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
1. 개요
ရိုဟင်ဂျာ
ﺭُﺍَࣺﻳﻨڠَ (Ruáingga)
Rohingya people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 전 세계적으로 250만 명이 산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인도아리아 계통의 사람들이며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얀마의 마웅다우, 부티다웅, 아캬브, 라테다웅, 캬우크타우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미얀마 외에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에도 존재하며 일본, 미국, 유럽[1] 에도 극소수의 로힝야족이 거주한다.
UN 난민 기구 고등판무관을 역임하는 등 난민과 소수 민족 문제에 정통하다고 알려져 있는 현임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로힝야를 가리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미얀마인들 대부분, 즉 주류 민족인 버마족은 물론이고 여타 소수민족마저 이런 의견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2. 이름에 관하여
Rohingya라는 표기는 버마어 이름 ရိုဟင်ဂျာ [ɹò.hɪ̀ɴ.ʥà]를 전사한 것이다. 영어 발음은 로인자, 로힌자, 로잉야 3가지인데, 이 중 원어에 가까운 발음은 로힌자다. 버마어 철자를 흉내낸 로마자 표기에서 ky, (h)ky, gy로 적는 음들은 현대 버마어에서 ㅉ, ㅊ, ㅈ와 비슷한 파찰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로힝야는 Ro-hing-ya로 잘못 끊어 읽은 발음이다.
한편, 그들 자신이 쓰는 로힝야어(=치타공어)로는 루아잉가라고 발음한다.
3. 기원
로힝야는 1799년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Francis Buchanan-Hamilton)의 저서에 루잉아(rooing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로힝야의 기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아라칸 왕국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미얀마로 들어온 이슬람계 아랍인[2] 선원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단 외모부터가 아랍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방글라데시 사람이다. 아라칸 지역에 소수의 무슬림이 전근대부터 거주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대다수 로힝야의 선조는 영국의 미얀마 진출과 함께 벵갈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2년 기준으로 5만 8천 명이던 무슬림의 수는 1911년에 3배 이상 증가했다. 다만 이 숫자 대부분은 일감을 따라 벵골과 미얀마를 오가는 사람들로 기록에서는 이들을 거주민으로 보지 않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당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으로부터 미얀마로 벵골족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1차 엑소더스) 1990년대 초반에 다시 미얀마로 25만여 명에 이르는 2차 엑소더스가 있었다. 현재 로힝야 족의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된다.
로힝야족, 로힝야어라는 별개의 명칭을 통해[3] 전혀 다른 혈통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게끔 하고 있지만, 이는 일개 모험가의 일대기에 나온 단어를 토대로 20세기 초 로힝야족이 자신들에 대한 민족주의를 대두시키면서 발굴한 단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항상 벵골족이라 불렸으며 치타공인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확연한 벵골인에,[4] 언어도 벵골어의 남부 방언인 치타공어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동남아시아 계통의 미얀마인과, 인도 계통의 벵골인 사이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로힝야어라고 명명은 해주지만, 실상은 치타공어와 단어 몇 개, 그리고 사용하는 문자가 다른 수준일 뿐 억양마저 동일하다. 그나마 표준 벵골어와는 같은 벵골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르지만 이는 로힝야어와 방글라데시 치타공어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한 비교다. 당연히 미얀마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서, 미얀마인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미얀마에 3세대, 100년이 넘는 기간이나 살면서 로힝야어와 치타공어가 차이가 없고, 미얀마어와 기초적인 의사소통도 안 되는 것은 미얀마 정부의 책임이 큰데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교육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미얀마어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다보니, 로힝야족의 입장에서 배워야 할 필요도 없어 로힝야족이 독자 언어로 토착화가 이루어질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르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만큼 언어의 변화는 보수적이고 불과 수십 년의 단절만으로는 언어가 고유 언어가 될 만큼 바뀌지는 않는다. 만약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미얀마어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면 로힝야어는 미얀마어 차용어가 유입되어 치타공어 및 표준 벵골어와는 더욱 많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언론 기사에서 종종 다루는 바와 같이, 로힝야 난민과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다. 허나 서로 간에 필담은 불가능한데, 방글라데시에서 벵골어를 동부 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는 반면 로힝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아랍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이다.[5] 로힝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이 부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로힝야는 혼혈되지도 않은 벵골인이고, 억양마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각국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가 난민 캠프의 출입을 차단해도 로힝야가 도시로 몰래 들어가서 취직해서 일하고 섞이는 것을 방글라데시 경찰이 단속을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방글라데시에서 계속 살아온 치타공인과 미얀마에서 온 로힝야족을 구별하려면 글을 써보라고 하면 되지만, 이런 방식의 단속을 일일이 하는 것도 큰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따른다. 따라서 본인이 방글라데시 치타공인인지 로힝야족인지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한 사실상 난민 캠프를 몰래 탈출한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사회에 동화되도록 놔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로힝야나 로힝야어라는 단어는 인류학, 문화학, 언어학적인 학문적 의미를 가진 단어라기보다는 근래에 생긴 정치적인 단어이고, 그렇기에 미얀마인들은 '로힝야'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인, 로힝야어를 부정하고 일관되게 벵골인, 벵골어로 칭한다. 그러나 정작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벵골인들은 로힝야족을 같은 벵골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으니 로힝야족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셈이다. 물론 반대로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벵골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로힝야족들 또한 적지 않은 편이지만...
4. 역사
로힝야족은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시절 영국인들이 미얀마에 설치한 농장에서 기인한다. 영국 식민당국은 미얀마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비슷한 쌀 생산 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1826년 전쟁으로 버마로부터 아라칸을 할양받은 영국총독은 '라카인족들이 반항적인데다가 비생산적이고 마약에 쩔어 살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남기고 그 대안으로 순응적인 인도인들을 이주시킬 것을 제안한다. 노동생산성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통제 가능한 노동력을 투입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북미에서 미국 원주민을 내쫒고 흑인노예농장을 만들거나 만주에서 만주족을 내쫒고 조선에서 소작농을 모아 투입시킨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
미얀마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보다 정글이 더 우거진 지역이라 베트남인들보다 농경 기술의 발달이 전반적으로 늦어졌고, 부족 중심의 원시 사회도 다수 존재하므로 이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볼만한 노동력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아라칸인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그 자리에 농장을 세워 인도인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후 수 차례 미얀마와 전쟁을 거치며 범위가 확대되었고, 미얀마를 완전히 정복한 시점에는 그 대상이 미얀마 전토가 되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문화, 이모작이 가능한 지리적 요건, 영국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미얀마는 한때 아시아 최대 쌀 수출국이었다. 네 윈이 쿠데타로 집권하기 전까진.
