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image]
金重業
한국의 1세대[1] 건축가. 1922년~1988년. 김수근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한 인물이다.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3월 평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横浜高等工業学校)(現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에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마츠다·히라타 건축사무소[2] 에서 3년간 건축실무를 익혔다. 1944년 서울에 있는 조선주택영단 기수로서 일하였으며, 광복 전 1945년 안양에 있는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범대학을 비롯하여, 한양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과 부산공업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하였으며,[3] 베니스에서 만난 세계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에게 수학하기를 바란다고 끈질기게 부탁한다. 이후 3개월여간 이탈리아 건축 답사 후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 찾아가 다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는데, 베니스에서 별 뜻없이 한번 와보라고 한 말에 진짜로 찾아온 김중업의 열정에 감복하여 테스트를 받는 특전을 얻는다. 2주간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진행하던 인도 샹디갈 주정부 청사의 옥상정원이 첫 과제. 김중업은 태극문양의 정원을 제안하고 합격했다. 이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포함하여 총 3년 2개월간 수학한다.
수학 이후 17개국을 일주하며 세계 건축물 답사를 거치고 1956년 2월에 귀국. 참고로 유학기간 동안 김중업은 거의 매일 새벽 3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스승의 설계도를 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쥐꼬리만한 작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사무실 열쇠를 얻기 위해 건물경비에게 용돈까지 떼어주면서 닥치는대로 공부했다고. 당시 사무실에서 설계한 도면에는 작업한 사람의 사인을 귀퉁이에 남겼는데, 후일담에 무슈 김의 사인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는 그를 아껴 귀국을 말렸다고 한다. 실제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 사망 후 미국의 건축지에 르 코르뷔지에의 수제자 5명을 꼽아서 실었는데, 그 중에 김중업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귀국 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설계에 참여한 것도 스승의 추천이 컸다고 한다. 물론 추천만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고, 다른 프랑스 건축가 5명과 경합해서 당당히 선정된 것이다.
귀국 후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1957년 4월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김중업 건축작품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작품전을 열고 그 동안의 작품과 프랑스 정부가 만든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선보였다.
서울이 당면한 도시계획·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는데,[4] 이 필화 사건이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1971년 11월 갑작스럽게 3개월 단수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거주'''하게 되었고,[5] 강제추방 외에도 표적성 세무조사로 거액의 세금이 추징되고, 31빌딩 설계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의 시련이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성북동 자택도 경매로 날아가고, 소장 석물 등도 모두 매각되어 빈털터리가 된다(...).
프랑스에선 1972년 3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4년 프랑스 공인건축가(DPLG)로 인정받았다. 그 뒤 한국 정부와 편지 등으로 실랑이하다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어 결국 여권을 발급받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주권을 취득,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대학과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78년에는 파리건축대학에서 명예석사 학위도 수여받는다. 그러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하고 유신이 끝나자 귀국해 1988년에 별세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래 지어진 건물 중 몇 개의 건물에서 부분적인 표현은 아직까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시설 및 건물에서도 보일 정도로 당시엔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었다. 주택 같은 경우 아무래도 개인 재산이다 보니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는 경우도 있다. '''철거되었다고 한 사람의 건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삭제하지 말 것. 다만 철거된 건물은 취소선으로 표기한다. 총 64개 작 외 다수.
