의 시그램 빌딩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최초로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은 커튼월 방식으로 지은 건물이며, 현대적 고층 건물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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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본이라는 단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 근대 건축가 김중업의 1968년 작품 삼일빌딩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았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 도처의 수많은 고층건물이 이 빌딩의 영향을 받았다.
죽을 때까지 설계를 하던 그는 유작으로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을 남기고 1969년 사망한다.
건축을 형이상학과 철학, 시詩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고 여겨지며, 르 코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근대 건축 3인방'''으로 불린다.[8] 그리고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정립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그러나 영향력에 비례해서 비난도 많이 받는다. less is more라는 그의 철학과 건축은 세상을 끔찍하게 지루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를 똑같이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9][10] 그리고 앞에서 판스워스 하우스의 사례와 같이, 건축가의 이상을 위해 실제 거주자의 삶을 희생시키는 엘리트주의적 건축가의 모습도 전 세계에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궁전의 창시자인 것으로도 비난받는데, 이는 유리궁전을 무분별하게 짓는 정부와 자본이 더욱 큰 문제다(...)
이후 오늘날 현대건축은 "모더니즘은 실질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음"을 선언했음에도 현대 건축의 공간은 점점 더 미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다. 자본과 상업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는 현대 사회는 미스의 '순수하고 균질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게 임대하고 빼기 좋으니까. 진짜다(...) 당장 아무 상가건물이나 들어가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주택도 그렇게 되고 있다.
1. 개요
Ludwig Mies Van der Rohe(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2]신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s)[1]
독일 출신의 1886년생 근대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의 거두로서 20세기 마천루의 형태를 제시한 인물이다.
2. 생애
3. 탄생과 성장
미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시골의 작업장에서 어릴 때부터 돌을 만졌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재능을 인정받고 곧 독립적인 건축가로 나서게 된다.
이때, 촌놈이었다가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적 엘리트로 변모하면서 본명인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에서 좀더 귀족적인 어머니의 성인 '반데어로에'를 붙여 '미스 반데어로에'로 개명한다. 즉 아버지의 성+어머니의 성.
초기의 건축은 전통적인 독일식 양식으로 설계한 고급 주택이 주를 이루었다.
4. 내가 모더니즘이다
전통적인 주택들을 설계하면서도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전위적인 사상을 계속 접하고 있었지만 미스를 극적으로 바꾼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유럽의 제국적 리더십이 가진 낡은 질서가 극적으로 실패하면서 문화계에서는 진보적인 이론들이 훨씬 신빙성을 얻게 되었고, 고전적이며 복고적인 건축양식은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상징하게 되었다.가우디, 매킨토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등 위대한 천재들이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보다 미스 한 사람의 영향이 더 크고 깊다.
- 김석철
미스는 고전적인 양식들을 버리면서 단순히 새로운 이론과 형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강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재료, 공법을 폭넓게 연구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국제 건축계에 신의 한 수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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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이런 비주얼을 목격한 당시 건축계는 충공깽. 삼각형 대지 위에 철골구조와......아니 철골구조'만'이 서 있는 듯한 투명함, 그러면서도 주변을 반사하며 새로운 물질감을 나타내는 유리면. 기존의 육중한 건물과 비교하면 무게가 없는 듯한 이 계획안은 지어지지 못했지만 미스의 이름은 순식간에 유명해지게 된다.
이러한 무게가 없고 투명한 공간은 당시의 새로운 사상과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문화적 진화라는 것은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로부터 무의미한 장식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순수한 공간 자체를 창조하려 했다. 그리고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에서 지어진 임시 건물인 독일관에서 미스가 제시한 새로운 공간이 실체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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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계는 또 한번 충공깽. 물 흐르는 듯 어디로도 뚫려 있는 공간[3] 에, 벽은 너무나 얇아 보여 '물질'이 아닌 '방향성을 가진 면'으로만 인식되고, 빛나는 크롬 재질의 기둥은 지붕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벼워서 둥둥 떠 있는 지붕이 날아가지 못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반쯤 사실이었다.''' 기둥은 지붕을 받치기도 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양력이 생기는 경우에 지붕을 붙잡고 있는 것이 더 큰 역할이었다.
이 건물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자 사진으로만 남은 시기에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메커니즘을 통해 거의 전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후 바르셀로나에 다시 복원했을 땐 너무 커졌던 신화를 만족시키진 못했을 정도(...). 미스는 이 건물로 건축이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것을 선언했다.
5. 미국으로
1929년 이후 세계 대공황으로 일감이 줄어들었고, 친구이자 경쟁자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잠시 맡았으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싫어했던 나치정권의 압력으로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미스의 건축양식이 '독일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4]
1937년 마지못해 조국을 떠난 그를 받아준 것은 미국이었다. 사실상 받아준 게 아니라 엄청난 환대를 받았는데, 국제주의 양식의 열렬한 후원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데이비드 베컴의 LA 갤럭시 진출을 보듯이 찬양 분위기였다. 따라서 시카고의 아머 공과 대학(IIT의 전신)의 건축학부장을 맡으면서 '''캠퍼스의 새 건물들을 자기가 짓는 것을 조건으로 건 것은 무리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1944년 미스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독일 국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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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그는 형이상학적 건축의 완결판이며, 건물로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칭송받는 주택, 판스워스 하우스를 짓는다. 그는 이 건물에서 철과 유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재료가 이루는 미학을 완성했으며, 건물의 구석구석을 근성으로 다듬어 완벽하게 탈물질화된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공간 자체도 순수하게 공간만 남고, 투명한 벽은 이곳으로 주변의 자연이 들어오게 한다.