영국인들은 이이제이 방식으로 미얀마를 식민통치하며 농장을 경영했다. 그들은 이주시킨 인도인들에게 작황과 관련없이 고정된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소유권도 넘겨주었다.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건 벵골에서 농경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던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유인이 되었다.[6] 그렇게 현지에서 인력을 모은 후 이들을 대규모로 미얀마로 이주시켜 경영을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로힝야는 미얀마의 모든 소수 민족과 버마족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들이 영국으로부터 불하받은 농장은 미얀마인에게서 빼앗은 농경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당국의 농장은 미얀마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얀마에 거주하는 주류 버마족과 다른 133개 소수민족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벵골인에게 농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전세계 어디서나 그렇지만, 농민의 입장에서 농토를 빼앗기는 것은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일이며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에도 충분한 조건이다. 이들은 이렇게 미얀마인들에게 미움받으면서 미얀마에 정착했다. 그리고 인종과 종교가 다른 점 때문에 그 이후에도 화해하지 못하고 주변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농경지를 차와 면화 농장으로 바꾼 뒤 미얀마에서 쌀을 공출해서 플랜테이션을 유지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덕분에 로힝야는 지속적으로 식민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인들의 벵골인들에 대한 분노는 커져 갔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군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과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축영미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선전을 하던 일본군은 이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점령지 내 벵골인들의 농장을 해체하여 땅을 다시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거의 100년을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미얀마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항전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고,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 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무려 2만 명이나 죽였다. 이에 분노한 아라칸인들이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군 역시 아라칸인에게 무기를 지원하였고 라카인족들과 레드 카렌족은 로힝야 5천 명을 죽였다. 로힝야는 또한 평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불교 절을 부수고 승려를 학살하는 등의 종교 갈등을 일으켰으며, 더 나아가 같은 이슬람 및 벵갈계인 '''동파키스탄에 2차례에 걸쳐 아라칸 합병을 청원하기까지 하면서 미얀마의 전 민족들에게 큰 원한을 사게 되었다.'''[7]
이 때문에 미얀마의 독립을 앞둔 영국인들은 로힝야의 말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독립의 조건으로 로힝야의 처우를 보장하고, 내각과 의회에도 로힝야가 다수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미얀마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초기 미얀마 정부에는 로힝야의 세력이 무시 못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것은 미얀마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네 윈 장군이 쿠테타로 정부를 뒤엎으며 서방 세계와의 모든 조약을 무효화했다. 따라서 이 모든 약속은 허사가 되었고, 로힝야는 시민권을 잃게 되었으며, 거주지에서 쫒겨나 방글라데시로 추방하기 쉽도록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라카인 주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
미얀마 전역에 있던 벵골인들을 모으니, 벵골인들은 미얀마인에 비하면 2% 미만의 비중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서 라카인 주[8] 에 한해서는 30% 이상을 차지했다. 현재는 전체 인구의 약 40% 넘게 차지하여 절반을 살짝 넘기는 아라칸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은 인구의 96%가 로힝야족으로 전부 로힝야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얀마의 다른 민족과의 분쟁으로 100만여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친 가운데 도망친 이들까지 포함하면 라카인 주 인구의 60% 넘게 차지하는 최대민족이 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 대해서만 1가구 2자녀라는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는데도 이렇다.
이에 라카인 주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 라카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에 매우 강경하면서도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에게 '우리에게 짐더미를 떠넘겼다'고 원망하고 있고,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런 원망에 일정부분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9] 불구하고 로힝야족은 공공의 적으로 모든 소수민족 + 버마족의 혐오와 경멸을 사고 있다.
기원이 기원이다 보니 타협이라고는 모르고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기만 하는 미얀마 정계에서 단 하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것이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미얀마인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종족이다. 현재 로힝야족들은 과거 조상들의 제국주의 앞잡이로서의 인식과 현재 자신들의 폭력적 대응[10] 으로 미얀마의 모든 민족한테서 미움을 받고 있다.
현재도 영국은 로힝야 문제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최근 안보리에 로힝야 문제를 상정하는 데도 주도적으로 기여하였다. 문제는 로힝야에 대한 옛 식민통치국 영국의 관심이 미얀마에 대한 내정간섭으로 비춰질 공산이 크고, 로힝야족을 영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얀마는 방글라데시나 영국이 로힝야족을 모두 데려가기를 원하지만, 이주민에 대한 거부감으로 브렉시트까지 결정한 영국이 로힝야 100만 명을 데려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럴 의지도 없다. 당장 포르투갈이 마카오 시민들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한 것과 달리 영국은 홍콩 반환 때에 홍콩 시민들에게 영국 시민권을 주지 않은 사례도 그렇다. 그나마도 자기들이 이민을 받아준 것도 아니고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에 떠넘겨버렸다.
결국 이 로힝야족이 심리적으로 기댈 곳이자, 이들을 받아들여줄 만한 곳은 이들의 정서적인 모국인 방글라데시 뿐이지만, 정작 방글라데시도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방글라데시의 정치인들도 동족인 이들의 처지를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방글라데시는 고작 대한민국 1.5배 만한 땅에 2억에 가까운 엄청난 인구가 밀집한 빈곤 국가이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자국 내의 인구와 실업자가 넘쳐 이민이 전혀 필요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이 로힝야족은 불교도에게 오랜 기간 박해받은 것에 대한 반발로 이슬람 극단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타 종교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다. 난민촌을 유지하다가는 방글라데시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확산돼 자칫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등[11]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얀마 강제송환의 위험성이 높은 방글라데시를 피해 땅이 넓어서 정부의 규제가 비교적 허술한 인도로 가는 로힝야 난민도 있다고 한다. 인도의 경우 방글라데시보다는 영토 면적이 큰데다 최근의 경제성장으로 경제력과 나라 사정은 남아시아의 국가들 중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만, 인도도 인구가 넘치는 터라 이들을 대거 수용하려 들 리가 없고,[12] 인도 역시 종교적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종교 갈등이 있으며, 파키스탄은 종교적으로 무슬림들이 다수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거리도 멀고 벵골인들과 언어, 인종적인 차이도 나며,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1950, 60년대 방글라데시가 동파키스탄이었을 당시 방글라데시를 탄압하다 1971년 전쟁을 일으켜 인도의 지원으로 파키스탄에서 분리독립하는 등 방글라데시, 인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이다.
다른 같은 권역의 이슬람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정부군과 탈레반, IS 등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데다 경제 사정도 좋지 못하고 자국 국민들마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올 것이란 희망도 버리고 내전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지옥 그 자체인 자기 나라를 탈출해 난민이 되어 이란이나 파키스탄, 인도 같은 여러 주변국들을 떠돌거나 미국과 유럽으로 서로 가고 싶어하는 상황이고, 스리랑카 역시 거리가 먼데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고 국가면적도 동족격 국가인 미얀마의 옆 나라 방글라데시나 다른 남아시아의 국가들인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보다 더 작은 섬나라에 이 나라에서도 다수 불교도와 소수 힌두교도, 무슬림 사이에 종교적 갈등이 있다.[13] 그래서 전세계의 누구도 이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참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탄압받는 민족이라는 타이틀에 손색이 없는 민족.
5. 로힝야족 난민 사태
위와 같은 이유로 문화/종교/인종이 모두 다르며 역사적으로 원한을 쌓을 대로 쌓아온 로힝야족은, 미얀마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 이 미얀마인들에는 주류 버마족뿐만 아니라 버마족과 피터지게 싸워온 소수민족들도 포함된다.'''하나디 카테르지 (Hanadi Katerji) / 국경없는의사회 간호사 및 의료 팀장'''
"생존자들은 화요일 저녁 4대의 트럭을 타고 난민통과센터(Transit center)도착했습니다. 대부분 청소년이었고, 12세에서 20세 사이, 주로 미혼남성과 미혼여성이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서거나 걸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트럭에서 내렸을 때 이들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많은 수가 간신히 생존해 있는 듯 했습니다.
사람들은 영양실조, 탈수가 심각했고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빛이 매우 불안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이 보였는데, 저는 그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먼저 우리는 가장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별했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영양실조 합병증을 앓고 있는 5명을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일단 초기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거나 쓰러진 몇 명을 안정시킨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습니다. 이후 더욱 심층적인 조사를 진행하며 이들의 의료적 필요를 조사하고, 정신 건강에 대해 묻고, 상담을 제공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보다 남성들이 영양실조와 탈수상태가 더 좋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부상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몇몇 남성들은 심한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영양실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몸에 상처가 있었고, 배에서 선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정신건강 지원의 필요도 컸습니다. 대부분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정신적 외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겁에 질리고 불안정 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표류했습니다.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100여 명이 사망했고, 사람들은 시신을 배 밖으로 내던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잃어 슬퍼했고, 이중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본 것 중 최악의 일입니다.
많은 가족들이 매우 걱정스러워하며 입원한 가족을 보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문 앞에 몰려왔습니다. 병원에서 가족들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한 소년은 코트로 몸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코트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온 게 분명했습니다. 그건 소년이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가져가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미나(Amina, 가명) / 14세 로힝야 난민'''
우리는 바다에서 표류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남자들은 배 아래쪽에 있었고 완전히 가려져 있었어요. 배 밑바닥은 무척 뜨거웠는데 누군가 나가려고 하면 구타를 당하고 바다에 던져졌어요.
