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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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또 다르게 표현하면 21세기인 지금도 바르셀로나를 먹여살리는 건축가,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 일반적인 천재와는 다르게 생전에 이미 대성공한 건축가로서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며, 스페인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본명은 카탈루냐어식으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지만 카스티야어(스페인어)식 이름인 '안토니오 가우디'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1852년, 카탈루냐 캄 데 타라고나(Camp de Tarragona) 바시 캄(Baix Camp)의 레우스(Reus) 혹은 리우돔스(Riudoms)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프란세스크(Francesc)와 모친 안토니아(Antònia)는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2]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어렸을 적부터 류마티스를 앓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한다.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또한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데 그 꿈은 그의 사후 함께 복원을 꿈꾸었던 친구인 토다가 이뤄낸다.[3] 한 살 위인 둘째 형 프란세스크[4] 와의 관계가 각별했는데 건장했던 그가 몸이 약했던 가우디를 많이 업고 다녔다고... 훗날 이 프란세스크의 존재와 그의 이른 죽음이 가우디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적도 좋지 못하고 몸도 허약했던 가우디는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게 그가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 큰 계기였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25세에 건축사 자격을 딴 후[5]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본격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 수입도 늘게 되고 허약했던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는데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였다 보니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다녔다고. 대신 술은 약해서 주로 미식을 즐겼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본인이 좋아서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활동하던 시점이라 인맥을 넓혀 좀 더 큰 일을 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다. [6]
1878년 카사 비센스[7] 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8]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9]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10]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11] 한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12]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883년부터는 평생 동안 설계한 '성가정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하고[13] 1926년 6월 7일 성당에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기며 그를 길 옆에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볼품없는 차림새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번째 운전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어 이 병원에서도 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병원 관계자들이 매우 놀라며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세상을 떠나고 불과 10년이 지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묘지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가우디의 무덤도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우디의 제자 리카르도 오피소가 간신히 막았다. 그렇지만 몇 달 뒤 경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말았다. 무덤 안에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관뚜껑까지 뜯겨나가는 참극은 면했지만 무덤은 파헤쳐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가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무덤을 다시 봉인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엽에는 그를 성자로 시복할 것을 건의하는 운동이 있기도 하였다. 성가정 대성당의 수난의 파사드 부분을 맡은 조제프 마리아 수비락스 이 시자르(Josep Maria Subirachs i Sitjar, 1927년 3월 11일 ~ 2014년 4월 7일)는 이미 가우디를 성자로 간주하여 조각 사이에 가우디의 옆모습을 본따 끼워 넣어 두었다. 하지만 당시 가우디의 친구들은 고인이 보면 비웃을 일이라면서 이런 걸 불쾌하게 여겼고, 후손들도 반기지 않고 있다.
3. 성향
거대한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한다. 어렸을 적부터 영향을 받아왔던 것일지도.
또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였다. 젊었을 적에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교회 관련 건축 일을 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엔 성당 내 사무실에서 살 정도였다.
건축 성향은 카탈로니아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중국, 마야와 잉카,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 식물 및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건축에서 고전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 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우디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재발견되어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류였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같은 건축이었고, 후대에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가우디의 양식은 가우디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며, 카탈로니아의 전통 건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만든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그러한 독특함 속에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일견 멋으로만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들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며, 효율적인 구조가 아름다운 구조라는 개념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충실하게 설계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진정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게다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무에서도 직접 미장공이나, 타일공을 섭외하고 부르는 등 자신의 건축물이 지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쓰는 건축가로 유명했다.
4. 기타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현란한 색감의 타일아트는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제자이자 동료였던 조제프 마리아 주졸 이 지베르트(Josep Maria Jujol i Gibert, 1879~1949)와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가우디 본인은 색을 배합하는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실제로 그와 같이하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에는 그러한 타일 장식이 없다.
조제프 마리아 주졸은 단순히 가우디의 제자가 아닌 독립된 건축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성가족 대성당 같은 큰 프로젝트는 끝내 맡지 못했다. 대공황에 따른 건축 경기 불황 탓에 1932년을 마지막으로 교회나 주택 같은 자잘한 건물 보수만 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술을 잘 못마시는 대신 줄담배를 피웠다는데 골초였던 듯하다. 함께 일하던 조각가 로렌소가 연기 때문에 모형이 뿌옇게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41살에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롭던 시기에도 담배만은 포기 안 했다고한다... 그랬던 사람이 50살무렵 친구인 토라스 신부와 함께 담배를 끊었다고하니 사람일은 참 알 수 가없다.
일하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페피타'[14] 라는 여성[15] 을 사모한 적이 있는데 5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한다.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조정 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는 청혼을 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 한다... 실연의 충격이 상당했던 것인지 이후 가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듯.
데뷔 당시 신인이다보니 어쩌다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점포장식이 고작이었다한다. 인맥의 중요성을 느낀 그는 카탈루냐주의 과학적 탐방협회[16] 라는 업계 모입에 가입, 협회 임원에도 입후보하며 내키지 않는 집필활동과 행사에도 매번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 결과 회원 중 경제계의 거물들이 그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기기 시작하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가로 지명받았으며 카페의 내장 디자인으로 점포 디자인상까지 수상하게된다. 가우디 같은 거장도 한때 그런 시기가 있었으니 그때도 지금 못지않게 인맥이란 게 상당히 중요했었던 듯...
화끈하게 놀고 일욕심에 바쁘게 지낸 청춘이 간 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17] 이후 36세부터 그는 경건한 가톨릭 신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주변엔 한때 200여 명에 달하는 장인들이 있었다 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품들이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이셨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 듯.
