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재건기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와 베네치아와의 양면전선의 승리를 거둔 이후의 장기간의 재건 및 휴전기간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주인공이 베네치아와의 협상을 마친 1438년 5월부터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2. 재건과 개혁의 시작
2년에 걸친 오스만과의 세 번째 전쟁도 어느덧 끝이 나고, 주인공은 황폐화된 발칸 영토와 이전보다 줄어버린 핵심지역들의 인구를 갖고 경제 회복과 아나톨리아 수복을 위한 재건에 돌입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위치한 총대주교구의 상징성이 아니라 완전히 황폐화되고 오스만군에 의해 위협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실태에 주목한 관료들은 데미클레오테스와 토마스 마기스트로스를 중심으로 천도를 건의하지만, 주인공은 수도의 상황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천도하지 않고 황제가 중앙에서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서방에 되도록이면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외국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서쪽으로 천도하면 안된다며 이를 일축한다.
한편, 요안니스, 디미트리오스, 그리고 테오도로스 세 형제에 의해 일어났던 내전 시도에서 교훈을 얻은 주인공은 제국의 민속놀이나 다름없는 내전을 막기 위해 정치구조를 좀더 안정적으로 개혁하려 드는데,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초기 입헌군주제,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태동한다. 정치구조의 개혁 과정에서 민회와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는 관료들에게,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음을 근거로 든다.
이를 직접 들은 데미클레오테스와 마기스트로스 또한 만족하며, 그렇게 제국에서 민주주의 실험이 시작되고 동시에 내부 정치개혁 또한 착실히 진행된다.* 어차피 민회가 오스만 및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에 영향력을 더 넓히려 들 것이므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어렵지 않게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
* 팔레올로고스 왕조 내내 중앙집권화 시도는 무참한 실패로 끝나기만 했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민회를 통한 지방자치가 더 높은 효율과 안정성을 보여주었다. 민회에게 국력이 감소하지 않을 적당한 수준의 권력을 쥐여준다면 통치 난이도가 급격히 하락한다.
* '적당한 수준'의 권력이라 함은, 사법권의 독립과 함께 민회 의석의 증대를 통한 황제의 입법권 독점 포기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설령 교회가 황제를 반대하더라도 사법권을 쥔 법관들과 입법권을 쥔 민회들에게서 통치의 객관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
* 하지만 여기서 보험으로 써먹기 위해 민회 의석에서 기존에게 황제에게 주어진 6석만큼은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한다. 의석이 많아질수록 의원 개개인의 권력이 약해지고, 이들간에 적당한 알력 다툼을 조장한다면 근황파 6석은 계속해서 유지되거나 다툼 과정에서 황제 쪽으로 돌아선 인사들에 의해 오히려 늘어나는 반면 의회의 단일 파벌의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며 계속해서 약해진다.
* 황제가 합법적으로 민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더이상 시민들이 중앙집권화를 빙자한 황제의 폭거에 대해 들고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고, 지방과의 불화 가능성 또한 많이 낮아진다. 즉, 내전의 가능성이 급격히 하락한다.
내부 정치개혁이 궤도에 오르면서, 동시에 추수철을 맞이한 발칸의 참상 또한 드러난다. 오스만의 강제징집 및 징발과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때문에 농촌사회에서 수확을 해야 할 장정들이 크게 줄어들었고, 특히 그 여파가 더 컸던 트라키아와 불가리아에선 경작하지 못한 땅에 잡초가 자라기 시작하고 곡식이 다 익었는데도 수확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주인공은 터르노보 대주교를 중심으로 해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5인의 불가리아 자문단과의 협력 하에 발칸의 빠른 복구를 위해 노력하고, 재정착을 원하는 8천 명의 유민에 더해 흑군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 커뮤니티의 재건과 농촌 사회의 복구 지원을 맡은 2천 명의 사제단을 꾸려 최대한의 행정효율을 내도록 힘쓴다. 협력적인 태도로 나오는 터르노보 대주교 및 불가리아 정교회를 위해 민회 설립을 약속하고 한편으론 베네치아 출신 상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남은 관료진으로 각 무역품 별로 개별 관세를 적용하면서, 제국은 점점 더 수도와 지방이 모두 건실하게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황좌에서 물러난 요안니스 8세에게 명예직인 셀림브리아 친왕위를 내려 과거 미하일 8세 당시처럼 이전 황제에게 더 호감을 가진 인사들의 불만을 미연에 방지한다.
* 이주교 공의회를 반대하던 불가리아 인들과 터르노보 주교좌를 회유하기 위해 기존의 불가리아 독립교회의 수장격인 터르노보 총대주교구을 최대한 인정하는 쪽으로 가고, 동시에 불가리아인의 동등한 권리 약속과 2년간의 면세정책을 펴서 빠르게 복구가 이뤄지도록 한다.