아래 계획안들은 설계도면으로만 남아있으며 실제로는 건축되지 않았다. 몇몇은 실제 건축되었다면 상당한 볼거리가 되었을 듯.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답게 아파트 문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마포아파트와 관련된 좌담회에서 김중업은 아파트는 한국 주거 생활의 혁신이라 극찬했고, 아울러 85%가 산악지대라 주택건설을 위한 공지 조성이 매우 힘든 한국의 주택 정책은 '''가능한 한 집단 주거 위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44]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의 제약공장이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는데, 공장이 제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공장이 텅 비게 된다. 이에 이것을 어찌 하나 고민하다가 2007년에 안양시에서 이 공장이 세워진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2014년 시민에 개방했다. 박물관 이름도 이 사람을 기념해 '''김중업박물관'''이라 지었다. 또한 이 박물관 안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기록한 낙서들과 글, 그가 설계한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는 '''김중업관'''이 있는데, 그의 기록물들은 전자화 작업을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그가 설계한 건물들 중 일부는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었는데, 그 건물 모형들 중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그런지 상당히 고급스럽다.[45] 관람료도 무료니 한번쯤 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金重業
1. 소개
한국의 1세대[1] 건축가. 1922년~1988년. 김수근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3월 평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横浜高等工業学校)(現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에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마츠다·히라타 건축사무소[2] 에서 3년간 건축실무를 익혔다. 1944년 서울에 있는 조선주택영단 기수로서 일하였으며, 광복 전 1945년 안양에 있는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범대학을 비롯하여, 한양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과 부산공업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2.2. 유학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하였으며,[3] 베니스에서 만난 세계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에게 수학하기를 바란다고 끈질기게 부탁한다. 이후 3개월여간 이탈리아 건축 답사 후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 찾아가 다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는데, 베니스에서 별 뜻없이 한번 와보라고 한 말에 진짜로 찾아온 김중업의 열정에 감복하여 테스트를 받는 특전을 얻는다. 2주간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진행하던 인도 샹디갈 주정부 청사의 옥상정원이 첫 과제. 김중업은 태극문양의 정원을 제안하고 합격했다. 이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포함하여 총 3년 2개월간 수학한다.
수학 이후 17개국을 일주하며 세계 건축물 답사를 거치고 1956년 2월에 귀국. 참고로 유학기간 동안 김중업은 거의 매일 새벽 3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스승의 설계도를 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쥐꼬리만한 작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사무실 열쇠를 얻기 위해 건물경비에게 용돈까지 떼어주면서 닥치는대로 공부했다고. 당시 사무실에서 설계한 도면에는 작업한 사람의 사인을 귀퉁이에 남겼는데, 후일담에 무슈 김의 사인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는 그를 아껴 귀국을 말렸다고 한다. 실제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 사망 후 미국의 건축지에 르 코르뷔지에의 수제자 5명을 꼽아서 실었는데, 그 중에 김중업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귀국 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설계에 참여한 것도 스승의 추천이 컸다고 한다. 물론 추천만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고, 다른 프랑스 건축가 5명과 경합해서 당당히 선정된 것이다.
귀국 후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1957년 4월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김중업 건축작품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작품전을 열고 그 동안의 작품과 프랑스 정부가 만든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선보였다.
2.3. 강제추방
서울이 당면한 도시계획·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는데,[4] 이 필화 사건이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1971년 11월 갑작스럽게 3개월 단수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거주'''하게 되었고,[5] 강제추방 외에도 표적성 세무조사로 거액의 세금이 추징되고, 31빌딩 설계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의 시련이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성북동 자택도 경매로 날아가고, 소장 석물 등도 모두 매각되어 빈털터리가 된다(...).
프랑스에선 1972년 3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4년 프랑스 공인건축가(DPLG)로 인정받았다. 그 뒤 한국 정부와 편지 등으로 실랑이하다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어 결국 여권을 발급받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주권을 취득,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대학과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78년에는 파리건축대학에서 명예석사 학위도 수여받는다. 그러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하고 유신이 끝나자 귀국해 1988년에 별세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3. 작품 목록
3.1. 실제로 지어진 것
아래 지어진 건물 중 몇 개의 건물에서 부분적인 표현은 아직까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시설 및 건물에서도 보일 정도로 당시엔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었다. 주택 같은 경우 아무래도 개인 재산이다 보니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는 경우도 있다. '''철거되었다고 한 사람의 건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삭제하지 말 것. 다만 철거된 건물은 취소선으로 표기한다. 총 64개 작 외 다수.
