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 테일러

 

'''Michael Kevin Taylor'''
(1949년 1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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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런던 하이드 파크 무료 공연에서. 이 공연은 믹 테일러의 롤링 스톤즈 멤버로서의 첫번째 공연이었다.
1. 개요
2. 유년기
3. 존 메이올 & 더 블루스브레이커스
4.1. 1969년, Let It Bleed
4.2. 1970-71년, Sticky Fingers
4.6. 탈퇴, 그리고 이후
5. 여담


1. 개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37위

홈페이지
영국 하트퍼드셔의 웰린가든시티 출신의 기타리스트.
'''17살의 어린 나이에 피터 그린을 대신해 존 메이올 &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리드 기타를 연주한 천재이다.'''
이후 존 메이올이 브라이언 존스를 쫓아내고[1] 새로운 리드 기타리스트를 찾고 있던 롤링 스톤즈의 믹과 키스에게 어린 테일러를 추천해주고, 1969년 롤링 스톤즈의 정식 멤버가 된다.
그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타 솔로들은 1969년부터 1974년 사이 쏟아져나온 롤링 스톤즈의 명반들(Let It Bleed, Sticky Fingers, Exile on Main St.)을 더욱 빛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라이브에서도 출중한 기타 실력으로 1969년 브라이언 존스를 잃은 밴드가 다시 재기해 세계 최고의 로큰롤 밴드가 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밴드 내 마약 문제 등으로 1974년 밴드를 떠나게 된다.[2] 스톤즈의 대부분의 팬들은 지금까지도 믹 테일러가 롤링 스톤즈에 있던 69년부터 74년까지의 5년이 밴드 최고의 전성기라고 하며, 실제로 믹 테일러 탈퇴 이후 밴드의 음악적 기량이 점점 하락세를 타게 된다.[3]

2. '''유년기'''


믹은 잉글랜드 웰린가든시티의 노동 계급(Working Class) 가족에서 태어났다.
9살 때부터 삼촌에게서 기타를 배웠다고 하며, 십대에는 친구들과 직접 밴드를 결성해 연주하기도 했다.
1965년 어느 날 믹은 웰린가든시티에서 친구들과 존 메이올 &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하필 그날 에릭 클랩튼이 나오질 않았고, 콘서트의 휴식 시간에 존 메이올에게 그의 앨범과 노래들을 몇개 알고 있으니 내가 연주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부탁한다.
존 메이올은 어린 테일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17살의 어린 나이에 정식 밴드 멤버로서 계약을 맺는다.

3. '''존 메이올 & 더 블루스브레이커스'''


존 메이올의 밴드에 가입한 믹은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에 존 메이올의 투어와 앨범 녹음에 참여하며 블루스에 기반하여 재즈라틴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개발한다.
이후 롤링 스톤즈에서 테일러가 리드 기타 이외에도 슬라이드 기타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곡들이 많은데, 이 시기에 슬라이드 기타도 틈틈히 연습한 듯 싶다.

4. '''롤링 스톤즈'''


1969년 6월, 브라이언 존스롤링 스톤즈에서 해고당한 이후 존 메이올은 보컬 믹 재거에게 자기네 밴드의 어린 기타 천재 믹 테일러를 추천해준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인 스톤즈의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녹음을 하러 갔을 때 테일러는 자기가 그냥 임시로 연주해 주는 세션 기타리스트를 권유받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연주를 듣고 놀란 믹 재거키스 리처즈는 바로 다음날 스튜디오에 테일러를 초대해 그들의 1969년작 '''Let It Bleed'''의 수록곡 Live With Me, Country Honk, 그리고 싱글 '''Honky Tonk Women'''[4]을 함께 녹음했다.

4.1. '''1969년, Let It Bleed'''


1969년은 롤링 스톤즈 멤버들에게 있어 어려운 시기였다.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밴드에서 가장 먼저 마약을 시작한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의 리더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마약 중독이 심각해 정상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브라이언의 몰락은 밴드의 발목을 잡았고, 신작 앨범에서 브라이언의 영향력은 결성 초기에 비해 초라할 정도였다. 1968년작 Beggars Banquet부터 그는 더 이상 밴드에 음악적 기여를 하지 못했다.
결국 1969년 6월 8일 밴드에서 해고당한 브라이언은 스무 살의 젊은 믹 테일러로 대체된다. 1969년 7월 3일 브라이언 존스가 집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이후 바로 다음날 7월 4일 롤링 스톤즈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무료 공연을 열었다. 무려 2년만에 열린 밴드의 공식 공연이었으며 브라이언 존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동시에 신규 멤버인 믹 테일러를 소개하는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신작의 발매에 앞서 밴드는 11월에 미국 투어를 시작한다. 1966년 이래 첫번째 미국 투어이자 테일러와의 첫번째 투어이기도 한 이 투어는 후술할 1972년 북미 투어/1973년 유럽 투어와 함께 롤링 스톤즈 최고의 투어 중 하나이자 로큰롤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테일러는 1969년 투어에서 스무 살의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69년 12월 5일 발매된 정규앨범 Let It Bleed에서 테일러는 Country HonkLive With Me 두 곡에서만 연주했다.

4.2. '''1970-71년, Sticky Fingers'''



4.3. '''1972년, Exile on Main St.'''



4.4. '''1973년, Goats Head Soup'''



4.5. '''1974년, It's Only Rock 'n Roll'''



4.6. 탈퇴, 그리고 이후



5. 여담



[1] 방출 한달 후 약물과다 복용으로 수영장에 혼절한채 빠져 익사로 사망한다.[2] 이 당시 대체할 기타리스트로 로리 갤러거가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로리 갤러거 참조. [3] 믹 테일러가 그 시기 스톤즈 앨범에 절대적인 영향력까지 있었던건 아니었지만 이후 앨범들이 테일러가 있었던 위 시기만큼 빚을 바라지 못했던건 맞다.[4] Country Honk의 일렉트릭 버전. 싱글로 발매되었으며, 스톤즈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이자 가장 인기있는 라이브 트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