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존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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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즈의 창립 멤버이자 '''초대 리더'''였던 인물. 향년 27세로 요절했으며, 만일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현재 '''82세'''로 조 바이든, 폴 매카트니, 마틴 스콜세지, 지미 헨드릭스 등과 동갑이며 앞의 셋이 호호할아버지가 되었음을 감안하면 지금 그는 자연사하거나, 역시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When this you see, remember me and bear me in your mind Let all the world say what they may speak of me as you find'''[1]
대중음악계에서 손에 꼽는 '''비운의 천재'''로 불리우는 인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반비례하게도 운이 상당히 없었으며[2]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밴드 내에서는 키스 리처즈와 함께 기타 파트를 맡았지만[3] 60년대 중반부터는 기타 하나에 치중하기 보다 다양한 악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깔끔한 귀족적 이미지[4] 를 자랑하며 여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5] , 온갖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였으나[6] 밴드 내 비중 저하와 동료 키스 리처즈의 NTR로 인한 우울증 문제와 마약 문제를 겪다가 1969년에 재거-리처즈 듀오에 의해 전격적으로 밴드에서 축출당했고 결국 같은 해 수영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2. 생애
1942년 2월 28일 영국 첼트넘 (Cheltenham)에서 웨일스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브라이언 존스의 부모님은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그에게 피아노와 오르간을 비롯해 색소폰, 기타등 다양한 악기를 가르쳤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는 반항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을 많이 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타고난 머리가 굉장히 좋았기에[7] 시험에서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59년경 브라이언 존스는 학교와 집을 떠나 영국의 북부를 떠돌면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블루스에 심취했다. 또한 이 때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가 되는 앤드류 루그 올드험 (Andrew Loog Oldham)을 만난다. 이후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브라이언 존스는 여러 뮤지션들과 교류하며[8] , 슬라이드 기타 등의 다양한 테크닉을 습득하게 된다.
1962년 브라이언 존스는 '재즈 뉴스 (Jazz News)'지에 밴드원 모집 광고를 하고, 건반 주자인 이언 스튜어트 (Ian Stewart), 드러머 찰리 와츠,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 보컬 믹 재거, 믹 재거가 데려온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등의 멤버를 받아 같은 해 밴드 '''롤링 스톤즈'''를 결성한다. 브라이언은 영국에 전통 블루스 및 R&B를 알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롤링 스톤스를 결성했기 때문에 결성 초기 밴드는 자작곡보다는 블루스 곡들을 커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활동했다. 당시 브라이언은 밴드의 설립자이자 리더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공연 수익도 다른 멤버들보다 5파운드의 금액을 더 받았다[9] . 다만 Nanker/Phelge 명의의 인세는 멤버들에게 동등하게 배분했다고.
허나 이후 밴드의 매니저가 된 앤드류 올드험 (Andrew Loog Oldham)은 반항적이고 섹시한 카리스마를 지닌 믹 재거를 앞세워서 '안티 비틀즈'로 롤링 스톤즈를 홍보하기 시작했고 밴드의 음악적인 노선도 블루스 밴드에서 로큰롤로 변경했다. 브라이언은 이런 앤드류의 정책에 반가를 들었지만 1965년에 발표한 재거-리처즈의 자작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자 밴드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후 브라이언은 신경쇠약으로 인한 약물 복용을 시작하였다. 그는 롤링 스톤즈 멤버들 중 가장 먼저 마약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결국 브라이언 존스는 1966년 즈음에 패션 모델이자 자신의 약혼녀인 아니타 팔렌버그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여[10]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고 멤버들에게 '밴드에서 탈퇴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뛰어난 악기 연주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기 멤버인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매니저인 앤드류 올드험은 브라이언에게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밴드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을 했다.