-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도서관 (1956)[6]
- [7]
- 부산시 부산대학교 본관 (1956)[8]
- 부산대학교 정문 및 경비실 (1956)[9]
- [10]
- 서울시 서강대학교 본관 (1958)[11] - 문화재 지정
- [12]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원자력연구소 중앙공업연구소 (1959)[13]
- 서울시 남산 드라마센터 (1959) - 서울예대 남산캠퍼스
- 유유산업 안양공장(1959) → 김중업박물관 (2014) → 안양박물관 (2017)
- 주한프랑스대사관 (1960)[14]
- 고려인삼 공장 (1960)
- [15]
- [16]
- [17]
- 부산시 남구 대연동 UN묘지 채플 (1963)
- 서울시 중구 장충동 설원씨 주택 (1963)[18]
- 서울시 중구 행촌동 행촌병원 (1964)
- [19]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한창우씨 주택 (1964)
-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서산부인과의원 (1965)[20][21]
-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 유치봉씨 주택 (1965)[22]
- 부산시 남구 대연동 UN묘지 정문 (1966)
-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이난영씨 세번째 주택 (1966)
-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윤주탁씨 주택 (1967)
-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이경호씨 저택 (1967)[23]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미국 F.N.C.B. 한국지배인 저택 (1967)[24][25]
- 진해해군공관 (1968)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국제화재 사옥 (1968)[26]
-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갱생보호회관 (1968)[27]
-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학교 본관 (1968)
-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학교 인문사회관 3동 및 제1공학관
-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박치현씨 주택 (1969)
- 제주도 서귀포시 소라의 성 (1969)[28] 다만 실제로 설계에 관여했는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 삼일빌딩 (1969)[29][30]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송요찬씨 주택 (1969)
- 니제르 도자기공장(KOREA-NIGER CERAMIC PLANT) (1971)
- 서울시 중구 장충동 유특한씨 주택 (1971)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5가 단암빌딩(구 서울도큐호텔) (1971)[31]
-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홍명조씨 주택 (1973)
- 서울시 중구 정동 성공회 제1회관 (1976) - 현 세실극장
- 강원도 속초시 설악파크호텔 (1978)[32]
- 나이지리아 라고스 에븐올루와 스포츠호텔 (1978)
-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쇼핑센터 "태양의 집" (1979)
- 아나백화점 (1979)
-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민씨 주택 (1979)
-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이강홍씨 주택 (1979)
-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 EBS 사옥 (1979) - 한국건축가협회상(82), 대한건축학회 작품상
- 부산 충혼탑 (1980) - 강제 출국후 사실상 첫 귀국작품[33]
- 부산 문화회관 계획안 (1981)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이병목씨 주택 (1982)
-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 육군박물관 (1982) 육군사관학교내 - 대한건축사협회상 대상(1983)
-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현상설계 (1982)
-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박씨 주택 (1983)[34]
- 을지로 재개발 16, 17지구 현상설계당선 (한국중소기업은행 본점) (1983)
- 군산 문화회관 현상설계 당선 (1984)
-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장석웅씨 주택 (1984)[35][36]
- KBS 국제방송센터(IBC) (1985)[37]
- 평화의 문 (1985)[38][39] - 건축사협회상(89), 한국건축가협회상(88)
- 광주문화방송(광주MBC) 사옥(1986)
- 목포문화방송(목포MBC) 사옥 (1984)[40]
3.2. 설계도면만 남은 것
아래 계획안들은 설계도면으로만 남아있으며 실제로는 건축되지 않았다. 몇몇은 실제 건축되었다면 상당한 볼거리가 되었을 듯.