여자들은 햇빛에 노출된 채 배 위쪽에서 앉아있었어요. 머리를 가리려 하면 구타를 당했어요. 우리는 하루종일 무릎을 가슴에 댄 채 앉아있어야 했어요. 사람들은 다리가 부어올라 마비가 되기도 했고,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특히 남자들이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산소가 부족해 질식사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영양실조도 극심해 피부와 뼈만 남은 상태였어요.
선원들은 우리에게 '''“어디를 가든 너희는 난민이다. 미얀마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난민이다. 배에 있든, 말레이시아에 있든 똑같이 난민으로 간주된다. 어디를 가든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
- 2020년 4월 15일 구조된 로힝야 난민선에 대한 증언. 해당 선박은 2020년 초 방글라데시에서 약 500 명의 난민들을 태우고 말레이시아로 향했지만 말레이시아 측에서 입항을 거부하자 다시 방글라데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밀수꾼들이었던 해당 선박의 선원들은 마치 과거 서구 제국들의 노예선에서 그러했듯 난민들에게 온갖 학대를 가했으며, 필수품도 제공하지 않았다. 거기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들의 가족들에게 연락하여 난민들이 잘 도착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수송 비용을 받아내곤 해상 한가운데 배를 버리고 달아나기까지 했다. 결국 이 난민들은 바다에서 약 2달이 넘는 기간 동안 표류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100명이 가량의 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천만다행으로 말레이시아 해안경비대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하게 쇠약해져 있어 치료를 받는 중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 외에도 약 천 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세 척의 난민선에 실려 여전히 인도양을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출처
보통 카친족이나 샨족 등 다른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이해관계나 원한관계가 있지 않는 한 버마족에 대한 경계 때문에 서로 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로힝야족만은 이 연대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미얀마 중앙정부와 그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미얀마 군부는 2012년 이전에는 사실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라카인 주에는 정부와 군부를 주도하는 버마족이 거의 살지 않는 데다가 원주민인 라카인족과 카미족 등의 반군 활동으로 버마족이 이주를 기피함에 따라 사실상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닿지 않아서 이이제이의 심정으로 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얀마의 주류 민족인 버마족들 못지 않게 로힝야족을 가장 증오하고 싸움을 펼치는 건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인 카미족과 라카인족이다.[14] 라카인족은 라카인 주의 최대 민족이며 카미족과 샨족 또한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라카인은 로힝야족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자 가장 많이 정착한 곳으로, 원래 여기 거주하던 소수민족들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고있는 민족이다. 따라서 라카인 주에서 로힝야족을 박해하고 있다는 뉴스에 등장하는 미얀마인은 버마족뿐만 아니라 라카인족, 카미족, 샨족 등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문제가 극적으로 바뀐 계기는 2012년 발생한 대규모 분쟁 사건이다. 2012년 5월 28일 저녁, 로힝야족 남성 3명이 라카인족 여성 1명을 강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3명의 용의자를 체포하여 이송했으나 문제는 분노한 라카인족이 6월 3일 용의자들이 타고 있다고 착각한 버스를 공격하였고 10명의 로힝야족이 사망했다. 로힝야족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8일 라카인족 마을을 습격하여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12명 이상의 불교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로힝야에 대한 아라칸족의 분노는 불타오르기 시작하여, 6월 9일 로힝야 족에 대한 폭동이 시작되었다. 라카인족은 라카인 주 불교계[15] 의 지지와 함께 폭동을 진행했고 로힝야족 거주구역을 공격하여 로힝야족 수백여 명이 사망하고 약 20만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동남아의 상좌부 불교는 그 자체가 권위와 권력있는 종교집단인데다가 절에 정주하면서 시주받는 재산으로 사는 게 일반적인 대승불교와 달리 상좌부 불교는 교리상으로 탁발이 의무화되어 있어, 라카인 주에서는 승려들이 로힝야족 극단주의자에게 습격당해 참수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4년 로힝야족 분리주의 반군이 하필이면 '''다에시에 충성 맹세를 하면서''' 전세계에다 어그로를 끌게 되었고, 안 그래도 골치아픈 문제가 더더욱 심화되었다. 이 극단주의 반군은 조직적으로 승려를 참수하고 불교 신자들이 탄 버스를 습격하여 수십 명씩 살상하였고, 인근 불교도 마을을 공격하여 방화, 살해, 강간을 하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로힝야에 대한 강경한 처분을 주장하는 미얀마 내 강경파에게 명분을 주는 실수를 범한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서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권이 낙후되어 있으며 내전과 정치적 탄압 등으로 자기 민족도 수만 명씩 학살하는 일이[16] 비일비재한 지역이라, 테러는 곧 대규모 보복학살을 부를 것이라는게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미얀마 정부도 경찰인원을 라카인주에 대거 배치하고 상시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2016년 10월 9일에는 로힝야 무장 반군이 버마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9명의 국경관리인을 죽이고 다수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10월 11일에는 다시 버마군인 4명이 살해됐다. 이에 대응해 버마 정부는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폈다. 이렇게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2017년 8월 25일, 대전차 미사일 등 중화기로 무장한 로힝야족 반군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이 2차례에 걸쳐 경찰 초소를 동시에 수십곳을 공격하여, 1차로 30여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수백명이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얀마군은 "로힝야 구원군은 중화기를 포함해 중무장한 상태이며 민간인과 군경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감행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했다. 이 진실게임에서 무장수준에 대해서는 금방 밝혀졌는데 2016년 초 로힝야 구원군이 IS에 충성맹세를 할 때 자신들의 무기와 병력을 자랑하는 동영상을 스스로 뿌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만 의문이었을 뿐인데, 미얀마는 "이 사건 조사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지하디스트와 자금 무기 등인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하고, "국제구호기구의 일부 직원이 폭발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암모니아 등을 공급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로힝야족 거주구에 모든 국제구호기구의 출입을 금지해버렸다. 이와 같은 강경한 태도로 인해 로힝야족에 대한 긴급구호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장의 실태조차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미얀마군의 이 주장은 국제분쟁 전문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 IGC의 보고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ARSA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로힝야 망명자 위원회의 감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으며 이 단체의 지도자격인 야타 울라는 미얀마에서 태어나지 않은, 파키스탄 카라치의 로힝야 이주자 집안에서 태어난 외국인 지하디스트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20명 이상의 다국적 남성이 미얀마로 밀입국하여 2년 넘게 수백명의 로힝야족에게 무기사용법과 사제폭탄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이 사건 이후, 미얀마 정부군은 경찰로 치안을 확보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로힝야 거주구역을 군사작전구역으로 선포하고 아예 군대를 진주시켜 반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반군만 건드리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민간인 거주지를 불태우고 로힝야족을 추방하고 있어, 이로 인해 1차로 30만 명, 이후 30만 명이 추가되어 미얀마 내의 로힝야족의 70%가 집을 잃어버리고 방글라데시로 탈출한 상태이다.