* 행정체계 통합의 일환으로 모든 공문서에 사용되는 언어로 그리스어를 채택하고, 기존의 비그리스식 도시명[1]
을 예전의 이름으로 되돌려놓는다.* 전국의 민회를 대표해 의원을 배출할 18개 주요 도시[2]
에 도시 하나당 3개 의석을 배정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의석 다섯, 거기에 황제 본인까지 포함해[3] 60명으로 이뤄진 중앙 의회를 구성한다.* 현실의 헌법재판소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역할은 대법원과 검찰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사법기관인 7인 위원회를 설치한다. 초대 위원회에 소속되어 선례를 만들 법관들이 대부분 황제의 측근이거나 수도 출신인 데에서 기인하는 민회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7석 중 모레아의 아카데미 출신을 4석 배정한다. 이를 통해 민회들이 위원회에 소속시킬 법관을 양성하기 위해 앞다투어 학원을 설립하는 부수적인 이득까지 얻는다.
한편, 주인공은 행정효율을 높이는 데에 있어서 자료 분류와 분석 및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며 현대지식을 이용해 자료 분석에 활용할 도표와 '''막대 그래프''', 즉 '''근대 통계학의 기초'''를 도입한다.[4] 주인공은 이를 활용해 모든 세수와 동원 가능한 인력을 도표로 정리해 보고할 것을 마기스트로스에게 명한다.
3. 에게 해와 흑해 헤게모니의 개편
한편, 제국이 유럽에서 오스만을,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를 몰아내면서 힘의 질서가 순식간에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비교적 빠르게 눈치를 챈 몇몇 국가들이 행동에 나선다. 이들 중엔 대표적으로 세르비아, 왈라키아, 구호기사단이 있었는데, 세 세력 모두 자발적으로 제국의 속국이 되어 보호를 받으려는 속셈이 있었지만 그 의도는 조금씩 달랐다.
세르비아의 경우 주라지의 막내아들인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제국에게서 적장자가 아닌 자신의 계승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부러 누가 다음 왕이 될지까지 물어보려 했고, 주인공은 그 행보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왕이 되기 위해선 제국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라자르의 후견인이 되어 직접 대관식을 열어주기로 결정한다. 한편 후녀디와 흑군의 수탈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던 블라드 2세는 과거 맘먹은 대로 제국의 관직을 정식으로 청하면서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말하지만, 후냐디와 맺은 밀약 때문에 다뉴브 강 이북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던 주인공은 이를 거절하면서 대신 장남을 볼모로서 콘스탄티노플로 유학보내기로 한다.[5] 한편 구호기사단은 종교 문제가 교회통합으로 해결되면서 대오스만 성전의 대열에 정식으로 참가하는 겸 해서 제국 휘하의 세력으로 들어가길 청했고, 주인공 또한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기사단의 원 설립 목적인 병자들의 구호를 발칸에서도 시행하는 협력관계를 맺는다. 기사단이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갤리 7척이 정식으로 제국군에 합류하면서, 제국에겐 수십 년만에 다시 제대로 된 함대가 생긴다.
흑해 방면을 비롯한 에게 해 밖의 국가들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크림 칸국에게서 계속해서 위협당하고 있고 제노바 또한 경계하던 테오도로 공국이 다시금 제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로 맹세하면서 크림 반도가 회복되었고, 밀라노에게 밀리던 끝에 신성로마제국 밑으로 들어간 베네치아 또한 이전과는 달리 모든 무역 특권과 조차지를 빼앗긴 채 물건만 팔아먹는 평범한 상인 세력으로 전락한다. 가장 특이한 행보를 보인 것은 트라페준타였는데, 앞의 두 세력과는 달리 메가스 콤니노스의 정통성을 앞세워 자신들의 공주와 토마스 간의 결혼을 성사시켜 대등한 동맹을 맺겠다는 오만에 가까운 제안을 하지만 정작 토마스 본인에게 경멸어린 시선만을 받은 채 단칼에 거절당한다. 그 외에도 모스크바 대공국이 사절을 보내 교회통합을 비난하면서 독립교회를 선포하는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6] , 제4차 십자군 이후 한번도 되찾지 못했던 에게 해와 흑해에서의 패권이 제국에게 돌아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주인공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제국 내에서의 서열정리를 꾀한다. 주인공은 알바니아와 로도스 기사단 및 세르비아의 자치를 인정하고, 제르지에게는 뒤라키온 총독[7] 직위를, 라자르에게는 서방 사령관[8] 의 직위를 내려 서쪽 국경을 안정화시키게 만듦과 동시에 기사단장에게 해군 부사령관[9] 의 직위를 주어 무슬림 해적의 준동을 저지하게 만든다.