1967년 3월 모로코 여행에서 아니타와 키스가 맺어지고[11] 아니타와 결별한다.[12] 이후 브라이언은 마약을 하며 1년여를 완전히 폐인으로 보내면서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녹음 작업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앨범이 상업적, 비평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자 브라이언은 음악에 흥미를 잃고 1968년 즈음부터는 스튜디오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13] 브라이언의 마약 복용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자동차 사고를 연달아 일으키고 마침내 기소를 당하게 되었다. 재판부는 브라이언에게 가벼운 벌금형으로 선처를 베풀었지만 이 문제로 인하여 브라이언이 미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 미국 투어를 계획중이었던 롤링 스톤즈는 그를 자르고 새로운 멤버를 고용하기로 하였다. 1969년이 되자마자 롤링스톤즈의 멤버들이 브라이언의 집에 방문해 그를 밴드에서 해고한다고 통보하였고 메스컴에 발표하는건 브라이언에 맡기기로 하였다. 밴드에서 해고당한지 3주 뒤 브라이언은 자신의 집[14]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롤링 스톤즈에서 존스의 빈자리는 믹 테일러가 대신하게 된다.
그의 장례식은 매스컴으로부터 대서특필되어 진행되었으나, 그의 장례식장에 참석한 롤링스톤즈 멤버는 찰리 워츠와 빌 와이먼 둘뿐이었다. 나름 창시를 주도한 멤버로선 씁쓸한 최후. 키스 리처드야 틀어질대로 틀어진 사이라 그렇다쳐도 믹 재거는 참석할 용의가 있었음에도 스케줄상의 문제로 불발되었다고 한다.
사후 1972년 Exile on Main St.앨범에 그를 추모하는 곡인 Shine a Light가 실린다.
2005년 Stoned라는 전기 영화가 만들졌으나 악평 속에 반항없이 묻혔다. 무명 시절 벤 위쇼가 키스 리처즈로 출연한다.
3. 음악적 능력
'''프린스 이전의 원조 올라운더. 많은 악기를 빨리 습득하여 훌륭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특화된 천재이다.''' 주 분야였던 기타를 비롯해 시타르, 덜시머, 하모니카, 건반 악기, 마림바 등 무수히 많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특히, 하모니카를 정말 기깔나게 분다. 초반엔 기타와 하모니카를 주로 연주했는데 둘 중 하모니카가 더 좋다고 하였다. 그의 편곡/악기 연주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앨범이 롤링 스톤즈의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16] . 원래 다룰 줄 알던 악기도 많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면서 배운 악기도 여럿 있는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악기던지간에 배우는 속도가 남들 대비해서 월등히 빨랐다고 한다. 비틀즈 등 동료 뮤지션들의 음반에도 색소폰, 퍼커션 등 다양한 악기 연주로 참여하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광역계'''이다.
사실 다양한 악기를 모조리 연주할 수 있는 만능 연주자 역할 이미지가 부각되어서 그렇지, 기타에 관한 평을 덧붙이자면, 브라이언 존스는 일렉트릭 기타계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지미 헨드릭스'''가 천재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인물이다.[17] 더불어 슬라이드 기타 주법을 대중음악계에 처음으로 도입한 뮤지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송라이터로서는 활동/재능이 없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는데, 이에 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롤링 스톤즈의 모든 자작곡들은 모두 재거/리처즈의 명의로 앨범에 수록되었고 매니저 앤드류 올드험 또한 "본래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에 흥미가 없어서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해왔기 때문에 브라이언 존스가 롤링 스톤즈에서 작곡한 곡들마저 모두 재거/리처즈의 곡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1965년 잡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존스에게 "당신은 작곡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브라이언 존스는 "언제나 작곡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대부분 블루스 스타일이다."라고 말하며 앤드류 올드험의 발표를 반박하기도 했다. 브라이언이 작곡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는 블루스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엄청난 악기 실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자 했었다. 그런 악기 실력과 음악적 천재성을 다른 멤버들이 질투한 면이 있는 듯하다.
