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아웅 흘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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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의 최고지도자.
육군 상급대장이며, 미얀마군 통수권자인 최고사령관 신분으로 2011년 탄 쉐의 퇴임 후부터 사실상 미얀마 실권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3월 30일부터 탄 쉐 이후 군 출신의 대통령 정부에선 군권과 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가, 2016년 초 아웅 산 수 치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군권만 가지고 물러났다. 그러나 의회와 주요 부처 장관 등에 군 출신을 배치하고, 일부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가져 완전히 민정 이양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2021년 미얀마 쿠데타를 통해 미얀마 정부 권력 역시 완전히 장악하고 다시 국가 최고지도자로 있다.
2. 상세
학력만 보면 미얀마 최고 엘리트다. 졸업한 고등학교인 라사 제1고등학교(Basic Education High School No. 1 Latha)는 미얀마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학교 중 하나이고, 명칭에 아예 '제1(No.1)'이라고 박혀 있듯이, 최고의 중등학교이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랑군인문사회대학교[8] 법학부에 진학한다.
여러 출처에서 법학부를 졸업했는지 여부가 갈리는데, 당시 미얀마 내의 대학 제도가 문란했던 점, VOA기사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관학교에 입학하느라 첫해 교육의 상당수를 건너뛰었다[9] 는 언급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을 수도 있다. 대학 이후 세 번의 도전 끝에 입학한 국군사관학교는 당시나 현재도 미얀마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으로 미얀마 내의 위상은 대한민국 유신, 5공시기의 육군사관학교를 상상하면 된다.
BBC 기사에 따르면, 사관학교 졸업 이후 튀지 않으며 자신을 낮추는 처세를 보이며 조용히 성장해왔다고 한다. 탄 쉐의 퇴진 이후 표면적으로 아웅 산 수 치와 손 잡으며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 시기도 군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조용히 확대해 왔고, 결국 2021년 미얀마 쿠데타까지 일으킨 것으로 보면, 결정적인 시기에 크게 한 건하는 매우 주도면밀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미얀마군은 대통령과 총리 등에게 통수권이 없고 최고사령관이 군대 내 합의에 의해 '''알아서''' 추대되며[10] 군대 내부의 일을 자기들끼리 관리한다. 미얀마의 이전 독재자 탄 쉐도 마찬가지로 군부 대표로 정권을 잡고 있었다.
로힝야 난민 사태 당시 로힝야족을 말살하려 한 실질적인 주범으로, 아웅 산 수 치를 방패삼아 온갖 범죄를 명령한 최고 흑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로힝야 학살’ 수치 돌 맞을 때, 주범은 웃는다 [11]
기본적으로 친러 성향이다. 해외 순방은 거의 아시아 위주로 다니며, 일본, 중국, 유럽을 드물게 순방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3년 이래로 여섯 번을 다녀와서, 매년 한 번꼴로 방문하고 있다.# 그 개인의 성향만은 아니어서, 미얀마 군은 러시아 의존도가 매우 높은 상태이다.
일단 본인은 장기집권할 생각이 없으며 총선에서 승리한 세력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개혁된’ 선관위가 선거를 담당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
3. 기타
가족으로는 아내와 1남 1녀를 두었다. 현재 아들이 결혼했다. 아들은 건설회사, 보험회사, 의약품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며 딸과 며느리도 사업가로 연예기획사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쿠데타 이전부터 UN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학살 문제로 페이스북 계정을 강제 삭제당했으며 미국과 영국의 제재 대상이었던 인물이다.#
군인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점 때문에 이집트의 독재자 압델 파타 엘 시시와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압델 파타 엘 시시가 여러 논란과 별개로 소수종교 보호 및 이슬람 극단주의 배척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 평가가 있는 것과 달리 민 아웅 흘라잉은 로힝야족 탄압으로 대표되는 소수민족 탄압 때문에 장기독재에 성공해도 긍정적 평가 자체를 못 받을 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1] 흘라잉(Hlaing)의 Hla에 해당하는 미얀마어 문자 လှ는 무성 설측 치경 접근음 [l̥a̰\]를 나타내기 때문에 흘라잉이 아닌 라잉이 더 타당하다. 다만 미얀마어의 라틴 문자 표기법인 미얀마 언어위원회 전사 시스템(MLCTS)상에서 이를 일관되게 Hl로 전사하기 때문에 라틴 문자 표기를 준용한 흘라잉이라는 표기가 사용된다.[2] 現 미얀마 다웨이[3] Basic Education High School No. 1 Latha, 미얀마는 학제가 4+4+2이기 때문에 High School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10학년(한국으로 따지면 고1)때 졸업한다. 17살에 대학에 가는 셈.[4] Rangoon Arts and Sciences University, 현, 양곤대학교[5] 대부분의 기사에서 대학을 다니던 도중 3수 끝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위키피디아 영어판에서는 법학 학사학위(LL.B)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6] Defense Service Academy[7] 명칭(Senior General)과 달리 원수에 상응한다. 미얀마군의 체계는 준장-소장-중장-대장-부상급대장-상급대장 순이다.[8] 현재의 양곤대학. 이 대학은 원래 영국 식민지 시기 랑군대학으로 설립되었고, 교수언어가 영어였으나, 반영운동이 벌어지던 대학이기도 했다. 1962년 네 윈은 쿠데타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이뤄질 것을 염려하여, 학내에서 영어 사용을 금지하고 각 종합대학들을 학부단위로 찢어서 분산시키고, 대학 교육기간을 2~3년으로 축소시켜버렸다. 랑군인문사회대학교는 랑군대학에서 강제 분리된 대학 중 하나였다. 랑군대학은 한때 동남아시아 지역 내에서 수위권에 들던 명망 있는 대학이었으나, 네 윈 정권의 조치로 위상이 수직 추락한다. 랑군대학을 비롯한 미얀마의 대학 교육이 정상화되고, 4년 이상의 교육 연한을 제대로 확보한 것은 2011년 탄 쉐 정권의 퇴진 이후이다. 즉, 미얀마에서는 6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까지 대학 교육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9] 미얀마의 대학은 5월에 입학하고, 사관학교는 1월에 입교한다. 때문에 교육 기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10] 외형적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후보자는 군부가 지정하며, 대통령은 해당 후보 외의 인물을 임명할 수 없다.[11] 로힝야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단, 이 갈등은 영국이 미얀마인을 몰아내고 로힝야 족을 살게 했다가 이들이 독립할때 로힝야가 미얀마에게서 뺏은 땅을 지킨다고 미얀마 인을 먼저 학살 한것이 시작이다. 당연히 이후 현대까지도 대부분의 미얀마 부족은 반영에 로힝야를 증오하는 경향을 가진다. 아웅 산 수 치는 친영쪽이며 오히러 로힝야와 화해하러 했으나 국민 감정이 이를 용납할리가.로힝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