미얀마군의 진압행위의 명분이 되는 로힝야 반군의 잔혹행위는 미얀마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고 UN 구호기구의 접근권한이 통제된 탓에 세계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일방적인 주장이라 소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국제앰네스티가 2018년 5월 22일자로 홈페이지를 통해서 로힝야 구원군이[17] 미얀마 군경초소를 공격한 날 직후에 최소한 힌두교인 99명을 살해한 증거를 찾아서 공개했다고 복수의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기사
로힝야 반군의 힌두교인 학살 사건의 진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2017년 8월 25일 라카인주 북부 마웅토의 힌두교도 집단 거주지인 아 나욱 카 마웅 세이크 마을에 들어가 약탈하고, 눈을 가리고 결박한 힌두교도 53명을 마을 외곽으로 데려가 처형했는데 그 중 14명이 8살 이하의 아동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변 마을인원 전원을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남성은 모두 살해되었고 이슬람으로 개종강요에 동의한 여성 8명과 그들의 아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로 흩어져있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엠네스티는 집단처형되었다고 주장된 장소를 직접 검증하였고 해당 장소에서 처형된지 1년된 시신들을 찾아내고 법의학자의 검증을 거쳐 진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앰네스티 보고서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 동안 미얀마군의 군사작전구역 선포에 이은 강경진압으로 UN추산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해당지역에 미얀마가 군대를 투입하면서까지 대규모 작전을 벌이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인가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있어왔기 떄문이다. 종교를 이유로 미얀마에서 주도권을 쥔 불교도도 아닌 소극적으로 은둔하고 있는 힌두교인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이 밝혀졌기 때문에 해당지역에 미얀마군이 군사작전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다만 로힝야 반군은 굉장히 궁핍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로힝야족의 무장은 오랫동안 엄격히 감시되고 있었으므로, 실제 반군 병력은 수백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경찰력으로는 통제가 무리가 있는 숫자이기는 하나 독립 이후 수십 년간 내내 최대 3만여명의 카렌족 반군이나 1만이 넘었던 카친족 반군 등과[18] 전투를 벌이던 미얀마군에 있어서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이고 카친 주의 경우 99%가 카친족일만큼 여타 반군과의 전투는 적지에서의 작전이지만 라카인주의 부락은 과반이 미얀마군을 지지하는 등 실전경험이 풍부한 미얀마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 과정에서 현재까지 사망자는 미얀마군이 밝히는 바로는 400명이지만 UN은 천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로힝야족의 급격한 미얀마 탈출로 방글라데시의 난민촌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도 로힝야족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이전의 시각에서 벗어나 제한적이나마 로힝야족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내 집단적인 소수민족 집단이 되는 것을 꺼리고 있고[19] , 이들이 극단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려해, 주요 민족인 벵골인과 같이 거주하기보다는 갠지스 강 삼각주 중 하나인 바산 차르로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문제는 이 섬이 갠지스 강 하구로 흘러들어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2006년 새로 생겨난 섬으로 우기인 6월부터 9월까지 물에 잠기는 데다 그로 인해 삼각주에 사회 기반 시설이 아무 것도 없으며 동남아시아에 아직 남아 있는 해적들의 약탈로 인해 사람들이 살기 힘들기 때문에 300km2이 넘는 상당한 면적임에도 무인도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로힝야족 지도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촌의 포화 상태를 극복할 수 없어 이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 방화사건의 진행이 국제적 탐사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미얀마군이 로힝야족 부락에 대해 이틀내로 무차별 공격이 있을 것을 통보하고 퇴거를 종용한다. 자기 집과 논밭을 버리고 퇴거하지 않는다면 박격포와 기관총을 동원한 위협사격으로 이들이 황급히 탈출하게 만들어 마을을 비운 뒤 군대를 따르는 일단의 미얀마인[20] 들이 로힝야족 부락에 남은 것들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남아있는 로힝야인을 죽이거나 강간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아마도 이 행동이 전쟁범죄라는 것을 미얀마군(버마족)도 인지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카미족과 아라칸족의 손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힝야족 부락을 모두 불지른 뒤에 사태가 진정되면 이후에 이러한 전쟁범죄가 미얀마군의 행동임을 부정하고, 방화사건은 반군활동이 활발한 카미족과 아라칸족의 행동이라고 선언해서, 이들에게 죄를 일방적으로 떠넘겨 숙청하여 반항적이고 미얀마의 골칫거리인 라카인 주의 반군세력을 일거에 싹슬이할 속셈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주민을 쫒아내고 인근 적대 부족의 약탈 방화를 묵인하는 시점에서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군이 책임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런 강제 퇴거에 로힝야족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으며, 끝까지 떠나지 않고 교섭을 시도하거나 저항하는 로힝야족은 분명 사살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빠른 강제 퇴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지고 온 짐이 무거워 국경에서 강을 건너 방글라데시로 넘어가는 걸 주저하는 로힝야족에 대해 '''웃으면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위협 사격을 가하여 황급히 탈출하게 하는 모습까지 방글라데시군에 의해 목격되었기에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군이 저지르고 조장했다는것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행동에 대해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6. 로힝야 분리주의
[image]
어느 해외의 한 네티즌이 그린 로힝야족 가상 독립 국가의 지도.
로힝야족의 분리주의 움직임도 있다. 사실 일부 반미얀마 성향의 로힝야족 망명 세력들과 무장 저항 단체 세력들중에는 더 이상은 미얀마와 한 나라로 더 이상은 공존이 불가능하다며 미얀마의 지배로부터 분리 독립해 떨어져나가서 로힝야 독립국을 수립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에게 학살과 탄압을 겪다가 NATO와 유엔의 군사 개입으로 세르비아에게 박탈당한 자치주의 지위를 다시 회복했다가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한 코소보나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한 동티모르, 1988년 이후부터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등에 접해있었던 팔레스타인의 자치지구들(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자치 정부가 되어 2012년 유엔에서 대부분 독립이 인정되어 2013년 자치 지구에 절반은 독립된 상황인 팔레스타인처럼 로힝야족이 살고 있는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의 미얀마 서남부 영토 일부 지역을 분리독립시켜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주거나 방글라데시에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있다. 라카인 주 북부쪽에서는 로힝야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는 한다. 그래서 라카인 북부를 떼서 로힝야족들의 독립국가를 만들거나 방글라데시에 편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로힝야족에게서 나온다.
카친족이나 카렌족 등 미얀마의 통치에서 분리독립하려는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의 분리 운동을 아주 강경하게 탄압해오던 미얀마로서는 로힝야의 분리 독립을 좌시할 가능성은 절대 없다. 적어도 카친족이나 카렌족은 역사적으로 미얀마의 토착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강경하게 진압되었는데, 로힝야족의 일부는 토착민이지만 대부분은 1850년대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인구 + 독립 이후 강제이주된 인구이기 때문에 미얀마 정부는 이들에게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동티모르와 코소보, 팔레스타인은 독립할 당시 호주와 미국, 유엔, NATO, 알바니아, 말레이시아, 아랍같이 분리 독립을 지지했고 강요와 압력을 넣었던 외세들이 존재했지만, 로힝야는 미얀마에게 분리를 강요할만한 외세와 명분이 없다. 물론 방글라데시가 있긴 하나 방글라데시 역시 편입은커녕 로힝야의 분리 독립조차도 로힝야와 같은 민족인 방글라데시가 영향력을 뻗친다는 오명만 괜히 뒤집어 쓸 수 있기에 원치 않는 바이다.
또한 라카인 주의 문제가 동티모르와 코소보와 다른 점은 인구 구성비 그 자체에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에는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있었고, 동티모르를 떠나 티모르섬 전체에서 기독교 교인의 비중이 99%였으며, 코소보는 코소보 지역 안의 이슬람 계통인 알바니아계의 비중이 90%가 넘었기에 분리독립이 가능했다. 팔레스타인 역시 각지의 유대인 정착촌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지금도 있기에 국제사회 대다수로부터 독립이 인정되어 팔레스타인의 자치지구 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준독립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로힝야족은 자치 정부가 있었던 상황도 아니고, 로힝야족의 숫자가 가장 많은 라카인 주에서조차 30% 정도에 불과하며, 라카인주에서도 다수민족이 아니다. '라카인족'을 비롯해 카미족, 친족등 다른 황인종 소수민족들이 더 많다. 로힝야족을 분리 독립시키기 전에 카미족이나 아라칸족, 친족도 나라 만들어줘야 할 판이며[21] 마찬가지로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카친족이나 카렌족등 다른 미얀마의 소수민족들도 독립시켜야 할 판이다.[22] 그렇게 되면 '''미얀마는 특정 민족 단위의 여러 군소국가들로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
로힝야족 인구는 영국 식민지배기를 거쳐 북부지역에서 비중이 다소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칸족과 카미족, 산악부족인 친족의 부락과 어지럽게 섞여 있다. 이렇게 섞여 있는 이유는, 원래 동남아 지역이 잡거 경향이 강해서 그렇다. 정글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거주지역 사이에 불모지의 정글이 자리잡고 있어 안정적인 교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한다해도 타지역과 부족지를 점거한다기보다 노동력이 되는 사람들만 납치해오는 형태의 전쟁을 했으며 덕분에 민족들이 구별되어 살지 않고있는 것이다. J.G. 스콧의 <상부 버마와 샨주의 관보>에서의 "부족들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살아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섞여 있다. 더욱이 그들(카친족)의 마을들에서 팔라웅족, '라족', 와족, 중국인, 몇 명의 샨족을 발견할 수 있다."라는 언급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부락들이 마구 뒤섞여있어 분쟁은 극심해지고 지역별로 분할하기도 힘들다.