말년엔 성가정 대성당 건설에 매진하여 두문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늙은 모습이 찍힌 사진도 어떤 행사 중에 우연히 찍힌 옆 모습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가우디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사망 당시 본인이 밝히기 전까지 모두가 일개 노숙자로 알았던 걸로 보인다.[18]
5. 작품
- 괄호는 건축기간입니다.
5.1.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작품
카사 비센스(1879~1888)
'''성가정 대성당'''(1883~'''건설 중''')[19]
구엘 별장(1884~1887)
'''구엘 궁전'''(1886~1889)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1890)
카사 칼베트(1890~1898)
벨예스구아르드(1900~1909)
'''구엘 공원'''(1900~1914)
미라예스 농장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6~1910)[20]
5.2. 카탈루냐의 가우디 작품
구엘 술창고(보데가 구엘)
몬세라트 성지 보수공사
팔마 대성당 보수공사
구엘 성지(성당)(1887~1918)[21]
5.3. 스페인의 가우디 작품
엘 카프리초 별장(1883~1885)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1893)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2~1893)
[1] 현재도 건설 중이다.[2] 아버지는 프랑스계 가우디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코르네트 가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판 장인이었는데, 가우디는 아버지가 구리냄비를 만드는 과정을 줄곧 지켜봐왔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난 뒤 바로 귀가하지 않고 아버지의 작업장에 죽치며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 종일 구경했다고...[3] 에두아르트 토다 이 궬(Eduard Toda i Güell, 1855년 ~ 1941년), 조제프 리베라 이 산스(Josep Ribera i Sans, 1852년 ~ 1912년), 가우디 이 세 동기는 현재는 세계 문화유산이지만 당시 황폐해져있던 포블레트 수도원을 보곤 소년시절부터 복구 도안을 그렸다고 한다. 그 도안은 가우디가 17세에 그렸다고 알려져있는데 토다가 그린 것이란 말도 있다. 여담으로 이 셋은 학창시절 '엘 아를레킨(El Arlequín)'이라는 기관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었다. [4] 워낙 늠름하고 명석했던지라 부모의 기대가 굉장히 컸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5]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당시 학장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학장이 이런 말을 남긴 이유는, 가우디가 예전에 한번 그의 건축물을 비난해서 가우디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번은 그를 낙제시켰으나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한 교수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고 가우디는 그것을 완성시켜서 마지못해 준 것. [6] 스페인은 광장 문화에다 야행성이기에 나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겨울을 제외하고 낮에는 고온건조한 날씨 때문에 다니기 힘들다. 시에스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7] 타일을 베이스로 한 아랍식 저택으로, 가우디의 건물이지만 사적인 건물이라 출입불가였으나, 바르셀로나시에서 일부를 매입하여 2017년부터 박물관으로 운영중[8] 그리고 이때부터 가우디는 낭비 전문 건축가이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당시에 타일이란 꽤나 고가였는데 가우디는 당시 건축주가 타일공장을 경영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왜곡되어 소문으로 퍼진 듯.[9] 바로 이 해부터 가우디는 성가정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0] 대표적으로 핀카구엘. 가우디의 후원자인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에게 처음 의뢰받았던 일로 구엘 백작이 가족과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북쪽 문주변만이 남았다. 문을 장식하는 주철로 만들어진 큰 용이 꽤나 인상적인 작품.[11]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만, 언론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건축가인 것은 분명했다.[12] 특이하게 돌을 쌓아올린 다음 깎아서 곡선 형태로 지은 건물. 그의 후기작품들을 좋아하는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두 작품 모두 좋아한다고한다. 두 곳 다 고급아파트로 이용되었다.[13] 원래 구엘이 후원하다가 아들의 사업을 돕기도 해야하고 너무 돈도 많이 들어가 중간에 빠졌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설계를 하였다는 게 문제겠지만, 성가정 대성당의 교구가 유지되려면 일정 규모의 거대한 성당은 반드시 필요했다. 전혀 터무니없이 무리한 규모로 설계,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성가정 성당은 '''착공 당시부터 공사기간을 200년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속죄 교회로서 후원금으로만 지어질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14] pepita란 말엔 과일의 열매라는 의미도 있다 한다. 슬램덩크와 배가본드의 작가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화가인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그녀의 이름을 창조의 pepita를 찾는단 의미로 가우디의 흔적을 찾아 떠난 스페인 여행기를 담은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가우디의 동경의 대상이란 의미도 포함했다고.[15] 금발에 키가 큰 상당히 멋진 여성이었다한다 결혼을 총 세 번 했다고. [16] 회원은 건축가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문화인이나 종교 관계자, 경제계의 거물 등 대단한 인물도 많았다 한다. [17] 당시 자료인 사진상으론 머리도 밀고 옷차림도 비교적 후줄근해졌다.[18] 생각해보면 노숙자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한 것도 상당히 씁쓸한 사실이다. 특히 피해자가 가우디라서 운전자나 승차와 입원을 거부한 택시기사들, 병원들이 처벌을 받은 것처럼 보여서 더 그렇다.[19] 가우디가 살아있을 때 완성된 부분은 지하제실, 탄생의 파사드, 네 개의 탑 정도에 불과했다. 가우디는 '''2082년''' 완공을 상정했으나 현재는 그보다 훨씬 짧아진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이다. 이는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현재는 지붕과 일부 방들을 관람 할 수 있다. 카사 밀라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카사 바트요에 도달한다.[21] 원래는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지하제실 공사에서 멈추었다. 사실 성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주거단지를 짓는 것이 목표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