이들 외에도 오스만과의 전쟁이 임박한 카라만 토후국을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이슬람 토후국들도 오스만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황제를 직접 만나 제국의 보호를 요청했지만, 황제는 동등한 동맹이 아닌 속국으로 들어온다면 받아주겠다는 식으로 요구하면서 결국 이들의 합류는 성사 되지 않게 되었다.
4. 패전 이후 오스만의 혼란 수습
한편, 에게 해에서 세력균형이 재편되는 현상을 오스만 또한 눈치챈다. 무라트 2세가 방구석에 틀어박히면서 할릴로 대표되는 신진관료세력 '재상파'와 이스하크 및 투라한 등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뭉친 '가지파', 그리고 일부 토후세력으로 구성된 '토후파'가 모인 연립정권이 통치를 시작하자 각지의 토후들이 반발했고, 심지어 그중 일부는 더이상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오스만에게서 이탈하려 한다. 이오니아 쪽의 부유한 땅덩이를 쥐고 있는 아이딘과 이즈미르가 여러 핑계를 대며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고, 발칸에서 오스만이 밀려난 시점에서 유일한 흑해쪽 관문을 틀어쥐고 있는 칸다르는 아예 사신을 맞이하지조차 않는 등 오스만의 세력이 계속해서 쪼그라드는 상황 속에서, 무라트를 대신해 오스만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 할릴이 행동에 나선다.
할릴은 우선 과거 제국과 맺었던 조약을 빌미로 포케아 등의 제노바령 조차지를 노리는 척하면서 이즈미르쪽에 이스하크와 투라한이 이끄는 일군을 주둔해 토후들의 반발을 억누르려 시도하고, 또 이브라힘에게 3천의 병력을 붙여 북쪽으로 파견해 칸다르의 이탈을 막으려 한다. 이스하크나 투라한, 이브라힘 셋 모두 정국을 주도하는 할릴에게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만 '일단은' 오스만을 지킨다는 미명 하에 군을 이끌고 떠나고, 그러는 동안 마니사에선 예니체리들을 이끄는 자아노스 파샤가 예언의 아이인 메흐메트 2세를 찾아간다.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술탄의 정무를 일부 분담하던 메흐메트에게 예니체리들이 선천적인 카리스마를 느끼고 충성을 맹세하면서, 삼대 파벌의 균형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오스만의 연립정권이 그의 등장으로 무너질 것임이 암시된다.
그러면서 할릴은 메흐메트 왕자의 후견인을 자청하여 그가 자랄 때까지 직접 가르치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할릴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메흐메트와 그를 따르던 예니체리의 모습에 기가 찼지만, 이내 오스만의 절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고 이슬람의 번영을 위해 자신이 힘써야겠다고 다짐한 그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국정을 다스리며 제국을 막기 위한 방안을 하나 둘 내리게 된다.
이렇게 할릴은 방어책을 만들고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는데 알차게 써왔지만, 문제는 이러는 동안 제국도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는 게 그도 생각 못한 변수였고, 거기다 구호기사단의 제국 합류로 자체 해군까지 증강한 제국이 조만간 카라만과 손잡고 오스만을 압박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조해진 할릴은 얼른 카라만을 끝내기 위해 1440년 4월, 이스하크 파샤에게 요청해 카라만을 침공하게 된다.* '''1.''' 보스포러스 해협 맞은편에 요새 '''루멜리 히사르'''를 축성하여 제국의 도해를 저지하는 것과 잔다르의 준동을 물리적으로 저지한다.
* '''2.''' 전임 칼리프였던 아쉬라프 바르스바이의 병사 이후 맘루크의 영향력이 약화된 정세를 이용해, 아나톨리아 동부에 있는 둘카디르, 에레트나와 접선하여 잠재적 적인 카라만을 삼면 공격한다.
* '''3.''' 제국이 오스만의 큰 위협이라는 것을 경계한다는 차원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보아즈'''[10]
, 다르다넬스 해협을 '''케센'''[11] 이라 칭한다.
카라만을 침공하면서 오스만은 카라만의 일방적인 정복이 아닌 카라만의 말살을 목표로 둔 터라 외교적으로 안전하게 전쟁을 수행하였고 끝내 카라만을 거의 끝장내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이 전쟁이 아나톨리아 통일을 목표로 둔 게 아니라 '''카라만을 대신해 맘루크에게 신종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지자 오스만군은 이 사실 때문에 승전 직전까지도 사기가 떨어졌었고, 대신 동맹으로 갔었던 둘카디르와 에레트나가 카라만의 주요 도시들을 탈탈 털고 있던 와중에 뜬금 없이 맘루크 왕국의 봉신이었던 라마잔 토후국이 군사를 일으켜 카라만의 해안 도시들을 선점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에 동맹들은 분노했지만, 할릴과 이스하크는 라마잔의 배후에 맘루크가 있다는 걸 간파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맘루크 함대와 파견 병력들이 라마잔의 점령 지역에 진주하면서 할 수 없이 오스만군은 라마잔이 점령한 해안가를 포기하고 물러서게 된다.