다른 토착 소수민족들 입장에서도 아라칸에 난민수용소를 설치한 버마족이 중심이 되는 미얀마 정부가 원망스러운 판에, 라카인 북부를 로힝야의 독립국가로 분리 독립시키라는 주장은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다. 차라리 로힝야족을 절멸하고, 로힝야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에게 적대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두고 신생 독립국 로힝야와 내전을 벌이면 벌일 가능성이 높다면 높지. 원래부터 살아오던 아라칸 지역을 버리고 다른 미얀마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힝야가 독립 이후에도 로힝야족과 라카인, 카미족 등 타 종족 세력들끼리 내전이 일어나거나 학살 없이 카미족, 라카인족 등 로힝야 신생국 내 토착 소수 민족의 거주지 영토들이 로힝야에 귀속되지 않고 로힝야 국가 내부의 미얀마령 월경지가 되거나 국경 재조정으로 문제가 되는 일부 카미족, 라카인족의 거주지 영토들이 미얀마령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카미족, 라카인족 부락 지역이 로힝야 독립국에 갇힌 고립형 내륙 월경지가 될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 라카인 주 북부 지방의 로힝야족의 거주 지역과 라카인족과 친족, 카미족, 버마족의 거주지가 완전히 겹치기 때문에 본국과 이격된 역외 영토로 분할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라카인 북부 해안 저지대 지역은 로힝야가 차지하고 나머지 내륙 산간 지역은 토착 소수 민족이 차지하여 미얀마로 넘어가며 영토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으나 이도 현실적으로 양측이 수용하려고 할지는 미지수다. 당장에 로힝야 독립국 내에 월경지인 미얀마 땅으로 남는 것도 친족과 카미족, 라카인족 집단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원수인 로힝야족들에게 포위된 채로 살아가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로힝야족 또한 완전한 독립국가의 영토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에 사실상 신생 독립국가의 영내에 카미족이나 라카인족 집단의 거주지역이 미얀마에 잔류하여 적대국가인 미얀마의 월경지가 생기는 것을 좌시할 가능성 또한 낮다.
혹은 라카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 국가에 잔류하되 자치권을 허용하거나 또는 로힝야와 미얀마의 이중 국적을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라카인족, 카미족이 지배층이 된 로힝야족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신생국의 주민으로 분쟁 없이 평화적으로 동화, 편입되거나 양보할 가능성이 아예 희박하다는 것이 문제다. 또 하다 못해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가 독립에 성공해서 국가를 세워 온건한 유화정책을 펼치며 신생국가 내부의 라카인족이나 카미족들을 용서하고 자기 나라의 국민으로 잘 포용할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한 나프 강 유역 이남 지역의 라카인 북부 영토 일부만이라도 로힝야 독립국으로 독립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조금이나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로힝야 독립국의 수도가 될 도시들 또한 로힝야족들 사이에서도 논란인데 로힝야족의 일부 분리독립론자들은 만일 로힝야족이 독립한다면 라카인 주의 주도이자 라카인 북부 최대 도시인 시트웨를 신생 독립국가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시트웨는 미얀마로서도 지정학적 가치가 있는 항만 도시인데다 도시 시민 구성원들 상당수가 라카인 주의 토착민족인 아라칸족이 더 많기 때문에 로힝야가 신생국의 수도로 삼는다고 가정할 경우 다른 땅 일부는 내주더래도 시트웨와 나머지 라카인 북부 영토들만큼은 유지하겠다고 필사적으로 미얀마가 반대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로힝야 인구가 많은 라카인 북부 내륙 도시인 부티타웅과 마웅다우 또한 독립국의 수도로 유력하긴 하지만 여기는 경제적인 기반조차 없는 소도시라는 것이 문제다.
또 당장에 로힝야족이 독립을 한다 해도 국제사회의 국가들이 독립한 로힝야를 정식국가로 승인하고 수교관계를 맺어주고 신생국이 된 로힝야의 유엔 가입을 허락해줄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 그렇긴 하지만 미승인국으로 독립하는 것조차 로힝야족에게는 꿈같은 목표다. 스페인 카탈루냐와 바스크, 인도네시아 아체, 인도 시킴 주의 예처럼 몇단계나 낮은 목표인 미얀마내 로힝야 자치구나 자치주의 획득 등 자치 부여도 미얀마 내 정서와 환경상 거론 자체도 힘들다. 방글라데시가 난민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비무장지대를 주장한 바도 있지만 이런 정도의 주장에 대해서도 미얀마 국토에 대해 미얀마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방글라데시의 영토할양 요구로 받아들여져 미얀마 정부는 단호히 거부하고 미얀마인들은 분노에 떠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만큼 미얀마는 라카인 주에 대해 단호한 소유 의사가 있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힝야족의 입장에서 어떠한 시나리오로라도 고작 유엔에만 가입하지 못하는 미승인국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소수 민족의 자치나 독립 요구에 대한 미얀마의 강경한 태도와 말로만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을 비판하고 로힝야족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는 미국 등 서방 세계, 국제 사회, UN에서 강대한 힘을 발휘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얀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로힝야족에 대해 우호적인 국가는 자신들의 국경 외부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슬람 국가들뿐이다.[23] 그리고 이들이라고 소수 민족 문제가 없는 게아니라 로힝야 독립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서파푸아 탄압이나 아랍권의 베르베르계를 비롯한 소수 민족 차별이나 억압 등.) 물론 로힝야의 탄압이나 학살을 중지하라는 주장 정도만 가능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독립에 대하여 주장을 쉽게 꺼내기도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힝야족 스스로가 미승인국을 추구한다는 발설만으로도 미얀마인의 반발을 불러서 더 끔찍한 재난을 불러들일 수 있다. 현재 서방은 말로만 미얀마를 비난할 뿐 이들이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집단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이유로도 배척당하는 등 주변에 독립을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이 하나 없다. 물론 로힝야가 터키나 튀니지처럼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을 배격하는 세속적 이슬람 국가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 역시 더더욱 낮아보인다.