- 밀바의 집 계획안(1954)
- 필그림 홀 계획안(1956)
- 경주국립공원 계획안(1956)
- 서울역 서부역사 계획안(1969)
- 한국외환은행 현상설계(1974)[41]
- 바다호텔 계획안 (1979)
- 하늘교회 민족대성전 (1979)[42]
- 예술의 전당 지명 현상설계(1984)[43]
4. 여담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답게 아파트 문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마포아파트와 관련된 좌담회에서 김중업은 아파트는 한국 주거 생활의 혁신이라 극찬했고, 아울러 85%가 산악지대라 주택건설을 위한 공지 조성이 매우 힘든 한국의 주택 정책은 '''가능한 한 집단 주거 위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44]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의 제약공장이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는데, 공장이 제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공장이 텅 비게 된다. 이에 이것을 어찌 하나 고민하다가 2007년에 안양시에서 이 공장이 세워진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2014년 시민에 개방했다. 박물관 이름도 이 사람을 기념해 '''김중업박물관'''이라 지었다. 또한 이 박물관 안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기록한 낙서들과 글, 그가 설계한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는 '''김중업관'''이 있는데, 그의 기록물들은 전자화 작업을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그가 설계한 건물들 중 일부는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었는데, 그 건물 모형들 중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그런지 상당히 고급스럽다.[45] 관람료도 무료니 한번쯤 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5. 관련 문서
[1] LH 블로그에 2세대 건축가인 정기용, 김수근과 함께 소개된 적이 있다.[2] 현재의 (株)松田平田設計[3]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로 일본으로 간 후 비행기를 8번 갈아타고 베니스에 도착했다고 한다.[4] 1970년 4월, 준공 4개월만에 와우 아파트가 붕괴하자 라디오 동아방송에 출연하여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당국에 블랙리스트로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70년 8월 서울시 철거민 이주를 위해 졸속추진되다 대규모 봉기를 야기한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을 때 또다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기재해 양택식 시장(김현옥 시장이 추진한 광주대단지이지만, 당시의 책임자는 양택식 신임시장)을 강하게 비판한다.[5] 중앙정보부의 강제추방. 3개월 여권이 만료된 후 '''무국적자'''가 되어 불법체류 신분이 되었지만,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건축으로 받은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으로 프랑스에서 체류는 가능하였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밖으로의 출입국은 안되는 반쪽짜리 체류.[6] 현재 언어교육원으로 쓰이고 있다.[7] 현재 철거되었다.[8] 현재 인문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문화재 지정.[9] 현재 후문으로 쓰이고 있으며, 문화재 지정.[10] 1992년에 철거되었다.[11] 1997년 내부수리.[12] 현 세종대학교. 2002년 광개토관 건설로 철거되었다.[13]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사.[14] 이 사람의 대표 작품.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한국에 귀국해서 그 동안 고뇌한 한국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담론을 적당하게 합하여 최대한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콘크리트로 지붕 처마선을 직선과 곡선으로 처리한 형태와 단아한 전체구성 및 공간처리는 한국의 얼과 프랑스다운 우아함이 잘 어우러진 건물로서 한국 현대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에서는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이 작품으로 62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5년에는 샤를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과 슈발리에(騎士) 칭호를 얻었다. 이때 받은 슈발리에 서훈으로 나중에 강제출국 후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체류가 가능하였다. 김중업에 이어 한국인으로 슈발리에 서훈을 2번째로 받은 사람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15] 3호선 독립문역 근처에 소재했으며 너무 많이 변경되어 초기 형태 가늠 불가. 2016년에 철거되었다.[16] 현재 철거됨.[17] 세계 박람회 최초의 한국 자국관. 박람회 이후 철거됨.[18] 1962년의 설씨 청평산장과 소유주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19] 지금은 없어진 구본관이다. 용담동 캠퍼스 본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대학교가 아라동으로 이전한 이후 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에서 사용했었다. 