이 때문에 할릴이 너무 소극적으로 행동한 거 아니냐는 불만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맘루크에게 신종하겠다는 할릴의 결단에 불만을 품던 관료들은 가지파를 중심으로 할릴을 비판하게 되면서 오스만의 국론이 분열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거기다 반대를 무릅쓰고 맘루크에 보낸 사신한테서 '''맘루크의 술탄이 제의를 거절'''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게 되자, 오스만의 국론은 더 개판이 되어버리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할릴은 충격을 떨쳐내며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고, 그런 상황을 들은 메흐메트 왕자도 할릴이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인정은 하지만 그러면서도 운명은 할릴 당신이 아닌 자신의 것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하며 때를 기다린다.
5. 제국 개혁의 종결
혼란스러운 오스만과 달리 제국은 이전에 지시한 개혁을 성실하게 추진하며 옛날 영화를 회복하던 와중에 1440년 8월 4일, 소피아가 적자이면서 자줏빛 출생인 안드레아스 황자를 출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된다.[12] 이에 많은 사람들은 황실의 새로운 계승자가 생긴 거라고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론 황태제로 있는 토마스와 의도치 않는 황위 쟁탈전이 또 벌어질 수 있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걱정도 하게 된다. 황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헬레네와의 대화[13] 를 통해서 안드레아스에게 황위를 넘겨줄 생각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공주인 소피아의 계승권을 물려받게 된 안드레아스가 태어나게 되면서 제국의 여론은 이번 기회에 세르비아를 완전히 합병하자는 쪽으로 가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던 세르비아의 라자르도 대관식을 연기하는 등 또다른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을 상황에 이르자 황제는 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 명령 후 1년 만에 처음으로 제국 의회에 참석하여 이번 상황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대중들의 여론대로 대부분의 의원들은 계승권이 생긴 지금이야말로 언제 통수칠지도 모를 세르비아를 완전히 합병해야한다고 황제에게 강력히 주장했었지만, 황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세르비아냐 아나톨리아냐? 란 식으로 의원들에게 역질문하면서 의회를 흔들었고, 제국의 재건과 번영을 위해선 괜한 영광 때문에 무의미한 싸움을 벌이기보단 조용히 준비하면서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알리며 첫 의회 공방전은 황제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된다. 허나 의원들도 황제의 발언을 곱씹으며 후대의 황제들이 과욕을 쫓다가 파국에 이를 사태를 사전에 저지하고 견제하는 게 의회의 역할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방 도시를 돌며 오스만이 버리고 간 수많은 불량 은화들을 수색한 뒤 지역 소유자들에게 식량을 주고 환수하던 프란치스코가 콘스탄티노플에 복귀한 뒤, 불량 화폐의 실태에 경악한 황제는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한편 마침 베네치아의 두카트 신용도가 떨어진 세관 측의 보고를 계기로 플로린을 제국의 기축통화로 대체해달라는 피렌체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도 환전과 수수료를 통한 이중과세를 거두어 빠른 두카트 축출을 유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제국은 전후 복구가 덜 된 불가리아에 민회를 설치하는 등 예전에 약속했던 행정적 지원을 시작했고 교회 측과도 합의를 거쳐 교회 토지를 일방적 몰수가 아닌 국유지로 유상매수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작중 중반부터 있었던 교회와의 경쟁관계를 완전히 종식하고 화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내부를 완전히 다져놓은 황제는 오스만과 맘루크 사이에 있었던 봉신 거절 사건 소식과 카라만 멸망 소식을 받고 뒤늦게 이슬람 세계 정세를 보게 되는데, 겉으로 보면 분열된 것처럼 보이는 오스만이 왕위 계승 논쟁도 없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왕자, 메흐메트한테 뭉쳐지는 기미가 보이고 있으며, 또한 맘루크도 제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오스만의 운명을 다음 세대에게 맡기는 것보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 직접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14] 이에 따라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야전군'''[15] 을 편성하고 갈리폴리의 오스만 요새 주변에 전초기지나 봉화망을 구축하게 된다. 이런 제국의 군사 행동에 오스만은 휴전 조약 위반이라고 항의했지만 제국은 이미 오스만이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건설했기에 그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한 거라고 맞받아치면서 제국의 위상이 불과 30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제대로 보여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