그런 점 때문에 로힝야족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미얀마 정부의 차별 중단과 시민권 획득을 요구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 여론이 점점 얻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 분리 독립의 경우는 라카인 주의 실효지배국인 미얀마의 격한 반발을 비롯하여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나[24] 거의 전 세계에서 나쁜 이미지를 굳힐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분리 독립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와는 별도로 국제 사회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얻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7.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이간책과 아웅 산 수 치
미얀마 정부의 공식 입장은 1982년 제정된 미얀마 국적법에 따라 1823년 이전부터 미얀마에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로힝야인에게만 3등급 시민권을 주겠다는 입장이다.[25] 3대가 한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에게 낮은 수준의 시민권만 줘서 공공연하게 차별하겠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선조가 1823년 이전부터 현 거주지에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저 법안의 의미는 현재 미얀마 정부군에 반항적인 로힝야족이 아닌 순응적인 노선을 천명하는 까툰계 로힝야인을 염두에 둔 법안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뱅골인이라고 인정했으며 미얀마군의 학살을 부정하고 다른 로힝야족을 비난하고 있는데, 이 20만명의 까툰계 뱅골인은 다른 로힝야인들에게도 당연히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의 원 거주지는 강 상류 지역이고, 1823년부터 로힝야 무슬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역사책에 남은 유일한 지역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 현 거주지에 계속 거주한다는 조건으로 복종의 상으로 시민권을 수여하겠다는 법안인데, 이들도 거주지를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순간 체포되고 처벌받게 되므로 사실상 제한된 수준의 로힝야 거주 구역을 인정한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미얀마 정부의 이 이간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어서 로힝야인 내부의 대립이 격화돼서 난민촌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한다. 기사 사실 벵골인은 인종 명칭이라 로힝야인이라고 불리는 그룹에서도 거주지가 다르고 옮겨온 시점이 다르면 서로 소닭 보듯 하는 시선이 있는데 이들을 내세워 로힝야족의 분열을 더 증폭시키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대부분이다.
미얀마 정부는 디바이드 앤 룰의 스페셜리스트다. 인구의 68% 정도를 차지하는 버마족이 공식 소수 민족만 134개나 되는 미얀마 영토를 다스리는데 1982년 국적법을 새로 제정하면서 버마족을 포함한 미얀마의 8개 주요 민족을 버마족은 최대한 뭉쳐서 68%로 만들어놓고 다른 민족은 134개로 찢어놓았다. 이게 정말 제대로 먹혀서 로힝야인이 6~7개로 분열하게 되고 이들끼리 서로 죽고죽이는 분열을 일으키게 되면 버마인 입장에서 좋을 것이다.
로힝야족 내부에서의 파벌들은 이미 수십 개가 난립되어 있고 크게 세개로 잔류파, 귀환파, 항쟁파로 나눌 수 있다. 잔류파는 방글라데시는 자신들과 같은 인종이 살고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어떻게 되었던지 난민촌만 뚫고 나가서 치타공까지만 가면 절대로 분류할 수도 없는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방글라데시 정부가 뭐라고 하던 우리는 여기서 살 것이지 절대로 미얀마에 돌아갈 수는 없다."라는 입장이고 귀환파는 까툰처럼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더라도 난 무조건 고향에 돌아가겠다, 미얀마 정부의 검증 절차를 믿어보자는 의견이다. 항쟁파는 단결해서 무장 투쟁을 이어나가 로힝야 독립 국가를 수립하자는 의견인데 세부적으로 노선차이도 상당하고 매우 복잡한 의견들이 각각의 난민 대표 단체를 만들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다가 서로 유혈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아웅산수지가 로힝야 사태에 침묵을 깨고 2017년 9월 19일 공개 석상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된 발언을 하였다. 그는 4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유발한 이번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의지를 밝히고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 그러나 아웅산수지는 미얀마군의 로힝야족 탄압과 로힝야족 난민의 재입국을 위한 안전 지대 설립을 거부했다.
미얀마 영내의 미얀마의 주권이 속하지 않는 자치령을 만드는 전조이자 주권 침해로 받아들일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노린 제안이기도 했고. 물론 미얀마군이 로힝야족의 재입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상 미얀마의 영토 할양이나 마찬가지인 제안을 군사적 개입 없이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얀마 정부는 그 동안 로힝야족들에 대한 폭력과 탄압을 무시해 왔으며,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탈출하는 난민이 70만명이 넘는 상황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은 무색할 뿐이다.
현재 미얀마 정부의 수장은 틴 쩌 대통령이지만, 실질적 지도자는 아웅 산 수 지다. 아웅 산 수 지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고, 미얀마의 군부독재 정권 몰락과 민주화 운동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웅산수지가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소수민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점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많은 외신 기사들은 수 지의 노벨상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로힝야 족에 대한 폭력에 대한 묵인과 중립적 관점이 심히 비판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아웅 산 수 지가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자 인권운동가였지만 로힝야족에 대해 전향적으로 나설 수 없는 이유는 미얀마의 인종적 상황,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미얀마는 군부가 여전히 민주화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미얀마 국회 상,하원의 25%를 투표조차 없이 지명할 정도로 군부의 세력이 아직 건재한 국가이다. 이 25%는 미얀마의 헌법 개정 가능 득표와 일치한다(상,하원 75의 동의가 있어야 헌법 개정 가능) 여기에 친군부 구색정당까지 있어서 실제 의석 점유율은 이보다 더 높다.
선거에서도 군부는 독자적으로 정당을 구성하여 의원을 낸다. 미얀마인 전체, 특히 인구의 68%를 구성중인 버마족과 기타 소수민족까지 포함한 증오를 받고 있는 로힝야족에 대해 온정적인 언급 한 마디면 정치적으로 매장당하고 매국노로 취급당할 게 뻔한 상태에서, 아웅 산 수 지라고 한들 로힝야족 탄압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옹호론도 있다. 특히나 아웅산수지의 아킬레스 건이 외국의 꼭두각시론이다.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그 역사로 인해 미얀마인의 반영감정은 상당히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영국인[26] 이고 아들들 역시 영국 국적자인 것은 서방의 주목을 받고 노벨 평화상을 받는데는 큰 장점이 되었지만, 미얀마인들의 지도자로서는 상당한 결격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아예 미얀마 헌법에는 외국 국적을 가진 자가 친족이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도 있을 정도다. 사실 이 헌법조항은 아웅산수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군부의 꼼수였다.
그래서 아웅산수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막후 실력자로서만 활동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로힝야 문제에 관해 미얀마인의 대변인이 되기보다는 서방 세력의 눈치를 보는 발언을 한다면, 아웅 산 수 지는 미얀마의 통치자로서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특히나 아웅 산 수 지의 정당은 지난 선거에서 버마족에게도 우세했지만 소수민족의 몰표로 당선된 바가 큰데, 로힝야족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군과 다르게 로힝야족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면 적어도 아라칸 주의 소수민족들의 표는 잃어버릴 게 확실하므로, 로힝야족에 대한 온정적 언급은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 전술한대로 미얀마 민주화의 중심인 아웅 산 수 지의 민족민주동맹이 군부에 다시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의회의 75%를 유지하고 있어야 군부, 위성정당을 상대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특히 국제 사회가 아웅산수지에게만 비난을 쏟아내는 사이에 오히려 미얀마 내부에서는 로힝야를 박해하는 최고 군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흘라잉은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군부의 후계자로서 대통령이 되었을 사람이라 아웅산수지의 입장에선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흘라잉은 이런 국내의 인기를 기반으로 2020년 대선에 출마해 군부의 정권 탈환을 노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만약 흘라잉이 집권할 경우 본보기로 로힝야를 탄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국제 사회가 원하는 로힝야족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로힝야 학살’ 수치 돌 맞을 때, 주범은 웃는다
큰 문제인 것은 난민 70만 명 중 몇 만 명이나 가해자일 것이냐는 것이다. 대다수는 그냥 이주하라고 혹은 생존 때문에 살아가다가 여기까지 왔을 텐데 몇몇의 무책임한 폭력 행위로 난민과 폭력을 당하는 잠재적 가해자같은 시각으로 연좌제에 묶여야 하고, 심지어 학살까지 당하는 상황이다. 대다수의 로힝야족이 가지는 시각은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발언을 했을 때 절대다수의 미얀마인들이 반발하는 정서와 비슷할 것이다.