.....라고 건축계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스는 한때 연인사이로 알려지기도 했던 건축주와 소송까지 가게 된다. 일단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서 볼트 너트와 같은 철물을 쓰지 않고 용접했는데, 용접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하다보니 시간과 돈이 몇배로 들었다. 그리고 깔끔한 모양을 위해 벽난로의 굴뚝을 놓지 않아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안으로 퍼진다(...). 게다가 보통 창문으로 쓰이는 유리가 옆에서 보면 평면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재질의 유리를 썼더니 바람이 불면 미친듯이 흔들리고 방열도 전혀 되지 않아 엄청 춥다. 그리고 보일러를 눈에 안띄게 창문 앞쪽 천장에서 나오도록 설치 해놨는데 이 때문에 우풍이 불어 이 집에만 오면 아이들이 병이 났었고(...)
또한 원래 모든 천장은 평평해보여도 어느 정도는 기울어져서 물이 빠져 나가도록 해놓는데 판스워스 하우스는 천장이 '''너무 완벽하게 평평해서''' 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집 안으로 다 샌다. 그리고 집 자체도 낮아서 비가 많이오면 잠긴다...무엇보다 '''집 안이 다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 건물은 모더니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5]
다른 의견도 있다. 애초에 건축주와 건축가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건축주가 건축가의 작품에 매료되어 쫒아다닌 것이 원인. 그의 작품성에만 매료되어 설계당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건축주의 잘못도 크다.[6] 실제 건축개론에서 '''건축주가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점'''으로 배운다.
[image]
그렇지만 이 주택에서 완성한 철과 유리의 미학은 이후의 미스의 건축, 나아가 앞으로의 세계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게 된다. 1958년 완공된 뉴욕의 시그램 빌딩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최초로 건물 전체를 유리로 덮은 커튼월 방식으로 지은 건물이며, 현대적 고층 건물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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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본이라는 단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 근대 건축가 김중업의 1968년 작품 삼일빌딩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았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 도처의 수많은 고층건물이 이 빌딩의 영향을 받았다.
죽을 때까지 설계를 하던 그는 유작으로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을 남기고 1969년 사망한다.
6. 영향과 평가
건축을 형이상학과 철학, 시詩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고 여겨지며, 르 코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근대 건축 3인방'''으로 불린다.[8] 그리고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정립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그러나 영향력에 비례해서 비난도 많이 받는다. less is more라는 그의 철학과 건축은 세상을 끔찍하게 지루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를 똑같이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9][10] 그리고 앞에서 판스워스 하우스의 사례와 같이, 건축가의 이상을 위해 실제 거주자의 삶을 희생시키는 엘리트주의적 건축가의 모습도 전 세계에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궁전의 창시자인 것으로도 비난받는데, 이는 유리궁전을 무분별하게 짓는 정부와 자본이 더욱 큰 문제다(...)
이후 오늘날 현대건축은 "모더니즘은 실질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음"을 선언했음에도 현대 건축의 공간은 점점 더 미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다. 자본과 상업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는 현대 사회는 미스의 '순수하고 균질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게 임대하고 빼기 좋으니까. 진짜다(...) 당장 아무 상가건물이나 들어가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주택도 그렇게 되고 있다.
[1] 남들과 같은 평범하게 네모난 건물을 설계했다면 미스가 이토록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스의 건축은 비율 등 디테일에서 차별화됐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고 패러디되기도 한다.[2] Ms. van der Rohe가 아니다. [3]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영향을 받았다[4] 당시의 '독일적'이라는 것은 알베르트 슈페어로 대표된다(...)[5] 그와 같이 모더니즘 건축 대가로 평가받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경우에도 대표작인 '낙수장'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는데, 대체로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실제 생활하는 사람에게 건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사상에 사람을 맞추려고 한다는 지적을 받는 경우가 많다.[6] 월간 SPACE NO.552 2013년 11월 FEARURE 한국건축에서 공공을 말하다_김광현교수 인용[7] 이 건물에 대한 비판 역시 있다. 건물앞에 거대한 광장을 조성한것이 그 원인이다. 뉴욕의 건물은 보도에 접하는 기준선이 다른건물과 이어진다. 건물의 1층에는 상점가가 있기에 활기가 넘치는데 이 건물의 광장이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축을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거기에 1층은 르 코르뷔지에의 필로티로 되어있어 로비외엔 텅빈 공간이다. 즉 거리의 활기참을 이 건물의 광장이 분산시켜 굉장히 썰렁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8] 발터 그로피우스를 넣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나 미스를 빼는 사람도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9] 다만 이는 미스를 비난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이, 미스의 사상은 건축의 본질, 즉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소재와 그 구조의 명료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미스는 'God is in the details'이라는 말도 남겼는데, 그는 자신의 건축물의 구조와 재료의 표현을 위해 디테일에 엄청나게 신경을 쏟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제는 미스의 영향을 받은 추종자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하고 건조한 건축물을 양산한 것...[10] 사실 전세계를 똑같이 만들었다는 비판은 국제주의 양식의 지향점 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무국적성을 원했고 자신의 건축이 전세계 어디서나 어울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그들은 건물이 서있는 대지,장소성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받는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