건축계에서 철거를 극구 저지했으나 결국 1995년에 헐렸다. 공식적인 철거 이유는 바닷바람의 소금기로 인한 건물 노후화지만 철거를 밀어붙인 높으신 분이 "꼴뵈기 싫은 거 밀어버리니 속 시원하다"는 등의 말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 안전 문제보다는 정치적 문제로 헐렸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건축계와 학계에서 현장답사와 보존방안 모색을 위한 세미나를 각각 92년 12월과 93년 2월에 여는 등 보존을 위해 열의를 보였지만 당시 제주도의 의사결정자는 쿨하게 씹고 밀어버렸다.[20] 평면도를 보면 산부인과의 컨셉에 맞게 남성의 성기와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자궁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물.[21] 병원이 없어진 후 이런저런 점포건물로 쓰여지는 등 수난을 겪다가 지금은 아리움이라는 디자인 회사가 입주하여 사용 중이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간판 등이 없어지고 원형에 충실.[22] 사무실로 기능 변경.[23] 김중업의 지인 이경호 씨를 위해 지어진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는데, 80년대 초 3년여간 이탈리아 대사관저로 쓰이기도 하고, 이후 사립 한국미술관이 들어왔으나, 미술관이 용인으로 이전하며, 개인 김주현 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김주현 씨는 20여년 넘게 거주하며 가족이 줄어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냥 매각하면 건물을 철거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2011년 국내최초로 건물이 경매로 나오게 되었다. 경매가로 나온 가격은 원형유지 조건에 300억원. 지가를 감안해도 대단한 가격이다. 2015년말 기준 아직 철거되지 않고 있다.[24] 현 씨티은행 뱅크하우스.[25] 호화관사 논란으로 시끄럽다.[26] 현 단암빌딩.[27] 현 안국빌딩.[28] 당초 관광전망대로 건축되었으나 이후 음식점 등을 거쳐 현재 문화공간 리모델링 계획 중이다.[29] 다른 의미에서 대표작이다. 한국 최초의 마천루, 현대적 유리궁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의 데드카피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하여튼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순위에도 올랐다.[30] 김중업 본인은 시그램 빌딩의 카피임을 쿨하게 인정했다고...[31] 현재 리모델링을 해서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원형이 많이 사라졌다며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1981년까지 서울 도큐 (일본의 대형 사철 회사 맞다.)호텔로 운영하다 폐업했다.[32] 해외에서 원격 참여.[33] 70년대 중반 외유 시기의 건물은 이전에 설계한 것이거나, 우편으로 진행한 것 - 설계 후 현장시공은 챙기지 못한 건물들.[34] 자료마다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시기나 위치로 보아 김중업 후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욱일빌딩(박시우 치과의원) 건물로 보인다.[35] 현재 담장을 허물고 커피숍 '에스프레소 하우스'로 영업 중인 것으로 보인다. - 카페 입구에는 김중업의 80년대 초 작품이라고 동판에 설명이 씌어있다.[36] 건물주 장석웅은 일반 고객이 아니라 김중업의 제자인 장석웅으로 보임. 김중업이 설계한 건국대학교 구 도서관(현재 언어교육원)을 대신해서 새로 지은 상허 도서관은 그의 제자 장석웅이 설계한 것이다.[37] 통칭 (여의도) KBS 신관. 구 TBC 사옥인 별관이 아니다! KBS 본관 뒤에 있는 빌딩으로, 현재는 보도본부와 기타 사무공간이 들어서 있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KBS 뉴스 9가 이 건물에서 제작된다.[38] 1차 당선기준 연도, 올림픽공원의 상징적인 조형물. 이 때 즈음엔 건강이 많이 약화되어 주된 구성원리만 짚어주고 거의 다른 실무자에 의해 설계되었다. 1차 당선 이후 기념성이 약하다는 비난이 일자, 정부는 86 아시안 게임 조형물 설계자인 조각가 김세중에게도 각기 다른 안을 제출하라고 하였다. 김중업은 이후 처음의 것을 엄청난 스케일로 확대시켜 무려 높이 90m의 안을 제출했다고... 주위에서 모두가 만류하였지만 매우 쇠약한 상태에서도 그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높이 45m 등 여러가지 요소가 수정된 후 최종적으로 김중업의 안이 당선되었다.[39] 이후의 작품들은 그의 건강상태가 더욱 나빠져 건물에서 그와 관련된 작품성이 짙게 나타나진 않는다.[40] 아래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 후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 정확한 연도 파악이 잘 되질 않는다.[41] 같은 현상설계에서 정림건축의 설계가 선정되고 김중업이 낙선되어 이대로 현 KEB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이 된 건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42] 200m 산 위에 400m짜리 초대형 교회를 세워 도합 600m의 건물을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후보지로는 북한산 등이 모색되었다.[43] 이 현상설계를 계기로 억울하게 낙선되었다고 생각하여 충격을 받아 쓰러짐. 입원할 정도로 위중했고, 사경을 헤매다 건강이 호전되어 퇴원하였으나 예전 같은 활동은 하지 못했다.[44] 경향신문 1963-04-18, 《아파트와 입식생활을 위한 좌담회: 주택난 해결의 길》.[45] 특히 주한프랑스대사관 모형은 예술적인 자태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