로힝야는 그에 절반인 5%의 인구비율에, 종교와 인종마저 미얀마 주류와 다르고, 이들의 집단 정체성이 확립되던 시기에 식민지배 영국이 통치를 위해 벵골의 무슬림을 이주시켜 이들이 섞여버리면서 이들의 정체성이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가 된 것이다. 이때문에 버마족을 중심으로 한 미얀마 주류의 반영감정+종교갈등+다수라는 힘이 로힝야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도하거나 혹은 묵인하는 상황이 된 것.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문제의 근원은 아웅산 수지도 있지만[27] 로힝야족을 극도로 미워하는 미얀마인들의 정서와 문민통제에 실패하여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미얀마의 정치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아웅산 수지의 입장에서는 침묵하거나 옹호하면 문민정부를 구성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서구의 지지 여론이 떨어지고, 반대하면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떨어지는 상황이 되는, 군부 입장에선 더할나위 없는 꽃놀이패였던 상황.
실제로 로힝야족 학살의 이면에는 군부의 이런 계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문에 서구가 미얀마군의 로힝야 학살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이를 옹호하여 아웅 산 수 치가 국제 지지 여론을 크게 상실하고 2021년에 개헌을 감행한 아웅 산 수 치에 반발해 마음놓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7.1. 로힝야족 아웅산 수지 지지 선언
(한국일보)로힝야족은 왜 동족 학살 방조한 아웅산 수치를 옹호할까
당연히 로힝야족은 이러한 눈에 뻔히 보이는 미얀마 군부의 수작질에 속지 않고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발발하자,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이 쿠데타 반대, 아웅산 수지 지지 시위를 벌였다.
애초 속고싶어도 속을 수가 없었다. 아웅산수지는 로힝야족 학살을 옹호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만 그런 것이고, 만약 아웅산수지가 학살을 비판하고 로힝야를 옹호했다면 군부가 지금처럼 부정선거라며 쿠데타를 일으킬 것도 없이 정당하게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웅산수지의 학살 옹호는 대국적으로 군부의 학살을 종식하기 위한 초석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었지만 미얀마 군부는 실제로 로힝야족을 대거 학살한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었다.
아웅산수지는 로힝야족에게 있어 기분이 나쁘고, 과거 학살에 대한 미화 문제겠지만 미얀마 군부의 재집권은 로힝야족 제노사이드가 다시 재림하거나 완전한 민족 몰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이다.
유엔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미얀마에도 라카인주(州) 수용소에 사실상 감금된 12만명을 포함해 모두 60만명의 로힝야족이 남아있다”며 “이번 사태가 이들의 상황을 악화시킬까 두렵다”고 지적하였을 정도.
8. 국제 사회의 각종 움직임
# 유엔 안보리가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을 규탄하는 공식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12월에는 프란시스코 교황이 방글라데시에서 로힝야 난민들을 만나면서 "로힝야" 단어를 공개적으로 처음 썼다. 그 동안 로힝야 문제에서 미얀마를 지지하던 중국과 러시아도 입장을 바꾸고 규탄 성명에 동참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도 현재의 대규모 난민 사태와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군의 인권 유린을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국제앰네스티가 전년도에 일본 기린 홀딩스의 자회사 미얀마 브루어리를 통해 낸 기부금이 로힝야 인종학살에 쓰였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는데, 기린 측은 폭력사태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 냈다고 했지만 첫 기부금이 민 아웅 흘리앙 장군에게 전해졌다는 것으로 나와 의혹의 여지가 있다.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은 이슬람 국가들의 큰 반감을 사고 있으며 이 나라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번져가고 있는데, 인근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도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을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미얀마 정부를 규탄하고 있는 상황이다. # # 물론 이들의 주장도 온전히 순수한 것만은 아닌데 인도네시아의 로힝야족에 대한 시위는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신자와 불교 신자, 힌두교 신자에게 테러와 폭행을 자행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터키도 오스만 투르크의 멸망 이후 이슬람교의 주도권을 잃은 것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터키의 의지에 따라 시리아 내전, 카타르 단교 사태 등 이슬람권의 모든 이슈에 개입하기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며, 방글라데시 역시 치타공 구릉지대의 황인종 소수민족들[28] 을 로힝야족을 박해하는 미얀마처럼 강하게 탄압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얀마의 로힝야족 박해는 물론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슬람권의 대처방안이라는 것도 인도네시아의 1만 지하디스트 파견대기 발언 같은 것이나 자국 내 비무슬림 박해를 정당화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미얀마의 상황과 별개로 우려되는 사안이다.
역사적으로 은원 관계가 존재하고 미얀마인들이 로힝야인들을 침략자로 볼 이유는 충분하기는 하다. 그러나 오랜 박해와 의료/교육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정책으로 말미암아 로힝야족은 평균수명이 극히 짧아, 인구의 60%가 20대 이하인 기형적인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로힝야족은 그 부모 세대도 아니고, 가히 1세기가 넘은 먼 조상 세대의 은원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자마자 주변 민족과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부터 체계화된 경멸과 차별 및 탄압을 받고 있다. 해방 후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미얀마 정부는 미얀마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음에도 로힝야를 끝내 포용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고 자국령 내에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이런 처우를 하고 있는 국가는 미얀마가 유일하다. 자국 내 이민족과 사실상 수십년 간의 내전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마저도 가자지구, 서안지구처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아니라 이스라엘령에서 태어났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을 저렇게 대우하진 않는다.
또 소수이면 소수인대로 다수이면 다수인 이유로 극단주의화하는 이슬람의 문제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주류 종교가 아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각종 차별에 시달린다. 물론 이런 차별은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29] 나 중동 아랍권과 같은 이슬람이 주류인 국가들의 경우,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소수민족들과 비이슬람계 종교들을 더욱 극단적으로 공격, 박해하기에 사실상 내전과 종교 분쟁 상태에 빠져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이슬람 극단주의를 수출하는 국가의 자금과 무기지원, 여러 이슬람권 출신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분쟁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국제 사회가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결책으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미얀마 정부에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중단하고 이들에게 미얀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의 중재안을 권고한 바 있다. 즉 로힝야족을 그들이 본래 거주하고 있던 라카인 주에 그대로 거주하게 하고 미얀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미얀마 국민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얀마는 위에 서술된 이유로 로힝야족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쁘고 그들을 영국에 의해 이주한 방글라데시인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은 인도 제국 당시에 합법적으로 이주한 것이므로 불법 이주자에 대한 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미얀마라는 신생 민족주의 국가에서 배척되는 타인종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미얀마 입장에서 인도 제국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와 다를 바 없는 식민지배 시기이므로 미얀마인들의 사회적 합의 없이 영국이 멋대로 이주시켰다고 볼 공산이 크다. 버마가 당시 인도 제국의 일부였기에 벵골인 이주가 합법적이라면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을 비판하지도 말아야 한다.
방글라데시는 자체 인구밀도가 엄청나게 높고 최빈국에 속하는 가난한 국가이므로 로힝야족을 받아들일 능력이 거의 없다. 현실적으로 로힝야족을 부양할 수 있는 지역은 지금까지 살아온 미얀마 지역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난민촌을 건설하고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연명은 할 수 있겠지만 국제 사회의 관심이 식으면 유지조차 불가능해질 것이다. 결국 난민촌은 일시적인 해법일 뿐이고 로힝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은 미얀마인이 로힝야족을 미얀마인으로 동화하는 것인데 로힝야족이 미얀마에 살면서 미얀마어조차 교육받지 못하는 이런 상황은 사회통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국가를 분리독립시킬 생각이 없다면 적어도 공식언어와 기초적인 윤리교육과 치안통제는 이루어져야하는데 이런 시도가 민족말살정책이니 뭐니 하는 비난을 받더라도 적어도 고립시켜서 고사시키는 방안보다는 훨씬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이런 걸 해낼 여력이 없었다. 미얀마 정부는 오랫동안 수도 근방의 일부지역 외에는 통치력을 투사할 수 없었고 지금도 각지의 소수민족 반군과 난립한 군벌세력들이 잔존한 상태로 불안정한 동거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다. 이러다보니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통치력을 구사하는 해결책은 나올 수가 없었고 결국 방치된 결과로 민족분쟁과 종교분쟁이 발생해 민간내전사태로까지 발전해버린 것이다.