롤링 스톤즈가 60년대 발표한 곡들 중에서 재거/리처즈의 이름으로 발표된 브라이언 존스의 곡들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나 마리안느 페이스폴과 빌 와이먼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 존스가 작곡한 곡은 주로 Nanker/Phelge(낸커/펠지)로 발표되었으며[18] <Under My Thumb>, <Paint It Black>, <Ruby Tuesday> 등의 히트곡들 작곡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Ruby Tuesday의 메인 멜로디도 브라이언이 작곡했다고. 더불어 빌 와이먼은 '낸커/펠지'로 발표되어야 했을 곡 (즉 밴드 공동으로 작곡한 곡) 중에서도 '재거/리처즈'로 크레딧에 오른 곡이 여럿 있다' 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관계 없이 믹 재거는 여전히 브라이언 존스의 작곡을 부정하며 '내가 본 사람 중 최악의 작곡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 평했고 키스 리처즈도 "브라이언 존스는 단 한번도 밴드 멤버에게 온전한 형태의 자작곡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며 그의 작곡에 대한 기여를 부정했다.[19]
[1] Through the Past, Darkly (Big Hits Vol. 2) 앨범 커버 내용. 익명의 시이다.[2] 당장 그가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하려고 만든 취지의 밴드인 롤링 스톤즈는 매니저 앤드류 올드험과 재거-리처즈에 의해서 로큰롤 성향을 띄게 되었다. 밴드 내에서 재거-리처즈의 비중이 높아진 이후 애인 아니타 팔렌버그와 다른 밴드를 하려고 나가려고 했지만 이도 매니저 앤드류 올드험에게 저지당했고 나중에는 아니타도 같은 밴드 멤버인 키스 리처즈와 눈이 맞으며, 결국 밴드,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 애인(아니타 팔렌버그)을 한순간에 모조리 잃어버렸다. 이후 마약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사망했다.[3] 주로 키스 리처즈는 리듬 기타, 브라이언은 리드 기타 포지션을 맡았다.[4] 물론 사망 직전에는 각종 마약을 너무 많이 한 탓에 같은 밴드의 키스 리처즈 혹은 믹 재거 못잖은 폐인 이미지가 되었다.[5] 사생아도 4명이나 만들었다.[6] 1980년대에 프린스가 있다면 1960년대에는 브라이언 존스가 있었다.[7] 기록에 의하면 IQ가 135였다고 한다.[8] 대표적으로 크림의 베이시스트인 잭 브루스 (Jack Bruce)등이 있다. 브라이언은 잭과 함께 밴드를 하다가 롤링 스톤즈를 결성하였고 밴드에는 브라이언의 '''후임'''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가입한다.[9] 다른 멤버들은 모르고 있었기에 후에 사실이 밝혀지고 반발을 산다[10] 이 시기 브라이언은 아니타 팔렌버그가 주연한 아방가르드 영화 <A Degree of Murder (Mord und Totschlag)>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다.[11] NTR이라고도 보는 시각 역시 있다.[12] 브라이언이 사망하자마자 키스 리처즈와 아니타 팔렌버그는 공식적으로 동거를 시작해서 1980년에 키스 리처즈에게 파혼당할 때 까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키스 리처즈는 자서전 Life에서 밝히기를 원래 자신의 애인은 모델인 린다 키스(Linda Keith) 였는데 린다가 미국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보고 반해서 키스를 차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린다에게 차인 후 마음고생을 하고있던 중 브라이언이 모로코의 요양소에서 아니타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다 서로 눈이 맞아서 영국으로 같이 돌아온 것이 관계의 시작이였다고 한다.[13] 1968년 즈음 촬영된 <Sympathy for The Devil>의 녹음 과정을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 되었는데 스튜디오에 오랜만에 찾아온 브라이언 존스에게 믹과 키스가 곡조를 흥얼거리고 이것을 들은 브라이언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리듬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확연히 보인다. 참고로 최종곡에서는 브라이언의 연주 분량이 삭제되고 니키 홉킨스의 피아노로 대체되었다.[14] 이 집은 곰돌이 푸의 원작자 A. A. 밀른이 살았던 집인데, 브라이언이 구매했다[15] 1966년, 에드 설리번 쇼에서 'Paint It Black'의 시타르 부분을 연주하는 모습이다.[16] 다만 이 앨범 자체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도 이 앨범을 깠다.[17] 이 둘은 실제로 매우 친했으며, 공교롭게도 둘다 1942년생이고,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으며, 27세, 즉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18] 믹 재거에 의하면 브라이언 존스는 평소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차즈 같은 작곡 콤비 스타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19] 사실 앞의 둘이 비범한 작곡 실력을 갖고 있긴 하다. 당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순위에도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