로힝야족 난민문제는 폭압적인 지배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최소한의 치안과 교육을 제공할 지배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다. 최근 10년간 벌어지고 있는 내전의 대부분이 그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해올 치안군은 없는데 국제사회가 평화를 위해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우니 해결방안이 요원한 것이다. 이것부터 세우려면 미안먀를 다시 점령하여 수많은 소수민족 독립 반군세력과 버마 민족주의 세력을 힘으로 진압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내정간섭 논란을 피할 수 없고 정작 군대를 밀어넣으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소수민족들이 단결하여 저항해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도대체 어느쪽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미얀마인들의 국가가 받아들인 것이 아닌 대영제국의 법률이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 당시 미얀마는 뺑룽 조약(Panglong Agreement)에서 로힝야족의 시민권과 그 처우를 보장했다. 만약 미얀마가 이 조약에 불응했다면 영국은 아라칸 주의 북부를 떼어 인도에 떼어주는 방식으로 국경선을 새로 정할 수도 있었다. 미얀마는 이 조약을 승인했으니 영국은 그걸 믿고 아라칸 주 전체를 확보한 미얀마의 국경선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네윈의 군사 쿠데타 이후 이 조약을 무시하고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한 것이다. 군사 쿠데타건 민주혁명이건 정부가 바뀌었다고 그 전 정부가 맺은 조약을 모두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다. 불평등조약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권의 시각에서 미얀마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얀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보다 자국 내 100만 명이나 되는 소수민족을 무국적자로 교육/의료 복지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좋을 리는 없다.
한국 여론은 로힝야 문제를 다룬 뉴스들의 댓글들이 기자의 의도와 다르게 로힝야족 민족 청소에 공감하고 한국의 일제앞잡이들을 사례로 삼아 응원하는 목소리가 짙다.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인 입장에서 미얀마인에 상당히 감정이입을 하고 영국의 힘으로 호의호식하던 로힝야족에 대한 민족 청소를 마치 일제 청산과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호의적인 시각도 상당히 많다.[30] 게다가 이슬람 난민들이 유럽에서 보여준 추태 때문에 이슬람포비아 정서와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31] 까지 만연해있기 때문에 로힝야족에 대한 우호 분위기가 형성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2018년 제주 난민 사태 이후로는 난민 자체에 대한 시각마저 나빠져서 친일파급으로 낙인찍힌 로힝야에 대한 인식은 완전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방글라데시 입장에서도 이미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로힝야인을 방글라데시로 받아들이면 이들은 조상의 땅을 내놓으라고 방글라데시를 공격할 것 같으니 로힝야족의 방글라데시 영구거주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고 있는 상태다.[32] 그러다 보니 "1821년부터 거주가 증명된 사람들을 송환받겠다."라는 미얀마 정부와 그게 뻔히 수작인건 알면서도 로힝야인들이 계속 뭉쳐있으면 골치아픈건 본인들도 마찬가지라 방글라데시 정부는 생각외로 쿵짝이 잘 맞고 있다. 이슬람계열 난민촌이 일치단결해서 수용국에 내전수준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시리아나 레바논, 케냐 등지에서 일어난 일처럼 예측 못할 일도 아니다.
아웅산 수지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오히려 서방 세계와 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을 비판하기도 한다. 애초에 영국이 자기들 식민 통치에 용이하다는 이유로 로힝야를 앞잡이로 내세워 미얀마인들과 대립시키는 졸렬한 짓을 저지른 게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이었고, 자기들 때문에 수십년 간 고통과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는데도 책임 질 생각 따윈 전혀 없는 주제에 이제 와서 인권의 이름으로 미얀마와 아웅산 수지를 질타하는 것은 한낱 위선에 불과하단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전형적인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할 수 있지만, 서방 세계가 행동으로 로힝야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으면서 말로만 뭐라 하면서 미얀마에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이는 제 3국에 의한 분쟁 해결 조차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로힝야인은 전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들은 다른 박해민족과 달리 과거에 저지른 짓이 있는데다, 바다에서 말라 죽든 난민촌에서 굶어 죽든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의 일일 뿐이다. 미얀마에 군사력을 투입할 마음은 누구도 없고 로힝야족을 구제할 마음도 별로 없다. 개별적으로 로힝야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은 없고 UN이 가지고 있는 구호 예산 집행에나 찬성할 뿐이다. 미얀마가 로힝야족을 떠안는 게 국제 사회의 이익이니까 그런다면서 비난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게 이익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입 닥치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명분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서방 국가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 온다. 그러니 비난을 안 할 수는 없다. 현재 미얀마가 공식적으로 추방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가 비판여론을 일으켜 로힝야족의 처우에 대한 책임을 미얀마에 떠넘길까봐 일을 크게 키우지 않는 것이다.
로힝야와 미얀마인이 서로 사이가 대단히 나쁘지만 르완다나 나이지리아, 스리랑카처럼 세계에는 이보다 더한 혈전을 겪었던 민족들이 분리독립 없이 한 나라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경우에 따라 분리독립이 되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거주지에서 강제 추방이라는 형태로 땅만 집어삼키고 주민은 난민으로 내쫒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적어도 정부군의 해법으로는 공식적으로는 세계에 없었던 해법이고, 이게 용인된다면 소수민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들 중 이를 뒤따를 나라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미얀마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완강히 부인하지만, 폭력사태의 발생 경위에서부터 미얀마 정부가 그동안 로힝야족을 차별하고 문제를 악화해온 것은 사실이고, 폭력 사태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상하기도 힘든 민족 단위의 강제 추방이라는 극단적인 방책을 취한 것은 명백한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군의 책임이다. 세계 정세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동남아시아의 문제이고, 지역적으로 중국의 강한 비호를 받기 때문에 미얀마에 대한 서방의 원조 중단 외에 현실적인 제재가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2018년 8월 유엔 인권위원회 조사단의 보고서를 통해 UN은 로힝야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했다. 보고서는 미얀마군 장성들이 제노사이드를 의도했다며 이들에 대한 수사와 국제형사재판소 기소를 촉구했다. 보고서가 나온 이후 페이스북은 미얀마군과 장군들의 페이스북을 삭제했고 로힝야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페이스북들도 삭제했다.
#미얀마 정부가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도피한 70만 명의 로힝야족 난민에게 본국 귀환 시 시민권 신청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툰 타웅 미얀마 국가안보보좌관은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온 로힝야 난민 70만 명을 모두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지난 6월 1일에 입장을 밝혔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정부 대표단은 30일(현지시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회담을 열어 로힝야족 귀환 사업을 11월 중순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방글라데시가 자국 내의 로힝야족 난민들을 미얀마로 돌려보내려는 계획을 취소했다.[33]
제노사이드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됐다.# 그리고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학살을 막을 대책을 시행하라고 미얀마에 명령했다. 그럼에도 이행을 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힝야족 학살 죄로 군사재판을 가졌다는 것이다.#
중국이 우방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미얀마 정부는 무슬림인 로힝야 소수민족 박해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집단학살 비난 여론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하면서 로힝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군에 무기를 팔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외딴 섬에 난민촌을 만들어서 강제로 보냈다.#
2020년 9월에는 국제앰네스티가 <군 주식회사: 미얀마 인권침해에 자금을 대다(Military Ltd.: The Company Financing Human Rights Abuses in Myanmar)>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다국적 기업과 미얀마 군부 간의 로힝야 학살행위 관련 유착문건을 공개했는데,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이코노믹홀딩스(MEHL)'를 통해 미얀마 에버플로우리버그룹을 비롯해 일본 기린홀딩스, 한국의 포스코와 태평양물산, 이노그룹 등 8개 기업을 지목하며 서한까지 보냈으나, 이들은 관계 검토중이라거나 답변하지 않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11월 26일에는 '로힝야와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 등이 미얀마 군부와의 연결 의혹이 있는 한국 기업에게 관계 단절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